제목 ; 제왕천하 - 금강 著 차례 작품에 들어가면서 天下를 출간하면서... 序 (一) 전설(傳說) (二) 탄생(誕生) 1 장 황실(皇室)에 이는 바람 2 장 천단(天壇)에서 만난 기인(奇人) 3 장 구천신마조화경(九天神魔造化經) 4 장 호국지존(護國至尊)의 탄생(誕生) 5 장 운명(運命)의 만남 6 장 천년신비(千年神秘) 7 장 무서운 음모(陰謀)의 소용돌이 8 장 발동하는 호국지존(護國至尊) 9 장 천제문(天帝門)의 등장(登場) 10 장 후주(后主) 나타나다. 11 장 또 하나의 변수(變數) 작품에 들어가면서 자미(紫薇)가 모습을 드러내매, 천하(天下)가 핏빛으로 물들고 마경(魔磬)의 저주 어린 울부 짖음에, 하늘조차 통곡(痛哭)하도다. 현천(玄天)의 소리 합쳐지니, 비로소 천하에 서광(瑞光)이 비추이도다... 무림 중에 전하는 삼대천음(三大天音)의 전설(傳說)! 황실을 위해 문(文)의 길로 들어선 다섯째 황야(皇爺) 주천운(朱天雲). 그는 우연히 삼대천음의 전설을 접하면서 세상을 구해야 하는 호국지존(護國至尊)이 되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없는 음모(陰謀)의 소용돌이... 帝王天下를 출간하면서... 제왕천하(帝王天下)는 한국 창작무협물에 황실 붐을 몰고 왔던 절대지존(絶代至尊) 이후, 숱 하게 쏟아져나온 무협들이 중국 황실이나 의복, 제도들을 너무 왜곡되게 그리고 있음을 바 로잡기 위해 시도되었던 작품이다. 무협의 흥미를 위해서 과장(誇張)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황제의 권위를 초월하는 존재가 생 기는 것까지는 좋다. 그렇지만 그 당시 관직의 명칭조차 아무렇게나 적고, 그 시대에 있지도 않았던 관직까지 등장함은 한번 생각해 볼 일이었고, 그것이 나아가서는 무협의 질적(質的) 저하까지 자초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무협물들이 황실을 피상적으로 다루었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황실이 주 무대 가 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황실과 무림이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 을 것이다. 결국 천하는 하나이고, 무림과 천하는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닐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 것 이 이 제왕천하이다. 제왕천하는 풍운천하 이후 쓰여진 본인의 중반기 작품이다. 기연과 과장이 판을 치던 때의 작품이라, 그러한 점은 보정(補正)하여 조금 사실적으로 손질 을 하고자 하였지만 평가라는 것은 늘 그렇듯이 독자의 몫이다. 당시에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던 천마경혼(天魔驚魂)이 현재에 이르러 상당한 호응을 받은 것처럼... 좋은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라면서... 단기 4329년 새해벽두 蓮花精舍에서 金剛. 序 (一) 전설(傳說) 무림삼대천음(武林三大天音). 무림 중에는 세 가지, 하늘의 소리에 관한 전설(傳說)이 전해진다.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신 비(神秘)스럽다고 전하는 세 가지의 악기(樂器)를 일컫는 말이다. 천하(天下)에 이 삼대천음(三大天音)의 전설을 모르는 자 없으나, 그것을 본 자 또한 아무도 없었다. 자미(紫薇)가 모습을 드러내매, 천하(天下)가 핏빛으로 물들고 마경(魔磬)의 저주 어린 울부짖음에, 하늘조차 통곡(痛哭)하도다 오오-현천(玄天)의 소리 합쳐지니, 비로소 천하(天下)에 서광(瑞光)이 비추이도다... 이것이 바로 무림삼대천음의 전설(傳說)이다. 자미가 모습을 드러내매 천하가 핏빛으로 물들고... 이 첫번째 구절은 자미천소(紫薇天簫)를 가리킨다. 자미원(紫薇垣)의 신비(神秘)를 간직하고 있다는 한 자루의 퉁소가 바로 자미천소다. 이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미원이란 바로 하늘의 중심으로 천제(天帝)의 거처라고 전하는 바, 그 정기(精氣) 를 받아 천소(天簫)라고까지 불리는 자미천소에는 가공할 비밀(秘密)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자미천소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곧 천하혈겁(天下血劫)의 서곡(序曲)일 만큼의 거대한... 마경의 저주 어린 울부짖음에 하늘조차 통곡하고... 이 두번째 귀절은 혈천마경(血天魔磬)을 가리킨다. 혈천마경은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경(磬)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일단 혈천마경이 핏빛을 뿜으며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천하에 다시없는 마물(魔物) 이 된다. 천하가 피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침몰해 가도록... 오오-현천(玄天)의 소리 합쳐지니 비로소... 마지막 귀절은 현천고금(玄天古琴)을 가리킨다. 이름으로 보아 금(琴)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누구도 본 적이 없기에, 과연 어떻게 생겼으며 거기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현천고금에 천하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좌우할 거대한 힘이 있음을 의심하는 자는 없다. 과연 어떠한 힘이, 어떠한 비밀이 거기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건만... 무림삼대천음(武林三大天音)의 신비(神秘)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가중(加重)되어 갔으나, 한 가지 분명히 전해지는 사실은 그 중 하나라도 얻는 자는 거대(巨大)한 힘과, 가공(可恐)할 무공에, 엄청난 부(富)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천하의 주인을 의미하고 있었다. 과연 무림삼대천음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인가? 자미(紫薇)가 모습을 드러내매, 천하(天下)가 핏빛으로 물들고 마경(魔磬)의 저주 어린 울부짖음에, 하늘조차 통곡(痛哭)하도다 오오-현천(玄天)의 소리 합쳐지니, 비로소 천하(天下)에 서광(瑞光)이 비추이도다... 序 (二) 탄생(誕生) 밤이 되면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그 수많은 별들 중에 유난히 빛나는 두 별이 있다. 자식을 가진 어버이로서 그 두 별을 모르는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문창성(文昌星)과 무곡성(武曲星)! 바로 인간세상의 문(文)과 무(武)를 관장한다는 두 별인 것이다. 제왕(帝王)과도 같은 당당한 위엄을 지닌 한 노인이 서로 떨어져 있는 밤하늘의 그 두 별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밤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세차게 펄럭이건만 노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못박힌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 이런 일이..." 노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의 안색은 온통 의혹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녕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그 수많은 별들이 천천히 갈라지는가 싶더니, 두 개의 별이 눈부시게 광채를 뿜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문창 무곡의 양대령성(兩大靈星)이었다. "오오!" 노인은 탄성을 터뜨리며 몸을 떨었다. 기변(奇變)! 정녕 밤하늘에는 믿을 수 없는 일대 장관(壯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별들이 쫘 악 갈라지면서 무엇에 이끌리듯 문창 무곡성이 서서히 다가서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노인이 보고 있는 사이에 점점 더 빨라져 이윽고는 무서운 속도로 서로에게 부딪쳐갔다. "추, 충돌한다." 노인이 경악해 부르짖는 순간, 정녕코 문창과 무곡성은 무섭게 충돌하고 말았다. 번-쩍! 그것과 동시에 문창 무곡성은 찬란한 빛덩어리가 되어 가공할 속도로 하계(下界)로 쏟아졌 다. 그런데 그것은 노인이 서 있는 곳, 바로 노인에게로였다. 그 무서운 속도, 그 엄청난 광 채의 덩어리를 어찌 인간이 피해낼 수 있단 말인가! "으-아-아-아...!" 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비명을 지르며 그가 몸을 일으킨 침상은 일반인은 상상할 수도 없도록 거대하고 화려한 것 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대청을 방불케 하는 방은 또 어떠한가! 아홉 마리 금룡이 휘말려올라가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며, 사방의 장식은 감히 그 누 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기진이보(奇珍異寶)의 결정체요, 예술품이었다. "꾸, 꿈이었단 말인가? 그새 내가 잠이 들었던가?" 노인은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음을 느끼고 망연자실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꿈이라기에는 너무도 생생하지 않은가?" 노인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하늘은 변함없고, 별도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문창 무곡의 양대령성도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한데, 문창 무곡성에서는 전에 없이 신비로운 광채가 어리고 있지 않는가? "벼, 별의 정기(精氣)가 이... 곳으로 내리고 있다!" "폐하(陛下)..." 노인이 창문턱을 움직이며 경악하여 부르짖는 순간에 밖에서 공경(恭敬)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 제독태감(提督太監)인가?" 노인이 황급히 몸을 돌리며 외쳤다. "소신이옵니다... 폐하..."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장대한 체구이나 수염 하나 없는 얼굴의 화려한 관복의 노인, 이 사람이야말로 자금성(紫禁 城) 내의 모든 환관(;내시)들의 우두머리인 제독태감이었다. 제독태감에게 폐하라 불릴 수 있는 사람, 당금 천하의 황제(皇帝)가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 가? "어찌 되었는가?" 황제가 다급히 물었다. "앙축(仰祝)하옵니다, 폐하..." 황제의 재촉에 제독태감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두 분 마마 다이십니다." "둘 다?" 황제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누가 아들을 보았는가?" "두 분 마마께오서 거의 같은 시각에 똑같이 황자전하(皇子殿下)를 순산하셨습니다. 감축하 옵니다..." 제독태감은 다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황제는 신음하고 말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오늘 황제는 그가 가장 총애하는 두 귀비(貴妃)의 해산 소식을 기다 리다 깜박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신비하기조차 한 꿈을 꾸고 난 지금, 너무도 공교롭게도 두 귀비가 똑같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지 않은가? '그것도 거의 같은 시각!' 황제는 신음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창성과 무곡성은 이제 상당히 흐려져 있었다. '그 꿈... 그 꿈은 문창 무곡의 정기를 받은 절세위재(絶世偉才)가 태어남을 암시하는 것이 다. 그러나 같은 순간에 두 아이가 태어남은 무슨 뜻인가? 제각기 그 힘을 하나씩...' 생각을 굴리던 황제는 부인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문창 무곡은 합쳐졌다... 결코 갈라질 수 없다! 그 힘은 한 아이에게만 이어졌다!" "예?" 느닷없는 외침에 제독태감이 어리둥절해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누가 먼저 태어났느냐?" "정귀비마마께서 약간 일찍 해산하신 것으로 아옵니다." "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귀비에게 가 전해라. 수고했다고... 그리고 아이의 이름은 성운(星雲)이라 부르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유귀비에게도 가서 전하라! 아이의 이름은 천운(天雲)이다!" "성은이 하해(河海)와 같사옵니다." 제독태감은 국궁(鞠躬)하며 물러갔다. "음...!" 묵묵히 서 있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본 황제의 몸에 진동이 일었다. 하늘의 중심, 거기에 위치한 자미성(紫微星)이 빛을 잃어가고 있지 않는가. 자미성은 하늘의 중심이며 그것은 곧 황제의 별이기도 하다. "짐의... 천수(天壽)가 다됐단 말인가?" 황제의 신음하는 듯한 음성이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그것은 거대한 회오리의 시작을 의미하는 울림이었다. 제 1 장 황실(皇室)에 이는 바람 북경(北京)은 황성(皇城)인 자금성(紫禁城)을 둘러싼 중원천하의 중심이다. 황제가 있는 자금성은 천하의 부(富)와 힘[力]이 집중된 곳이다. 마치 줄을 서듯 잇달은 누각과 누각.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화려한 처마, 그 어느것 하나 예술품(藝術品) 아님이 있겠으며, 하찮은 기둥 하나에도 명장(明匠)의 혼(魂)이 스며 있음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누각과 누각은 화려(華麗)한 낭하(廊下)로 끝없이 이어져 있고, 눈이 어리도록 채색된 담장 과 담장 사이는 눈이 시리도록 하얀 백석(白石)이 깔려 이어졌으니, 실로 발에 흙 한번 묻히 지 않아도 되는 곳이 바로 이곳 자금성이다. 자금성(紫禁城)은 곧 천하(天下)였다. 그 자금성 위로 고요히 내려앉은 어둠의 나래 위에 다시 은빛으로 부서져내리는 달빛[月 光]! 그 황홀하도록 부드러운 달빛은 천하의 무엇이라도 감쌀 수 있도록 포근해 보였다. 연꽃[蓮花]. 신비스럽기조차 한 미소를 머금고 피어난 연꽃이 가득한 연못, 맑은 향기(香氣)가 그윽한 가 운데 삼면이 그 연못에 둘러싸인 정자가 있었다. 월광이 가득 내려앉은 이곳은 단심정(丹心亭)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 단심정에는 한 사람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용포(龍袍)를 걸친 그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은 삼척동자라도 당연히 알 수 있다. 사람이란 의복에 따라 달라 보이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보 면 그가 넝마를 걸치고 있어도 빛날 사람임을 알게 된다. 이제 갓약관(弱冠)에 이른 그의 모습은 바로 임풍옥수(臨風玉樹)이기에, 눈을 씻고 천하를 뒤져도 찾아보기 힘든 귀공자(貴公子)였다. 문약(文弱)해 보임이 옥에 티라고 할까? 하지만 그의 맑디맑은 두 눈, 천하의 모든 것을 담은 듯 맑고 깊은 그의 눈은 그것을 덮고 도 남음이 있었다. 그의 전신에 은은히 스며 있는 고귀(高貴)함은 또 어떠한가. 용포의 귀공자는 미동조차 않은 채 정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가 정자에 그 자세로 앉아 있은 지는 이미 두 시진여... 제아무리 정력이 좋은 사람도 책상다리를 한 채 두 시진을 꼼짝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 러나 그는 나무를 깎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를 이상히 보는 사람은 자금성 내에는 없었고 독서하는 그를 감히 건드릴 담량을 가진 사람도 자금성 내에는 없었다. 한데, 느닷없이 뼈도 없는 듯 부드럽고 조그만 손 하나가 그의 뒤에서 불쑥 뻗어나와 그의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닌가? "누구-게?" 코먹은 듯 기이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은방울처럼 영롱한데다 치기(稚 氣)마저 어려 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눈을 가리운 용포공자의 입가에 한 가닥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 누굴까?" 용포공자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리운 조그만 손을 더듬더니 말했다. "야밤에 이토록 털이 수북한 손이 나타난 걸 보면 여우인가?" 순간이다. "어디? 어디 털이 수북해요?" 그의 머리에 작고 뭉클한 가슴이 기대왔다. 상기된 음성과 함께 그의 눈을 가렸던 손이 그 의 눈앞에 드러났다. 마치 옥을 깎아만든 듯 작고도 예쁜 섬섬옥수. 거기에 어찌 털이 수북할 수 있겠는가? "역시 여우인 게로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금시 예쁜 손이 될 수 있겠나?" 용포공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이럴 거예요?" 뾰족한 음성과 함께 그의 면전에 조그만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아미(蛾眉)를 상큼 치켜뜨고 쌔근거리면서 터억 하니 허리에 손을 댄 소녀, 화려한 궁장에 이제 약 열 살 가량으로 보이 는 꼬마 아가씨다. 그녀를 보고 천상(天上)의 옥녀(玉女)를 생각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 리라! "하하하..." 용포공자는 갑자기 홍연대소(哄然大笑)하면서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놔요! 놔!" 궁장의 소녀는 조그만 주먹으로 용포공자의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앙탈했다. "정말 영(瓔)아가 여우 같아요?" 잠시 후, 용포공자의 가슴에 안긴 채 궁장의 소녀가 맑은 눈망울을 또르르 굴리며 물었다. "아니." 용포공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우가 열 번을 둔갑해도 우리 소영(小瓔)이만큼 예쁘지는 않을 거야. 어림도 없지!" 용포공자는 웃으며 궁장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거짓말!" 눈을 흘기면서도 내심은 좋아 웃음이 번지는 꼬마 아가씨, 그 천진함에 사랑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그 누구이랴. "한데 이 밤중에 자지 않고 여긴 웬일이지?" 용포공자가 부드럽게 물었다. "달빛은 밝고... 잠은 안 오고... 오숙(五叔)은 보고 싶고... 그래서 왔지요?" 궁장소녀는 눈을 빛내며 까르르 웃었다. 용포공자는 열 살 꼬마의 말에 어이없는 듯 흠칫하더니 마주 웃었다. "우리 영아가 이젠 시인이 다 되었군그래..." 그때였다. "공주마마... 이제는 정말 침소(寢所)에 드셔야 하옵니다." 나이 든 여인의 공경한 음성이 들려왔다. 경운공주(卿雲公主) 주소영(朱小瓔). 바로 당금 황제의 단 하나밖에 없는 천금(千金)이 그녀였다. 황제조차 쩔쩔매는 말괄량이에 귀염둥이가 그녀였고, 나이 열 살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줄 줄 외는 그녀였다. 정자 아래에는 오십대의 엄격해 보이는 얼굴의 궁장여인이 가벼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고 그 뒤에는 갓이십대의 궁장여인들이 시립하고 있었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따라왔다지?" 경운공주는 뾰로통해 종알거리더니 용포공자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오숙, 나 좀 재워줘요." "공주마마..." 용포의 귀공자는 손을 흔들었다. "조상궁(曹尙宮), 그냥 두시오. 잠시만 내가 데리고 있다가 영아를 보내겠소." "황공하옵니다..." 궁장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 순간, 경운공주의 손이 용포공자의 품속에 뭔가를 집어넣었음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용포공자 본인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교묘했기에... 폭풍(暴風)! 이 고사리손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행동은 거대한 회오리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었다. 용포공자가 경운공주의 머리를 쓸어주고 있는 동안에 경운공주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 어 있었다. 잠든 그녀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귀여웠으나 어딘지 모르게 한 가닥 처연한 기 운이 어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불쌍한 녀석...' 용포공자는 나직이 탄식하며 조심스레 일어났다. "조상궁, 공주가 잠이 들었소. 깨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심려 놓으시오소서. 전하(殿下)..." 궁장여인은 조심스레 경운공주를 받아들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의 용태는 좀 어떠신가?" 용포공자의 말에 궁장여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늘 초저녁부터 혼수(昏睡)에 드셨... 사옵니다..." "혼수라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환후에 조금 차도가 계셨지 않은가?" "황공하옵니다... 저녁에 미음을 조금 드시고는 복통을... 황공하옵니다..." 궁장여인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용포공자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의(御醫)는 뭐라 하던가?" 그의 음성은 어느새 가라앉아 그가 얼마나 침착한 사람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조상궁은 송구한 듯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밤을 넘겨보아야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오나 큰일은 당하지 않으실 것이라 하 셨습니다." "확실한가?" "들은 대로 전하였사옵니다." 황궁은 말 한마디 잘못이면 목이 달아나는 곳이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법이 없다. 그저 전할 뿐이다. 조용히 서 있던 용포공자의 시선이 궁장여인의 품에 잠들고 있는 경운공주에게 머물렀다. "소영이도 그것을 알고 있소?" "조금 전까지 건청궁의 폐하 곁에 계셨사옵니다..." 궁장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용포공자는 잠든 경운공주의 눈가에 영롱한 이슬이 한 방울 매달려 있음을 보았다. '불쌍한 녀석... 의지할 데가 없어 내게 왔었구나...' 세 살 때 모후(母后)를 여읜 경운공주다. 그 아버지인 황제마저 병석에 누운 지 이미 삼 년, 그 용태는 하루하루 위중해가기만 하는 것이다. 지금의 황제는 경운공주 하나뿐, 후궁의 몸에서조차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한 황제에게는 배가 다른 아우가 무려 여섯이나 있었다. 황위계승권(皇位繼承權)! 그 거대한 권리는 그 여섯 명 모두에게 있는 것이었다. 후계자가 결정되지 못한 지금이다. 황제의 병세가 자꾸 위중해가기만 하는 지금이었다. 차기 황권을 노리는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와중에, 장중보옥(掌中寶玉)과도 같은 경운공주가 외토리가 되는 것은 또한 당연하였다. 열 살이라고는 하나 유달리 총명한 그녀가 주위의 공기를 모를 리 없었다. 끝없이 짓궂은 장난과 거침없는 쾌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철없음으로 볼지 모르나 용포공자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슬픔을 감추기 위한 방편(方便)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경운공주는 그를 찾고 그를 따른다. 용포공자가 대내(大內)에서 가장 사심(私心)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기에. '황제의 딸이 다 무슨 소용인가...' 용포공자는 나직이 탄식하며 잠든 경운공주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조상궁, 공주를 잘... 돌보아주시오..." "황공하옵니다. 어찌 목숨인들 아끼오리까... 선행(先行;죽은 황후)마마의 유명을 받든 소인이 옵니다." 궁장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그만 돌아가보오." "밤바람이 차옵니다. 옥체 보중하소서..." 머뭇거리던 궁장여인은 속삭이듯 한마디하고는 총총히 사라져갔다. "폐하께서 혼수에 빠지시기 전에 전하를 찾으셨사옵니다..." 파라-락! 밤바람이 옷자락을 휘날린다. 거기에 새겨진 용이 승천하려는 듯 춤을 춘다. 용포공자는 밤하늘에 아스라이 찬 별들을 바라보며 석상인 양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형님께서 날 찾으셨다고?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주위는 갑자기 어둠에 잠겨들고 있었다. 그토록 교교히 빛나던 달이 홀연히 먹장구름에 가 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암시(暗示)와도 같았다. "아바마마께서 붕어(崩御)하신 지 이미 오 년... 과연 내가 지난 오 년 간을 서고(書庫)에 파 묻혀 있었음이 잘한 것일가?" 용포공자의 입에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정자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주에게 오숙(五叔)이라 불리며, 황제를 형이라 부르는 그의 신분은 당연히 평범할 리 없었 다. 오황야(五皇爺)! 당금 황제의 여섯 명의 아우 중 네번째 아우인 대혜왕(大慧王)이 바로 그였다. 주천운(朱天雲)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나이 셋에 사서오경을 외우고, 나이 일곱에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涉獵)했으며 열 살에 이르러 가르치던 한림원(翰林院) 시 강학사(;從五品)를 학을 떼게 만들고, 나이 열 둘에는 당대석학(當代碩學)인 한림원학사(;正 五品)의 안색을 썩은 돼지의 간빛으로 질리게 하였고, 열 셋이 되었을 때는 당세 최고의 대 석학(大碩學)이라는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 고경(古敬)이 자신의 재주를 한탄,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시골로 도망친 일을 천하의 그 누구가 모르겠는가? 오황야 대혜왕을 모른다면 그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리라! 그로부터 오 년이다. 선황이 죽고 태자가 등극(登極)한 후, 그는 자신의 왕부(王府)로 돌아가지도 않고 황궁서고 (皇宮書庫)에 묻혀 살아왔다. 그의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려는 얼빠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햇볕을 못 본 그의 얼굴이 희게 변하는 만큼, 그의 눈빛이 맑아짐을 볼 뿐이었다. * * * 당금의 황실에는 황제가 삼 년 전부터 병석에 누우면서 매우 미묘한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 었다. 선황(先皇)은 모두 칠자이녀(七子二女)를 두었고, 현 황제에게 소생이 없는 이상 황위계승권 은 황제의 여섯 아우에게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황후의 적출(嫡出)은 현 황제뿐, 나머지 여섯 아우는 모두 후궁의 소생인데다 둘째 와 여섯째를 제외하고는 어머니마저 달랐다. 어찌 조용할 수 있겠는가? 황위(皇位)! 그것이야말로 끝없는 유혹(誘惑)의 상징이거늘... 황제 주수운(朱守雲)이 황위에 오른 지 오 년. 그는 영민(英敏)한 황제이나 선천적으로 병약(病弱)하여 지닌 경륜(經倫)을 채 펴보지도 못 하고 병석에 누운 지 이미 삼 년이다. 환후(患候)는 날이 갈수록 깊어가고... 그에 따라 왕부(王府)에 가 있던 친왕(親王)들이 마치 무엇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북경에 돌아온 지도 이미 이 년이 넘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보내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광덕왕(匡德王) 주뢰운(朱雷雲)은 선황의 둘째 황자다. 금년 스물다섯이며, 누나인 난정공주(蘭亭公主) 주수경(朱琇瓊)과 여섯째 주소운과 함께 이 귀비(李貴妃)의 소생이다. 그의 위인됨은 호인(好人)인 편이나, 그의 부인 심려려(沈麗麗)는 여걸(女傑)이라고 전한다. 무성왕(武成王) 주룡운(朱龍雲)은 가장 막내동생인 가선공주(嘉善公主) 주하경(朱霞瓊)과 함 께 최귀비(崔貴妃)의 소생이다. 팔척거구의 그는 신력(神力)이 과인(過人)하여 야심(野心)과 패기(覇氣)의 덩어리 같은 사람 이었다. 금년 나이 스물셋이다. 흥문왕(興文王) 주성운(朱星雲)은 나이 셋에 사서삼경을 떼어낸 천하기재(天下奇才)였다. 일곱 황자 중 주천운과 함께 가장 빼어난 인물, 선황은 그와 주천운을 놓고 골머리를 싸매 고 있다가 돌아갔다. 선황이 죽기 전에 중얼거린 말은 이러했다. "누굴까? 누가... 진짜일까...?" 흥문왕 주성운에게는 주천운을 능가하는 점이 있었다. 주천운이 문(文)의 외골수인 반면, 그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준재(俊才)인 것이다. 그는 대단한 야심가(野心家)이지만 실제로 그가 흉중(胸中)에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으며, 그의 능력이 과연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십팔 세의 주천운과 같은 날 반 각 차이로 일찍 태어나 사황야(四皇爺)가 되었다. 대혜왕(大慧王) 주천운(朱天雲)은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천재라고 불린다. 대내에서 유일하 게 권력에 야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유귀비는 아들의 장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진명왕(眞明王) 주소운(朱 雲)은 둘째인 광덕왕 주뢰운과 함께 이귀비의 소생이다. 금년 나이 열일곱, 무엇을 하든 남보다 떨어지는 법은 없다. 일곱 황자 중 가장 평범한 인물이다. 그러나 평범 속에 진리(眞理)가 있기도 한 법이 또한 세상의 이치가 아니랴. 숭덕왕(嵩德王) 주서운(朱瑞雲)은 주소운과 반 년 차이로 동생이 된 인물이다. 그는 별로 말이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가 과연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 알지 못한다. 혹자(或者)는 그를 일러 일곱 황자 중 가장 심기(心機)가 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 * 백화난만(百花爛漫). 밝은 햇살 아래 그토록 만발(滿發)했던 꽃들은 어둠 속에서 꽃봉오리가 되어 숨쉬고 있다. 가슴이 맑아지도록 그윽한 향기는 화원을 감돌고 있었다. 주천운(朱天雲)은 조용히 그 화원을 지나고 있었다. 이 화원은 그의 거처인 천기각(天機閣)과 단심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이 화원이 미치는 범위 는 곧 천기각의 영역이었다. 문득, 주천운의 발걸음이 멎었다. "화로(花老),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한 인영이 화원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오십니까, 전하. 날씨가 흐려져 꽃을 돌보려는 중입니다." 자상한 얼굴의 노인이 화원 가운데에서 허리를 펴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미 칠십 고령임에 도 불구하고 그를 보는 얼굴은 동안(童顔)이다. 화로(花老)라고 불리는 그가 죽은 꽃도 살려낸다는 화중성(化中聖)임을 대내에서 모르는 사 람은 없다. 꽃〔花〕은 바로 그의 모든 것이었다. 주천운은 담담히 웃어 보이고는 그의 곁을 스쳐지났다. 그가 꽃과 같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있으면 꽃이 있고, 꽃이 있다면 그가 있기 때문이다. "전하, 안에서 유상서(柳尙書)께서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등뒤에서 화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유대숙(柳大叔)이?' 가벼운 멈칫거림이 주천운의 발길에서 느껴졌다. 단 한곳도 화려하지 않으나 고아(古雅)한 품위가 어리고, 수많은 책들이 들어차 있으나 결코 어지럽지 않은 곳, 제이의 황궁서고(皇宮書庫)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이 천기각이다. "전하, 이제 오십니까?" 주천운이 들어옴을 보고 반백의 노인이 일어섰다. 약간은 비대한 체구에 근엄한 풍도를 갖고 있는 노인, 호부상서(戶部尙書) 유관룡(柳冠龍)이 바로 그였으며, 주천운의 죽은 어머니인 유귀비의 친정 큰오라버니였다. "그간 무양(無恙)하시오니까?" 호부상서 유관룡의 옆에서 한 장년인(壯年人)이 허리를 굽혔다. 병부시랑(兵部侍郞) 유위(柳威), 유관룡의 아들로 나이 서른 다섯에 이미 병부시랑이 된 실 력자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진작 연락을 하시지 않고..." 주천운은 반갑게 웃었다. "연락이라니요. 어렇게 불청객이 된 것만 해도 정수(靜修)에 방해가 되지 않았나 좌불안석입 니다." 호부상서 유관룡은 나직이 웃었다. 나이로는 까마득하지만 이 나이 어린 조카에게는 누구라도 쉽게 대할 수 없었고, 유관룡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전하, 소식을 들으셨사옵니까?" 잠시 머뭇하던 유관룡이 침중히 입을 열었다. "무슨 소식 말입니까?" "모르시오니까? 폐하께서 오늘 저녁 혼수상태에 빠지셨습니다." 유위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유대숙께서 나를 찾아온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주천운이 침착히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사옵니까?" 유관룡의 물음에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시면서도 이렇듯 무심하시오니까?" 유위가 답답한 듯 말했다. "폐하의 병세가 위중하심은 천하만인의 걱정이거늘, 어찌 무심타 하오?" 주천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하!" 유관룡 부자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전하, 대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무슨 뜻이오?" "폐하의 혼수상태가 퍼져나가자마자 황야(皇爺)들께서 측근들과 은밀히 회동(會同)하기 시작 했습니다." 유관룡이 침중히 말했다. "이황야쪽은 지금 부마도위(駙馬都尉)를 비롯해 육황야까지 모여 있고, 사황야쪽은 구문제독 (九門提督)..." "그만!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오?" 주천운이 열을 띠어가는 유위의 말을 잘랐다. "전하!" 눈〔眼〕! 유관룡의 눈이 불타기 시작했다. "지금 대내에는 황야들간에 치열한 세력 확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휩쓸리 지 않으려는 중도세력(中道勢力)도 있습니다..." "중도세력의 힘은 지금 각황야들께서 흡수한 힘에 비해 오히려 강합니다." 유위의 눈도 불탄다. "황야들 중, 권력에 초연한 분은 오직 전하 한 분뿐임을 그 누가 모르리까? 중도세력은 은 연중에 전하와 뜻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유관룡의 나직한 음성이 격앙된다. "게다가 전하께서 여섯 황야 중 가장 뛰어난 제기(帝器)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 전하께서 원하시면 중도세력은 전하를 지지하오리다!" 유위의 음성도 불꽃을 튀긴다. "명만 내리소서! 소신은 중도세력을 끌어들일 자신이 있사옵니다! 민심(民心)은 전하께 있사 오이다!" "전하! 전하!" "그만두시오!" 조용하면서도 힘찬 음성이 그들의 말을 끊었다. "내게 파당(派黨)을 지어 골육상쟁(骨肉相爭)을 하란 말이오?" 가을하늘과도 같은 주천운의 눈동자가 은은한 노기를 띠고 빛나고 있었다. 틀리다. 평시에는 맑게 가라앉은 대해(大海)와 같더니, 노기를 띠자 그 조용한 대해는 마치 해일(海 溢)과 같은 엄청난 위세로 들끓어오르지 않는가? "...!" 유관룡 부자는 그토록 유약해 보이던 주천운의 변한 모습에 일순간 기가 질리고 말았다. 결코 그의 그와 같은 모습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들이었으므로... 그러나 주천운의 전신에 떠오르던 노기는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과... 과연...!' 유관룡은 식은땀이 솟아남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산전수전 다 겪은 당금 조정의 중신(重臣)이 아니던가! "전하, 그런 뜻이 아니오이다! 생각해보소서. 지금 대내의 사정을!" 유관룡은 힘주어 말을 끊는다. "..." 주천운은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전하를 제외한 다른 황야들께서 지금 어찌하고 계시오니까? 이대로라면 미구에 대내에 왕 자지란(王者之亂)이 일어날 것이오이다!" 그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대사(大事)이옵니다! 그것을 막아야 하옵니다! 그 럴 수 있는 분은 오직 전하뿐이오이다!" "전하께서 나서시는 것은 골육상쟁이 아니라 그것을 막는 길이옵니다!" 유위가 눈을 빛내며 거들었다. 대의명분(大義名分)! 그것은 이렇게 아 다르고 어 달라지도록 사람의 입에서 회자(膾炙)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대숙..." 그러나, 주천운의 나직한 음성에는 대의명분도 빛을 잃는다. "오 년 전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신 후 내가 왜 왕부로 돌아가지 않고 서고에 묻혀살았는지 아십니까?" "오 년 전...?" "나는 그때 이미 오늘의 사태를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 려고 서고에 묻힌 것이오." '부... 불과 열세 살 나이에 오 년 후를 예... 측했다고?' "권력이 허망한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오 년 전에 굳어진 것, 이제와서 변하리라 생각합니 까? 돌아가십시오." 유관룡 부자가 경악하며 말을 잃을 때 떨어진 주천운의 마지막 말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도록 단호했다. "전하..." 유관룡과 유위는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 십 장 밖이다. 천기각을 굽어보는 삼백 년 노송의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나직이 웃고 있었다. 전신에 칠흑 같은 야행의를 걸친 복면인이 거기 있었다. 보이는 것은 차가운 신광(神光)이 뻗어나는 두 눈뿐. '우리 형제 중 가장 무서운 인물은 넷째와 다섯째... 다섯째 형의 의사가 저토록 확실한 이 상 남은 것은 넷째...' 복면인의 중얼거림은 그가 십 장 밖 천기각 안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 었다. '넷째 형이 비록 무서운 인물이라고는 하나... 내게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있다! 후 후...' 나직한 웃음과 함께 복면인의 몸은 야조(夜鳥)와 같이 사라져 갔다. 그가 떠나갔음에도 노송 의 가지는커녕 솔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놀라운 경신공부(輕身功夫)가 아닌가?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눈이 있다. 그 눈은 무심하게... 기척도 없이 떠나는 복면인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그는 노인이었다. * * * 주천운(朱天雲)은 눈을 감은 채 그린 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유관룡 부자가 돌아간 지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문득, 주천운이 나직이 탄식하며 눈을 떴다. "그까짓 권력이 무엇이기에..." 맑은 그의 두 눈에는 한 가닥 고뇌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최악의 결과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 주천운은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침상 앞에 이르러 막 옷을 벗는 순간, 툭! 하는 경미한 음향이 들리며 옷 속에서 무엇 인가가 떨어졌다. "이게 무엇인가?" 주천운은 의아한 빛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차곡차곡 접혀진 손수건이었다. "이건... 소영이의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내 품에...?" 중얼거리며 무심결에 손수건을 펴보던 주천운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졌다. <내일 밤 삼경, 너를 때려준 곳에서 기다리겠다. 네가 보고 싶구나!> 단 두 줄, 누가 썼는지 서명조차 없는 간단한 글이 그 손수건에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그 뜻은 또 어떠한가? 다른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것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리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글을 쓴 것이 경운공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뚫어져라 손수건을 쳐다보고 있던 주천운의 손길이 떨리기 시작했다. "폐하..." 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이미 그 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해낸 것이다. "도대체... 무... 엇때문에 이토록 은밀하게... 소영이를 시켜서..." 이 밑도끝도없는 글은 바로 그의 큰형이자 황제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소영이가 자신을 찾 아왔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바로 이 글을 전하기 위해서였음을 깨달았다. "오늘 초저녁에 폐하는 혼수에... 그런데 이 글은...?" 주천운은 갑자기 전신이 경직(硬直)되어옴을 느꼈다. '뭔가... 대내에 내가 생각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황제가 혼수상태에 빠지고, 열 살 먹은 공주가 남의 눈을 피해 의식불명인 황제의 편지를 전한다. 삼척동자라도 그것이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으리라! "나를 보고 싶다고 함은 나 혼자만... 그것도 남의 눈에 띄지말라는 뜻... 나를 때려준 곳도 폐하와 나밖에는 모르는 곳이니, 이것은 글이 남의 손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도대 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주천운은 손수건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황제(皇帝)와 황제(皇弟)들은 거의 다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기에 별로 싸운 적도 없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 태자는 늘상 주천운에게 뒤져 선황에게 한 번 꾸지람을 당한 적이 있었 다. 그때, 주천운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태자에게 실컷 두들겨맞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은 태자와 주천운만이 아는 비밀이고 이미 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은 거의 잊혀져가는 일이었다. 단 한번뿐인 일이기에... * * * 다음날 아침, 아침해가 사방을 홍광(紅光)으로 붉게 물들일 때, 주천운은 화원에서 화로(花 老)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찬란한 햇살 속에서 꽃을 다듬는 화로의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전혀 무리가 없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은 마치 자연(自然)과도 같다... 내가 그를 능가했 다는 것은 그의 겸손이었군...' 꽃을 다듬는 화로의 손길을 보고 있던 주천운의 생각은 느닷없는 음성에 깨지고 말았다. "다섯째, 여기 있었군!" 몸을 돌린 주천운의 앞에는 한 명의 당당한 체구의 용포공자가 나타나 있었다. 그의 모습은 주천운에 못지않았다. 영준수절(英俊秀絶)함은 주천운에 뒤떨어지는 것 같으나, 가늘고 길게 패어진 두 눈은 왕자 지목(王者之目)이요, 그 눈이 맑게 가라앉아 있음은 그의 심기가 깊음을 말함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은 강인한 의지가 있음이고, 사각형의 얼굴은 그가 사람을 포용할 흉금을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주천운에게 없는 패기(覇氣)가 있었다. "넷째 형님, 아침 일찍 어쩐 일로..." 주천운의 깊은 눈에 파문이 일어났다. 흥문왕(興文王) 주성운(朱星雲). 바로 주천운과 거의 같은 시각에 태어난 사황야가 나타난 것이다. "아직 모르느냐? 폐하께서 위중하시다고 해서 문후(問候) 드리러 같이 가자고 들렀다." 흥문왕 주성운은 주천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어의들이 문후를 막고 있습니다. 가실 필요 없습니다." 주천운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다녀왔느냐?" 흥문왕 주성운은 뜻밖인 듯 흠칫했다. 그러나 그의 눈 깊은 곳은 미동도 않고 있었다. "하하... 너의 우애(友愛)는 도저히 내가 따를 수 없구나! 우리 형제가 모두 너와 같다면 좋 으련만..." 주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흥문왕 주성운은 가볍게 탄식하며 주천운의 손을 마주잡았다. 순 간, 주천운은 한 가닥 괴이한 경력에 이끌려 하마터면 앞으로 쓰러질 뻔했다. 그러나, 그 힘은 일어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이런, 조심해라." 흥문왕 주성운이 주천운을 잡아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천운은 쓰게 웃으며 몸을 바로잡았다. "그러기에 내 뭐라 하더냐? 너무 책에 몰두하지말고 체력에도 신경 쓰라 하지 않더냐? 모름 지기 장부(丈夫)란 문무(文武)..." "형님은 또 저와 해묵은 언쟁을 할 참입니까?" 주천운의 담담한 대답에 흥문왕 주성운은 고소했다. "그만두자. 어차피 너는 고금제일의 서치(書痴)니까... 그래 요즘은 무엇을 읽고 있느냐?" "불경을 조금 보고 있습니다." "불경(佛經)? 설마 중이 되려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게 되면 천하가 울음바다가 될 게 다!" "?" "그렇지 않으냐? 오황야를 연모하는 규중처자들이..." "그만하십시오. 내가 알기로는 샌님 같은 나보다 형님을 연모하는 규녀(閨女)들이 더 많은 줄 압니다." "하하... 이거 이젠 말로도 안 되겠군! 그래 요즘 읽고 있는 불경은 어떤 것이냐?" "대보적경(大寶積經)입니다." 흥문왕 주성운의 눈에 한 가닥 기광(奇光)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보적경이라면 당(唐)의 유지(流志)가 번역한 백이십 권..." "형님이야말로 모르는 게 없군요. 그렇습니다. 그 중 후반 십오 권을 보고 있습니다." "후반 십오 권이라니? 그것은 번역은 했으되, 뜻이 통하지 않아 아무도 못 보는 것이 아니 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원본(原本)을 보고 있습니다." "원본! 범어(梵語)로 된 것 말이냐?" 흥문왕 주성운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튕겨져나갔다. "그냥 보는 시늉만 하고 있습니다." 주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흥문왕 주성운은 신음하듯 말했다. "네가 천하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뜬소문입니다. 인간이 어찌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주천운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화원을 걸었다. "다섯째, 너는 나를 어찌 생각하느냐?" 이윽고, 흥문왕 주성운이 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형님으로 생각합니다." 주천운의 태연한 대답에 흥문왕 주성운은 잠시 멍청해졌다. "좋아, 좋아... 우문현답(愚問賢答)이군! 너는 어찌할 셈이냐?" 흥문왕 주성운은 주천운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것은 단도직입(單刀直入)이었다. 그러나 주천운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제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젯밤에 유상서(柳尙書)에게 한 대답... 아마 형님도 알 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조용한 음성은 흥문왕 주성운을 신음케 했다. "또 우문(愚問)을 했군! 좋다. 부인치는 않겠다. 우리 형제 중 가장 솔직하고... 우애있는 사 람이 너였지..." 흥문왕 주성운은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형님은 포기할 수 없습니까? 굳이 피를 나눈 형제끼리 반목(反目)..." 흥문왕 주성운은 빙그레 웃으며 주천운의 어깨를 잡았다. "너만 나서지 않는다면 나는 형제들의 피를 보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의 눈은 불타고, 그의 음성은 나직하며 말할 수 없이 굳건했다. "..." 주천운은 쓰게 웃었다. 더 이상 말해보아야 소용없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넷째야! 너는 대단히 비범한 인물이다! 흐흐... 그러나 너는 너무 너를 자신(自信)한다... 그 것이 네 약점이다!' 팔척거구에 용포를 걸친 인영의 눈이 은밀히 주천운 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몸을 숨긴 가산(假山)과 주천운과의 거리는 팔구 장이었다. 직후, 인영은 소리도 없이 그곳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떠나는 순간에 흥문왕 주성운의 입가에 냉소가 스쳐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흥문왕 주성운도 주천운이 자신의 냉소를 알아보았음은 미처 짐작치 못했다. 그저, 부드러운 아침 햇살만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쏟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제 2 장 천단(天壇)에서 만난 기인(奇人) 천단(天壇)은 북경성 외성(外城)에 위치한 제단(祭壇)이다. 성밖으로 통하는 리하(里河)가 흐르는 천단은 천자(天子)가 천제(天帝)를 봉사(奉祀)하는 곳 이다. 눈보다 흰 대리석(大理石)으로 세워진 천단은 대명(大明)이 하늘의 뜻을 잇고 있음을 상징 한다. 태양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 천단에 한 명의 유생(儒生)이 나타났다. 연한 청색의 유삼(儒衫)을 받쳐입은 유생의 모습은 하계(下界)의 인간이 아닌 듯 초속(超俗)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천단을 마치 산보하듯 천천히 걷고 있는 청의유생은 바로 주 천운이었다. '천단! 황제가 자신이 천제의 아들임을 알리고 제사하는 곳. 천제의 아들... 그래서 황제는 천자(天子)라 불린다...' 주천운의 눈에 넓고도 높은 천단의 웅자(雄姿)가 들어왔다. 운남(雲南) 대리(大理)에서도 가장 좋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천단은 햇살 아래 찬연히 흰 빛을 부셔내고 있었다. '천자가 된다고 자신이 인간임을 부인할 수 있는가? 그저 인간다워지는 것. 그것이 전부이 고 자연(自然)인 것을...' 주천운은 천단에 오르는 석란(石欄;돌난간)을 만지며 탄식했다. 문득 그의 눈빛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원래 천단의 주위에는 상록교목(常綠橋木)들이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최하 백년을 살 아온 거목(巨木)들이다. 그 중에서도 거대한 노송의 아래에 한 노인이 기대 누워 있었던 것이다. 마치 따뜻한 햇살 을 즐기고 있는 듯한 노인. '왕족이 아니면 허락없이 천단에 들어올 수 없거늘...' 주천운은 의아한 빛으로 노송에 기대 잠들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의 낡은 백의는 빨아 입은 듯 매우 깨끗했다. 그러나 거기 어디에 왕족의 영화(榮華)가 있는가? 하지만 잠든 노인의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밝았다. "노인장, 노인장..." 주천운의 조용한 음성에 백의노인이 눈을 감은 채 혀를 찼다. "쯧쯔... 여기서도 조용히 잘 수가 없단 말인가?" '잠이라고?' 주천운은 어이가 없었다. 잠은커녕 경비무사에게 들키면 잘해야 반 죽음이 아니겠는가? "노인장, 땅바닥에서 주무시면 노구(老軀)에 해롭습니다. 아직은 날씨가 찹니다." "?" 주천운의 조용한 음성이 의외였던지 백의노인은 눈을 떴다. 그가 주천운을 바라본 순간, 그의 눈에서 마치 번갯불과 같은 신광(神光) 한 가닥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부는 한 가닥의 햇살만 있으면 어느 곳이라도 잠들 수 있다네... 그대는 누군가?" 말하는 백의노인의 눈은 마치 무엇을 찾아내려는 듯 주천운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랑객입니다." 주천운의 대답에 백의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유랑? 좋지! 어차피 모든 것은 부운(浮雲)과 같은 거니까... 그대는 많은 것을 보았는가?" 주천운의 눈에 한 가닥 기이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보통 사람이 아니로군.' "소생과 같은 나이에 본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저 보고자 노력할 따름입니다."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백의노인의 음성이 빨라졌다. "마음〔心〕을 보고자 합니다." 그에 비해 주천운의 음성은 더욱 차분해졌다. "그대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 주천운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대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선가(禪家)에서 즐겨 쓰는 화두(話頭;불교의 題材)였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수백 수 천 가지나 되고 그 모든 것은 모두 주천운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주천운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알기만〔知〕 하고 내 것은〔得〕 아니었구나!' 주천운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하늘이 푸르지 않는가?" 백의노인은 더 이상 주천운을 쳐다보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 서너 쪽이 한가로이 흘러가고 있었다. "..." 주천운은 묵묵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 구름에 바람이 섞여 풍운조화(風雲造化)라 하던가... 구름이 흐르는가? 바람이 부는가?" 백의노인의 입에서 또다시 기이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간단한 물음, 바람이 불기에 구름이 흐른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그릇은 자신의 몸밖에 담을 수 없으리라. "조화(造化)는 마음〔心〕속에 있지 않습니까?" 주천운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으하하하..." 돌연, 백의노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속에는 통쾌함이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뭉게구름을 보고 사람의 얼굴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같은 시각에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은 기암괴석과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이것은 구름과는 관계없이 보는 사람의 관점(觀點)이며, 그것은 곧 마음의 움직임인 것이 다. "과연 대혜왕답군! 단 한마디에 모든 것을 깨달아버리다니..." 백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아시는군요...?" 주천운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오. 대혜왕, 오황야를 제외하고 또 누가 그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 을 수 있단 말이오?" 주천운은 쓰게 웃었다. "노인장은 뉘시오? 내 기억으로는 노인장과 같은 기인(奇人)을 본 적이 없소만..." 주천운은 백의노인을 쳐다보았다. "노부와 같은 인물이 어찌 기인이 될 수 있겠소이까?" 백의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초민(草民)이 미처 전하를 몰라뵙고 무례를 범했소이다." 주천운은 백의노인이 자신에게 예를 표하려 하자 당황해 그를 잡았다. "이 무슨...! 강호기인들은 속례(俗禮)를 좋아하지 않는다 들었소. 나를 욕보이려 하지마시 오." "그러시다면 굳이 예를 갖추지 않으리라." 백의노인이 허리를 폈다. 눈〔眼〕! 그의 눈과 주천운의 눈. 두 눈이 허공을 격하고 엉겼다. 주천운은 백의노인의 두 눈이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고 느꼈다. "전하, 무(武)를 배우지 않으시려오?" 그 순간, 백의노인이 주천운의 두 손을 움켜쥐며 침중히 물어왔다. 주천운의 눈이 백의노인의 허리에 걸린 길쭉한 물건을 스쳐갔다. "노사(老師)는 무림인이시오?" "그렇소이다. 하지만 한번도 남을 이겨본 적은 없소..." "?" 주천운은 의아한 빛으로 백의노인을 쳐다보았다. "단 한번도?" "그러하오. 하나 전하가 무공을 배운다면 전하는 단 한번도 남에게 지지 않을 수 있소." "노사가 단 한번도 남을 이기지 못한 무공으로 내가 단 한번도 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주천운의 말에는 의혹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끔 상식을 뛰어넘는 의외도 있는 법이다. "그렇소. 그러기 위해 노부는 만 번을 패했소." "...?" 주천운은 백의노인이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노사의 말을 의심하지 않소. 하나, 내가 이기면 내게 패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무 (武)... 나는 남과 피를 흘리며 쟁패(爭覇)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전하! 그런 것이 아니오!" "노사, 내가 거처하는 천기각에는 무림인들이 탐을 낼 무공비급이 수십 권이나 있소. 그러나 그 무공비급들의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소." "으-음..." 백의노인의 안색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미안하오. 내가 무공을 배우려면 이미 예전에 배웠을 것이오." '상승(上乘)... 상승... 최상승 기재이거늘...!' 백의노인이 땅이 꺼지게 장탄식을 뿜어냈다. "백년... 지난 백년간의 심혈(心血)이 노부와 함께 땅속으로 들어가야 하다니..." 백의노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백년이라고?' 주천운이 흠칫 고개를 드는 순간, 백의노인의 모습은 이미 그 곳에 없었다. '이럴 수가?' 주천운이 대경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백의노인은 이미 십여 장 밖의 숲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발이 땅에 닿는 것 같지도 않는데 마치 행운유수와 같이 사라져가고 있는 그 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역시...' 주천운은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나 노인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 지금의 내가 어찌 무공을 배울 여유가 있겠는가?' 주천운은 나직이 탄식했다. 그사이, 노인의 모습은 주천운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주천운은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노인이 갑자기 사라지리라고 상상치 못했던 일인 것이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사월의 태양은 의외로 따가웠다. 책에 파묻혀지내는 주천운으로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주천운은 천천히 무거운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의 신형은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있었다. 사 장여 밖에 울울창창 뻗어난 잣나무에 기대선 인영이. 칠팔십 세 가량 되어 보이 는 황의노인의 온몸은 놀랍게도 피투성이었다. 그러나 황의노인의 두 눈은 쏘는 듯 날카로 웠다. 그가 천단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은 분명했다. '괴이하군! 오늘은 어떻게 천단에 외인이 잇달아 나타난단 말인가?' "누구요?" 그러나 주천운의 음성에는 의혹이 어려 있을 뿐 침착했다. "귀하가... 정녕... 오... 황야 전하이시오?" 한데 뜻밖에 황의노인은 주천운의 신분을 아는 듯하지 않는가? '나는 대내에서 살며 거의 나다니지 않아 자금성 내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거늘...' 주천운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귀하는 뉘시오?" 주천운이 상대의 신분을 묻는 순간, 한 가닥 미풍이 일어나며 황의노인이 주천운의 앞에 내 려섰다. "!" 그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는 순간,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변해 주춤 한걸음 물러 났다. 어찌 참혹치 않으랴? 피투성이인 황의노인의 온몸은 상처로 엉망이었고 가슴팍의 상처는 얼 마나 심한지 뼈가 드러나 있었다. 마치 야수에게 뜯긴 듯한 옆구리의 상처에서는 피범벅이 된 내장마저 은은히 보이니... 제아무리 주천운이 침착하다해도 백면서생인 그가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윽!" 주천운이 주춤 한걸음 물러난 순간에 괴로운 신음과 함께 황의노인이 옆구리를 움켜잡으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조심하시오!"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황의노인을 부축하려 했다. 황의노인의 일그러진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스쳐갔다. '남을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는 마음씨... 과연...!' 암중에 고개를 끄덕인 황의노인이 다시 물었다. "말해주시오! 중대한 일이오! 정녕 대혜왕(大慧王) 전하이시오?" "내가 대혜왕임에는 틀림이 없소." '여기서 오황야를 만나게 되다니... 하늘의 뜻이다.' "우-욱!" 순간, 황의노인은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거기에는 토막난 내장부스러기가 섞여 있었 다. "크으... 그놈의 단장인(斷腸印)이 이... 토록 지독할... 줄이... 야..." 황의노인은 내뱉듯 중얼거렸다. '이 노인은 이미 오장육부가 으스러졌다...' 의학(醫學)에도 고심한 조예가 있는 주천운은 그의 상태를 알고 놀라 다급히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우선 노인의 상처부터 돌보고 나서 말을..." 황의노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시간이... 없소... 이다. 노부는... 오늘을 넘... 길... 수 없소..." 그는 쥐어짜듯 말하더니 품속에서 목갑(木匣) 하나를 꺼냈다. 길이 한 자에 높이 네다섯 치 가량의 목갑, 주천운은 대번에 그것이 극상품의 침향목(沈香 木)으로 만든 것임을 알아보았다. "받아주시오! 이... 시각부터 이것은... 전하의 것이오." 황의노인은 목갑을 주천운의 품에 쑤셔넣었다. "이게 무슨...?" 주천운의 검미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바로 그때였다. 삐리리리... 어디선가 가냘픈 새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황의노인의 안색이 참혹하도록 일그러졌다. "버, 벌써 쫓... 아오다니! 전하! 그 물건은 천하를 지배할 힘을 가졌... 소이다!" '천하를 지배할 힘을 가졌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이겠는가. 한낱 목갑에 어찌 그런 힘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주천운 이 기가 막혀 침향목갑을 내려다보는 순간에 황의노인은 다급히 품속에서 용안(龍眼)만한 환약을 꺼내 입 속에 털어넣었다. "그것은 혹 잠마신환(潛魔神丸)?" 주천운이 흠칫해 묻자 황의노인의 얼굴에도 경악한 빛이 드러났다. "전하께서 모르는 것이 없다더니..." 잠마신환(潛魔神丸)이란 꺼져가는 불꽃에 생기(生氣)를 주듯 인체의 모든 잠력(潛力)을 한꺼 번에 끌어올리게 하는 기약(奇藥)이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죽음뿐. "전하께선 그 누구에게도 오늘 노부와 만났다는 말을 하거나 그 물건을 보여서는 아니 되 오. 만약 전하께서 그 물건이 필요없거든... 차라리 없애버리시오." 다급히 말하는 황의노인의 얼굴에는 홍광(紅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마신환의 효력이 일 어나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주천운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웬 놈이냐?" "전하 옆에서 물러나라." 다급한 음성과 함께 경비무사들이 나타났다. 경비무사들은 장창을 꼬나쥐고 다급히 쫓아왔다. "괜찮다. 걱정 말고 물러...!" 그들을 보며 물러가라는 시늉을 하던 주천운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맙소사! 채 비명조차 없었다. 피보라를 뿌리며 쓰러지는 그들의 목은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단 일검. 미풍과 함께 주천운의 곁에 내려서는 황의노인의 수중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똑! 한 방울의 선혈이 아프게 검끝에서 흘러내렸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들이 무슨 짓을 했다고..." 주천운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믿을 수 없게도 황의노인이 다짜고짜 경비무사들을 베어 버린 것이다. "전하를 위해서외다! 노부가 전하와 만난 것을 아는 자가 있다면 전하는 그들의 손을 벗어 날 수 없게 되오." "그렇다고 죄없는 그들을 죽이다니! 이곳은 황성이거늘..." "황성 아니라 폐하의 침전이라도 그들은 가리지 않을 것이오. 이것만이..." 그 순간, 예의 새 소리 같은 것이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그것은 매우 또렷하고 괴이하게 도 고막을 찌르는 힘이 있었다. "그들이 이미 사방을 포위했소! 노부가 그들을 유인하겠습니다. 명심하소서. 만약 그 물건이 악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전하는 그 죄를 감당하실 수 없을 것이오." 황의노인은 속삭이듯 다급하게 외쳤다. "우-" 그리고 다음 순간에 한소리 외침과 함께 황의노인의 신형이 단숨에 십 장을 치솟았다. 놀라운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전하, 노부의 뒤를 쫓는 자들은 신비집단의 고수들이오. 그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황제라도 가리지 않을 자들이외다. 노부가 여기서 전하를 만나게 됨은 하늘의 뜻! 부탁하오." 한 가닥 미약한 음성이 주천운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에 황의노인의 신형은 점으로 화해 사라져갔다. "도대체 이게...?" 삐삐! 삐리리- 주천운이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신음하는 순간에 급촉한 새 울음소리와 함께 수백 장 떨어진 사방에서 인영들이 솟더니 황의노인이 사라진 쪽으로 날아갔다. 그 기세는 황의노인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주위는 삽시간에 정적(靜寂)을 회복했다. 주천운은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러나 저 앞에 쓰러져 있는 경비무사의 시체는 그것이 꿈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음을 가라앉히려 여길 나왔다가..."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품속에 들어 있는 침향목갑에 손이 갔다.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주천운의 머릿속은 느닷없는 일련의 사태에 혼란해졌으나 상황이 매우 급박함을 추측할 수 있었다. '황의노인은 어떤 강대한 힘에 쫓겨 악전고투 끝에 여기까지 도망쳐왔으나 자신이 살아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내 신분을 알자 이것을 내게 맡기고 적을 유인해갔다...' 주천운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음은 그가 사악한 자가 아니란 뜻이고... 그가 무사들을 처치한 것 은 그를 쫓는 자들이 그만큼 무섭다는 뜻...' 주천운은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변함없이 푸르렀다. '강호가 그토록 험악한가...? 황궁보다 더?' * * * 천단을 빠져나가던 주천운은 흠칫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앞에 마치 땅에서 솟아난 듯 한 명의 괴인이 길을 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방금까지 그곳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주천운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사람 닮은 데가 없다!' 주천운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슴속에서 한기가 치밈을 의식했다. 괴인의 눈은 괴이하게도 녹광(綠光)이 흐르고 그의 안색은 그가 걸친 백포(白袍)보다 더욱 희니... 전신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소름 끼치는 한기뿐이었다. 주천운은 사람의 그런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다!' 주천운은 대번에 백포괴인이 누군지 직감했다. "그대는 누군가? 감히 천단에 함부로 난입하다니, 황법이 두렵지도 않은가?" "?" 뜻밖에도 당당한 주천운의 태도에 백포괴인의 눈에 어이없는 듯한 빛이 스쳐갔다. "약골치곤 대담하군..." 얼음을 뱉아내는 듯한 백포괴인의 음성은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감히 백주(白晝)에 천단에서 내가 누군지 알고 행패를 부리려는 것인가?" 주천운이 꾸짖듯 낭랑히 외쳤다. "우흐흐흐... 노부 앞에서 안색이 변치 않는 놈은 처음이군! 네가 철담대협(鐵膽大俠)을 만난 것을 안다!" 백포괴인은 음산히 웃으며 주천운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으..." 주천운은 무서운 살기가 자신을 덮쳐옴을 느끼고 신음하며 어쩔 수 없이 한걸음 물러났다. 백면서생인 그가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 것만 해도 장한 일이었다. 백포괴인은 강호인이 라면 누구나 안색이 질리고 마는 대마두인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웬 놈이 감히 전하께 무례를 범하려 하느냐? 물러나지 못할까?" 우렁찬 호통과 함께 무장(武將) 하나가 장검을 비껴들고 나타났다. 천단위장(天壇衛將) 주뢰 (周雷)였다. 주천운이 천단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을 찾아다니던 천단의 경비책임자인 주뢰가 나타난 것이다. 그 뒤에 경비무사 다섯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뒤따르고 있었다. 주천운의 눈에 한 가닥 안도의 빛이 스쳐갔다. 천단위장의 무예는 발군의 것이기에 그가 내심 안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으-악!" "흐-으-!" 하나 그 순간, 한 가닥 흑영(黑影)이 나타남과 함께 다섯의 경비무사들은 피보라 속에 쓰러 져갔다. 동시에 그 흑영은 천단위장을 덮치고 있었다. 가공할 속도, 위세였다. "흥!" 천단위장이 대경실색하며 검을 쪼개어내는 순간에 뼛골이 시릴 듯 차가운 냉소가 터짐과 함 께, 그는 가슴을 파고드는 처절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으-와악...!" 그가 믿을 수 없는 듯 두 눈을 부릅뜰 때, 그의 심장은 이미 그의 몸을 떠나고 있었다. 흑포괴인, 주천운의 앞에 선 백포괴인과 거의 분간할 수 없게 생긴 흑포괴인은 손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심장을 들고 있었다. 끔찍스럽게도 그 심장은 아직 헐떡거리고 있었다. "천단 내에는 경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흑포괴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심장을 바닥에 내버리며 감정없이 내뱉었다. '사람이... 아니로군!' 주천운은 소름이 끼쳤다. 그가 언제 그런 광경을 보았던가? 단숨에 여섯 명을 죽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흑포괴인, 그보다 그가 보여준 무공은 또 얼마 나 가공한가? "동천기에게 물건을 숨길 여유가 있었을 리 없지... 내놓아라!" 흑포괴인은 차갑게 외치며 주천운에게 다가왔다. '벌써... 그 노인이 변을 당했단 말인가?' 주천운은 철담대협 동천기가 바로 그 황의노인을 지칭함을 깨달았다. "무엇을 내놓으란 말인가? 감히 천단 내에서 살인을 하고 물건까지 뺏으려들다니!" 주천운은 당당히 꾸짖었다. "뼈다귀밖에 안 남은 놈이 간덩이가 부었군..." 흑포괴인은 어이가 없는 듯 코웃음 쳤다. 그의 눈에서 악독한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황족이다." 백포괴인이 차갑게 내뱉으며 나섰다. "황족?" "천단 내에서 활보함을 보면 알 수 있지! 좀 전에 죽은 놈도 전하라 불렀고..." 백포괴인은 냉막히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귀하가 철담대협에게 받은 물건은 무림인이 아니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오. 더구나 그 것의 원주인은 우리였소. 우리는 동천기에게 그것을 도둑맞은 후 한 달 간이나 그를 추격했 소. 돌려주시오!" 백포괴인은 손을 내밀었다. 주천운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이 자리를 간단히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명심하소서! 만약 그 물건이 악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전하는 그 죄를 감당하실 수 없을 것이오... 황의노인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들의 행색을 보아 결코 좋은 자들은 아니다. 그러나 내게는 이것을 지킬 힘이 없구나.' 주천운은 처음으로 자신이 약함을 발견했다. "좋소. 물건은 받았소. 하나, 지금 그것은 내게 없소." "없다고?" "그렇소. 노인이 중요한 물건이라기에 숨겨놓고 돌아가는 길..." "가소롭군! 품속을 뒤져본 후에도 그런 소리를 하는지 봐야겠다!" 흑포괴인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감히!" 주천운이 두 눈을 부릅떴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의 품속에 물건이 있으면 그를 죽여 흔적을 없애라! 황궁과 정면대립할 필요는 없다!" 차가운 외침과 함께 백의복면인이 유령과 같이 나타났다. "영주(令主)를 뵈옵니다!" 두 괴인은 백의복면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많지 않다. 속히 확인하라." 백의복면인은 냉담히 외쳤다. "예!" 흑포괴인이 번개처럼 주천운에게 덮쳐왔다. "감히 황궁을 건드리다니!" 돌연 굉량(宏量)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펑! "우-욱!" 한소리 굉음과 함께 흑포괴인은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말았다. "누구냐?" 흑포괴인은 기혈이 울렁거림을 느끼고 크게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노사...!" 주천운의 얼굴에 한 가닥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백의노인, 조금 전 주천운의 곁을 떠났던 그가 어느새 주천운의 앞에 막아서 있는 것이다. "전하, 중용(中庸)의 뜻을 아시겠소?" 백의노인은 주천운을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다. "..." 주천운은 할말이 없었다. 오늘처럼 자신이 무기력함을 느낀 적이 없었기에. 중용이란 어느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다는 뜻이 아니던가? 백의노인의 말은 그가 문에 치우쳐 있음을 꾸짖는 것이었다. "누구냐? 너는!" 백포괴인이 음산히 백의노인을 쏘아보았다. "어린애들이 노부를 알아볼 리 없지." 백의노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미친 늙은 놈!" "혓바닥이 없어도 아가리가 성한가 보겠다!" 흑, 백 두 괴인이 분노해 덮쳐왔다. 그들은 이미 구십이 넘은 노마두인 것이다. 분노한 공세는 보는 이의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기련노괴(祁連老怪)의 천잔마수(天殘魔手)로군..." 그러나 백의노인은 그들의 가공할 공세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기련노괴는 저들 기련쌍마(祁連雙魔)의 사부!' 백의노인의 중얼거림에 뒤에 서 있던 백의복면인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구십이 넘은 노 마두들을 상관치 않고 그들의 사부를 안다는 것은 그가 그 시대와 동배의 인물임을 뜻하는 것이다. "물러나라!" 그의 신형이 바람과 같이 하늘로 날아오를 때, 기련쌍마의 신형이 문득 굳어졌다. "백년잠수(百年潛修) 끝에 뽑은 검... 결국 피를 보고 마는군..." 백의노인은 약간 낮추었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찰칵! 맑은 음향과 함께 그의 손이 허리에 머물렀다. 백의노인의 허리에는 보자기에 싸인 검이 매어져 있었던 것이다. '피를 보다니? 검은 뽑지도...' 의아해 중얼거리던 주천운의 안색이 대변했다. 기련쌍마의 목에서 피가 솟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백의노인은 이미 기련쌍마를 베고 검을 검집에 넣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어... 어찌... 서 있는 짚단이라도 저렇게 할 수는 없을 터인데...' 풀썩! 풀썩! 백의복면인이 백의노인의 앞에 내려서는 순간, 기련쌍마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통나무와 같 이 나뒹굴었다. '사... 상상할 수도 없는 쾌검...' 백의복면인의 눈빛이 경계로 곤두섰다. "귀하는... 뉘시오?" 삐삐삐... 그 순간, 괴이한 새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백의복면인이 눈에 한 가닥 희색이 스쳐갔다. "전하를 본 이상 너도 살려둘 수는 없다!" 백의노인은 탄식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백의복면인은 전신이 터져나가는 듯한 검기에 노출됨을 깨달았다. "타-아앗!" 위기를 느낀 백의복면인은 벼락같이 선제공격했다. 파파-팟! 번개 같은 검광이 가공할 속도로 백의노인을 덮쳤다. 백의노인의 몸이 기우뚱했다. 그의 손에서 소리도 없이 검광이 불을 뿜었다. 쨍! "으-윽!"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백의복면인이 용수철과 같이 튕겨졌다. "크으... 이럴 수...? 분... 명 내가 먼저 발검..." 백의복면인이 피가 솟아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그의 검은 이미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노부가 너를 얕보았군!" 백의노인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쨍! "으-악!" 반동강의 검이 부러지며 복면인의 목에서 다시 피가 솟았다. 찰칵! 백의노인의 검은 이미 검집에 들어가고 있었다. '보... 이지도 않는다...! 저토록 자연스러울 수가?' 삐리리... 삐삐... 주천운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때, 좌우에서 예의 새소리가 들려왔다. 백의노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들이 이토록 빠르다니...! 전하, 우선 이곳을 피해야 하겠소이다." 주천운이 대답도 하기 전에 그의 몸은 구름을 타고 있었다. * * * "아직도 남을 이기지 않겠다는 생각, 변함이 없으시오이까?" "..." 백의노인의 물음에 주천운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대답을 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心]... 전하는 이미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음을 아셨소이다. 이기고 짐 또한 마음이오 이다." 하늘은 변함없이 푸르다. 하지만 그 하늘을 보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다르다. "전하가 남을 누를 힘을 가지고도 남을 누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仁)이오... 그러나!" 백의노인의 음성이 주천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오늘, 전하의 약(弱)함으로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몇 죽었소이다... 그것은 전하의 고집 때 문이니 곧 불의(不義)외다!" 주천운은 푸른 하늘을 쳐다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나는 대명(大明) 친왕(親王)의 몸... 그런데도 굳이 무(武)를 배워 손에 피를 묻혀야 하오이 까?" 주천운의 굳게 다물어졌던 입술에서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백의노인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전하에게 힘이 있었다면 아무도, 아무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오. 진정한 무(武)란 이 렇듯 피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피를 막는 것이오!" 눈〔眼〕! 주천운의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푸른 하늘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세찬 바람에 마구 흩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거대한 변화(變化)를 예고하는 듯했다. 그의 발 아래는 북경성이 있다. 팔보산(八寶山). 주천운이 지금 있는 곳은 북경성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팔보산 정상이었다. 북경성을 굽어본다. 그것은 곧 천하를 굽어보는 것이다. 주천운의 눈이 빛나고 그의 전신에 힘이 차올랐다. 그것은 용틀임이었다. 지금의 그를 보고 누가 그를 일러 책벌레라 하겠는가?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무도(武道)를 가르쳐 주소서." 주천운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의 무릎은 어떤 무형의 힘에 의해 굽혀지지 않았다. "전하의 절을 받을 인물은 천하에 없소. 노부는 다만 전하에게 노부의 평생 심득(心得)을 전 할 수 있음을 하늘에 감사할 뿐이오." "그냥 모든 것을 전수하시겠단 말씀이시오?" 백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로 하여 노부의 심득이 실전되지 않고 전하에게서 빛을 발한다면 더 무엇을 바라리 까?" "명호... 를 듣고 싶습니다." 백의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쳐갔다. "명호를 쓰지 않은 지 이미 백년... 기억조차 나지 않으나 아마 남들이 만패검성(萬敗劍聖)이 라 부른 듯하오." "만... 패검성?" 주천운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쳐갔다. 만 번 패한 검의 성인(聖人)... 모순된 이름이 아닌가? 백년 전. 무림에는 절대쌍검(絶代雙劍)이 있었다. 만패검성(萬敗劍聖) 종리관(鍾離寬). 평생을 오직 검을 위해 산 사람, 그는 만 번을 싸웠고 만 번을 패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검성이라 불렀다. 그가 싸운 사람 중 단 하나도 고수 아님이 없었으나 그는 살인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가 공할 고수와 부딪쳐도 그 자신도 상처만 입을 뿐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 절강고수(絶强高手) 와 부딪쳐도 일반고수와 부딪쳐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상승검마(常勝劍魔) 하후뢰(夏候雷). 그도 검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싸울 때마다 이긴 명실공히 검도 최강고수였다. 하지만 그는 검마라 불렸다. 그와 싸운 사람들은 죽지 않으면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싸우면 이기는 자와 싸우면 지는 자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도 기이한 일, 그런데다 그 두 사람은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백년, 그 긴 세월 동안 세인(世人)의 기억에서 잊혀진 만패검성, 그가 지금 주천운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노부가 전하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별로 많지 않소... 그 동안에 얼마나 얻을 수 있 는가는 전하에게 달렸소." "그 시간이 얼마나 되오이까?" 하늘을 쳐다본 만패검성이 입을 열었다. "세 시진 남짓이오..." "겨우 세 시진? 무슨 일이기에..." "곧 아시게 되리라. 시간이 없으니 지금부터 시작하겠소." 만패검성은 천천히 검을 잡았다. 그의 검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검을 잡자 그의 모습은 그대로 태산이 되었다. "노사께서 만 번을 패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주천운은 그의 모습을 보고 신음하듯 말했다. 만패검성은 빙그레 웃었다. "노부가 사람을 죽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고 이긴 것도 오늘이 처음이라면 전하는 믿으시겠 소?" "믿으오리다!" 주천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때 만패검성은 정색을 했다. "노부는 평생을 검에 바쳐왔고, 전하께 전수할 것도 이 검뿐이오. 검은 백병지왕(白兵之王) 이라 배우기는 쉬우나 이루기는 어려운 병기요..." 그는 감회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노부는 검에 뜻을 두고 그 묘(妙)를 찾기 위해 만 번을 싸웠소... 비록 그때마다 졌지만 노 부는 한 가지씩을 깨달았소!" 만패검성 종리관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시험키 위해 스스로 상대의 검에 뛰어들었던 것이 고, 세인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수십 수백 번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것이다. "결국 노부는 검에 있어 빠름〔快〕이 변화보다 앞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처 음 발검에서부터 이루어짐을 깨달았소!" 그로부터 만패검성은 백년 잠수에 들어간 것이다. "노부는 천하검수(天下劍手)들과의 대적경험을 토대로 연구하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발검 자세가 모두 삼만 이천세 가지에 이름을 알았소..." '삼만 이천... 그렇게나?' 주천운의 놀람과는 상관없이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노부는 그 자세 모두에 조금씩의 무리가 있음을 알고 지난 세월 동안 거기에 만 칠천구십 의 결점을 보강했소." 만패검성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부는 상대에 따라 그것들을 삼백예순다섯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소!" 만패검성은 검을 고쳐쥐었다. "삼백육십오세(三百六十五勢)! 이것은 단 일초(一招) 안에 모두 녹아들어 있소! 언제 어느 때라도 가장 자연스럽게, 가장 빠르게 적을 공격할 수 있으니 이를 일러 여의섬(如意閃)이라 하오!" 팟! 팟! 검(劍)! 일단 만패검성의 손에 검이 들리자, 그것은 검이 아니라 하나의 섬광(閃光)이었다. 주천운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만패검성의 움직임을 노려보고 있었다. "명심하시오! 노부가 전하에게 시범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단 한번뿐임을!" 만패검성의 다짐이 뇌리에 쟁쟁하기에. "제칠십구세(第七十九勢) 벽뢰세(劈雷勢)!" 팟! "제백구십세(第百九十勢), 관홍세(貫虹勢)!" "제이백팔십구세(第二百八十九勢) 분광세(分光勢)!" 파-팟! 만패검성 종리관은 피곤한 기색으로 검을 거두고 있었다. "다 보셨소?" "예." 주천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몰랐다. 알지 못했다. 만패검성과 같은 고수가 시범 한 번 보이고 피곤을 느낄 수 없다 는 것을. "다 기억하실 수 있으시겠소?" "삼백육십오세까지는, 다만 거기 있는 변화만은 아직 완전히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나 될 줄이야!' 만패검성은 도저히 믿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다. "여의섬(如意閃)의 근간(根幹)은 모두 삼백육십오세, 그것만 기억한다면 천하의 재지(才智)로 써 거기에 따른 변화는 충분히 체득하실 수 있을 것이오..." 문득 하늘을 쳐다본 만패검성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시간이 없군... 실례하오!" "!" 주천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만패검성에게 제압되어 쓰러져버렸다. "?" 주천운은 내심 크게 놀랐으나 아무 말도 없이 의혹 어린 음성으로 만패검성을 올려다보았 다. '과연... 다르다!' 만패검성은 속으로 다시 한번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노부는 전하의 근골을 바꾸어주려고 하오. 이것은 노부가 전하를 만났던 조그마 한 선물이오. 고통스럽겠지만 결코 비명을 질러서는 아니 되오!" 만패검성은 주천운을 반듯이 누이고 그 앞에 단정히 앉았다. 다음 순간, 그의 양손이 투명히 변하기 시작했다. '윽! 으으윽...' 그의 손이 닿기 시작하자 주천운은 몸서리쳐지는 고통에 치를 떨었다. 전신의 뼈가 모조리 부서져나가고 근육이 갈기갈기 찢겨져나가는 듯했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터지고 전신의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툭툭 불거졌다. 극통(劇痛)! 그것은 황궁에서 고이 자란 주천운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피가 흐를 뿐... 신음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가닥 용광로의 화염과 같은 무서운 기운이 주천운의 온몸을 뒤덮는 순간, 마침내 그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역근세수(易筋洗髓). 그의 온몸은 최고의 고수가 자신의 모든 힘을 남김없이 쏟아부어야 하는 개정벌모세수대법 (開頂伐毛洗髓大法)에 의해 완전히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주천운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제 3 장 구천신마조화경(九天神魔造化經) <전하, 노부는 백년잠수(百年潛修) 끝에 깨달은 여의섬(如意閃)을 이을 인재를 찾다가 절망 했었소... 전인은 찾지 못했는데 노부의 수명이 다 되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오. 전하께서 이 글을 볼 때면 노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오... 시간이 없다고 한 말 의 뜻을 이제 아시겠소?> "그, 그럼...!" 주천운은 그의 행동이 그토록 급박했던 까닭을 알게 되었다. 천기각 밖에는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한 기인의 종말을 의미하듯... 주천운은 지금 자신의 거처인 천기각에서 만패검성이 남긴 글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슬퍼 마시오. 노부는 이제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소. 노부의 필생 정화인 여의섬은 전하께 이어졌고, 무덤 속에서 썩어질 육신의 남은 힘으로 전 하에게 상승내공의 기초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오.> 주천운의 눈은 전보다 더욱 맑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자금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온몸이 전과 다름을 깨닫고 있었다. 전신이 가볍고도 활력이 넘쳤다. 근육에 탱탱한 힘이 깃들여 있었던 것이다. <내가진기(內家眞氣)를 다스릴 수 있게 되면 전하는 노부가 남긴 백년공력을 활용할 수 있 을 것이오. 전하에게 또 다른 인연이 있음을 알기에 내공심법은 남기지 않았소. 천단에서 만난 자들에 유의하시오. 노부는 강호에서 신비한 세력을 발견했는데 만약 그들이 그 세력과 관계있다면 천하는 매우 중대한 국면을 맞게 될 것이오... 이제, 천하는 전하에게 달렸소! 노부의 육신은 죽으나... 정신은 전하와 함께 할 것이오. 노부의 만패(萬敗)가 전하에게서 만승(萬勝)으로 빛나길 바라며... 종리관 유필(遺筆).> 불〔火〕! 불꽃이 춤을 춘다. 주천운은 단정히 앉아 불타는 만패검성의 서찰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사... 당신과 나의 만남은 짧았으나, 당신은 내게 너무나도 큰 흔적을 남기고 가셨소. 들 어주시오! 나, 주천운은 노사를 마음속의 스승으로 모시겠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미소 짓는 만패검성 종리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아니, 삼백육십 오세(三百六十五勢)의 여의섬(如意閃)을 전개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스르르... 만패검성의 서찰을 사르던 불꽃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환영도 스러졌다. "일단 무(武)에 입문한 이상... 절대일인자(絶代一人者)가 되리라!" 주천운은 재로 변한 만패검성의 서찰에서 천천히 눈을 떼며 중얼거렸다. 겨우 몇 시진 전에 검법 일초를 전수받은 사람치고는 너무 광오한 말.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대혜왕 주천운인 것이다. 그리고... 단 며칠 사이에 그는 다른 사람이 상상치도 못할 탈바꿈을 하게 된다. 침향목갑(沈香木匣). 탁자 위에서 그 목갑은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주천운의 앞에서 죽어간 사람이 벌써 몇이던가? "이 작은 상자에 무엇이 있기에 천하를 지배할 힘이 있다는 것인가?" 주천운은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달-각! 고리를 벗기자 부드러운 음향이 들리며 목갑이 열렸다. "으음...!" 목갑 속을 들여다본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마기(魔氣)! 그것은 소름 끼치도록 사악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주천운이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에 그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대신, 목갑의 주위에는 한 가닥 음산하기조차 한 묵광(墨光)이 담담히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목갑의 속에는 일곱 치 가량의 기이하도록 검은 장방형(長方形;직사각형)의 물건이 들어 있 었다. "이게 뭐지?" 주천운은 의아한 빛으로 물건을 집어들었다. "금(琴)과 닮았는데...?" 주천운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침향목갑에서 나온 장방형의 물건은 길이가 일곱 치에 전체는 괴이한 문양(文樣)으로 뒤덮 여 있고, 양끝에는 흉측한 아수라상(阿修羅像)이 팔을 쳐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수라상의 팔과 팔은 오광(烏光)이 흐르는 현(弦)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모양은 심히 괴이하지만 그 형태는 금(琴)인 듯 보였다. "하지만... 금이라면... 어떻게 줄(弦)이 하나밖에 없단 말인가?" 주천운은 음률(音律)의 대가(大家)였고, 특히, 금예(琴藝)는 당대 최고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삼현, 사현, 오현(五弦)... 거기에 문무현(文武弦)을 더한 칠현금(七弦琴)이 당대(唐代)에 이 르러 완성되었으나 단현(單弦)은 들어본 적도 없다. 더구나 이렇게 작아서야..." 고개를 숙이며 무심결에 줄을 퉁겨본 주천운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뜻밖에도 줄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동뿐 아니라 조그마한 소리조차 없었다. "이럴 리가?" 주천운은 힘껏 줄을 퉁겼다. 틱! 그러나 손가락만 끊어질 듯 아플 뿐 거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줄도 그대로 여전히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어떤 손인가? 금예(琴藝)로 단련된 손이 아니던가. "괴이하군... 역시 범상한 물건이 아니라 어떤 내력이 있는 모양이다!" 주천운은 세밀히 그것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무가 아니다. 지심(地心)에 있다는 殆좋?墨血玉晶)... 그리고 이 줄은... 천잠사(天 絲)... 아니다. 금정사(金精絲)... 그것도 아니고..." 주천운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황궁보고(皇宮寶庫)에는 천하의 온갖 진귀재보(珍貴財寶)가 가득 차 있었다. 그 기보(奇寶) 들이 어떻게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다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바로 주천운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대혜왕(大慧王)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이 괴이한 금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천잠의 부드러움... 금정의 질김, 강모(鋼母)의 강함... 이 모든 것이 이 줄〔弦〕 하나에 있 다..." 신음하듯 중얼거리던 주천운의 눈에 기광(奇光)이 스쳐갔다. "글자로군!" <현천마금(玄天魔琴)>. 그 금의 밑바닥에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과연 금이군! 이 필체의 웅혼(雄渾)함이나 강유가 겸비되어 가공이 불가능하다는 목혈옥정 을 이토록 정교히 조각할 수 있는 것이나, 철담대협의 말... 그 모든 것으로 보아 이 현천마 금이 보통 물건이 아님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주천운은 조용히 현천마금을 내려다보았다. "마금... 그 이름에 어울리도록 보면 볼수록 마기(魔氣)가 감도는 물건이다..." 주천운은 다시금 금현(琴弦)을 퉁겨보았다. 틱! 또다시 손가락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아무리 힘을 써도 소용이 없군... 하긴 소리가 나도 한 줄로써 무슨 연주를 할 수 있단 말 인가? 도대체..." 주천운은 현천마금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기에 천하를 지배할 힘이...!" 갑자기 주천운의 전신이 터질 듯 긴장되었다. 어둠은 천기각의 밖에도 안에도 내리고 있었고, 그 어둠을 쫓기 위해 주천운의 좌우에는 굵 은 용형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촛불에 비친 현천마금의 문양(文樣)을 보라! 주천운의 음성이 흥분으로 떨렸다. 주천운의 떨리는 손이 현천마금을 받쳐들었다. 틀림없었다. 현천마금을 뒤덮다시피 한 괴기한 문양은 도장 새기듯 반대로 된 회회문(回回文;아라비아문 자)이었다. 그것도 그냥 글자가 아니라 도형화된 회회문! 회회문이란 글자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당시의 현실. 그것을 누가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대혜왕 주천운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주천운은 조심스레 현천마금에서 탁본(拓本)을 떠냈다. 똑바로 된 회회문이 천천히 드러났다. 쿵! 쿵! 주천운의 가슴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뛰고 있었다. 그는 배운다는 데에는 무 서운 정열(情熱)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단 시작을 하면 침식을 잊는 열성과 끈기를 그는 가 지고 있었다. <현천마라금보(玄天魔羅琴譜)>! 회회문의 글자가 눈으로 쏘아져들어왔다. "금보? 그렇다면 이것이 정녕 퉁겨지는 금이란 말인가? 퉁겨져도 한 줄로 어떻게..." 주천운의 눈이 커졌다. <제일음(第一音) 천심전(穿心箭). 금을 퉁기는 순간, 백 장 밖의 쇳덩어리라도 그 속이 가루로 변하리라! 그것은 목표물에 소 리도 없이 이르니, 그를 일러 천심전(穿心箭)이라 하노라!> "믿을 수 없는... 소리도 내지 않고 백 장 밖의 것을... 겉에는 흔적조차 없이 내부만 가루로 만든다고...?" 주천운의 눈이 더 커졌다. <제이음(第二音) 탈심혼(奪心魂). 한소리 금음(琴音)이 울려퍼지는 순간, 그 소리를 듣는 자는 현천마금의 노예로 변하리라! 마음〔心〕과 혼(魂)을 뺏으니 이를 일컬어 탈심혼(奪心魂)이라 하리라!> "신지(神知)를 빼앗아 종으로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원하는 대로?" "전하! 이 물건은 천하를 지배할 힘을 가졌소!" 철담대협 동천기의 외침이 주천운의 뇌리를 다시금 강타했다. <제삼음(第三音) 사멸령(死滅靈)! 무릇 산 것이 살아갈 수 있음은 생명(生命)이 있기 때문이라. 그러나, 금성(琴聲)이 미치는 곳에 살아남는 것은 없으리라! 그 무엇도 저주의 소리를 벗어 날 수 없으니, 그렇기에 이를 사멸령(死滅靈)이라 칭하노라!> "지독한... 마치 생명이 살아 있음을 저주해 만들어놓은 것 같구나." 주천운은 몸서리를 치며 현천마금을 쳐다보았다. 그 조그만 것에 그런 가공(可恐)할 위력이 있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단음(單音;한 소리) 세 가지, 그것의 위력은 가히 천하를 지배할 지경에 이르고 있지 않는 가? 현천마라금보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러나 현천마라금보를 보는 주천운의 표정은 심각하기 이를데 없었다. "과연 이것은 익혀야 하는가? 이것은 너무도 살기가 짙다..." 살기 정도가 아니었다. 생을 저주하는 것과도 같은 저주가 현천마라금보에 담겨 있었다. "전하! 마음이오이다! 힘〔力〕이란 쓰기에 달린 것이오이다..." 고뇌하는 주천운의 귀에 문득 만패검성의 외침이 들리는 듯 했다. "익히리라! 무엇이든 배우리라!" 주천운의 결심은 드디어 완전히 굳어졌다. "천심전... 이 제일음을 내기 위해서는 한 순간에 열두 번 손이 움직이고 스물 네 번 손을 떨어야 한다. 이것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때, 천심전은 가공할 위력을 발하게 된다!" 주천운은 현천마라금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단 한 줄, 단 한 손짓! 단 한 줄기의 현천마라금을 뜯기 위한 단 한 손짓에 그토록 심오함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제이음, 제삼음은 더욱 복잡해지며, 전신의 모든 정력(精力)이 거기에 집중되는 것이다. 주천운은 금의 대행가(大行家)! 거기다 그의 무쌍(無雙)한 재지(才智)는 남이 십 년 걸릴 것을 하루로 앞당기고도 남음이 있었다. "음공(音功)에 그토록 엄청난 위력이 있을 수 있을까?" 주천운은 긴장된 표정으로 전신의 신경을 손끝에 집중한 채 현천마라금을 퉁겼다. 순간, 띵! "으-윽!" 주천운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피〔血〕! 금이 퉁겨지기는커녕 그의 손가락끝이 터져나가며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방법은... 잘못되지 않았다! 다만, 이 현을 퉁겨낼 힘이 내 손에 없을 뿐이다!" 주천운은 단정하듯 중얼거렸다. 그것은 틀림없었다. 현천마금은 절대신기(絶代神器)! 일반인은 평생을 노력해도 그 조그만 금의 현을 단 반 치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공력... 내가공력이 필요하다! 이런 류의 음공은 지고(至高)한 내가수법(內家手法)임을 들은 적이 있다!" 비록 연습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무공에 대한 대강은 듣고 있는 것이 주천운이었다. 주천운의 눈에 사방에 가득 찬 책이 들어왔다. 그것은 수만 권에 이르는 엄청난 양이었다. "내게는 노사가 남겨준 백년 공력이 있다... 운용방법만 알면 현천마금을 탄주할 수 있다!" 주천운은 벌떡 일어섰다. 아무도 모르리라! 책을 목숨보다 아낀다는 주천운의 서재에 먼지 앉고, 벌레먹어가는 책이 있음을. 그 책의 가 치는 더욱 모르리라! 그것들이 절세의 무공비급임을 누가 상상이라도 하랴... <산서 쾌도문 도보(山西 快刀門 刀譜)>. <대라보급(大羅寶 )>. <천뢰복마검경(天 伏魔劍經)>. <독종비해(毒宗秘解)>. <만류귀원록(萬流歸元錄)>. <복호금강권보(伏虎金剛拳譜)>... 주천운의 손을 거쳐 하나씩 쌓여지고 있는 고서(古書)들은 이미 이십여 권에 이르고 있었고 하나같이 보기 드문 무공비급이었다. 순식간에 서탁 위에는 걸레 같은 책들이 삼십 권 가량 이나 쌓였다. "벌써... 다란 말인가?" 주천운은 보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어 책 위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사심귀진(邪心鬼眞)>. 그것으로서 비급의 수효는 정확히 서른네 권에 이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주천운은 그것을 찾아 우선 빼놓은 것이 아니고 한 번 쭉 본 후에 내려놓고 있었 던 것이다. "지금껏 본 서른네 권의 비급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보이는 내가기공은 모두 일곱이 다." 주천운은 생각을 더듬었다. 믿지 못할 일! 무공에 문외한인 주천운이 슬쩍슬쩍 한번씩 스쳐본 무공비급 서른네 권의 내 용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대라무위신공(大羅無爲神功)은 도가오대현공(道家五大玄功)의 하나이다. 삼백 년 전 대라진 인(大羅眞人)은 이것으로 도가제일고수가 되었다. 반야대선공(般若大禪功)은 소림 칠대신공(七大神功)의 제이위이며 불가 십대선공(佛家十大禪 功)의 하나이며, 강유(剛柔)가 겸비된 항마신공(降魔神功)이다. 혈영수라강(血影修羅 )의 핏빛 광채가 이글거리는 곳에 남아 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혈영 신마(血影神魔)는 이것으로 마도제일고수로 일컬어졌으나, 종래에는 그 악독한 품성으로 인 해 천하공적(天下共敵)으로 몰려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그것이 지금 천기각에 있으니... 마도칠대공력(魔道七大功力)의 하나였다. 만류귀원신공(萬流歸元神功)은 유문제일기(儒門第一奇)라던 만류신유(萬流神儒)의 성명절학 (盛名絶學)이며, 속가팔대신공(俗家八大神功)의 하나다. 만겁화혈독공(萬劫化血毒功)은 만겁독존(萬劫毒尊)을 천하제일의 독인(毒人)으로 만든 독공 이다. 천하구대독공(天下九大毒功) 중에 실전된 사대독공 중 가장 강한 독공이기도 하다. 도반귀원신공(導反歸元神功)이야말로 악독무비한 사심귀존(邪心鬼尊)이 남긴 괴이(怪異)한 무공이었다. 남의 힘을 흐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공(邪功)! 사심귀존은 이것으로 오백 년 전에 무림에 군림했었다. 사도육대신공(邪道六大神功)의 하나 이다. 천뢰복마신공(天雷伏魔神功)은 천뢰복마검법을 펼치기 위해 검법에 포함된 절세신공이다. 비 록 속가팔대신공에 들지는 못했으나 그 강력한 위세는 가히 경천지세(驚天之勢)! 천뢰검존 (天雷劍尊)의 이 무적신공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악독하기로는 혈영수라강이나... 강력하기로는 천뢰복마신공과 만겁화혈독공이다. 반야대선 공은 그것에 비해 위력은 뛰어나지 못해도 몸을 지키는 데는 가장 좋다. 도반귀원신공은 사 공이나 쓸모가 많다..." 주천운은 중얼거리며 천기각 서제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무엇을 먼저 해볼까 생각하면서 또 남은 비급이 없는가 살피는 것이다. 그가 생각을 굴리는 사이에 찾아놓은 무공비급은 다시 이십 권에 이르고 있으나, 그것은 지금의 주천운에게는 필요가 없는 일반병서(一般兵書)와 정도가 낮은 것들뿐이었다. 그때, 막 무예총람(武藝總覽)을 보고 실망해 내려놓던 주천운의 눈이 빛을 발했다. 무예총람 을 꺼낸 그 뒤쪽에 지독히도 낡아 표지 글자조차 안 보이는 양피책자가 있지 않는가? "이건 나도 못 본 것인 것 같은데?" 주천운이 의아한 빛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서재에 어느 책이 어디 있는지까지 기억하고 있는 그였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책이 있었다 니... 주천운은 기이한 기대감이 가슴속에서 차오름을 느꼈다. 책은 기독히 낡아 곧 부스러질 지경이었다. 조심스레 먼지를 털어내자 겉장에 희미한 글자가 드러났다. 그것은 갑골문(甲骨文)이었다. <구천신마조화경(九天神魔造化經)>! 파삭-! 종이 같지는 않지만 너무 오래 되어 낡은 종잇장처럼 된 그것은 장이 넘어가자 삭아 부서져 내렸다. "지독히 보관 상태가 불량하군..." <신마지음(神魔之音)이 합쳐지니 풍운조화(風雲造化)가 거기 있으며, 능치 못할 일이 없노 라! 그대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 순간 책을 덮으라! 평범한 인간은 구천신마조화경을 익힐 수도 볼 자격도 없다! 망령되이 욕심을 부린다면 하늘의 저주 있으리니...> 그 뒤에도 글은 더 있는 듯했으나 훼손되어 더 이상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단한 자부심이군... 누가 어떤 것을 남겼는지 반드시 보아야겠다!" 주천운은 조심스레 장을 넘기다 멈칫했다. 안의 글은 앞의 갑골문과는 틀리게 범어(梵語)가 아닌가? <신부(神部). 천지간의 이치(理致)를 다스리니 이를 일러 신음(神音)이라 한다. 제일조(第一調) 만생휘(萬生輝)! 한소리 금음(琴音)에 천지간의 기(氣)를 실어 만물(萬物)의 생육(生育)을 도우니, 죽어가던 자도 살아나리라! 이를 일러 만생휘(萬生輝)라 하노라!> "금? 이것도 금이란 말인가?" 주천운은 무엇인지 모를 예감이 강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감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 현천마금이 튀어들 듯이 보여왔다. <제이조(第二調) 천상화(天祥和). 천하에 평화(平和)를 심고자 하노라. 신운(神韻)이 천지에 가득 차니, 적도 친구도 없도다. 흉인(兇人)이 살심(殺心)을 버리고 맹수가 토끼를 등에 태우니 그를 천상화(天祥和)로 칭하 노라! 제삼조(第三調) 단심뢰(丹心雷). 천하의 마(魔)를 멸(滅)하리라! 천지간에 가장 정대(正大)한 마음으로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氣)을 불러일으키니, 그 무 엇도 견뎌내지 못하리라! 그것을 단심뢰(丹心雷)로 명명(命名)한다!> "이, 이것은 악보(樂譜)다! 그것도... 금보(琴譜)다! 그, 그러나... 너무도 상반된다! 현천마라금 보와..." 주천운은 내심의 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부(神部)의 내용은 너무도 현천마라금보와 흡사하면서도 정반대가 아닌가? 천지간의 이치 를 움직이는 신부... 과연 그것은 평범한 인간이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장을 넘기던 주천운의 손은 그만 석상이 되어 굳어지고 말았다. <마부(魔部). 천지간의 가장 극렬(極烈)한 기운을 모아 마금(魔琴)을 창조하니 생령(生靈)이 공포로 떨도 다!> "회, 회회문(回回文)이다! 그렇다면 마부란 현천마라금보란 말인가?" 충격(衝擊)! 그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충격이었다. <신부절학(神部絶學)은 온유정대(溫柔正大) 하나 마금기예(魔琴奇藝)는 극맹패도(極猛覇道) 하다. 그리하여 마금에 한 가지 제약을 가했으니, 그것은 현천백옥수(玄天白玉手)를 연성치 않고는 마금의 위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게 함이다. 현천백옥수(玄天白玉手)! 화후(火候)에 따라 점점 더 손이 아름답게 피고, 드디어는 백옥을 깎아만든 여인의 손과 같 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그 손은 금강(金剛)과 같아져서 그 무엇으로도 상해(傷害)할 수 없 다.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마금의 만령사(萬靈絲)를 퉁기기 위해 만들어진 신공(神功)이다. 제일음(第一音) 천심전(穿心箭)! 금을 퉁기는 순간...> 오오! 마부(魔部)! 그것은 정녕 믿을 수 없게도 현천마라금보였다. 어찌하여 그것이, 그 가공무쌍한 비급이 여기서 썩어가고 있었더란 말인가? "으으... 이것을 하필 오늘 보게 되다니... 이것이 정말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가?" 주천운은 신음했다. 그것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공교로운 인연의 안배가 아닌가! 구천신마조화경은 아직도 몇 장이 더 남아 있었다. <신마부(神魔部). 신마지성(神魔之聲)이 어울려 현천지음(玄天之音)이 완성되니, 천지조화(天地造化)가 거기에 서 비롯되도다! 능(能)치 못할 일이 없으니 하늘의 힘을 잇지 않은 자는 망령되이 근접치 말라! 보아도 알 수 없음이오. 노력해도 터득할 수 없도다! 구천신마조화곡(九天神魔造化曲)! 신마양금(神魔兩琴)이 합쳐질 때 비로소 구천신마조화곡이 탄주(彈奏) 될 수 있으리라! 그대가 원한다면 세상은 극락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풍운조화(風雲造化)가 그대의 마음이며 호풍환우(呼風喚雨)가 그대의 의중(意中)에 있도다. 신마지곡(神魔之曲)이 미치는 곳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그대를 거역치 못하리라! 그대는, 곧 하늘이다!> 툭- 주천운의 손에서 구천신마조화경이 떨어졌다. "내가 이것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과연 인간에게서 이런 능력이 발휘될 수가 있단 말인 가..." 주천운은 경악이 지나쳐 전율(戰慄)했다. 그가 누구인가? 천하의 대혜왕(大慧王)이 아니던가. 한번 보면 모든 것을 기억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면 모든 것을 터득한다는 절대기재(絶代奇 才)가 바로 그인 것이다. 그런데도 구천신마조화곡은 마치 거대한, 넘을 수 없는 절벽과 같 이 느껴지는 것이다. 반드시 넘어가야만 하는데, 그 눈앞으로 거대한 절벽이, 그것도 깍아지른 절벽이 놓여 있을 때에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러하리라. "참으로 허황된 것 같으나... 결코 거짓은 아니다! 현천마금 외에 또 하나 현천신금(玄天神 琴)이 있는 모양..." 모르리라! 아무도 모르리라! 무림삼대천음(武林三大天音)의 하나인 현천고금(玄天古琴)이 신마양금(神魔兩琴)으로 나뉘어 있음을... 주천운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구천신마조화경이 들어왔다. "현천신금이 있다면... 그때 비로소 구천신마조화곡을 터득할 수 있으리라!" 정확(正確)했다! 그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마금의 탄주법과 신금의 연주법을 안 연후에 터득할 수 있는 것이 구천신마조화곡인 것이 다. 그것은 바로 신마조화지곡(神魔造化之曲)이기에. 주천운이 설사 지금보다 십 배 나은 능 력을 지닌다 해도 마금만으로는 구천신마조화곡을 터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필요없으리라! 현천마금의 삼음(三音)으로도 천하를 굽어보고 남음이 있다!" 주천운은 조심스레 구천신마조화경을 집어들었다. 와스스- 책이 산산이 부스러졌다. "이... 이런...!" 주천운은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너무도 낡은 책이기에 땅에 떨어지는 충격조차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마치 주천운이 보았 기에 의무를 다한 듯 구천신마조화경은 없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도 좋겠지. 세상에 남아 있으면 그만큼 번거로워질 테니까..." 중얼거리던 주천운이 흠칫 그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구천신마조하경의 잔해에서 보지 못했던 글씨 몇이 어렴풋이 보였던 것이다. "후회... 일시의 객기... 신마지곡 창조... 하늘의 노여움... 琴)... 성(聖)... 자미선자(紫微仙子)... 오해... 경(磬)... 흉계 지은 사람이 남긴 후기(後記) 같은데 이래가지고는 무슨 소린지 알 수 가 없군..." 주천운은 고개를 저었다. "현천백옥수는 수법 이전에 절강무적(絶强無敵)의 기공(奇功)이다." 주천운은 서제의 서탁에 단정히 앉아 현천백옥수의 구결을 떠올리고 있었다. 반응이 없다. 한 번, 두 번... 주천운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할 때, 마침내 그의 단전이 진동하며 한 가닥 진기 (眞氣)가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진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개울은 시내가 되고 시내는 강이 되며 강은 노도(怒濤)가 되었다. 손〔手〕! 주천운의 손이 시간이 감에 따라 차츰 투명해지고 있었다. 감겼던 주천운의 눈이 떠졌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좀더 시일이 필요하다. 결국 현천백옥수는 내공심법은 아니었다..." 주천운은 맑은 광채가 은은히 어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오륙 성은 되는 경지리라." 주천운은 문득 현천마금을 잡았다. 열린 창밖으로 멀리 울창한 그늘을 자랑하는 노송이 보여왔다. "한번 시험해보리라!" 주천운은 노송을 보며 한 가닥 미소를 떠올렸다. 일순, 긴장되었던 것 같은 그의 손이 마치 환영(幻影)과 같이 움직이며 현천마금의 현을 퉁 겼다. 디-이잉... 거의 들리지도 않는 음향과 함께 금현(琴弦)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움직이는군!" 기쁨에 차 소리치던 주천운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하늘〔天色〕을 본 것이다. "큰일이다! 삼경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겠는데!" 주천운의 모습이 황급히 창문에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창가에서 사라진 순간이었다. "으으..." 창문과 마주보고 있던 노송에서 쥐어짜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스르르- 동시에 노송 위에서 한 인영이 소리도 없이 땅에 내려섰다. "크으으... 심맥이 진동되고... 오장육... 부가 뒤틀렸다! 십... 여 장 밖에서 이토록 엄청난 위 력을... 발할 수 있다니... 무, 무서운..." 인영은 비틀거리며 노송에 기댔다. 뜻밖에도 주천운이 시험 삼아 노송에 전개한 천심전(穿心箭)에 상해를 입은 자가 있는 것이 다. "오... 오황야가 그... 토록 무서... 운 고수일 줄이... 야! 아... 알려... 야 한다...!" 비틀거리며 막 몸을 날리려던 인영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앞에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조용히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한 것이 다. "누-?" 인영의 눈이 채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경악(驚愕), 불신(不信)... 그의 목을 꿰뚫었던 칼이 빠져나가자 인영의 몸은 썩은 나무토막과 같이 나뒹굴었다. "백년... 지난 백년간을 은둔 수도했건만 결국은 또 살인을 하고 말았군..." 담담히 중얼거리며 새로 나타난 인영이 천기각을 바라보았다. "전하... 용은 가만히 있어도 구름이 찾아온다오. 당신은 결국... 시비를 벗어나지 못하오..." 인영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星〕! 수많은 별들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노부는 알고 있소. 전하가 평범히 살 수 없음을, 당신은 천하를 구하기 위해... 하늘의 선택 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오." 달을 가렸던 구름이 갈라지며 밝은 빛이 인영의 모습을 비추었다. 노인(老人)이다. 달빛 아래 드러난 노인의 모습의 굽은 등이 유난히 눈에 드러나 보였다. 제 4 장 호국지존(護國至尊)의 탄생(誕生) 벽월호(碧月湖)는 자금성 안쪽 태자궁(太子宮) 옆에 위치한 인공호이다. 북해(北海)에 이어 진 이 벽월호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태자가 황제가 되고 태자궁의 주인이 없는 지금, 미려(美麗)한 벽월호의 경치는 감상 하는 사람이 없어 아름답다기보다 오히려 쓸쓸해 보였다. 벽월호에는 관월정(觀月亭)이 세워져 있고, 관월정 주위에는 세 개의 가산(假山)이 삼신산 (三神山)을 상징해 솟아 있었다. 삼경(三更)이 되자, 환히 빛나던 달이 구름 속으로 숨어들고 벽월호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 에 잠겨들었다. 거기에 한 인영이 조심스레 나타났다. 주천운이었다. 그의 몸놀림은 마치 가랑잎과 같이 가벼웠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어둠에 걸려 더듬거렸던 그였으나 만패검성의 개정벌모세수대법의 효 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세 군데의 가산 중 방장산(方丈山)에 이른 주천운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틀림없을 텐데... 늦어서 기다리지 않았단 말인가?' 주천운은 내심 자책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대강 삼경이 조금 지난 것 같았다. 그 순간이다. "오제냐?" 나지막한 음성이 주천운의 귀를 파고들었다. 주천운은 흠칫 두리번거렸으나 어디서 소리가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몇 걸음만 오면 나를 볼 수 있다." 침착한 음성이 다시 주천운에게 들려왔다. '이, 이것은 내가고수(內家高手)만이 펼칠 수 있다는 전음신공(傳音神功)인데?' 주천운의 마음속에 의혹이 가득 차 올랐다. 그의 짐작대로라면 그를 부른 사람은 혼수상태 에 빠졌다는 황제가 아닌가? '폐하께선 무공을 모르신다...' 그러나 주천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우뚝 솟은 바위에 가려진 은밀한 그늘이 그의 앞에 드러났다. 주천운의 신형이 주춤 멎었다. 그 그늘에서 형형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복면인을 발견한 것이다. "..." 흑의복면인은 주천운을 주시하더니 아무 말 없이 복면을 벗었다. 근엄한 기색의 청수한 모 습이 드러났다. 삼십을 넘긴 듯한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폐하...!" 주천운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복면인, 그는 정녕 당금의 황제인 것이다. 삼 년 전부터 병석에 누워 죽어가고 있다던 바로 그 황제였다. "일어나라. 예를 갖출 때가 아니다." 황제는 탄식하며 주천운을 일으켰다. "혼수상태는 어찌 된... 정녕 괜찮으시옵니까?" 주천운의 음성이 절로 흥분되어 떨려나왔다. "혼수는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한 눈가림이다. 괜찮다고 할 수는 없어도 오늘 내일 죽지는 않 을 것이다." 황제가 담담히 말했다. "그럼 그간의 병세도?" "네가 보기에는 짐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으냐?" "..." 주천운은 황제의 물음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안력은 이미 상당히 좋아진 터라 어둠 속에서도 황제의 안색에 병색이 완연함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짐은 네가 의도(醫道)에 이미 어의를 능가하는 조예가 있음을 안다. 어디 한번 보겠느냐?" 황제는 가볍게 미소하며 주천운에게 어수(御手)를 내밀었다. 주천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황제의 어수를 잡았다. "!" 주천운의 눈에 한 가닥 경악이 스쳤다. 잠시 후, 주천운은 납덩이 같은 안색으로 어수를 놓았다. "어떠하냐?" "기력이 충만하십니다." 주천운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황제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럴 테지... 오제, 너는 알아낸 대로 말해보아라. 짐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주천운은 잠시 말이 없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폐하의 용체(龍體)는 이미 기름 다한 등잔과 같습니다. 지금 폐하의 몸에는 기력이 충만하 나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닌 어떤 힘으로 체내의 잠력(潛力)을 끌어낸 것..." 주천운은 신음하듯 말을 끊었다. "계속해보아라." "만약 잠력이 다하게 되면..." "짐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대로라면 열흘을... 채... 넘길 수..." 주천운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짐이 잠력을 분배한다면... 잘하면 반 년 정도는 능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폐하, 무엇 때문에 어찌하여 그런 무모한 일을 하셨사옵니까?" "오제, 너를 만나기 위해서다!" "예?" 주천운의 온몸이 일순 굳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짐은 앞으로 이삼 년은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황제의 음성이 무겁게 이어졌다. 천하의 모든 권위를 지닌 황제! 그가 자신의 숙명을 단축시키면서까지 이토록 은밀히 주천운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 가? "우리 형제 일곱은 어머니가 다르긴 했어도 매우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 떻다고 생각하느냐?" 황제의 물음은 주천운의 가슴을 찔렀다. "조금...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 정도가 아니다. 그들의 반목으로 황실과 조정이 분열되어 국기(國基)가 뒤흔들리고 있 다!" "어찌하여 진작... 후계 문제를 확정지어놓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후계... 천번 만번 생각한 일이다. 그러나 만약 후계자를 지정했다면 이나마도 황실을 지탱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감히 그들이 정변(政變)을 일으키리라 보십니까?" "너는 그러지 않으리라 장담하느냐?" "..." 주천운은 침묵했다. 병상에 있는 황제가 이토록 고심참담하고 있을 때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짐은 사태를 예의주시해왔다. 그러던 중... 어떤 은밀한 힘이 대내에 스며들고 있음을 발견 했다." 황제는 내뱉듯 말했다. "은밀? 형제들이 외부의 힘을 끌어들였단 말입니까?" "단정할 수 없다. 짐은 이미 이 년 간 심혈을 경주했으나 그것을 밝혀낼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힘이 점점 커진다는 것이다." 황제의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짐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조차 돌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주천운은 상황이 자신이 추측한 것보다 더욱 심각함을 깨달았다. "이미 짐의 측근세력은 하나도 믿을 수 없는 상태... 짐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말을 안 듣 고... 이 상태에서 그 힘이 완전히 형태를 갖춰 모습을 드러낸다면 사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황제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져나왔다. "그래서 짐은 천하를 건 도박(賭博)을 결심했다! 전부냐? 아니냐? 하는..." 주천운의 전신경이 곤두섰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말임을 알기에... "그것이 바로 너를 이 시비의 와중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천하의 주천운조차도 영문을 몰라 안색이 변했다.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짐이 혼수상태에 든 이상, 아우들은 물론 그 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황제! 천하의 주인인 그가 고육계(苦肉計)로 자신의 몸을 미끼로 내건 것이다. "그, 그런 무모한... 설혹 상대가 채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폐하께서 계시지 않은 이상, 누가 그것을!" 싹! 말하던 주천운의 안색이 갑자기 대변했다. "설마...?" "그렇다! 바로 너다! 오제, 네가 그 음모를 분쇄하고 황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 황제가 주천운의 말을 잘랐다. "폐하!" "너와 입씨름하기 위해 너를 부른 것은 아니다! 소영이를 시켜 너에게 연락한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으-음-" 주천운이 신음할 때, 황제의 말은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여섯 아우 중 너를 택한 이유는 너만이 권력에 초연할 수 있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사람 임을 알기 때문이다." 황제는 말을 끊으며 주천운을 바라보았다. "너는 하려고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말해다오! 하겠느냐?" 그의 눈과 주천운의 눈이 마주쳤다. 운명(運命)! 주천운은 황제의 눈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었다. '오늘 벌어진 일들은 더 이상 내가 책 속에 묻혀지낼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주천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봉명(奉命)하오리다! 하나... 소제의 능력은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 같지 않음이 송구합니 다." 황제는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천하에 너에게 자격이 없으면 또 누구에게 자격이 있겠느냐?" 황제는 정색을 했다. "시간이 없다. 요점만 말하겠다! 짐의 돌연한 혼수에 저들은 일제히 활동을 개시하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상호견제가 되어 누가 결정적인 우세를 잡을 때까지 대내는 오히려 겉으로는 평온할 것이다!" 황제는 미소를 떠올렸다. "너는 그 틈에 귀신도 모르게 힘을 길러야 한다! 단, 그 기간은 반 년 미만이라야 할 것이 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죽기 전에라는 것이었다. "명심하오리다!" 대답하는 주천운의 마음은 납덩이였다. "짐은 이미 너를 위해 몇 가지 안배를 해두었다. 너라면 능히 이 위국(危局)을 타개하리라 믿는다!" 황제는 품속에서 검 하나를 꺼냈다. 손잡이까지 합해 불과 한 자 일곱 치밖에 안 되는 검이었다. 금룡 두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살아 있는 듯 새겨진 그 검의 전신에서는 담담 한 금광이 흐르고 있었다. 삼척동자라도 그 검이 절세신병(絶世神兵)임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이 검의 내력을 알아보겠느냐?" 주천운의 몸에 진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혹... 전설의 호국지존병(護國至尊兵)이오니까?" "과연 너답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호국지존병이다!" 호국지존병(護國至尊兵)! 그 누구도 반항할 수 없고, 반항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참(斬)할 수 있는 절대권위(絶對權 威)의 신기(神器). 그러나 호국지존병이 그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황제가 자신의 권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황제란 지위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이다. 누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권위를 포기하려 하랴. 때문에 호국지존병은 지난 천여 년 간 단 한번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나라가 망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 홍무제(洪武帝)가 전조(前朝)로부터 호국지존병을 얻어 그 권위가 계속됨을 천명한 후 에도 마찬가지였다. 호국지존병은 당대(唐代)를 거쳐 명대(明代)로 이어지는 하나의 전설에 불과했다. 자신의 권위를 포기하려는 황제는 없었기에! "황제가 권위를 포기하면 호국지존병은 황제 위에 군림한다. 이제 너는 호국지존(護國至尊) 이 되는 것이다!" 천여 년! 당(唐) 송(宋) 명(明)에 이르는 누조(累朝) 천여 년의 전설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호국지존병에는 엄청난 비밀이 있으나 천여 년 간 풀지 못했다! 네가 그것을 푼다면 권위 뿐만 아니고 힘까지 지닌 명실상부(名實相符)한 호국지존이 될 것이다!" 호국지존병을 쥔 주천운의 손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양치 않았다. 사양할 계제가 아님을 알기에. "형제들은 어찌하오리까?" 그의 입에서 침중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다르다!' 황제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러했다. 주천운의 모습은 이미 연약한 서생의 모습이 아니라 위대한 호국지존의 모습이었다. "너의 뜻대로 하라!" "보위(寶位)는 누구로 하여금 계승케 하오리까?" 주천운의 입에서 또 한마디가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이 말 한마디, 그것은 적절하나 지독하도록 냉철한 물음이었다. '누가 오제를 일러 문약하다 했더냐? 그야말로 진정한 제왕지재(帝王之材)인 것을?' 황제는 갑자기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주천운! 다음 대 황제는 오제 너다!" 황제는 다짐하듯 외쳤다. 황제(皇帝)! 그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자리가 주천운에게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주천운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차선(次選)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는 고려할 여지도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답군...! 다시 한번 고려해볼 수는 없겠느냐?" 황제는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침착히 되물었다. "폐하께서 이미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소제가 권력에 욕심이 없다고..." 주천운의 음성은 조용했다. "..." 잠시 침묵하던 황제는 탄식했다. "모두가 너 같다면 짐이 편히 종신(終身;죽음)하련만... 여섯 아우 중 너와 넷째가 가장 뛰어 났다. 하지만 상황을 예측할 수 없으니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라."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전권(全權)! 주천운은 이제 천하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權限)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설사 황제라 해도 역적일 따름이었다. 황제는 다시 몇 개의 봉서를 주천운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아직 믿을 수 있는 심복들의 명단과 황제권위가 호국지존병에 이양된다는 어지(御 旨) 등 모두 다섯 개로 주천운에게 막대한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 와중에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구나. 오늘 너와 헤어지면 다시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황제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돌아가면 잠력을 배분, 반수반성의 상태로 반 년을 견디며 죽음을 기다려야 할 비운(悲運)의 황제. "형님!" 주천운은 격동하여 황제의 손을 움켜쥐었다. "폐하가 아닌 형님이란 소리... 실로 몇 년 만인가? 천운, 소영이를 부탁한다. 불쌍한 녀석이 다." 만감(萬感)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달빛〔月光〕! 한 가닥 희미해져가는 달빛만이 부등켜안은 두 사람을 비추고 있을 따름이었다. 별리(別離)의 아픔 속에 탄생(誕生)이 이루어지니... 그것은 천하를 진동할 호국지존(護國至尊)의 탄생이다. 제 5 장 운명(運命)의 만남 싱그러운 새벽 공기가 감도는 화원(花園)에 주천운은 서 있었다. 무엇인가 생각할 것이 있을 때 주천운은 화원에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화로(花老)는 어느새 일어나 마치 화원의 일부인 양, 주천운의 앞에서 꽃을 다듬고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그의 손이 지날 때마다 제멋대로 엉크러진 꽃나무들은 제 모습을 찾으며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문득 화로의 손길에 눈이 간 주천운은 흠칫했다. '저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손놀림이 아니다! 현기(玄機)가 어려 있다...' 그는 이미 어제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아니었다. 여의섬 삼백육십오세와 수십 권의 비급을 기억하고 있는 그인 것이다. "화로의 전도(剪刀)의 움직임은 이미 자연(自然)과 같소. 내 오늘에야 그것을 처음 알았소..." 주천운의 담담한 음성에 화로의 손길이 멈칫했다. 주천운을 돌아보는 그의 노안(老顔)에 미소가 번졌다. "이것은 오랜 직업에서 손이 익숙해졌을 따름, 여기 무슨 자연이 있으리까? 아마도 전하의 눈이 달라지셨나봅니다." "...!" 화로의 말에 주천운은 갑자기 굳어지고 말았다. '눈... 안목... 마음...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一切唯心造〕...!' 갑자기, 주천운의 뇌리에 수천 수만의 생각이 전광(電光)과 같이 명멸했다. 그때, 화로가 주천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곁에 있던 모란 두 송이를 손에 있던 전도(剪刀)로 잘라 주천운에게 내밀었다. "이 두 송이의 꽃에 어떤 점이 다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두 송이의 모란은 핀 상태와 잘린 각도, 길이, 모든 것이 거의 비슷했다. "...!" 주천운의 눈에 한 가닥 놀란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가지의 잘린 면이 매끄럽다 못해 광택이 날 정도로 깨끗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마 저 둘 다 똑같았다. "내 눈이 무디어 무엇이 다른지 알아볼 수 없구려. 가르침을 주오." 대혜왕 주천운, 천하제일의 석학(碩學)이라 불리는 그는 오만이 없으며 모르는 것을 묻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그는 천하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화로는 송구한 듯 굽어진 허리를 굽혔다. "무슨 그런 황공한 말씀을... 이 두 송이를 서재에 꽂아두겠습니다. 저녁 때면 전하께서 그것 을 아실 수 있으오리다." 그 순간이었다. "호호호...!" 시냇물이 흐르듯 낭랑한 웃음이 들려오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천하의 대혜왕이 이젠 화로의 밥줄마저 떼려 하나요?" 패옥(佩玉) 부딪치는 맑은 음향을 일으키며 나타난 인영. 미녀(美女)! 화원이 빛을 잃을 듯 화사한 궁장미녀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표현함이 가장 옳으리라. 초생달 같은 아미(蛾眉)에 흑진주와 같은 눈동자, 오똑한 콧날 아래의 그 타는 듯 붉은 입 술... 그것은 가히 미녀의 전형(典形)이었다. 고귀한 가운데 발랄함이 가득한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것이었다. 그녀는 가선공주(嘉善公主)라 불리는 주하경이었다. "이 이른 아침에 네가 여긴 웬일이냐?" 주천운은 막내 가선공주를 발견하고 의외인 듯했다. 잠꾸러기인 그녀가 아니던가? "왜요? 소매가 좀 일찍 일어나면 안 되나요?" 가선공주는 주천운에게 매달리며 투정부리듯 말했다. "이러는 걸 보니 또 무슨 떼거리를 쓸 일이 있어 일찍 일어났구나? 소영이 좀 봐라, 고모 체면... 으앗!" 주천운이 미간을 찡그렸다. 여지없이 꼬집힌 것이다. 막내라 응석받이로 자라난 그녀에게는 황제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폐하 때문에 걱정이 되어 일찍 일어났는데 무슨 억울한 소리예요?" 가선공주는 매섭게 눈을 흘겼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주천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슬슬 물러났다. 그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말예요. 다섯째 오라버니는 오늘 어디 가실 일 없지요?" 가선공주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건 갑자기 또 무슨 소리냐?" "실은 말예요. 오늘 지언니가 궁에 오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지언니란 병부상서 채광의 외동딸 채설지(蔡雪芝)를 이름이다. "그런데?" "그런데가 뭐가 그런데예요? 지언니가 오라버니..." "너는 내가 왜 일찍 일어났는지 아느냐?" "?" 뜻밖의 말에 가선공주는 어리둥절한 빛이 되었다. "폐하의 환후 때문에 지금 불공이나 드릴까 하고 절로 가는 길이다. 자, 그럼..." "오라버니!" 가선공주의 목소리가 금속성이 되어도 주천운은 뒤도 안 돌아보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등은 가선공주의 눈길에 구멍이 날 판이었다. "저런 목석 같은... 이를 어쩌지? 지언니가 또 실망하겠는데..." 가선공주는 발을 동동 굴렀다. 주천운 때문에 애태우는 여인이 어디 한둘인가...? * * * 삐르르... 이름 모를 산새가 지저귀는 숲속을 주천운은 걷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그가 이따금 찾는 불해사(佛海寺)가 있는 곳이었다. 호위군사도 대동치 않고 평범한 옷차림을 했기에 그가 오황야임을 짐작하는 사람은 없었다.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새소리와 어울리는 곳, 평소의 주천운 같으면 시상(詩想)에 젖었을 분 위기... 그러나 주천운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상한 눈치를 보여서는 안 된다... 대내에선 눈이 많다. 하루... 오늘 하루만 불해사에서 생 각을 정리하리라!' 그때,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디선가 끊어질 듯 퉁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주천운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이럴 수가? 천하에서 가장 퉁소를 잘 분다는 태상시(太常寺)의 전장악(錢掌樂)보다 더 대단 한 소리...' 그는 홀린 듯 천천히 퉁소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쏴아- 맑은 시냇물이 조그만 폭포를 이루는 곳에 백설보다 더 흰 백의를 입은 여인이 치렁치렁한 머리를 늘어뜨린 채 그린 듯 바위에 앉아 있었다. 등을 돌린 채 퉁소를 부는 여인의 뒷모습 은 세속을 초월해 있었다. 서기 어린 은은한 자광(紫光)이 어린 가운데 퉁소 소리는 맑게 흐르는데, 이 무슨 믿지 못할 일인가? 기경(奇景)! 그녀의 발 아래 흐르는 시내에서 고기가 고개를 내밀고 있으며, 백의미녀의 주위에는 다람 쥐, 토끼, 사슴 등과 작은 새들이 가득히 모여 앉아 있는 것이다. 주천운이 거기 나타난 순간, 퉁소 소리는 뚝 그쳤다. 그리고 동시에, 첨벙! 첨벙... 고기는 물속에 숨고, 후다닥! 새와 짐승들은 주위를 보고 깜짝 놀라 몸을 숨겼다. 그 소동조차 일대장관이었다. '내 구천신마조화경에서 본 것을 믿지 않았더니, 현실로 보게 될 줄이야!' 주천운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때, 백의여인이 천천히 퉁소를 거두며 몸을 돌렸다. 순간, 주천운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너... 너무도 아름답다!' 황궁에서 자란 주천운이었다. 그가 보는 것은 모두가 최고이며 여인들 또한 모두가 고르고 고른 미녀들이었다. 가선공주 를 비롯한 북경오미(北京五美)의 아름다움은 또 어떠했던가? 그런데 틀렸다. 아미(蛾眉) 단순(丹脣), 빙기옥부(氷肌玉膚)... 그 숱한 미(美)의 형용사가 다 헛된 것이었다. 백의려인(白衣麗人)의 눈은 천하의 모든 것을 비추일 만큼 맑았고, 그녀의 모습은 수려(秀 麗)하고도 고고(高孤)하여 오직 투명하도록 차게 아름다웠다. 가벼이 휘날리는 소맷자락에 휘감긴 백옥수(白玉手)에는 서기조차 어리는 자색의 퉁소가 살 짝 쥐어 있으니... 어느 누가 감히 그것을 속세의 아름다움이라 하겠는가? 주천운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의 심정이 되어 황급히 포권했다. "죄송하오.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소저의 퉁소 소리가 너무도 뛰어나 나도 모르게 그만 이리로... 죄송하오." 당황한 그의 모습은 그 와중에도 순수하고 기품이 있었다. 백의려인은 그의 그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떠올렸다. 주천운은 그녀의 웃음에 백화가 폭죽 터지듯 피어나는 착각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백의려인이 미소를 거두며 다시 몸을 돌리는 순간, 주천운은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 버린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도 음률을 공부했으나 소저와 같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소저의 선음(仙音)을 다시 한번 들을 수 있을지..." 돌아가던 백의려인의 몸이 흠칫했다. 그리고 그녀의 교구(嬌軀)가 천천히 주천운을 향했다. 그녀의 안색은 더욱 차가워져 얼음장 같았다. 미간에는 한 가닥 은은한 살기가 떠오르고, 주천운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얼음같이 차 고 칼끝같이 날카로웠다. 갑자기 겨울이 돌아온 듯 주천운은 그녀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보았다. '역시 무림고수였었군!' 그러나 그의 기색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眼〕! 백의려인의 눈과 주천운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기세, 그 눈빛은 무림의 내로라 하는 고수도 질리고 말 것이었다. 그런데 맑고 그윽 한 주천운의 눈은 그녀의 그 차고 날카로운 눈을 마치 포용(包容)하는 듯하지 않은가?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시오. 죄송하오." 그 순간, 주천운은 포권하며 그녀에게 가볍게 미소 지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백의려인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리고 찰나, 막 걸음을 떼던 주천운은 멈칫 그 자리에 섰다. 믿을 수 없게도 백의려인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주천운의 앞에 서 있었던 것 이다. "보아하니 평생을 책과 벗할 서생인 것 같은데... 너무 대담하다고 생각지 않나요?" 백의려인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 목소리, 차갑기조차 한 그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영롱했다. 옥구슬이 은쟁반에 구 른다는 속설(俗說)이 과연 이러한 소리를 지칭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아름다운 음성이었 다. "황법 아래 만민은 평등한 것, 서생이라고 할말을 못하겠소?" 주천운은 담담히 미소했다. "내 앞에서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도 못 해본 일이군!" 백의려인은 기가 막힌 듯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렇소..." 주천운은 조용히 대꾸했다. 그 순간이다. "오호호호..." 백의려인은 심산유곡에서 꾀꼬리가 울 듯 낭랑한 교소(嬌笑)를 터뜨렸다. 그 웃음은 또 무엇 으로 형용하랴! "당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군요? 내 여기서 잠시 지체했던 것이 당신과 같은 분을 만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에요." 웃음을 그친 백의려인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그 얼음처럼 한기가 풀풀 날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태도였다. 안색을 굳히 매, 엄동설한(嚴冬雪寒)의 얼음이요, 옥용에 웃음을 떠올리자 그 순간에 천지에 백합이 만발 한 듯하였다. 그녀의 태도는 희노(喜怒)가 무상(無常)하여 내심을 측량할 수가 없었다. 일시지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과분한 말이오. 나는 일개 서생일 따름이오." 주천운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지요. 정녕 내 퉁소 소리를 한번 더 듣고 싶은가요?" "들려주신다면 사양치 않겠소." "좋아요. 대신 후회는 말아요. 이번 것은 저번 것과는 틀리니까!" 백의려인은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럼에도 그 웃음은 아름다웠다. 쏴아아- 시내는 폭포를 이루어 급류가 되고 바람은 바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여인의 치맛자락을 들 추니, 그때마다 보일 듯 말 듯한 외씨 연족(蓮足)의 신비... 백옥인 양 투명히 빛나는 두 손은 구름을 헤집는 듯 뛰노는데, 거기에 희롱당하는 자소(紫 蕭)는 가냘픈 신음을 흘려낸다. 삐리리-삐이... 타는 듯 붉은 두 잎의 앵두가 향기로운 숨결을 토해낼 때마다 퉁소는 점점 더 처량히 신음 하고 있었다. 마음(魔音)! 그것은 무서운 힘을 지닌 마음이었다. 흐느끼는 듯한 퉁소 소리에 공기조차 굽어지고 초목조차 숨을 멈추어야 했다. 주천운의 안색은 창백하고 얼굴은 온통 처연한 기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퉁소 소리가 멈추고, 백의려인이 퉁소에서 입을 떼고 기이한 빛으로 주천운을 쳐다 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스스스... 주천운의 주위 십여 장에서 한창 신록(新綠)을 자랑하던 초목들이 생기를 잃고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소저의 음예(音藝)는 정녕 천하일색이오... 하나, 이번 곡은 너무 애절(哀絶)하구려." 그때, 주천운이 탄식하며 눈을 떴다. 백의려인은 대경실색했다. "애간장을 끓이는 상심루(傷心淚)를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견딜 수 있다니! 공자의 정력 (定力)은 믿을 수 없군요!" 그녀는 너무 놀랐는지 어투마저 변해 있었다. 상심루(傷心淚)! 그것이 어떤 음률이던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천고절기(千古絶技)의 하나로서 인간을 아니, 생령(生靈)을 슬픔에 겨 워 죽게 하는 위력이 있는 것이 아니던가. 비록 그녀가 오 성의 공력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주위의 상황만 보아도 그 위력이 어떤지 알 수 있는 것. "칭찬해주어 고맙소. 하지만 조금만 더 계속 되었거나 소저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나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오." 주천운은 힘없이 말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오늘의 만남, 그리고 소저의 절음(絶音)... 영원히 기억하리다. 그럼 이만..." 그가 정중히 포권해 보이고 몸을 돌리는 순간, 한 가닥 기이한 향풍(香風)이 스치며 백의려 인이 주천운의 앞을 또 막아섰다. "공자는 그냥 갈 생각인가요?" 주천운은 의아한 빛이 되어 백의려인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변변치 않은 소리나마 들었으면 공자도 답례를 해야지 예의가 아닐까요?" 뜻밖의 말에 주천운은 난처한 기색이 되었다. "소생의 천박한 재주를 어찌 소저와 같은 명인(名人)에게 드러내라 하시오? 더구나 소생의 수중에는 악기도 없고..." 백의려인의 눈에 일순 망설이는 빛이 스쳐갔다. "공자께서 꺼리지 않는다면... 이것을 쓰세요." 그런데, 백의려인은 소매로 들고 있던 자소를 조심스레 닦아내더니 내미는 것이 아닌가? 주천운의 안색에 당황한 빛이 드러났다. "소... 소저..." 방금까지 백의려인이 입술을 대고 불었던 퉁소였다. 그런데 주천운이 그것을... 그것은 간접적인 입맞춤이 되는 것이 아닌가? 백의려인의 얼굴에도 한 가닥 홍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를 알던 사람이 지금의 그녀를 본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리라! 일 년 가야 미소 한번 띠지 않으며, 남자라면 자신의 앞에서 고개조차 드는 것을 허용치 않 았던 그녀가 아니던가? "여기에 내 체취가 묻어 있어 더럽다고 느끼는 건가요?" 주천운은 그녀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태산이 무너져도 안색이 변치 않을 그이건만... "무... 무슨 그런...!" 주천운은 황급히 그녀의 손에서 퉁소를 잡았다. 그런데 크게 당황한 나머지 그만 백의려인의 옥수를 건드리고 말았다. "죄... 죄송...!" 어쩔 줄 모르게 된 주천운은 급히 퉁소를 받아들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불과 한 자 여덟 치 가량의 퉁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주천운은 몸을 휘청이며 하마터면 퉁소를 떨어뜨릴 뻔한 것이다. "조심해요. 이것은 보통 물건이 아니라 무게가 마흔두 근이나 되어요." 백의려인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주천운을 부축하며 말했다. 그것도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이면 주천운이 그녀의 품속에 안기는 것 같은 꼴이 될 줄이야! 물컹! 여인의 가슴이란 어찌 이다지도 한없이 포근하더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여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체향(體香)은 또한 얼마나 신비한가? "미... 미안... 미안하오." 혼비백산한 주천운은 급급히 물러나다가 이번에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뜻밖에도 남자를 안아 놀랍고도 부끄러워 가슴이 뛰던 백의려인은 자신보다 더 당황하는 주 천운의 그러한 모습에 오히려 미소를 떠올리고 말았다. 어색한 주천운의 눈과 당황하면서도 미소를 띤 두 눈이 마주쳤다. "...!" "...!" 갑자기 두 사람은 석상이 된 듯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괴이한 파문이 일어남을 느 꼈다. 그것은, 그들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것은 갑작스런 변화 이전에 어떤 약속된 운명(運命)이었다. "변변치 않은 솜씨, 비웃지마시오" 그녀의 눈빛을 견딜 수 없는 듯 주천운이 눈길을 돌리며 퉁소를 잡았다. '책벌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한편 막 힘들여 퉁소를 들어올리던 주천운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백의려인의 퉁소는 정녕 범상한 물건이 아니었다. 퉁소 전체에 신비로운 자색서기(紫色瑞氣)가 어리고, 소신(簫身)에는 기이한 무늬가 떠오르 고 있는데 한눈에도 현기(玄機)가 서려 있음을 알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천상(天上) 자미원의 성좌(星座)! 보고(寶庫)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 寶)다!' 내심의 놀람을 내색치 않은 채 주천운은 천천히 퉁소를 불기 시작했다. 퉁소음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해 안온히 변해가는데, 주천운의 퉁소 솜씨에 경악을 금치 못 하고 있던 백의려인의 안색이 갑자기 납덩이같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주천운도 땀을 비오듯 흘리며 중간에서 퉁소를 멈춰버리고 말았다. "추태를 보였소. 도저히... 기력이 뒤따르지 못하는군요..." "공자는 그 음률을 누구에게서 배웠나요?" 백의려인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어 내심 얼마나 놀랐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전, 소... 저가 처음 분, 바로 그 음률을 흉내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소. 기분 나빴다면 양해하시오." "...?" 백의려인은 너무나 놀라 말도 못하고 입만 딱 벌리고 말았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천부화락(天府和樂)은 천하절기이거늘 그것을 한 번 듣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놀람은 너무도 당연했다. 천부화락이란 것은 상심루보다 더욱 심오한 절학으로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배워도 한 소절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기에... 실은 주천운조차도 구천신마경 신부(神部)의 천상화(天祥和)의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것이 너무 엄청난 공력을 요구하는지라 주천운으로서는 더 이상 전개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범인(凡人)은 상상도 못할 능력이었다. "세상에 공자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공자의 대명을 듣고 싶군요." 백의려인은 주천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나는... 주천운이라 하오." 주천운은 숨김없이 대답했다. 순간, 백의려인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진동했다. "그... 그럼... 오황야, 대혜왕...?" "그렇소." 주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의려인은 신음하고 말았다. '대혜왕의 지혜가 하늘을 능가한다더니... 정녕!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녀의 가슴속은 처절하게 구겨지고 말았다. 왜 그러한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오직 하늘과 그녀만이 알 일이었다. "천민이 오황야이신 줄 모르고 불경한 죄, 만사무석(萬死無惜)입니다." 백의려인이 황급히 휘영청, 허리를 굽혔다. "이곳은 궁중이 아니고, 나 또한 주천운이란 일개인일 뿐, 마음에 두지마시오." 주천운은 그녀에게 퉁소를 건네주며 그녀의 예를 만류하였다. "감읍하옵니다. 그럼 소녀는 이만 작별코저 합니다." 백의려인이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곤 돌아가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체... 옷자락이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펄럭이며 주천운 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에 멍청하던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소저의 방명(芳名)을 알 수 있겠소?" 백의려인의 신형이 가벼이 진동하더니 멎었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주천운을 향했다. 그들의 눈은 다시 마주쳤다. 주천운이 그녀의 눈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연한 빛이 어린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 의 입이 열렸다. "소녀의 천명(賤名)은 대... 려군(戴麗君). 하오나, 듣고 잊으시는 것이 좋을 것..." 스스로를 대려군이라 이름한 백의려인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믿을 수 없도록 가공한 속도였다. 거기 남은 것은 주천운과 추억(追憶)과 미련... 그리고 운명(運命)이었다. 주천운마저 그곳을 떠나자,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그들의 가슴에 담겨 있으며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으므로... 제 6 장 천년신비(千年神秘) 불해사(佛海寺)는 북경성 근교(近郊)에 위치한 절이다. 대단한 규모는 아니나 엄숙한 수도장으로 명성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 주지인 회오대 사(悔悟大師)와 주천운이 교분을 가지고 있음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새 울음소리가 즐거이 아침을 알리고 처마에 달린 풍경(風磬)이 뎅그렁거릴 때, 주천운은 불 해사에 들어서고 있었다. 사방은 깨끗이 비질되어 있으며 산문(山門)은 활짝 열려 있으나, 기이하게도 오가는 승려는 아무도 없었다. '괴이하군. 이때쯤이면 아침 독경을 마치고 부산할 때인데...?' 주천운이 산문을 들어서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아미타-불..." 불호 소리가 들리며 중년승인이 주천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불해사의 수좌(首座)인 공월대사(空月大師)였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공월대사가 합장배례했다. "고맙소. 한데 사내(寺內)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아니오이다. 어젯밤 방장사부(方丈師父)께서 오늘 아침 귀인(貴人)이 오실 것이니 모두 출 입을 삼가하라 이르셨기에..." '뭐라고? 그렇다면 회오대사께선 이미 내가 올 것을 짐작하고 계셨단 말인가?' "소승은 그 귀인이 전하이실 줄은 미처... 들어가시지요. 방장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월대사가 앞장섰다. 회심당(悔心堂)은 불해사 뒤쪽에 세워진 정갈한 초옥이다. 마치 오두막과 같은 이곳이 불해사의 방장이 거처하는 곳임을 믿을 사람은 별로 많지 않으 리라. "들어가시지요. 소승은 여기서 기다리겠사오이다." 회심당의 주위에 둘러쳐진 싸리 울타리에 이르자 공월대사는 공손히 합장했다. 주천운은 평소 자신이 왕(王)임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누구와도 격의없이 대해 거리를 두지 않았다. 그가 오황야임을 아는 사람이 방장 회오대사와 그의 수좌 공월뿐이라고는 하나, 오늘은 뭔 가가 틀렸다. 공월대사가 싸리 울타리 밖에 서 있음을 보고 주천운은 회심당의 댓돌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에 창노한 음성이 회심당 안에서 들려왔다. "노납은 이미 전하를 기다리고 있었소. 들어오시오." 방장실 안은 흙벽에 침상이 하나 있고 그 앞에 검관한 나무탁자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을 뿐 썰렁하도록 아무것도 없었다. 있다면 벽에 걸린 달마도(達磨圖)뿐이었다. 그 침상에 우람한 체구의 노승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약간 마른 듯한 얼굴에 긴 눈썹이 눈을 덮고 긴 수염이 가슴을 덮은 노승, 이 사람이야말로 불해사 방장대사인 회오대사였다. "어서 오시오, 전하." 회오대사가 침상에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올 줄은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주천운은 예를 취하고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이미 그다지 격식을 차리지 않는 사이였다. "천기를 보아 누가 올 줄은 알았으나 그것이 전하일 것은 확신치 못했으나 대강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요..." 담담히 말하던 회오대사는 문득 주천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요하던 눈에 마치 타는 듯한 섬광이 스치고 지나감을 주천운은 보았다. "소생은 대사를 조금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주천운의 번뜩 이는 말에 회오대사는 자애한 미소를 지었다. "아... 미타불...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제 다 아시게 되리다. 더구나 전하께 기우(奇 遇)가 있었던 것 같으니 모든 것이 세존(世尊)의 자비외다..." 그의 어조로 보아 주천운이 전과 다름을 이미 알아본 듯했다. '득도한 고승인 줄만 알았더니... 이 며칠간은 정신을 차릴 여가가 없군!' "지난날 전하께선 노납의 회오란 법명에 대해 물은 적이 계셨소. 이제 대답하리다. 노납의 원 법명은 경심(鏡心)이었소..." 회오대사는 지난 일을 회상하듯 가늘게 눈을 뜬 채 말하기 시작했다. 복마신승(伏魔神僧) 경심대사(鏡心大師)! 칠십 년 전까지 천하를 떨어울리던 복마신승의 위명을 모르는 자가 그 누구인가? 소림사 출신인 그는 나이 삼십에 무려 사십오 종의 절예를 완벽히 터득해낸 최고의 기재였 다. 소림사 최고의 인재요, 경 자 항렬의 최고 배분인 그가 장문인이 되는 것은 누구라도 의 심치 않는 일이었다. 한데, 근신처분과 함께 장문직은 셋째 사제인 경오(鏡悟)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럴 수가? 이건 사기다!" 불법보다 무공을 좋아하며 옳지 않은 일을 보면 꼭 뛰어들며, 악한 자는 사정없이 쳐죽이는 열화와 같은 성미를 가진 경심. 그는 노발대발해 장경각을 때려부수고 몇 권의 비급을 들고 소림사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급한 성미로 일을 저지른 경심은 이내 후회를 했으나 자존심과 면목이 없어 소림사로 돌아 갈 수 없었다. 사미승이라도 와서 잡으려 들면 잡혀가고자 했으나... 괴이하게도 소림사에서는 그를 뒤쫓지 않았다. 그것은 경심대사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로부터 이십 년, 복마신승은 천하를 떠돌다 우연히 한 노승을 만나 그곳에 안주하게 되었 으니... "그곳이 바로 불해사이며 그 노승은 전대 방장이셨던 관허법사(觀虛法師)이셨소..." 회오대사는 주천운을 바라보며 담담히 미소했다. "그것은 경심이란 망나니가 견성(見性)하고 회오(悔悟)로 다시 태어난 계기가 되었소." "..." 잠시 말이 끊겼다. "노납은 회오가 되면서 관허법사께 막중한 짐을 물려받게 되었소." "막중한 짐? 그게 무엇입니까?" "이제, 그것을 전하께 보여드리겠소!" 회오대사는 소매를 저었다. 그르르- 그 순간, 돌이 밀리는 음향이 일어나고 회오대사의 등뒤 벽이 갈라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드러났다. "!" 투박하기조차 한 회심당에 이런 기관이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한 주천운은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방장실에 이곳에 있는 이유임을 그는 더 더욱 알지 못했다. "전하, 따라오시겠소?" 회오대사가 암문 속에서 말했다. 암문 안은 한 사람이 어깨를 펴고 걸을 수 있는 암도(暗道)였다. 약 이삼십 장 이상 걸었을 때, 돌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리며 주위가 환해졌다. 회오대사가 석문을 연 것이다. 석문 안에 들어선 순간에 주천운은 어리둥절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뜻밖에도 지하에 마련된 불당(佛堂)이었던 것이다. 정면에는 길이가 삼 장에 이르는 엄청난 탱화(撑畵)가 있고, 그 앞에는 단 위에 미륵불(彌勒 佛)이 모셔져 있었다. 빛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불이 밝혀져 있지도 않은데 사방은 밝은 편이었다. 그가 기대했던 무슨 기보나 특별한 비밀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전하께선 저 탱화를 알아보시겠소?" 회오대사가 주천운에게 물었다. "용화삼회(龍華三會)를 그린 것 같군요." 주천운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소. 미륵불께서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도를 이루고 세 번의 설법을 하리라는 그림이 오." 회오대사는 뚫어질 듯 탱화를 바라보더니 주천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본사에는 하나의 전설이 있고 그것은 천하가 멸망하려 할 때 그것을 건질 귀인(貴人)이 나 타나 저 용화삼회도(龍華三會圖)의 비밀을 풀어 제세(濟世;세상을 건짐)하리라는 것이오." "용화삼회도의 전설?"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용화삼회도를 쳐다보았다.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서 수많은 군중과 하늘의 선인들에게 둘러싸여 설법하고 있는 불화(佛 畵). 하늘에서는 우담화(優曇華)를 비롯한 수 없는 각종 꽃이 휘날리고 화면(畵面) 전체는 장엄 한 서기로 가득 차 있었다. '힘차고 생동감 있게 그렸지만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주천운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하듯 회오대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납 또한 저 그림을 수십, 수백 번 보았으나 인연이 없었소. 한번 보아 알 수 있다면 용화 삼회도가 천 년 동안의 신비로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오." 주천운은 어색히 웃었다. "불해사 방장에게는 바로 그 귀인을 기다리며 용화삼회도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오. 한데, 어젯밤." 회오대사가 정색을 했다. "노납은 자미성(紫微星)이 빛을 잃어 혈기(血氣)에 침식되고 한 가닥 마기(魔氣)가 세상을 뒤덮으며 내려오고 있음을 보았소... 그것은 바로 천하혈겁(天下血劫)의 징조였소." 주천운의 낯빛도 싹 변했다. 그는 성복지학(星卜之學)에도 경인(驚人)의 조예가 있는 것이다. 그런 그였지만 어젯밤은 너무 바빠 천기를 볼 여유가 없었다. '자미성이 빛을 잃었다 함은 폐하의 명운(命運)이 다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천운이 어젯밤의 황제를 생각하고 안색이 굳어질 때였다. "그런데 뜻밖에 문창무곡의 양성(兩星)이 자미원에 들어 빛을 발함을 노납은 발견했소. 그것 은 곧 그 혈겁을 막을 귀인이 나타나리라는 계시(啓示)였소!" 회오대사는 주천운을 바라보았다. "노납은 그 각도와 시간을 계산한 끝에 그 귀인이 오늘 불해사로 올 것임을 알게 되었소..." 주천운의 안색이 흔들렸다. "지금 대사께선 소생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여기 전하 외에 또 누가 있사오이까?" "대사!" "전하, 아무 말씀 마소서! 시위는 이미 당겨진 것, 천하가 전하를 부르고 있소이다! 전하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소!" 용화삼회도(龍華三會圖)와 미륵불상(彌勒佛像)의 앞에 주천운은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이 용화삼회도는 달마조사께서 소림 무공을 완성하시고 입적하실 때 남기신 것이라 하오. 이것이 어떻게 불해사에 유전되었는지는 모르나 달마조사의 유품임에는 틀림없소... 주천운의 뇌리에 회오대사의 음성이 떠올랐다. "달마대사께서 천하무학의 원조(元祖)라 불리는 분임은 들었으나..." 주천운은 용화삼회도를 쳐다보았다. "내게는 시간이 없다. 소림의 기재라는 회오대사가 수십 년 간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했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쓴웃음을 짓던 주천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비록 하루라도 내 전력을 다해보리라!" 그의 눈에 결심이 어렸다. 그는 정신을 모아 용화삼회도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미륵불의 미소 하나에서 휘날리는 꽃잎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얼마인가 시간이 지나자 주천운은 자꾸만 보고자 하는 곳의 시야가 막힘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정면에 모셔져 있는 미륵불상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조각이 어찌나 정교한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미소를 머금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주천운은 시간이 더 지나자 미륵불상 때문에 용화삼회도를 자세히 바라보기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자연적 그는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미륵불상의 좌우로 내밀게 되었다. 그때, 주천운은 미륵불상의 좌우 옆에 포단이 하나씩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후후-회오대사도 결국 여기서 장애가 되어 없는 곳으로 가셨군...' 가볍게 웃음을 떠올리고 막 불상의 약간 뒤쪽 옆에 놓인 포단으로 가려던 주천운은 흠칫했 다. "아니다! 대사는 저기서 수십 년을 보냈어도 아무것도 발견치 못했다. 나는 그분과 똑같이 하면 안 된다!" 주천운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시간이 감에 따라 미륵불의 자애로운 얼굴이 점점 더 크게 확대되면서 시야를 가로막 는 것 같았다. 주천운은 낭패한 기색이 되었다.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아니었다. 실제로 미륵불상이 더 커진 것 같았다. "이럴 리가?" 괴이함을 느낀 주천운은 자세히 미륵불상을 쳐다보다가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빛〔光〕! 어디선가 흘러드는 빛이 차츰 미륵불상에 모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빛을 금동(金銅)으로 된 미륵불상이 반사하고 있는데 그 빛이 강렬치 않아 미륵불상이 커져 보인 것이다. "?" 사방을 살펴보던 주천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석좌대(石坐臺)인데 그 재질(材質)로 보아 이 지하 불당을 만들 때 만 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빛을 지하로 끌어들이고 한군데로 모을 수 있는 건축가가 석대와 미륵불상이 일직선이 되 면 장애가 있음을 계산치 못했단 말인가?"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의도적인데... 무슨 의도로 오히려 훼방을 놓도록 설계... 훼방... 훼방?" 갑자기 주천운의 눈에 광채가 일어났다. "열쇠는 불상이다!" 그는 단정하듯 외치며 미륵불상을 주시했다. 웃는다. 미륵불상은 주천운을 바라보고 그저 자애롭게 웃고만 있었다. 그의 몸이 빛나고 커짐에 따라 뒤의 용화삼회도는 가리고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빛은 불상의 뒤쪽에 모이고 있다..." 주천운은 자리에서 일어 미륵불상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과연 그러했다. 빛은 미륵불의 후광처럼 퍼지고 있었다. "빛이 좀더 밝아진 것으로 보아 정오가 가까워오는 모양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뭘 발견할 수 없자 주천운은 맥이 빠졌다. "내가 착각을 했단 말인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앞으로 나서던 주천운의 눈이 미륵불의 얼굴을 향했다. 미륵불의 이마에 푸른 보석이 박혀 신비한 광채를 뿌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벽운주(碧雲珠)... 이것이 뒤쪽에 있다면 정말 신비한 광채를 발할 수 있을 텐데..." 성 하나와 바꾸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 벽운주가 아닌가? 주천운은 갑자기 뚫어지게 벽운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손을 벽운주에게 가져갔다. 그것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 불해사의 고승들은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주천운이 어떻게 했는지 갑자기 벽운주가 스르르 앞으로 빠져나오지 않은가? 주천운이 흠칫 물러나는 순간, 벽운주는 완전히 이마에서 구형(求刑)으로 돌출되었다. 그것과 동시에 미륵불상을 받치고 있던 두 자 높이의 석대가 밑으로 가라앉더니 미륵불상이 스르르-회전하기 시작했다. 두 자 높이의 석대가 평면이 되는 순간에 미륵불상은 완전히 반회전(半回轉)해 뒤로 돌아앉 았다. 찰나(刹那)! 파-앗! 찬란한 푸른 광채가 불당에 가득 찼다. 뒤쪽에 모이던 빛이 벽운주에 반사된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신비로운 조화였다. "오오...!" 눈을 감았다 뜬 주천운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보라! 찬란한 벽광(碧光)이 용화삼회도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서 새로운 그림이 희미하게 원래의 그림 위로 떠오르고 있지 않는가! 그 그림은 원래의 용화삼회도에 겹쳐져 용화삼회도를 기이하게 연결시키고 글자마저 나타나 고 있었다. <부처〔佛〕의 마음〔心〕으로 천하(天下)를 구하고자 항마신공(降魔神功)을 창조하노니, 천 하의 그 어떠한 마공(魔功)도 파괴하리라!> 오오! 드디어, 드디어 천년신비가 주천운의 손에서 풀리는 순간이었다. 천년신비는 이제 주천운의 앞에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이 여직껏 풀리지 않았던 이유는 모두가 불상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또 기관이 발동해도 빛을 모을 수 있는 시간이 일 년에 단 한번뿐이기 때문이다. 주천운은 바로 그 일 년에 오직 한번인 시간에 여기 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운명(運命)... 그뿐이었다. <천하겁(天下劫)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으며 그대에겐 시간이 없으리라! 이 용화진도(龍華眞 圖)는 나타난 후 세 시진이면 소멸되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대를 위해 창조되었기에, ...中略...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열반(涅槃)을 앞두고 남기노라.> "정녕 달마대사의 유진(遺眞)이었단 말인가?" 주천운은 신음하듯 용화삼회도가 변해서 된 용화진도를 바라보았다. 운명(運命)은 너무도 급박하게 한꺼번에 주천운에게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용화대수미선공(龍華大須彌禪功)>. 이러한 신공이 있음은 아무도 모른다. 주천운이 그것을 보는 첫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무공은 불문최강(佛門最强)! 아니, 천 하 신공의 최강이었다. 이미 수십 권의 비급을 읽고 그 중 칠 개 신공의 막강함을 알고 있는 주천운은 그것을 능 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반야대선공(般若大禪功)은 십대선공의 하나이며 소림 칠대신공의 제이위였으나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용화대수미선공이 펼쳐지면 전신에서는 장엄한 서기가 떠오른다. 그때에는 그 무엇도 그를 상할 수 없으며, 그 어떠한 사공마학(邪功魔學)도 그를 침범할 수 없다. 바로 금강불괴(金剛不壞)인 것이다. 십 성에 이르면 신공을 운기하지 않아도 천하의 그 무엇도 범접할 수 없다. 가장 큰 장점은 여타 정종무공(正宗武功)과는 달리 속성(速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화대수미선공으로 남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주천운을 공격한다면 그는 반탄지기(反彈之氣)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었 다. 용화대수미선공을 연마하면 태산과 같고 천신 같으며 춘풍과 같은 무형의 기세가 생겨나니, 그 기세만으로도 남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무공의 길... 이것도 이렇게 끝없을 줄이야..." 주천운은 고개를 저었다. <불광멸겁뢰(佛光滅劫雷)! 천하마공을 제압키 위해 창안한 가공지학(可恐之學)이다. 벼락치는 음향이 터지는 순간, 철판이라도 박살나고 만다. 그 무엇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앞에 파괴되지 않는 마공(魔功)은 없으리라! 펼치면 거둘 수 없으니 함부로 전개치 말라!> 서문(序文)은 그냥 써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문무공이라 할 수 없도록 가공무쌍(可恐無雙)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광멸겁뢰는 바로 용화대수미선공을 쏟아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주천운이 겨우 용화진도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확인해보려는 순간에 벽광(碧光)이 사라지며 용화진도는 다시 용화삼회도가 되었다. "어느새 세 시진이나 지났단 말인가?" 주천운과 같은 천재가 그것을 기억하는 데 세 시진이나 걸렸다면 용화진도가 얼마나 현오 (玄奧)한 것인지는 짐작이 가리라! 주천운은 말할 수 없이 피곤함을 느꼈다. 어제부터 단 한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심력(心力)을 있는 대로 소비한 주천운이었다. 그가 이 정도라도 지탱할 수 있었음은 만패검성의 덕이었다. "용화대수미선공은 최고 절학! 어쩌면 노사가 전수한 내공을 단숨에 내 것이 되게 할지도 모른다..."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도 서슴지 않는 실천력이 주천운에게는 있 었다. 놀랍게도 주천운의 주위에는 상서로운 서기(瑞氣)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용화대수미선공이 주천운에게서 운행 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주천운은 정녕코 단 이틀 사이에 백면서생에서 절세 고수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스스스... 서기가 영롱히 빛나는 것 같더니 사라졌다. 주천운의 눈에서 신광이 번뜩이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역시 대단하군... 노사가 전수한 내공이 단숨에 내 것이 되었다." 주천운의 입에서 담담한 말이 흘러나왔다. 쭉- 그가 허리를 펴는 순간, 그의 몸은 한 덩이 구름과 같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것은 위대한 영웅의 비상(飛翔)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 * * 어둠이 주위를 가릴 때, 주천운은 회오대사와 회심당에 마주앉아 있었다. 주천운을 쳐다보는 회오대사의 노안에는 격동이 일렁이고 있었다. "전하, 소승의 절을 받으소서." 회오대사는 주천운에게 큰절을 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주천운은 대경해 회오대사를 부축했다. "아니오이다. 전하는 달마조사의 절학을 이은 몸, 소승은 소림문 제삼십이대 제자입니다. 그 것은..." 주천운은 기가 막혔다. 그렇게 따지자면 자신은 회오대사의 사사사조(師師師祖)라도 모자라니 무림최고 배분이 아 니겠는가? "대사께선 세속예절의 구애를 받지 않는 고승이신데 이러시면 소생은 몸둘 바를 모르게 됩 니다." "하오나, 소림의 위계질서(位階秩序)는 말할 수 없이 엄격한 것..." 주천운이 손을 저어 회오대사의 말을 막았다. "계속 같은 말이 될 뿐입니다. 정 그러시다면 평배로 해주십시오." "그것은..." 난처한 기색이던 회오대사는 주천운의 뜻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아보았다. "노납이 열반에 들면 달마조사의 면책을 면치 못할 거외다." 그의 어조가 바뀐 것은 주천운의 말에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달마대사께서 그런 분이라면 내 오늘 얻은 것을 모두 돌려주고 말겠소!" 두 사람의 눈길에 웃음이 머물렀다. "노납은 상상도 하지 못했소... 설마 전하께오서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용화삼회도의 비밀 을 풀어낼 줄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그렇게 친다면 노납은 너무도 운이 없구려." 허허 웃던 회오대사는 주천운의 앞에 몇 권의 책을 내밀었다.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 주해(註解)>. 맨 위의 가장 두터운 책의 표지는 뭇무림인들의 가슴을 떨리게 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이것은?" "노납의 평생 심득이오. 비록 달마대사께서 남기신 것보단 못할지 모르나 역시 그분의 것, 도움은 될 것이오." "대사..." 회오대사는 주천운의 말을 막았다. "받아주시오. 그리고 후에 인연이 닿으면 소림에 돌려주면 고맙겠소." "그러시다면... 하지만 대사께서 돌려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을지?" 회오대사는 빙그레 웃었다. "노납은 이미 시비에 관여치 않은 몸, 그것으로 만족하오." "그렇게 하지요. 반드시 소림사에 전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떡이던 주천운은 문득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대사를 다시금 시비에 끌어들여야 하겠소!" 회오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하가 노납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을 것임은 노납은 이미 알고 있었소..." 마주보는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고 그 미소는 이윽고 소리내어 터졌다. "하하하..." "허허허..." 두 사람의 마주쥔 손길에 힘이 들어갈 때, 싸리 울타리 밖에 석상처럼 서 있는 공월대사의 파르스름한 대머리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것은 하늘에 빛나기 시작한 별뿐이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리라! 문약한 대혜왕이 단 이틀 사이에 절대무쌍(絶代無雙)의 호국지존(護國至尊)으로 변신했음을. 그것은 그 누구도 모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제 7 장 무서운 음모(陰謀)의 소용돌이 이경 무렵. 밤의 나래에 묻힌 천기각(天機閣), 자신의 거처로 주천운은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오시옵니까?"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말하며 날아갈 듯이 궁신하는 두 궁녀(宮女)는 주천운을 시중드는 매 향(梅香)과 설란(雪蘭)이었다. "음... 별일없었느냐?" "예, 하온데 이황야께서 다녀가셨사옵니다." 매향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공손히 대답했다. "둘째 형님이? 무슨 일로?" "그것은 모르겠사옵고, 오시는 대로 조양루(朝陽樓)로 오시라는 전갈을 남겨두셨습니다." 조양루는 이황야 광덕왕 주뢰운의 거처다. "조양루로?" 주천운은 검미를 미미하게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만들 가 자도록 해라." "침전(寢殿)에 자리를..." "아니다. 서재에서 자겠다." 주천운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매향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전하, 옥체를 보중하소서." "?" 주천운은 흠칫 매향을 바라보았다.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듯하여 감히... 용서하소서." 주천운의 눈길을 의식한 매향은 허리를 굽혔다. 매향과 설란이 그와 같이 있은 지는 이미 오 년이고, 매향은 그보다 두 살 위인 스물이며 설란은 그와 동갑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격의없이 대했으나 책과 더불어 사는 그인지라 그녀들에게 신경을 써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는 오늘밤 문득 매향의 모습에서 성숙한 여인을 본 것이다. 물기를 머금은 듯 영 롱한 눈에 복사빛 뺨... 궁장을 비집고 나올 듯 부푼 가슴을 보라. 내 어찌 그 동안 이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임을 몰라보았을까? 주천운의 눈길을 의식한 매향은 얼굴을 도화빛으로 붉히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왜 이리 갑자기 가슴이 주책없이 뛰는가. 두근거리는 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시집갈 때가 되었구나." "예?" "아니다. 걱정 말고 그만들 가 자거라." 매향이 어리둥절해 고개를 드는 순간에 주천운은 담담히 미소하며 서재로 들어갔다. "..." 주천운의 뒷 모습을 쫓는 안타까운 두 눈길에 진하게 일렁이는 사모의 빛을 주천운은 아는 가, 모르는가? "언니는 좋겠네." 설란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계집애, 전하의 성미를 알면서..." 매향이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마주보는 그들의 눈에는 쓸쓸한 빛이 감돈다. 황가(皇家)에서는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허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주천운은 그녀들의 손 목 한번 잡지 않았던 것이다. 매일매일, 눈을 뜨기만 하면 거울 앞에 앉아 단장하는 것이 누구를 위함인가. 잠자리에 들 때가 되면 다시 오늘 하루도... 라는 탄식이 그녀들의 가슴을 치는 것이다. 주천운은 서재에 들어서 용교의(龍交椅)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명상(瞑想)은 주천운이 깊은 생각을 할 때 하는 버릇이며, 그 어떠한 난제(難題)라도 거기서 는 풀리기 마련이었다. 대혜왕이란 칭호는 거저 받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폐하의 심복들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상태... 그렇다고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다. 모든 것 은 암중에 처리해야 한다!' 주천운의 고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제의 그는 이미 오늘의 그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은 산과 같다. "우선... 형제들에 관해, 그리고 당금의 형세에 대해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천운은 품속에서 도면(圖面)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황제로부터 받은 봉서 중 하나였다. 눈이 어리도록 수많은 선과 점들이 교차된 도면 에는 열다섯 글자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자금성 내부 비밀통로와 기관배치도(紫禁城 內部 秘密通路與 機關配置圖)>. 그것은 자금성 내부의 모든 배치가 기록된 도면이었다. 황궁이란 만약을 대비해 비밀통로를 만들어놓는 법이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 통로를 건설한 자들은 죽음을 당한다. 그렇기에 황궁 내의 설계를 일부분은 알아도 황제 외에는 그 누구도 전부를 알 수는 없다. 그 기관도면이 지금 주천운에게 들려 있는 것이다. "내가 지난번에 서고에서 찾아낸 부본(副本)보다 훨씬 복잡하군..." 잠시 후, 주천운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촛불에 도면을 갖다 댔다. 한번 봄으로써 그 복잡한 도면을 기억할 수 있도록 주천운의 기관지학(機關之學)은 독보적이었다. 화르르-불꽃이 일며 주위가 갑자기 환해졌다. "음?" 문득 주천운이 흠칫 눈을 떴다. 모란(牡丹)! 식탁 위 청화자에는 두 송이의 모란이 꽂혀 있었다. 분명히 아침에 화로가 주천운에게 보여주던 그 모란꽃이었다. 그런데, 한 송이는 싱싱하건만 다른 한 송이는 완전히 시들어 있지 않는가? "저녁 때면 그것을 아실 수 있으오리다!" 화로의 말이 생생히 떠올랐다.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송이의 모란을 뽑아들고 잘린 부분을 살폈다. 틀렸다. 분명히 아침에는 똑같아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의 밑둥은 아침과 다름이 없건만, 죽어가는 것의 밑둥은 시커멓게 색이 변하고 거칠어져 있었다. "똑같은 것이 하나는 죽고〔死〕... 하나는 산다〔活〕! 이것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주천운의 음성은 심각했다. 두 송이의 모란! 그것을 통해 화로는 주천운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주천운의 뇌리에 아침에 화로가 가볍게 두 송이의 꽃을 자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칼! 그리고 마음...! 살리고 죽이는 것이 칼을 쓰는 마음에 달렸다는 말인가?" 그 순간이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조화(造化)에서 이루어져 사활(死活)이 거기 있으니 그것을 변(變)이라 부릅니다." 갑자기, 주천운의 등뒤에서 창노한 음성이 조용히 들려왔다. 대경실색할 일이었지만 주천운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화로가 평범한 화원지기가 아님은 알았으나 이토록 고심한 고수일 줄은 미처 짐작치 못했 소..."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맑은 그의 음성은 말할 수 없이 침착했다. 화로(花老). 주천운의 등뒤에는 화로가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주천운의 태도가 너무도 침착하자 오히려 그의 뒤에 서 있는 화로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 랐다. '노부의 행동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심 경악한 화로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노노야말로 전하의 능력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군요." 주천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화로는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소?" 그리고 그가 한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화로는 흠칫하더니 말했다. "배우시겠습니까?" "필요하다면." 주천운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로는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기저귀에 오줌 싸던 때부터 주천운을 보아온 그가 아니던가? '언제 이렇게 변했던가...' 감회 어린 빛이 스치는 것은 일순, 화로는 천천히 걸어가 서재 한쪽에 걸린 장검을 잡았다. 스르릉-! 가을물빛을 보듯, 서릿발 같은 검신이 드러났다. "선황폐하께서 하사하신 용천검(龍泉劍)이지요..." 담담히 중얼거리는 화로, 그러나 그는 이미 화로가 아니었다. 으드득-굽었던 허리가 쭉 늘어나며, 흐릿하던 눈동자에서 번갯불 같은 안광이 뻗어나니... 그것은 절대검수(絶代劍手)의 위태(威態)였다. "검은 백병지왕(百兵之王)이라 하는 만큼 이루기가 어렵고, 수련한 사람에 따라 그 방법도 다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정(精) 기(氣) 신(神)의 일치(一致)입니다!" 화로는 천천히 검을 세웠다. 단 한 손짓, 움직임 하나로 사방에 삼엄한 검기가 가득 찼다. "빠름을 위주로 하는 쾌검(快劍)은 발검(拔劍)을 가장 중요시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년 전에 고금제일의 쾌검을 연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화로의 말에 주천운은 나직이 부르짖었다. '노사의 여의섬(如意閃)이다!' "그러나 노노는 그와는 달리, 평생을 검의 변화(變化)에 바쳤습니다. 변(變)이라 함은 일단 검집을 벗어난 검이 언제 어느 때라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함에 중점을 둡니다." 검기는 점점 짙어져 마치 목에 검이 파고드는 듯했다. 그러나, 주천운의 태도는 맑게 가라앉은 물과 같이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용화대수미선공은 천하제일의 정력(定力)을 키우는 심법이며, 그것은 원래 주천운의 성품과 어울려 단숨에 그를 천하제일의 침착함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노노는 백년간의 정수(靜修) 끝에..." '백년? 화로의 나이가 이미 백 살이 넘었었단 말인가?' 아무리 침착한 주천운이라 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천하제일의 검결(劍訣)이 펼쳐지고 있는 것 이다. "천하검법의 모든 변화를 정리하여 삼십육형(三十六形)을 만들었습니다. 언제 어떠한 경우라 도 뜻〔意〕에 이르면 검에 변화(變化)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이 삼십육형을 일컬어 조 화의(造化意)라 합니다!" 검(劍)은 예술(藝術)이며 변화(變化)의 덩어리였다. 화로의 일검 일검과 한 동작마다에는 극도의 현기(玄機)가 어려 있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핫! 하나의 섬광(閃光)이 일어난다. 파파팍! 섬광이 깨어져 수많은 검화(劍花)가 유성(流星)과 같이 명멸(明滅)하니, 뜻〔意〕이 이르는 곳에 조화(造化)가 일어난다. 그를 일러 조화의(造化意)라 부르노라! 주천운은 미동도 않고 조화의 삼십육형을 눈에 담고 있었다.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까?" 천천히 시범을 보인 화로가 검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 주천운은 깊은 눈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로는 주천운의 눈에서 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제구형(第九形)에 몇 개의 변화가 일었는지 알아보셨습니까?" "아주 많았소." 주천운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여전한 눈빛으로 꿈꾸듯 말했다. '전혀 알아보지 못했단 말인가?' 화로는 내심 실망한 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제삼십육형에는 변화가 얼마나 있었는지? 틀려도 좋습니다. 알아보신 대로만 말씀하 십시오..." "빠르게 한번 더 보고 싶소." 문득 주천운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화로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전하, 검이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부담 갖지마시고 차근차근히..." 주천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욕심부리지 않을 것이오. 제구형에 겉으로 드러난 변화가 서른여섯이고 암중의 변화가 서 른여섯, 제삼십육형에는 마흔아홉의 변화가 있고, 암중 변화가 마흔아홉이오. 그러나 그것들 이 연용(連用)되면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데 내 어찌 그것을 한번에 다 배울 수 있겠 소?" "!" 화로는 두 눈을 부릅뜨고 굳어졌다. 어찌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아니,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다... 다 보... 보셨... 기억하신... " 화로는 평생 처음 말을 더듬었다. 아마 그의 기억으로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삼십육형의 기본형은... 하나, 조화의의 진정한 위력은 연용(連用)에 있을 것! 그것을 보고 싶소." "..." 화로는 말을 잃었다. 단 한번에 조화의의 오의(奧義)를 알아낼 줄이야!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잠시 멍청히 서 있던 화로는 문득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것은 환한 웃음으로 변모했다. "보여드리리다! 모든 것을...!" 화로의 검이 질풍신뢰처럼, 혹은 춘풍난매(春風亂梅)와 같이 움직이며 천변만화(千變萬化)하 기 시작했다. 쳐다볼 수도 없는, 아니 보아도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는 엄청난 변화, 그것은 조금 전과 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검세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토록 엄청난 검세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서재에는 검풍 (劍風)조차 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녕 조화의(造化意)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로는 무려 반 시진 만에 손을 거두었다. "조화의가 연용되면 종일이라도 다른 초식을 펼쳐낼 수 있습니다. 전하의 재지라면 단시간 내에 노노를 능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주천운은 화로의 말에 대꾸없이 또 아까와 같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 화로는 주천운이 자신이 보여준 검세를 생각한다고 짐작하고 방해치 않으려고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주천운이 입을 연 것은 잠시 후였다. "화로." "예... 전하." "삼십육형... 그 모든 변화를 단 일검에 쏟아낼 수는 없소?" "!" 화로는 또다시 굳어지고 말았다. 검에 있는 모든 변화를 연구하고 그것을 삼십육형에 수용하느라 백년을 보낸 그였다. 그것 만으로도 세상을 경악케 할 일이거늘, 주천운은 그것을 단 일검에 모을 수 없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조화의 일형에는 나머지 삼십오형이 이미 포함되고 있습니다. 모든 변화는 거기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참 만에 화로가 조용히 대꾸했다. 주천운이 맑게 웃었다.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나보오." 그것은 어쩌면 사실일 것이다. 여의섬이나 조화의나 모두 심도(心道)에 중점을 둔, 일반인은 평생을 배워도 그 오의를 깨닫 기 힘든 최상승검도인 것이다. 강맹무쌍한 검세로써 검도무적(劍道無敵)이라던 천뢰검존의 천뢰복마검법보다 앞서고 있는 것이 여의섬과 조화의였다. "..."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것을 먼저 깬 것은 화로였다. "전하께서 어찌 노노의 신분을 묻지 않으십니까?" "신분이 무슨 필요가 있소?" "?" 화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신분이란 상대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 나는 지난 십팔 년 간 화로를 보아왔으며 화로가 내게 적의가 없음을 알고 있소. 무엇이 더 필요하오?" "..." 화로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의 탁견(卓見)은 언제나 세인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노노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노부는 하후뢰라 불리며 선황폐하의 부탁으로 전하를 지킬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선황폐하의 부탁?" 주천운은 뜻밖인 듯 화로를 쳐다보았다. 하후뢰! 그가 누구인가? 바로 만패검성 종리관과 함께 절대쌍검이라 불리던 상승검마(常勝劍魔)가 아니던가! 백년 전 모습을 감춘 검도 최강고수가 황궁에 한낱 화궁지기로 있다니, 천하가 경악할 일이 었다. 더구나 그가 만패검성과 하루 사이를 두고 절기를 전하다니 이것을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 는가. "그렇습니다. 그분께선 노부에게 암중에 전하를 보호하도록 부탁하고, 만약 대내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면 전하께 무공을 전수하도록 하셨습니다." 화로의 어조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천기각에 있는 무공비급은 바로 그때를 위해 선황폐하께서 구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황궁이라 한들, 그러한 절세무예비서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화로는 이미 대내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느끼고 내게 무공을 전수시키 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노부는 전하께 이미 적잖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화로, 하후뢰의 목소리가 가라 앉았다. "노부는 어젯밤 전하를 감시하던 자를 죽여 입을 막아야 했습니다." "감시?" "그렇습니다. 황상폐하의 혼수상태 이후 전하의 주위는 감시자로 들끓고 있습니다. 그만큼 전하의 능력을...!" 갑자기 하후뢰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싹! 동시에, 예리무비한 음향과 함께 창문이 두 동강이 났다. 하후뢰의 검이 불을 뿜은 것이다. "대담한 놈들! 이젠 천기각 내에까지!" 살기 어린 음성과 함께 하후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휘-익! 왜소한 체구의 복면인이 무서운 속도로 천기각을 휘돌아 후원에 스며들었다. 복면 속의 두 눈에는 당황과 고통의 빛이 역력했으며, 옆구리를 움켜쥔 그의 신형은 위태로 웠으나 비할 바 없이 빨랐다. "흑!" 그러나,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그의 앞에 우뚝 선 하후뢰를 발견한 순간에 그 인영은 다급한 한소리 외침과 함께 그대로 뒤로 튕겨져날았다. 변초(變招)의 신속함은 상상을 절할 정도였다. "뭐가 그다지 급한가?" 하지만 낭랑한 음성과 함께 그 인영의 앞에는 주천운이 용포를 펄럭이며 나타났다. '오황야 전하!' 복면인의 눈에 절망의 빛이 떠오르며 그의 신형은 흠칫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고 그의 몸은 그대로 주천운을 덮치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단검이 무서운 속도로 주천운을 베어갔다. "비켜라!" 그것은 소름 끼치도록 괴기악독(怪奇惡毒)한 검초라 피하지 않았다간 그대로 피를 뿌릴 판 이었다. "피하시오. 전하!" 하후뢰가 대경해 벼락같이 솟아올랐다. 그 순간, 주천운의 품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쾌속(快速)한 금광(金光) 한 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캉! 동시에 복면인의 단검이 두 동강이 되면서 복면인이 나직이 신음하며 물러났다. 주천운의 손에는 찬란한 금광을 발하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토록 빠를 수가? 분명히 내가..." 복면인은 주천운과 눈빛이 마주치자 주춤주춤 물러나며 신음했다. 음성이 달라졌다. 그 음성을 듣자 주천운은 갑자기 복면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순간, 느닷없이 복면인이 반 토막 남은 단검(斷劍)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흥!" 차가운 하후뢰의 코웃음소리와 함께 복면인은 팔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면서 검을 떨어뜨리 고 말았다. 동시에 주천운의 손에서 금광이 번개같이 복면인을 휘감았다. 다음 순간, 복면인의 복면이 스르르 흘러내리며 뜻밖에도 그 속에서 여인의 얼굴이 나타나 지 않는가? 놀랍게도 주천운이 너무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설란(雪蘭)! 고통과 경악과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그 얼굴은 정녕 그의 시비(侍婢)인 설란이었다. * * * 천기각 서재의 안. 설란(雪蘭)은 종잇장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화로의 일검에 당한 옆구 리의 상처가 매우 깊었지만 그것 때문에 얼굴이 창백한 것은 아니었다. "노부조차 이 계집애의 마각(馬脚)을 발견치 못했으니... 무서운 계집입니다." 화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무 뜻밖이구나. 란아." 주천운의 음성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 묵묵부답, 설란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누가 시켰느냐?" "죽여주십시오." 주천운은 그녀의 음성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메마른 풀잎과 같은 것이 거 기에서 느껴졌다. "언제부터였느냐? 내게 올 때부터였더냐?" "죽여주십시오." 여전한 설란의 음성은 무감각한 것이었다. "발칙한 계집, 어디 네가 분근착골(分筋借骨)의 고통에서도 그따위 태도를 보이는가 보자!" 화로가 코웃음치면서 다가왔다. 지난날의 상승검마라는 무서운 존재가 바로 그인 것이다. "그만두시오." 주천운이 고개를 저었다. 주천운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힘있게 쥐었다. "고개를 들어라, 란아!" 그의 음성은 나직했다. 그러나 거기 어린 위엄은 그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란은 고개를 들었다. "!" 그녀의 가슴이 격하게 떨렸다. 주천운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설란은 자신이 으스러져 주천운의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지금 대내가 어떤 상황인지는 너도 잘 알 것이다. 자칫하면 천하가 위태로워진다! 어쩌면, 너의 말 한마디가 그것을 구할지도 모른다. 란아." "전하." 설란이 신음하듯 입을 열었다. "북경을 떠나시옵소서! 천비(賤婢)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입니다." 그녀의 눈이 감겼다. "이유가 무엇이냐?" 주천운의 음성은 미동도 없었다. "떠나십시오. 이곳은 이미 전하 같으신 분이 계실 곳이 아닙니다." 그녀는 감히 눈을 뜨지 못했다. 자신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사랑,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작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 겁이 났다. 홀로 키워왔 던 그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 진정으로 두려운 것이다. "나는 갈 수 없다. 나는 이미 시비에 휘말렸으니, 내가 벗어나고자 해도 남들이 용납하지 않 을 것이다." 주천운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너에게 전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전하를 도와드려라." 설란의 내심을 간파한 화로가 그녀의 내심을 찔렀다. 깨문 그녀의 입술에 피가 맺혔다. "천... 비가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힘든 한마디가 떨어졌다. 암중의 인물은 그녀가 이토록 쉽게 입을 열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믿을 수 없으리라! 여인! 그것도 소녀의 가슴에 박히는 주천운의 마력(魔力)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기 전에는. 아니, 그보다 제아무리 혹독한 단련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 모든 것이 다 부질없음은 또한 천고의 진리가 아니던가. "너를 사주한 자가 누구냐?" "모릅니다." "모르다니?" "천비를 부리는 자는 영주(令主)라고 부르는데 천비는 그의 지시를 받을 뿐, 그들이 누군지 모릅니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들에게 복종한단 말이냐?" 화로가 믿을 수 없는 듯 다그쳤다. "천비는 어둠 속에서만 지시를 받고 무공전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약을 공급받았습니다." "약?" 설란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예, 만약 그 약을 시간 내에 먹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무서운 고통과 함께 용모가 파괴 됩니다. 천비는... 일 년 전 그 약을 일부러 먹지 않았다가... 그 뒤로 천비는 감히 배반할 마 음은 먹지 못했습니다." 설란은 전신을 가늘게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젊은 여인에게 있어 용모의 파괴라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위협이 될 것이었다. 주천운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네 말대로면 그것은 훼용(毁容)의 만성극독인 것 같다. 언제부터 그들의 명령을 받았느냐?" "황궁에 들어오기 반 년 전인 다섯 살 때부터였습니다. 그때 이미 금제가 있었고..." "다섯 살?" 주천운과 화로가 어이가 없는 듯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것은 벌써 십삼 년 전! 부황께서 붕어하시기도 전이다. 우리 형제의 짓은 아니다!' 주천운은 상황이 실로 엄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암중의 상대는 실로 무섭도록 심원(深遠)한 포석(布石)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에 연락이 없었는데 전하를 모시기 반 년 전부터 다시 명령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곧 전하를 모시게 되니까 준비하도록... 천비는 도저히 그들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여주 십시오, 전하..." 설란은 오열하며 말끝을 흐렸다. 주천운과 화로는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천기각에 들기 반 년 전부터 준비라? 그것은 그들이 대내에 사람을 마음대로 배치할 수 있 다는 소린가!' 맙소사! 그것은 정녕 너무도 엄청난 일이었다. "그들과의 연락은 어떻게 하느냐?" "일정치 않습니다. 대개는 그들이 명령을 보내옵니다." "네가 연락을 하고자 하면?" "제 방 창문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한 시진 내에 연락이 됩니 다." "..." 주천운과 화로는 신음하며 마주보았다. 그녀가 거처하는 곳도 천기각이다. 그렇다면 천기각 자체가 무서운 이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시작을 너무 늦게 했는지도 모른다... 폐하가 감지(感知)한 힘은 예상보다 더욱 엄청나 다!' 주천운은 그것이 암중세력이라고 단정했다. "너 외에 그들에게 지배받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천비가 동패(銅牌) 구호라 불림을 보아 한두 명이 아닐 것 같고 그 위에 금과 은패(銀牌)가 있다면..." 기가 막혔다. 그렇다면 황궁에 첩자가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설란은 수혈(睡穴)을 짚혀 잠들고 있었다. "이 아이를 어찌하시겠습니까?" 화로가 설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했으면 좋겠소?" "안됐지만 죽여야 합니다. 저들의 세력은 막강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암중에 숨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화로의 어조는 냉정했다. "아직 전하께서는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닙니다. 그러자면 우선 저 아이의 입을 막아야 합 니다." "그럴 수는 없소!" "전하, 노부는 선황께 전하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전하 일신상의 문제가 아 니라 천하의 안녕이 걸린 일입니다." "화로는 다만 약속 때문에 나를 지키려 하오?" 주천운의 물음에 화로는 흠칫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화로의 눈에 어색한 웃음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랬었지요. 하나, 전하가 커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실 선황과의 약속기한은 이미 반 년이 지났습니다." 화로는 이미 주천운에게 친손자와 같은 진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아무리 관심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이 커오는 것을 이십 년 가까이 지켜보게 된다 면 애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에, 더구나 상대가 주천운임에랴! 주천운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소. 나 또한 화로를 할아버지와 같이 느끼고 있소." 그의 음성은 크지 않았으나 천하를 포용(包容)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하에 군림하는 제황(帝皇)에게나 나타나는 기도(氣度)였다. "황공합니다. 전하..." "심려 마시오. 나는 결코 일시적인 감상(感想)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겠소. 설란은... 큰 의 미가 있소!" 주천운의 눈이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백수십 년을 살아온 노부가 전하의 내심을 알 수 없으니... 과연 큰 그릇이다!' 은연중에 화로는 점점 더 주천운에게 심복(心腹)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 며칠 사이에 일어 나는 일이었다. "전하께선 이황야께서 왜 오라고 하셨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화로가 말머리를 돌렸다. "아마 내 의중(意中)을 떠보려고 하는 것 같소만..." "그렇기는 하나, 또 다른 뜻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뜻?" "어젯밤 전하를 감시하던 자는 일류고수였습니다. 그자가 갑자기 사라진 이상, 보낸 곳에서 의혹을 느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둘째 형님이 그자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처음 행동을 보인 곳이 이황야시니 만약 그렇다면, 틀림없이 전하께서 무공을 지니고 계시 는가 시험할 것입니다." "음...!" 주천운이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물론 전하의 기지로써 모든 것을 무사히 넘길 수 있겠지만, 만약 초일류고수가 전하를 본 다면..." 화로가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알아볼 수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전하의 눈에는 은은히 신광이 서려 있어 초일류고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건 곤란하군..." 주천운이 난처한 빛을 지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무서운 힘줄기가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이 주천운의 몸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것은 단전에 이르러 가공할 기세로 아래위로 갈라졌다. 장강(長强)에서 은교(齒艮交)에 이르는 독맥(督脈) 이십팔 개 혈과 회음(會陰)에서 승장(承 漿)에 이르는 임맥(任脈) 이십사 개혈 도로 갈라진 힘줄기는 뻗어가고 있는 것이다. '임독이맥을 타통하면 음양이기(陰陽二氣)의 조화로 단숨에 절강고수(絶强高手)가 되어 무공 을 익힌 흔적을 나타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화로의 말은 이제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지 겨우 이틀의 주천운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불가 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량(最良)의 신체(身體)에 쏟아부어진 개정벌모세수대법(開頂伐毛洗髓大法)과 최고(最高)의 내공인 용화대수미선공(龍華大須彌禪功)! 거기에 상승검마라는 무서운 고수의 도움이 그것 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우드득! 우드득... 주천운의 온몸에서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잇달아 터져나오고, 그의 얼굴에서 아니, 온몸이 금방이라도 피가 쏟아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퍽! 동시에, 그의 몸에서 두 가닥의 형언할 수 없는 힘줄기가 부딪치는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기대보다 너무도 어이없이 간단이 이루어진 임독이맥의 타통(打通)이었다. 단정히 앉은 주천운의 몸 주위에는 장엄한 서기(瑞氣)가 어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 뒤로 달 무리와 같이 은은히 떠오르는 후광(後光)은 신비롭게 보였다. '내가 보고도 믿을 수 없구나! 누군가가 전하 몸의 기질(氣質)을 바꾸어놓기는 했지만...' 피곤한 몸으로 주천운의 명문혈에서 손을 뗀 화로는 운기조식할 생각조차 잊은 듯했다. 문약(文弱)한 서생 주천운은 이제 단 이틀 사이에 임독이맥이 타통되는 기적(奇蹟)을 낳으 며 변신하고 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늘의 모든 안배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으며 이틀 사이에 그 의 전신에 집중되어 그것을 가능케 하였다. 그 중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은 화로가 그간 암중에 밤마다 주천운의 몸을 내공으로 씻어주었 기 때문에 그의 신체가 실제로는 무공을 익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 * 조양루(朝陽樓)! 이름에 걸맞게 아침 햇살 속에 빛나고 있는 그 누각은 이황야인 광덕왕(匡德王) 주뢰운(朱 雷雲)의 거처다. "오황야께서 듭시옵니다." 환관의 긴 소리와 함께 조양루에 들어서는 용포 귀공자는 주천운이었다. 그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 피곤한 빛이었으나 두 눈만은 변함없이 맑았다. "안에 형님 계시느냐?" 주천운이 마중나온 조양루 상궁 궁씨(宮氏)에게 물었다. "보월당(寶月堂)에 계시옵니다. 잠시만, 곧 통보..." "통보할 것 없네! 내가 나왔으니." 낭랑한 음성이 궁상궁의 말을 가로챘다. 낭하를 가로질러 화려한 관복의 대한이 나타났다. 훤칠한 체구에 용모가 몹시 빼어나고, 눈빛이 매우 날카로워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볼 듯했다. "처남이 이리 일찍 올 줄 몰라 마중이 늦었소. 하하하..." 호탕히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나이는 금년 서른다섯, 바로 주천운의 누이인 난정공주(蘭亭 公主)의 남편인 부마(駙馬) 백문우(白文宇)였다. "매형(妹兄)께서 이 아침에 어떻게 여기에 계십니까?" 주천운은 뜻밖인 듯 백문우를 바라보았다. "황상께서 환후 위중하신데 내가 어찌 사가(私家)에서 편히 쉴 수 있겠소? 안 그래도 처남 이야기를 하던 참이오. 자, 들어가십시다!" 부마 백문우는 주천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아귀 힘은 대단하며 문약(?)한 주천운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평소에 그는 그렇게 심하게 주천운을 다룬 적이 없었다. 보월당(寶月堂)은 조양루의 내실과 같은 곳이다. 눈이 어리게 화려한 보월당의 가운데는 두 개가 되는 단향(檀香)으로 된 팔선탁(八仙卓)이 놓여 있었고, 지금 그 팔선탁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용포에 통천관을 쓴 좀 뚱뚱해 보이는 호인상(好人像)의 남자가 바로 이황야 주뢰운이고, 그 옆에 나의(羅衣)에 궁장을 한 소부(小婦)는 그의 부인인 광덕왕비(匡德王婢) 심려려(沈麗麗) 였다. 그녀의 미모는 상당했으며 눈빛은 뚜렷하여 그녀의 성정(性情)이 보통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온몸이 찬란하도록 패옥(佩玉)으로 장식한 궁장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 녀가 바로 난정공주인 주수경이었다. "오황야께서 드십니다." 주천운과 백문우가 들어서자 이황야 주뢰운이 특히 반겨했다. "너냐, 어제는 어디..." 순간, 문지방을 넘어서는 주천운이 앞선 백문우의 발에 걸려 넘어지려 했다. "조심하소서!" 문 옆에 서 있던 위사(衛士)가 다급히 주천운을 부축했다. 그런데, 그것은 우선 주천운을 잡으려고만 하다 보니 위사의 손이 주천운의 견갑(肩月甲)을 강하게 움켜쥔 꼴이 되고 말았다. "으윽...!" 주천운은 반신이 마비되고 어깨가 부서져나가는 듯한 통증에 부지중에 신음을 흘리고 말았 다. "죄, 죄송... 황공하옵니다. 전하,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위사가 황급히 손을 떼며 물러섰다. 비틀거리며 고개를 드는 주천운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괜찮다... 고맙다."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 밑에 고통을 참는 노력이 스며 있음은 눈이 좋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아볼 수 있었다. "조심해 부축을 할 것이지! 오히려 큰일날 뻔하지 않았나? 물러가라!" 백문우가 위사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광경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주시하는 눈이 있었다. 광덕왕비 심려려, 깜짝 놀란 듯한 그녀의 눈빛 속에는 더 할말 없이 냉정히 번뜩이는 또 하 나의 눈이 감추어져 있었다. "괜찮으냐?" 이황야 주뢰운이 다가오며 물었다. "예." "거 모두 처남이 너무 책에만 파묻혀 지낸 때문이오. 문지방에 걸려넘어지다니..." 백문우가 껄껄 웃었다. 그의 발에 주천운이 걸린 것이 과연 우연인가... "어제 소제를 찾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천운의 말에 이황야 주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다." "무슨 일입니까?" "폐하의 환후 때문입니다." 난정공주가 맑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주천운은 평소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형제들과의 사이는 좋았다. 어쩌면 그가 대권과는 무 관하기 때문인지도 몰랐지만... "폐하의 환후가 위중하여 언제 큰일을 당할지 모르는 이상, 그 대책을 마련해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황야가 헛기침하며 입을 떼었다. "원로대신들이 숙의(熟議)하고 있을 겁니다." "모르는 소리! 그들은 눈치만 보고 있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이황야가 목청을 돋우었다. "일단 유사시 그들은 서로의 세력에 눈이 어두워 중구난방이 될 것이니 황실 자체 내에서 어떤 결정을 해두어야 될 거요." 부마 백문우가 침착히 입을 열었다. "더구나 그 시기는 빠를수록 민심과 조정이 안정될 수 있을 것이오." 백문우의 말에 주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황실의 일은 황실이 처리해야 하는 것이니 만큼! 그래서 오늘 너를 여기로 불렀 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습니까?" 주천운은 주뢰운을 바라보았다. 그 태도는 너무 침착해 주뢰운은 주눅이 들어 할말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제기랄, 도대체 이 녀석 앞에서는 기를 못 펴겠다니까!' 그때, 광덕왕비 심려려가 탁자 밑에서 슬며시 그의 발을 밟았다. 문득 정신을 차린 주뢰운은 힐끔 심려려를 바라보고 목에 힘을 주었다. "우리 형제는 모두 일곱이고 누이가 두 사람 있지 않으냐? 한데 모두가 제각기 뜻이 다르 다. 우리들 중 누가 어떤 제안을 한다면 필경은 무조건의 반대가 있을 것이다. 주뢰운은 어깨를 으쓱 하더니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한 사람, 네가 일을 한다면 아마 그다지 반대가 없을 것이고 우리들도 그렇다. 그래 서 우리들과 여섯째가 모여 어젯밤에 숙의를 거듭한 결과!" 주뢰운은 주천운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가 너를 추대하기로 합의했다!" 너무도 뜻밖의 말, 주천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허허허... 천하제일이라는 네가 설마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단 말이냐? 우리가 너를 큰형님의 뒤를 잇도록 밀겠단 말이다!" "하하... 사양치 마시게.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만큼." 백문우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섯째가 어떤 사람인데 지금의 시국을 모르겠어요? 자칫 어떤 불상사가 있기 전 에..." 난정공주도 남편 백문우의 말을 거들었다. "형님!" 주천운이 난정공주는 쳐다보지도 않고 주뢰운을 보았다. "지금의 그 말씀 진정입니까?" "그야 이를 말이겠느냐?" "왜 하필이면 소제를 지목하셨습니까? 소제가 권력에 관심이 없음을 아시면서." "우리 형제 중 너와 사제(四弟)가 가장 뛰어났지만... 네가 공평무사함을 모두가 다 아는 터! 그러니 너를 택한 것이지!" 주뢰운은 조금도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승낙하겠습니다! 천하를 위하는데 제 한몸의 편안만을 바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의외(意外)! 주천운의 말은 너무도 뜻밖의 말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강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주뢰운은 불그스레한 얼굴이 느닷없이 창백히 질려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심려려 백문우, 난정공주까지 모조리 안색이 나무껍질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 일순간, 침묵이 장내에 휘몰아쳤다. "그... 그... 그러... 냐? 고... 고맙... 다." 주뢰운이 얼굴을 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딱딱히 굳어 있어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힐끔힐끔 잇달아 심려려를 쳐다보았다. "!" 일순, 그의 미간에 고통이 주름잡혔다. 광덕왕비 심려려는 탁자 밑에서 주뢰운의 발을 꽉 밟으며 낭랑히 웃었다. "호호호... 너무 뜻밖이군요! 우리는 다섯째 전하를 설득시키기에 아주 애를 먹을 것으로 생 각했는데..." "그,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백문우가 뒤따라 얼굴을 펴면서 웃었다. 대단한 여인이었다. 여지껏 한마디도 안 하고 있다가 대번에 어색한 국면을 풀어 놓은 것이다. "그, 그러게 말이야..." 주뢰운도 따라서 허허 웃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불만인 것도 같고 의혹인 것도 같으나 아무 소리 못하는 듯 보였다. 주천운은 그것을 보고 내심 탄식했다. '둘째 형님이 형수만 같았다면 오늘날 사태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여전히 고요했다. "형님!" "으, 응, 왜 그러느냐?" "형수님!" "예, 말씀하시지요." 심려려가 주천운을 건너보았다. 내심 당황한 듯했으나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음을 주천운은 알아볼 수 있었다. "소제는 권력에 관심이 없음을 이미 넷째 형께 밝힌 바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제 는 권좌(權座)에 관심이 없습니다." 주천운은 끊어 말하듯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더 이상 소제를 시험하려 하지마십시오. 소제는 형제간의 우애가 깨어지지 않고 조용히 일 이 마무리 지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중인들의 안색이 무참해질 때였다. "형님, 다섯째 형님이..." 누군가가 외치며 보월당에 들어섰다. 용포를 걸친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귀공자, 그가 금년 열일곱의 육황야인 진명왕(眞明王) 주 소운(朱 雲)이었다. 그는 이황야의 동복동생(同腹同生)으로 위인이 평범하여 이황야의 의도 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육황야는 주천운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주천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제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이런 식의 시험은 형님께는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다, 다섯째, 그, 그게 아니다! 나, 나는 정말...!" "이후 이런 일로는 형님과 얼굴을 마주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 주천운은 담담히 이황야 주뢰운의 말을 자르고 걸음을 옮겼다. 육황야 주소운과 주천운의 눈길이 마주쳤다. "여섯째!" 주천운이 가볍게 육황야 주소운의 어깨를 잡았다. "..." 하나, 주천운은 이내 가볍게 탄식하며 주소운을 스쳐지났다. 그의 뒷모습을 쫓는 육황야 주소운의 눈빛이 기이하게 흔들렸다. "낭패군! 낭패야, 이런 창피막심할 데가 있나?" 주천운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황야 주뢰운의 얼굴이 벌게지며 침묵을 깨뜨렸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빼도 박도 못하게 될 뻔했잖아요?" "그렇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오." 난정공주의 말에 부마 백문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뛰어났어요. 비록 허를 찔리기는 했지만." 심려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눈길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매달렸다. 그런 무의식적인 행동은 그녀의 행동이 은연중에 좌중을 지배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에 다 름이 아니었다. "다섯째 전하의 의중(意中)을 확인한 이상, 결과는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넷째가 있지 않소? 넷째에게는 구문제독(九門提督)과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의 막 강한 세력이..." "호호호... 우리쪽이 그쪽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가요?" "옳습니다. 안사람까지 합해 이쪽은 모두 셋이고 그쪽은 하나 뿐입니다." 광덕왕비 심려려의 말에 부마 백문우는 선황의 칠자이녀(七子二女) 중 이자일녀가 이쪽에 있음을 강조했다. "셋째도 만만치 않지! 일곱째도 심기가 깊고..." 이황야는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처남도, 별걱정을 다하시오. 넷째 전하 외에는 마음이 있어도 힘이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손을 잡는다면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을 겁니다." 육황야인 주소운도 거들었다. "두 분은 우리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군요? 더구나 그들은 힘을 합할 수 없어요." 이황야가 왕비인 심려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주장의 전형을 보는 것 같은 그림이었다. '왕비가 아니라면 둘째와 여섯째 처남의 그릇으로는 도저히 넷째 처남과 겨룰 수 없다! 셋 째와 일곱째 처남조차 능가할 수 없을 것이다...' 부마 백문우는 입맛이 썼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그의 안색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제 8 장 발동하는 호국지존(護國至尊) "별일없으셨습니까?" 주천운의 귀에 화로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주천운은 화단에서 나무 손질하고 있는 화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란의 동태는 어떻소?" 그의 입에서도 전음이 흘러나왔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청대법(天聽大法)으로 일거일동을 놓치지 않았는데, 역시 전하께서 보신 대로 믿을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주천운은 화로의 전음을 스쳐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 누가 유심히 보았어도 그들이 대화를 나누었음은 짐작조차 못하리라! "이제 오십니까?" 천기각을 경비하는 금군위장(禁軍衛長)이 허리를 굽혔다. "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천기각을 들어서던 주천운이 금군위장을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나는 서재에 들어가니 하인(何人)을 막론하고 천기각의 출입을 금하라!" "알겠사옵니다." 금군위장이 다시 허리를 굽혔다. 금군위장이 허리를 폈을 때, 주천운의 모습은 이미 천기각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또 며칠이나 계시려는 것인가..." 금군위장이 중얼거렸다. 주천운이 이런 식으로 서재에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인형(人形)! 백옥(白玉)으로 깎아만든 정교한 소녀상이었다. 주천운은 서재에 조용히 서서 탁자 위에 올려놓은 한 자 가량의 그 소녀상을 바라보고 있었 다. 팟! 한 줄기 섬광과도 같은 금광(金光)이 갑자기 뻗어나는가 싶은 순간에 사라졌다. 주천운의 어깨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뿐, 그의 손은 품속에 있었다. 주천운은 걸음을 옮겨 손을 내밀어 소녀상의 머리를 건드렸다. 툭-! 순간, 소녀상의 목이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여의섬(如意閃)의 빠름은 절대적(絶對的)이다. 그러나..." 주천운은 고개를 저었다. 품속에 있던 손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사방이 찬란한 금광으로 가득 찼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한 자 가량의 금검(金劒)이었다. "호국지존병(護國至尊兵)은 검이 이르지 않아도 검기(劍氣)가 사람을 상해할 정도의 절세신 기(絶世神器)다." 주천운은 천천히 호국지존병을 들어올렸다. 형언할 수 없는 검광이 서린 검신이 눈에 들어왔다. "여의섬의 그 가공할 빠르기와 호국지존병의 검기가 합쳐지면 천하의 무엇도 견뎌내지 못한 다..." 주천운의 눈이 잘려진 백옥소녀상의 목으로 향했다. "노사는 수십 년... 아니 백년의 노력으로 여의섬의 여의(如意)의 경지에 올렸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검도입문(劍道入門) 삼 일! 주천운의 이 말은 천하무림인의 입맛을 잃게 하고 의욕마저 상실케 할 말이었다. 그러나, 주 천운은 삼 일에 이미 남이 삼십 년에도 할 수 없는 기적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기적이 아님은 또한 사실이기도 하였다. "빠름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상, 살검(殺劍)이 되고 빈틈마저 드러나게 된다." 주천운은 원래 백옥소녀상의 목을 벨 생각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여의섬의 검세가 너무 쾌속해 그것을 제어(制御)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주천운보 다 십 배 나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노화순청(爐火純靑)! 화로 속의 불길이 최고로 타올라 푸르게 되는, 극고(極高)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수련(修 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게는 방법이 있다!" 주천운의 입가에 신비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슥... 그의 손이 뒤집어지며 호국지존병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찬란한 금광이 금룡이 움직이듯 꿈틀거렸다. 엄청난 검세의 변화가 목 없는 소녀상을 휩싸고 돌았지만 미풍이 일 뿐이었다. 파파-팟! 산더미 같은 검광이 무섭게 명멸(明滅)하며 느닷없이 내리꽂혔다.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을 가슴에 모으고 서 있었다. "조화의(造化意) 삼십육형은 천하무쌍의 변화를 가지고 있다." 투투-툭- 그의 말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순간에 소녀상의 전신에서 마치 허물 벗어지듯 옥조각이 떨어 져나가며 그 자리에는 소녀상 대신에 둥근 옥주(玉柱)만 남았다. 한 순간에 호국지존병이 소녀상의 조각된 부분을 모조리 깎아내버린 것이다. "발검에 있어 여의섬을 따를 것은 없고 변화에 있어 조화의를 따를 것은 없다... 그 두 가지 는 하나일 수도 있다." 조용히 흘러나온 그의 말은 너무도 거대한 외침이었다. 검도입문 삼 일의 햇병아리인 주천운이 절세고수 두 명이 백 년 노력한 정화(精華)를 감히 합치겠다는 것이다. 여의섬의 가공할 빠르기와, 조화의의 그 엄청난 변화! 천하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변화무쌍한 이 두 검식이 합쳐질 때, 과연 그 무엇이 호국지존 병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서재(書齋). 책 냄새가 진동하는 주천운의 서재에서 이런 절대무적(絶代無敵)의 검식이 탄생되고 있음을 누가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알아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주천운의 눈은 호국지존병의 끝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눈은 하늘보다 더욱 맑고 고요했다. 그가 이런 자세로 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미 세 시진이나 지나고 있었다. '검도는 마음〔心〕... 이 두 가지 검식의 근간(根幹)은 마음이고 천지조화가 마음에서 비롯 한다.' 주천운의 마음은 차츰 비워지고 뇌리는 명경지수와 같이 맑아졌다. 주천운(朱天雲)! 이 절세의 기재는 법을 배우고, 술(術)을 배우기 이전에 도(道)를 배웠기에 일반인들이 상상 할 수 없는 속도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호국지존병이 소리도 없이 그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은 검을 놓고 홀가분 해졌다. 검을 놓은 그의 태도는 약간 허전한 듯했으나 이내 정상이 되었다. 그의 몸에는 담담한 서 기가 어리고, 두 눈이 푸르도록 맑아질 때, 그의 전신은 한없이 부드럽고 장중한 기세를 형 성해냈다. 그 누구도 그를 마주대하기가 힘에 겨울 그러한 기세였다. 팟! 그의 손이 움직인다 싶은 순간에 그의 품속에서 금광이 폭발하듯 튀어나와 소녀상에서 옥주 가 된 백옥을 덮쳤다. 백옥주가 단숨에 두 동강이 될 것 같은 순간, 주천운의 신형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손 을 뻗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호국지존병! 그 절세신기는 금광을 뿌려내며 옥주(玉柱) 위에 닿을 듯 멈추어져 있었다. 옥주와 호국지존병의 사이에는 머리카락조차 통과할 수 없으리라! 주천운의 입가에 담담히 회심의 미소가 번져갔다.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조금의 시간만 있으면 여의섬과 조화의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 양대고수의 절학이 합쳐지는 것이 너무도 간단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주천운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우연히도 그 양대절기가 모두 심도(心道)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길을 같이하고 있었기에 주천운이 거기에서 공통점을 찾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주천운이 내심 기쁨을 금치 못할 때, 금광이 찬란히 빛나며 호국지존병에서 무서운 검기가 일어났다. 마치 두부토막 잘라지듯 옥주가 두 동강이 나 갈라졌다. 검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검기만 으로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기쁨 때문에 나도 모르게 공력을 일으켰었군..." 주천운은 검을 거두며 정신을 차렸다. 주위는 어느새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그토록 빨리가고 있는 것이다. "무공에만 정신을 쏟을 수는 없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주천운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뇌리에 용화대수미선공의 구결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신이 하나이면 안 된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주천운은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서재의 한쪽으로 다가갔다. 드르르-! 그가 벽면을 쓰다듬는 순간,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육중한 서탁(書卓)이 가라앉으며 벽에 암 도(暗道) 하나가 나타났다. 이 비밀통로는 그가 어제까지도 몰랐던 것이었다. "도면에 따르면 대내 어디에도 비밀통로가 없는 곳은 없다..." 드르르... 서탁이 다시 올라오는 소리가 주천운의 말소리를 집어삼켰다. 원상이 회복된 서재에는 이미 주천운의 모습은 없었다. * * * 조양루에도 어김없이 밤의 나래가 퍼져 있었다. 사방에는 숙위(宿衛)하는 위병(衛兵)들이 오가고 있고, 요소요소에는 횃불이 대낮같이 타오 르고 있었다. 후원 곳곳에는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숙위하는 위사들로 개미새끼 하나 스며들 수 없는 곳 이 바로 조양루다. 그런데, 개미보다 수백 배나 큰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소리도 없이 조양루 후원을 빠져나가 고 있었다. 인영의 신법은 대단해서 위사들은 눈치조차 못 챌 정도였다. 인영의 온몸은 칠흑 같은 야행의로 뒤덮이고 얼굴에서도 드러난 것은 눈밖에 없었다. 인영 은 대내의 지리를 잘 아는 듯 조양루를 빠져나가 신속하게 자금성을 벗어났다. * * * 동가로(東街路). 북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로다. 대한장(大漢莊)은 선대에 역적으로 몰려 구족구멸(九族具滅)의 참변을 겪은 좌승상(左承相) 호유용(胡惟庸)의 저택이다. 지난날 그처럼 영화롭던 그 저택이었지만 이젠 세월이 지나면서 폐가(廢家)가 되었다. 어둠 이 깃들면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곡성이 들린다는 이곳이니 자연히 인적이 끊어질 수밖에 없 다. 무너진 누각에서 누각과 어우러져 머리를 풀고 흐늘거리는 잡초는 귀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인영 하나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대한장의 후원에 스며들었다. "서어어라..." 괴이한 음성이 소름 끼치게 울리며 인영의 앞을 막았다. 주위가 대번에 귀이한 공포로 가득 찼다. "태원(太元)." 인영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입을 열었다. "신분을."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스르르 인영의 앞에 나타나며 말했다. 인영이 아무 말 없이 손을 쳐들었다. 그 손 안에서 세 치 가량의 금패(金牌)가 반짝였다. "..." 귀신이 아무 소리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사라졌다. 인영은 쉬지 않고 움직였고, 그 인영의 앞에 낡은 전각 하나가 나타났다. 인영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좌우에서 검이 뻗어나 인영의 목을 노렸다. 그것은 거의 기척도 없는 어둠 속의 암습이었으나, 인영은 이미 그 공세를 벗어나 있었다. "치워라. 나는 금패사자(金牌使者)다." 인영이 차갑게 외쳤다. "물러가라." 냉막한 음성이 들리며 우람한 체구의 복면인이 나타났다. 팍! 동시에 사방이 환해지며 주위의 모습이 드러났다.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안은 매우 깨끗했으며 사방에는 두터운 휘장이 내려져 있어 조금의 빛도 스며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대청인 듯한 이곳에는 십여 명의 흑의검수가 무표정히 늘어서 있었다. 인영의 앞에 나타난 복면인의 기도는 범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오?" 인영이 냉랭한 어조로 복면대한을 바라보았다. "그분이 오셨소이다." 복면대한의 대답에 인영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기다리고 계시오." 스-윽! 복면대한의 신형이 계단을 날아 이층으로 올라갔다. 인영은 아무 소리 없이 몸을 날려 복면대한의 뒤를 따랐다. 그분이란 소리에 거만하고 냉담하던 태도는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누각 삼층. 대단히 화려하고 대낮같이 불이 밝혀져 있으나 역시 밖으로는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곳의 가운데는 두터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복면대한과 인영은 그 휘장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룁니다. 금패사자가 당도했습니다." "영주는 주위를 물리도록 하라." 휘장 안에서 얼음과 같이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복면대한과 함께 휘장의 좌우에 늘어서 있던 자들이 물러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그렇게나 빨리이옵니까?" 한데, 난데없이 인영이 떨리는 음성으로 느닷없이 외치며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닌가. 침묵이 아니라 암중으로 지시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유는 필요없다!" 차가운 음성이 예리하게 말을 잘랐다. "하, 하오나... 사황야와 삼황야, 칠황야 등의 세력이... 더욱이 사황야의 기반은 실로..." "금패사자, 많이 대담해졌군! 감히 말대꾸까지 하다니..." 차가운 웃음이 휘장 안에서 흘러나왔다. 인영의 눈빛에 공포의 빛이 뚜렷이 드러났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인영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명대로 시행하라. 만약 힘〔武力〕이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나서겠다!" "친히... 말씀이십니까?" 엎드린 인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렇다. 무림의 일이 순조로운 이상, 그보다 늦출 수는 없다. 더구나 황제가 위중하다면 내 가 반 년 일찍 온 것이 잘된 것이다." "봉명하오리... 다." 인영이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오황야... 그의 동정은 어떠한가?" 차가운 음성이 여운을 두었다. "그가 황위에 미련이 없음은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믿을 수 있느냐?" "속하가 친히 확인해보았습니다." 인영이 공손히, 그러나 자신있게 대답했다.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안에서 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결코 간단한 인물이 아니다. 눈을 떼지마라." "..." 인영은 다시금 휘장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의 신형은 뜻밖에도 왜소했다. * * * 천하기밀부(天下機密府)! 그것을 알 자격을 지닌 사람은 황제뿐이기에, 이런 곳이 존재함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천운은 황제가 아닌 사람으로 유일하게 천하기밀부에 들어선 사람이 되었다. 사방 십 장, 이것이 천하기밀부의 넓이다. 이 엄청난 넓이의 천하기밀부는 지하에 단 한 칸의 거대한 석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책(冊), 문서(文書), 도록(圖錄) 등 이것이 사방 십 장의 천하기밀부의 사면을 메우고 있는 전부다. 그 엄청남은 황궁의 서고에 육박하고 남음이 있었다. 그 규모에 걸맞게 여기에는 천하의 대소사(大小事)가 모두 집약(集約)되어 있는 것이다. "정녕 대단하군! 천하가 여기 모인 듯 일목요연하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 이 아니로다..." 대강 사방을 살펴본 주천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천하기밀부는 바로 봉천전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천하기밀부는 실로 역대 제왕(帝王)들이 남긴 걸작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대번에 알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인물, 학술, 무림, 황궁 등... 그 모든 것들이 세세히 분류되고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황궁편을 훑어보던 주천운은 다시금 감탄했다. 역대 황제 대의 일이 모두 소상히 적혀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주천운 형제들의 세력 분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까지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금의 황제가 남긴 것이었다. 무림편을 둘러보던 주천운은 또 놀랐다. 무림의 역사, 인물, 방파, 전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언급된 것 외에, 상당한 수로 보이는 각파비전의 비급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황궁의 힘은 세인이 생각하는 바를 초월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황궁의 상황과 무림에 대한 것만이 절실하다... 나머지는 내가 거의 아는 것이다." 그의 음성은 고요하나, 그 의미하는 바는 또한 너무도 광오할 만큼 엄청났다. 그것은 대혜왕 (大慧王)이란 이름이 헛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강 주위를 둘러본 주천운은 뇌리 속의 기관도면을 더듬었다. 그의 손이 서가의 한쪽을 미는 순간에 기관이 움직이는 그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서가가 쫘악 밀려나며 넓이 일 장여의 통로가 나타났다. <장보고(藏寶庫)>! 이 장 가량 길이의 통로 끝에는 큼직한 철문이 있었다. 거기에 새겨진 세 글자는 무한히 매력을 풍기는 뜻을 가진 것이 아니던가. "장보고라..." 주천운은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철문 옆의 기관을 작동시켰다. 과르르- 우렁찬 음향과 함께 철문이 열리는 순간에 주천운의 온몸은 휘황한 보광(寶光)에 파묻히고 말았다. "오-!" 천하의 주천운. 그의 입에서조차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왔다. 보고(寶庫)! 그 외에 또 무엇으로 이곳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장보고 안의 넓이는 천하기밀부를 능가할 지경이었는데, 거기에 가득한 것이 모두 금은주보 (金銀珠寶)였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각종 장신구(裝身具), 희귀한 약초에서 천고(千古)의 신병(神兵)에 이르기까지... 귀한 것이라 면 없는 것이 없었다. -천하기밀부와 장보고는 대명회생(大明回生)의 한 가닥 잠력(潛力)이다. 너라면 충분하리라! 주천운의 귀에 황제의 외침이 다시금 들리는 듯했다. "그랬었군... 폐하께서 반 년 동안에 사태를 수습하라는 것은 이런 힘이 있었기 때문이군..."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그의 손에 놓인 마지막 봉서로 향했다. * * * 다음날 저녁 무렵. 주천운은 천기각의 서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았되 실상은 밤을 꼬박 세고 방금 전까지 천하기밀부에서 쓴 기력을 운기조식하여 회복하는 중이었다. 그의 몸 주위에는 부드러운 서기가 흐르고 있었다. 설란이 조용히 그의 뒤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조용한 음성이 그녀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운기조식 중에 말을 전하다니... 도대체?' 주천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경악 속에 물결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애틋하기만 하였다. 이제 그 감정을 표현 한다는 것은 영원히 지난 일일 뿐이었다. "지시가 왔습니다." "지시?" "예, 전하의 동태를 예의주시, 단 한 순간도 놓치지말라는..." "언제 명령을 받았느냐?" "천비도 그 시간은... 아침에 일어나니 비둘기를 통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 주천운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설란은 잠시 기다리다 주천운에게 절을 하고 물러가려고 했다. "란아." "네?" "연락을 해라. 급히 보고할 것이 있다고." 설란이 나가고 나자 주천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이 빨려들 듯 깊은 눈이었다. '나를 감시하라...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되었단 말이지?' 그 눈은 이미 조용하지 않았다. * * * 태산보다 더 높은 가슴이 탄력있게 출렁인다. "아아..." 익숙한 손이 사납게 가슴을 터뜨리자 여인의 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매끈한 허벅지에는 탄력이 꿈틀거리고, 그 희디흰 허벅지와는 너무도 선명히 색의 대조를 이루는 여인의 신비지문은 처절한 유혹이었다. "소군(素君), 너는 갈수록 나를 홀리는 구나!" 욕정에 들뜬 음성과 함께 여인의 몸 위에는 우람한 남성의 몸이 실려 있다. "아흑... 아아...!" 여인의 입에서 신음인 듯,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사내의 등을 끌어안은 여인의 손끝은 열락(悅樂)으로 떨리고 있었다. 구문제독(九門提督) 정고풍(丁古風). 북경의 치안(治安)을 맡아보는 암중의 실력자, 이부상서와 함께 사황야인 흥문왕(興文王) 주 성운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힘이 큰 이유는 그가 흥문왕 주성운의 어머니 정귀인(丁貴人)의 오빠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지금 애첩인 지소군을 데리고 쾌락에 젖어 있는 것이다. "허... 허헉... 지난 사흘간이나 너무 바빠... 너를 품지... 모... 못했..." 구문제독 정고풍은 연신 탁한 숨을 뱉어냈다. "아... 언... 제까지 그렇게 바쁘... 세요...?" "나도 모르... 겠다. 또 나가봐야..." 정고풍은 미친 듯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애첩 지소군은 그가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호호... 이젠 나가실 필요가 없게 됐어요." 그런데, 지소군이 느닷없이 교태롭게 웃는 것이 아닌가. "그... 그게 무슨... 으! 으으..." 흠칫하던 정고풍은 갑자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너... 너는 아... 니로구나! 너... 는 누구냐?" 정고풍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뿐, 전라의 여인은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토 록 부드럽고 탄력있던 여인의 팔과 다리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힘으로 그를 끌어당기고 있 는 것이다. "누구면 무슨 상관인가요? 소군이란 계집보다 내 몸이 더욱 낫지 않아요?" 여인이 정고풍의 밑에서 교태롭게 웃었다. "으으..." 정고풍은 식은땀을 흘리며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의 몸은 그의 의사와는 반대로 계속 여인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로 그의 동작이 굳어지고 그의 부릅뜬 두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내일 아침, 구문제독 정고풍이 애첩의 배 위에서 복상사(腹上死)했다는 말이 퍼지면 세상이 진동하겠죠?" 여인이 까르르 웃으며 하체를 움직였다. '으... 음모(陰謀)... 음...!' 정고풍은 심중의 말을 채 뱉아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또르르-툭- 그의 등뒤에 맺힌 땀이 무심히 굴러떨어졌다. 외가공부(外家功夫)를 익혀 황소를 눕히는 완력을 가진 구문제독이 여인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바야흐로 일은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 * * 귀문진인(鬼門眞人)이라는 이름을 북경성의 뒷골목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칭 천하제일의 도술(道術)을 지녔다고 떠벌이지만 그를 도인(道人)이라고 인정해주는 사 람 또한 없었다. 술, 여인, 도박... 거기에 사기까지, 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은 하나도 지키지 않기 때문이 다. 그러면서도 그가 유명한 까닭은 북경성에 있는 사람치고 그에게 한두 번 속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런 사기꾼이 박살이 나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음은 그를 건드렸다가 는 본전은커녕, 오히려 더 큰 골탕을 먹기 때문이었다. 북경 교외에 위치한 귀진관(鬼眞觀)은 귀문진인이 거처하는 도관(道觀)이다. 그러나 말이 도관이지 다 쓰러져가는 초막 몇 간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법당 안은 엉망진창이라 들어오던 사람도 나갈 정도로 난잡했다. "드르릉... 쿨..." 그 와중에 한 도인이 아무렇게나 어지러진 신단 위에서 천둥처럼 코를 골아대면서 자고 있 었다. 금방이라도 삭아버릴 듯이 반들반들하게 닳아빠진 옷에 달라붙은 때는 아예, 그 도복이 처 음에는 어떤 것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했다. 꾀죄죄한 그의 행색은 어둠 속에서 차라리 야귀(夜鬼)와 같이 보였다. "귀문진인이 당신이오?" 한데, 느닷없이 그를 부르는 낭랑한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 누웠던 도인의 코고는 소리가 뚝 끊겼다. "당신의 도술을 사고 싶소." 예의 음성이 조용히 울렸다. 부스스... 귀문진인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삐딱한 도관(道冠)에 형편없이 낡은 도포, 귀문진인은 퀭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복면을 한 흑의인이 소리도 없이 그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헤헤헤... 드디어 본 진인의 도술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겼군!" 귀문진인이 괴이하게 웃었다. 그는 복면흑의인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새끼손가락으로 긁적긁적 귀를 후볐다. "하지만 본 진인의 도술은 천하제일이라 좀 비싼...!" 문득, 그의 온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르 떨며 경직(硬直)되었다. 굳어버렸다고나 할까. 퀭한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복면흑의인의 손에서 찬란히 금광을 뿜어내고 있는 단검을 본 것이다. "이것이면 되겠소?" 복면 속 흑의인의 눈이 담담히 웃었다. "그... 그대는...?" 귀문진인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순간, 복면흑의인의 전신에서 태산과 같은 위엄이 솟아났다. "호국지존병의 검주(劍主)!" 털썩! 귀문진인은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지존위(至尊衛)의 대장 정문수(鄭文秀)가 삼가 호국지존(護國至尊)을 뵈옵니다!" "정문수? 그럼 그대가 이십 년 전에 실종되었던 금군총교두(禁軍總敎頭;금군의 무술사부)란 말인가?" "신이옵니다." 귀문진인은 고개를 숙였다.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대내 제일고수(大內第一高手)로 불리던 패도무적(覇刀無敵) 정문수(鄭文秀)! 그 찬란했던 이름, 의문의 실종을 했던 그가 사기꾼 중의 사기꾼으로 불리는 귀문진인이 되 어 북경에 숨어 있음을. "황실을 위한 그대의 희생이 너무 크다... 일어나라." 복면흑의인은 호국지존병을 거두며 나직이 탄식했다. 순간, 부드러운 경력이 일어나 정문수의 몸을 일으켰다. 귀문진인, 아니 정문수는 암암리에 시험을 해보고 경악했다. '지존의 나이가 아직 약관인 것 같거늘 이미, 백년지경의 공력을 이룬 나를 능가하다니...' "황공하오이다." 정문수는 몸을 일으켰다. 으드득! 뚝딱-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뼈마디 마주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호리호리하던 그의 체구가 장대 하게 변했다. 동시에 퀭하니 거슴츠레하던 눈에서 신광(神光)이 폭사되어나왔다. 일신(一新)! 초라하던 그의 모습은 단숨에 무서운 위세를 지닌 대한으로 변모해버렸다. 지존위(至尊衛)는 선황에서부터 당금 황제에 이르면서 극비리에 조직된 고수집단이다. 그들의 존재는 아무도 모른다. 황제만이 알 뿐이다. 유사시를 대비해 조직된 최후의 힘인 까닭이다. 황제가 남긴 마지막 봉서는 바로 지존위에 대한 것이었다. 이로써 황제가 주천운에게 안배한 것은 다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주천운이 어떻게 행 동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지존위의 인원은 모두 얼마인가?" "부령(副令) 두 명을 합해 모두 백 명의 정예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백 명... 많지 않은 수효로군..." 정문수의 입가에 자신있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 백 명이면 십만금군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생기와 투지가 끓어넘치고 있었다. "그대에게 종친(宗親)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生死如奪權)을 부여한다! 지존위를 소집하라!" 복면흑의인의 음성에 정문수의 가슴이 벅차 올랐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일신의 영욕을 묻어버렸던 그 기나긴 세월이 끝나거늘... 일은, 여기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 * * 천기각 후전에 자리잡은 아늑한 처소. 그 창문에는 언제부터인가 노란 손수건 하나가 밤바람에 팔랑이고 있었다. 말리려고 걸어놓은 것인가. * * * 병부상서(兵部尙書) 채광(蔡匡). 대대로 무장(武將)의 집안인 그는 무장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한 힘을 구축하고 있었다. 천하의 병권이 그의 손에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과연 그는 황제(皇弟)들의 주목의 대상이었으나, 위인의 성품이 워낙 꿋꿋하여 중립을 고수 하고 있었다. 쏴아- 쏟아지는 물줄기, 흩어지는 물보라. 병부상서 채광은 뒷짐을 진 채 가산(假山)에서 떨어지는 인공폭포를 바라보며 정원에 서 있 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고뇌의 빛이 어려 있었다. '이제 중립을 지키는 것에도 한계가 왔다. 어차피 결정은 내려야 할 것... 오황야가 권리 포 기를 한 이상 인재는 하나 뿐...!' 그 순간이다. 가산에서 쏟아지고 있던 폭포가 쫙 갈라졌다. 동시에, 한 가닥 섬광이 무서운 속도로 그 속에서 채광을 향해 덮쳐왔다. "으흑!" 괴로운 비명과 함께 채광이 땅바닥에 뒹굴며 물러났다. 움켜잡은 어깨에서 선혈이 샘솟듯 솟았다. "웬 놈이냐?" 병부상서 채광이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외칠 여가까지도 없었다. 폭포에서 그를 덮친 것은 검을 든 흑의인인데, 흑의인은 채광이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다시 그를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물러나라!" 노호와 함께 채광의 좌우에서 두 명의 고수가 폭사되어 나왔다. 채광이 신임하는 근신시위(近身侍衛)였다. "으억!" "크-으!" 그러나 그들은 나타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빨랐다. 또 한 명의 자객(刺客)이 땅속에서 솟아난 것을 그들은 짐작조차 못했던 것이다. "으!" 피보라를 뿌리며 그들이 쓰러지는 순간에 또다시 선혈이 솟구치며 채광이 비틀거리면서 바 위에 기대섰다. 수없이 생사의 전장(戰場)을 넘나든 그였으나, 전장에서 단련된 기마무예(騎馬武藝)와 흑의 인의 무예와는 차원이 달랐다. 채광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그의 근신호위를 간단히 베어버린 땅속에서 솟아난 흑의검수. 그리고 폭포에서 나타난 흑의 검수! 그들이 무심하기조차 한 차가운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며 좌우에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뱀이 개구리를 노리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피할 수도 없다!' 채광은 소름 끼치는 살기가 엄습함을 깨닫고 내심 절망했다. "누가 보냈느냐?" 채광이 노기 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성질 하나는 살았군! 이번에도 피할 수 있다면 가르쳐주지!" 흑의검수가 싸늘하게 웃었다. 좌우에서 번갯불 같은 검광이 채광을 덮쳤다. 말할 수 없이 빠르고 악독한 살수검(殺手劍)이었다. '내가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다니!' 채광이 부르짖는 순간이었다. 카-캉! "흐윽!"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경악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채광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앞에 당당한 체구의 복면흑의인이 등을 보이고 서 그를 막 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믿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양손으로 덮쳐오던 흑의검수의 검을 움켜잡고 있다는 것이 다. '사람이 맨손으로 검을...?' 그때였다. "한번 더 피하면 가르쳐준다고 했던가?" 복면흑의인이 낭랑히 웃었다. "차앗!"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흑의검수들이 검을 움직여 복면흑의인의 손을 잘라버리려 들었 다. 따-땅! 그러나 손이 잘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검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신의가 없는 친구들이군." 복면흑의인이 담담히 말했다. 동시에 섬광이 번뜩이자 흑의검수들은 나직한 신음과 함께 토막난 장검을 떨구고는 비틀거 리며 물러났다. 그들의 어깨에는 부러진 검이 날아가 박혀 있었다. "누, 누구냐?" 흑의검수들이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괜찮으십니까?" 복면흑의인은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채광을 바라보았다. "위-험..." 채광이 갑자기 혼비백산해 외쳤다. 쉬쉬-쉭! 쉭! 독침(毒針), 우측의 흑의검수에게서 수백 수천 개의 쇠털 같은 독침이 쏟아져 그를 덮친 것 이다. 가까운 거리의 이 급습은 의외의 한수였다. "간악한!" 복면흑의인이 나직이 꾸짖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조금의 당황함도 없었다. 그는 천하제일의 정력가(定力家)인 것이다. 파-팟! 찰나지간에 산더미 같은 금광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사오 장을 뒤덮었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주위는 본래대로 돌아갔다. 복면인의 앞에는 토막난 독침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마치 솔잎이 병들어 일제히 떨어진 것 같았다. '이, 이럴 수가? 단 하나도 통과하지 못하다니...' 채광이 상처의 고통도 잊고 눈을 부릅뜨는 순간에 흑의검수들이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쏟아낸 독침이 복면흑의인의 검세에 튕겨져 오히려 그들의 몸에 박혔던 것이다. 단 한 순간, 장내의 그 누구도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이다. '여의섬에 이어진 조화의는 이미 천하제일이다...' 암중으로 중얼거린 복면흑의인은 천천히 흑의검수들에게 다가갔다. "누가 너희들을 보냈느냐?" 담담한 그의 음성에는 그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위세가 담겨 있었다. "흐흐흐..." 흑의검수는 도저히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닫자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그들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그들의 몸이 흐물흐물 녹아가기 시작했다. 피식! 피식... 괴기한 소리와 함께 그들의 전신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구토를 일으키는 냄새가 진 동했다. "화골지독(化骨之毒)..." 복면흑의인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알기는 하되, 그도 이와 같은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다. 순식간에 그곳에는 한줌의 혈수(血水)와 옷자락만 남고 말았다. "알려진 것보다 십배 강력한 화골지독이군." 신음하듯 중얼거리던 복면흑의인의 눈에 기광이 스쳐갔다. 휙-! 녹다 남은 옷자락에서 은빛이 허공을 격하고 복면흑의인의 수중으로 빨려들어갔다. 그것은 조그만 은패였다. "으... 은인, 위험하오! 거기에는 무서운 독이 묻어 있소." 채광이 급급히 외쳤다. "걱정은 고마우나, 내 손에 해를 끼칠 만한 독이 있진 않을 것이오." 복면흑의인이 담담히 대꾸했다. 채광은 자신도 모르게 복면흑의인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손〔手〕! 그것을 손이라 부르자니 오히려 욕된 느낌이 일었다. 백옥을 깎은 듯, 아니 그보다 더욱 맑 고 깨끗한 그야말로 흠집 하나 없는 완미(完美)한 손이었다. '남자의 손이 저토록... 더구나 저런 손에서 그토록 엄청난 힘이...' 그가 어찌 알겠는가? 현천백옥수(玄天白玉手)의 위력을... 채광이 놀라고 있을 때, 복면흑의인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은패(銀牌)의 겉에는 하늘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는 제왕(帝王)의 관(冠)이 나타나 있는데, 뒷면에는 후단(后檀) 십호(十號)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설란이 가졌던 동패와 양식이 똑같다. 그렇다면 채상서를 노린 것도 그자들?' "그대는 뉘시오?" 밀실 안에서 채광은 복면흑의인을 마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복면흑의인은 주저없이 복면을 벗었다. 순간, 주위가 환해지는 착각이 일어날 정도의 수준(秀俊)한 용모가 드러났다. "오-황야(五皇爺)?!" 채광이 떨리는 음성으로 믿을 수 없는 듯 부르짖었다. 복면 속의 얼굴은 바로 주천운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전하... 정녕 전하이십니까?" 채광의 눈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했다.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은 없소. 내가 채상서를 찾은 것은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주천운은 침착히 말했다. '오황야가 보통 사람이 아님은 알았으나 설마 무공까지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과연 제왕 지재(帝王之材)!' 채광의 머리가 번개같이 돌아갔다. "말씀하소서! 전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채광, 목을 걸겠습니다!" 주천운은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내심 쓰게 웃었다. 그러나, 주천운의 태도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내 부탁은... 채상서께서 계속 중립을 지켜달라는 것이오." "그것은?" 채광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나는 황위 쟁탈전에 뛰어들려는 것이 아니오. 오히려 그것을 저지하려고 채상서를 찾은 것 이오." "..." 채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천운은 당금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것은 그가 황제로부터 밀명(密命)을 받아 호국지존이 되었음과 신비한 힘이 배후에 준동 하고 있다는 것뿐, 그에게 닥쳤던 기연과 천하기밀부 등에 관한 여러가지는 빠져 있었다. "그럼 내심은 중립을 지키면서 겉으로는 접근해오는..." "바로 그런 의도였소. 하지만 그들이 채상서를 노릴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이상,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는 것 같소." "전하, 그들이 암중에 황궁에 세력을 침투시키고 나아가 황실을 조종할 정도라면 이는 대역 (大逆)의 뜻이..." "나도 그러리라 짐작하오." "하면 차라리 전하께서 직접 나서시는 것이... 전하의 신망(信望)이라면..." 채광의 권유에 쓴웃음을 짓던 주천운의 눈에서 신광이 폭사되었다. 탁! 동시에, 그의 몸이 창문을 뚫고 쏘아져나갔다. "악!" 창밖에서 놀람에 찬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내 집에도 첩자가?" 채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호국지존병이 매서운 금광을 뿌리며 한 여인의 목에 바싹 붙어 있었다. 주천운은 무공을 배 운 지 이제 겨우 나흘인데다 전력을 기울인 것이 검이라 손만 쓰면 검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가 비록 여의섬에 조화의를 조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것은 초보단계였고, 호국지존 병의 날카로움은 천하무쌍이라 여인의 목에서는 가늘게 피가 흐르고 있었다. "채소저?" 검광에 드러난 미인의 얼굴을 본 순간, 주천운은 신음하듯 외쳤다. 호국지존병도 그녀의 목에서 떨어졌다. "저, 전하...?" 미인의 눈도 동그랗게 변했다. 결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지(雅芝) 아니냐?" 달려나오는 채상서도 우뚝 멈추었다. 주천운에게 제압된 십칠팔 세 가량의 미녀는 바로 병부상서 채광의 외동딸인 채설지(蔡雪 芝)인 것이다. "네가 어떻게 여기를?" "..." 채설지는 주천운만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며 대답을 못했다. '이럴 수가? 그토록 문약하시던 분이 이토록 늠름할 수가...' 그러나, 그녀를 보는 주천운의 기색은 결코 밝지 않았다. "채상서는 영애(令愛)가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의 어조는 담담했으나 말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무공을? 아지(雅芝;설지의 애칭)가 무공을 지니고 있단 말씀입니까?" 채광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모르셨습니까? 그녀의 무공은 좀 전 흑의검수를 능가할 정도입니다." 주천운의 음성이 굳어졌다. 채광이 주천운의 음성이 굳어지는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네가 나를 감시? 그들의? 맙소사!" 채광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감시라니요?" 채설지의 눈이 비로소 주천운에게서 떨어졌다. 제 9 장 천제문(天帝門)의 등장(登場) "소녀는 어릴 적에 우연히 한 분 기인(奇人)의 눈에 들어 기명제자(記名弟子)가 되었어요. 그분은 일 년에 한 달 정도만 밤에 오셔서..." 채설지의 붉은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기인의 존함은?" 주천운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분은..." 주천운의 말속에 심문의 뜻이 있음을 안 채설지의 안색에 변화가 일었다. 그녀가 어떻게 커온 말괄량이였던가? 그러나, 주천운의 눈을 본 순간에 자신의 모든 자존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짐을 그녀는 느끼 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해(大海)와 같은 주천운의 모습에 자신이 얼마나 왜소해지는지... 아니, 그것은 어쩌면 사랑이리라! 지난 삼 년 간 주천운을 향해 키워왔던 그 작은 불꽃. "사부님은 무산신모(巫山神母)라고 불리는 분이세요." "무산신모? 백년 전에 중원삼신(中原三神) 중의 하나라고 불렸던 그 무산신모란 말이오?" "예." 천하기밀부를 나온 주천운은 이미 무림의 대소사를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다. '뜻밖이군! 그런 고수가 관부대신의 딸을 제자로 삼다니...'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금 채설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탐낼 만한 상승지재였다. "전하께선 소녀를 아직도 의심하십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짐작한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주천운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채소저를 믿겠소. 하지만 일이 너무 중대하니 오늘 본 것은 모두 잊어주시오." 채설지는 또다시 항거할 수 없는 기세를 느꼈다. '도저히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전하를 뵌 지는 겨우 보름인데 그때는 결코 그렇지가 않았는 데...' 그녀가 어찌 용화대수미선공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목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미안하오. 내 실수요." 주천운은 그것을 보고 미안한 빛을 지었다. "괜찮아요." 그제야 목의 아픔을 경각한 채설지는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잠깐만, 내 들어가 약을 가져오겠소이다." 채광이 말릴 사이도 없이 안채로 달려갔다. '약만 가져오려면 채소저를 보내면 될 것을...' 지금 딸의 목에 난 상처에 신경 쓸 때인가? 그 의도는 딴 데 있음이 틀림없었다.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의도를 짐작한 주천운은 내심 고소했다. 채설지는 피가 계속 흐르는데도 지혈할 생각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출혈이 좀 심한 듯하오. 실례하오." 주천운이 그녀의 목에 흐르는 피를 지혈시켰다. "전하는 무서운 분이세요." 주천운의 손길을 느끼고 몸을 가늘게 떨던 채설지가 느닷없이 말했다. "무슨 뜻이오?" "보름 전만 해도 전하께선 여인을 절대 쳐다보지 못하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서슴없이 손이 오는군요." 말을 하던 채설지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주천운은 흠칫했으나 어색히 대꾸했다. "인간이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법이오." 주천운은 슬쩍 한걸음 물러났다. 채설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분은 갑자기 태산이 되었다... 오늘이 지나면 영원히 바라볼 수... 조차 없을 거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 제아무리 주천운이라도 상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채설지가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든 것이다. 주천운은 채설지가 이토록 대담할 줄은 몰랐다. "채소저, 이 무슨..." 가슴에 뭉클한 감촉을 느낀 주천운은 당황해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전하께서는 소녀의 죽음을 보시려 하십니까?" 채설지는 고개를 쳐들며 부르짖듯 말했다. 매끄러운 흰 목에서 다시금 피가 터지고 있었다. '이토록 직선적이니 정말 자결을 할지도 모른다!' 주천운은 내심 탄식하며 그녀를 안았다. 채설지는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다. 주천운은 그녀의 목을 지혈하며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주천운은 여인의 몸이 그토록 부드럽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미안하오. 하나, 때가 좋지 못하오." 주천운은 달래듯 나직이 말했다. "전하, 소녀는..." 채설지가 더욱 안겨들며 주천운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가득한 애처로운 모습, 그것은 영원히 남성에겐 가장 강한 유혹이었다. 무엇에 끌리듯 주천운의 고개가 밑으로 숙여졌다. "...!" 주천운의 입김을 느끼자 채설지는 가늘게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 남과 여, 그 첫 입맞춤이 이루어졌다. 불꽃이 튀었다. 전혀 상상치도 않았던 곳에서 불꽃이 튀는 것이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한 전율이 두 사람의 몸을 휘감았다. 그때, 주천운의 뇌리에 뜻하지 않게 불해사로 가다 만났던 백의려인이 불현듯 떠올랐다. 대려군(戴麗君)!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그녀가 하필 이럴 때 떠오름은 무슨 까닭일까. * * * 천기각 후원 뒤쪽 으슥한 숲속. 원시림을 연상케 하듯 무성한 거목들이 치솟아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쉽게 알아보기 힘든 곳이었다. 거기에 녹의궁장의 설란이 무엇을 기다리듯 초초히 서 있었다. 설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오경(五更;새벽 세시에서 다섯시)이 넘어가는데...' 그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냐?" 차가운 음성이 그녀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설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의 등뒤에는 어느새 마치 땅속에서 솟아난 듯 한 명의 복면인이 나타나 있었다. 전신에서 드러난 곳은 오직 눈뿐인데, 거기서는 말할 수 없이 냉혹한 빛이 발산돼 음산한 기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 주님!" 설란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네가 천기각에 들어간 후, 자진해서 본령주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 무슨 일이냐?" 복면인의 눈은 설란을 꿰뚫을 듯했다. 설란은 원래부터 복면인에게 극심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화... 황야께서 무... 무공을..."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외면했다. "뭣이?" 복면인의 눈에서 냉전(冷電) 같은 광채가 쏘아졌다. "자세히 보고해라. 사실이냐?" "그... 그렇습니다. 속하는 오황야께서 무공을 연습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으-음...!" 복면인은 침음했다. "설마 했는데... 그가 그토록 자신을 감추었을 줄이야! 후주(后主)의 지시에 까닭이 있었단 말인가?" 복면인의 눈이 다시 차갑게 변했다. "그의 무공 정도는?" "직접 알아보십시오." 갑자기 설란의 음성이 침착해졌다. "뭣? 그게 무슨 소리냐?" 복면인의 냉혹한 눈 속에 어이없는 빛이 떠올랐다. "백문이불여일견(百門而不如一見)이란 말도 모르는가?"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복면인이 소리치며 번개처럼 일 장을 쏟아냈다. 싹! 매서운 음향과 함께 푸른빛 인광(燐光)이 쏟아졌다. 그의 동작은 말할 수 없이 빨라 그의 눈에 그의 뒤에 나타난 흑의인이 비친 순간, 그 인광 은 그 흑의인의 몸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빠르게 움직일 것을 짐작도 못한 듯 흑 의인은 피하지도 못했다. 팡! "크-으으..." 귀청을 때리는 굉음이 터지는 순간에 쥐어짜는 듯한 신음과 함께 한 사람이 비틀 물러났다. "이... 이럴 수가?" 경악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르짖는 인영은 바로 그 복면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흑의인을 공격했던 손이 인광을 뿌리며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이자의 공력이 생각보다 가공스럽다. 하마터면 기혈이 뒤집힐 뻔했군...' 내심 기혈이 울렁임을 깨달은 흑의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가 마도칠대공력의 하나인 귀린마염공(鬼燐魔焰功)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군. 어떤가? 시험해본 느낌이...?" 그러나 낭랑히 웃는 그의 모습은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황-야?" 복면인은 이를 갈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내저으며 외쳤다. "뜻밖에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군." 주천운이 담담히 웃었다. '크으으... 이건 뭔가가...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내 귀린마염공이 저자에게 격중되었는데 어 떻게 오히려 내가... 으으윽!' 복면인은 이미 손이 이글이글 타올라 손목에 뼈가 드러나자 그 고통에 치를 떨었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그것이 바로 용화대수미선공의 반탄지기(反彈之氣)임을! "네년이 감히 배신하다니..." 복면인은 상황을 깨닫고 설란을 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 눈빛이 마주치자 설란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펑! 그 순간, 복면인의 지글지글 녹아가던 왼손이 폭발하듯 터졌다. 터진 정도가 아니었다. 팔꿈 치 아래가 폭발하듯 터져 혈우(血雨)가 되어 설란을 덮친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위세로 삼사 장을 뒤덮었다. 파-팡! 나무밑둥이가 마구 터져나가고 바위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부서진 나뭇가지가 마구 흩어지 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설란이 있던 곳이 폐허가 되었다. "흐흐흐... 감히 배신을 하고 살 수는 없지..." 복면인은 냉혹히 웃었다. "단비혈폭마공(斷臂血爆魔功)은 자신의 몸을 망치는 것이지 남을 해할 수는 없는 무공이다!" 담담한 음성이 그의 말을 잘랐다. "으..." 복면인은 두 눈을 홉뜨며 한걸음 물러났다. 놀랍게도 주천운이 설란을 품에 안은 채 그와 이삼 장 가량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저토록 빠르다니?' '전하의 품에 내가 안기다니...' 복면인이 경악해 가슴이 뛸 때, 어이없게도 설란의 가슴은 뜻밖의 행운(?)에 벅차게 뛰었다. "란아, 괜찮으냐?" "예..." "좋다. 물러가 있거라." 설란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하자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내려놓았다. "네가 속한 단체는 어떻게 부르며 네 상전은 누구냐?" 주천운이 정색을 하고 침중하게 물었다. "흥!" 복면인은 냉소를 치며 주천운을 쏘아보다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주천운의 눈은 망망대해(茫茫大海)였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태산 앞에 버려진 조약돌과 같이 왜소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망망대해 에 뜬 일엽편주인 것 같기도 했다. 쓱- 주천운이 한걸음 다가왔다. 복면인은 형언할 수 없는 위세가 자신을 핍박해옴을 느꼈다. '무... 무서운! 후주(后主) 이외에... 이토록 무서운 기세를 본 적이 없다...' 복면인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네 상전이 누구냐고 물었다." 주천운이 침착히 외치며 다시 한걸음 다가왔다. 복면인은 숨쉬기조차 거북해졌다. '도대체 무슨 무공을 수련했기에... 이대로 있다가는 손도 써보지 못하겠다!' 복면인은 내심 몸서리를 치며 이를 악물었다. "가서 물어봐라!" 파-앗! 그의 하나 남은 손에서 벼락치듯 일검이 뻗어났다. 그 속도와 잔독함은 무쌍하여 일류고수조차 피할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 한데, 주천운은 피할 생각도 않고 태연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잔혼비섬(殘魂飛閃)? 쾌검으로 나와 겨루려 하다니..." 그의 입가에 담담한 웃음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캉! 한소리 맑은 음향과 함께 복면인의 검은 두 동강이 났다. 복면인이 혼비백산해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이미 오장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교활한! 그러나 네가 도망칠 수 있다면 조화의는 헛된 이름이다!" 주천운이 코웃음쳤다. 그의 손에서 호국지존병이 눈부시게 금광을 끌면서 복면인을 향해 덮쳐갔다. 복면인이 여의 섬 아래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겉으로만 공격하고 실은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천변만화(千變萬化)! 복면인을 가두고 있는 주천운의 검이 부리는 변화는 바로 그것이었다. "천하에 이토록 괴이한 검법이 있다니... 야야-아압!" 단 한 손짓에 자신이 전력을 다한 공격이 모조리 맥이 끊긴 복면인은 마침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주천운을 덮쳐갔다. 쏴아-아악! 무서운 검세가 일어났다. "어리석은!" 주천운이 냉담히 웃었다. 그의 수중에서 호국지존병이 금광을 일으키며 번뜩였다.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있어도 알 수가 없었다. 탕! 복면인의 반동강 검이 자루만 남고 마저 잘려나갔다. "으으... 으..." 복면인이 공포스러운 기색으로 주춤거렸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호국지존병이 바짝 붙어 무서운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제... 제대로 볼... 수도 없었는데?" 복면인은 넋이 나간 듯했다. "다시 묻겠다. 네 주인이 누구냐?" 주천운이 검끝을 치켜올렸다. 주르르- 삼엄한 검기에 복면인의 목이 선혈로 물들었다. "오황야가 이토록 무서운 자인지 짐작도 못했다! 하나... 흐흐... 후주께서는 지금쯤 네가 자 신을 드러내지 않은 고수임을 아실 것이다!" 복면인은 싸늘히 웃었다. 검이 주는 아픔에 고통은커녕, 오히려 정신을 차린 듯했다. "후주? 그가 누구기에 그것을 알 수 있단 말이냐?" "흐흐... 본문은 결코 혼자 행동하는 법이 없다! 네가 나를 제압하는 동안..." "오! 너와 같이 왔던 자들을 말하는 것이냐?" 주천운은 빙그레 웃었다. "뭣? 그럼...!" 음산히 웃던 복면인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화로." 주천운이 담담히 외쳤다. "두 놈 다 잡았습니다. 한 놈은 죽었습니다." 창노한 음성이 전해왔다. "으... 오황야! 너는 후주가 생각한 것보다 더 무서운 자로구나!" 복면인의 온몸이 싸늘히 식었다. "그러나... 너의 능력이 아무리 높다 해도 본문을 막을 수는 없다! 이미 때가 늦었다! 우하하 하...!" 복면인은 미친 듯 웃었다. "그것은 네 생각, 내 생각은 아니다!" 주천운은 조용히 말하며 호국지존병에 힘을 주었다. "크으으... 너는 본령주를 제압했다고... 자신을 너무 높게 보는구나!" 검이 목에 살짝 파고들자 복면인이 신음했다. "낮게 볼 이유도 없다!" 나직이 대꾸하는 주천운의 말에는 무한한 자신이 있었다. 또다시 자신이 주천운의 기세에 눌림을 깨달은 복면인이 외치듯 말했다. "후후... 천제문(天帝門) 후단(后檀) 삼령주(三令主) 중에 본령주가 제일 약하거늘, 감히 이 정도를 가지고 흐흐흐... 만약 후주(后主)께서 나서신다면..." 후주라는 말을 입에 담자 갑자기 복면인의 눈에 공포의 빛이 드러나면서 말이 뚝 끊어졌다. "후주가 누구냐?" "네겐 자격이 없다! 아무도 본문을 막을 수 없다!" 갑자기 복면인이 발악하듯 떨리는 음성으로 외치는 순간, 피분수가 솟구치며 목이 하나 그 대로 그의 어깨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뒤를 이어 주인 잃은 복면인의 몸뚱이가 호국지존령 아래 짚단처럼 쓰러졌다. 느닷없이 복면인이 호국지존병에 목을 드리민 것이다. 머리카락을 올려놓기만 해도 끊어지 는 호국지존병이었다. 그의 머리가 그의 발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 죽음이다. 천제문, 후주... 그들의 능력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이지..." 굴러떨어진 복면인의 목, 그 부릅뜬 눈에 어린 공포를 발견하고 주천운은 가슴이 무거웠다. 얼마 전, 병부상서의 집에서도 자결하던 그들을 보지 않았던가? "생각보다 지독한 놈들입니다. 나머지 한 놈도 독을 물고 죽었습니다." 화로가 나타나 나직이 말했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 같군요." 눈을 부릅뜬 복면인의 목을 보고 쓰게 말하던 주천운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스-윽! 그의 손짓에 따라 반쯤 벗겨져 있던 복면이 날았다. 복면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육십대 노인의 모습인데 공포가 떠올라 있고 피칠이 되어 끔찍스러웠다. "한족(漢族)이 아닌 것 같은데..." 유심히 복면인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주천운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 영문을 몰라 멍청히 있던 화로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한족이 아니다. 그럼...? * * * "뭣이? 그게 사실이냐?" 사황야 주성운(朱星雲)이 벌떡 일어섰다. 성덕전(星德殿). 자금성 내에 마련된 사황야의 거처. 아침 햇살이 밝은 성덕전의 대청 안에서 사황야 흥문왕 주성운은 그의 어머니 정귀비와 측 근 몇과 함께 함빡 웃음을 짓고 있다가 안색이 돌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옵니다. 정제독께선 복... 상사하시고 구시랑(具侍郞)께선 욕탕에서 익사... 상도어사 (尙都御史)께서는 급살을..." 우림위장(羽林衛長)이 무릎을 꿇고 아뢰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사황야의 조정세력 절반이 붕괴함을 의미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복상사에다 익사? 게다가 급살이라니..." 곁에 있던 이부상서 팽가림(彭家林)이 떨리는 음성으로 참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오라버니...!" 궁장의 중년미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혼절해버렸다. "어머님!" 사황야 주성운이 대경해 정귀비를 부축했다. 정귀비는 단 한 분뿐인 오라버니인 구문제독 정고풍의 급사(急死)에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것 이다. '누구의 짓인지 알겠다! 하나, 나 주성운이 그토록 만만하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가소로운 착각이다!' 정귀비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일어나는 주성운의 안색은 싸늘히 굳어 있었다. "결코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주성운은 동쪽을 보고 냉소했다. 그곳은 조양루가 있는 곳이었다. 순간, 그의 발이 대리석 바닥으로 기척도 없이 한 치나 꺼져들었다. 고수가 발을 굴러 대리 석을 깨뜨리는 것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기척도 없이 바닥이 꺼진다는 것은 엄청난 공력이 없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 * * 그와 같은 시각. "뭣이? 그게 사실이냐?" 조양루의 보월당에서는 이황야 주뢰운이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사실입니다. 어젯밤에 셋째 형님이 넷째 형님과 힘을 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육황야 주소운이 당황한 빛으로 더듬거렸다. 이황야 주뢰운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셋째! 그 욕심 많은... 패기만만한 녀석이 하룻밤 사이에 돌변하다니?" 이황야가 믿을 수 없는 듯 중얼거렸다. "셋째 처남은 호협(豪俠)한 성품이니 넷째 처남의 능력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부마도위 백문우가 신음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잔잔했다. 이황야 주뢰운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광덕왕비 심려려를 쳐다보았다. "이것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군요. 하나 셋째 전하의 조정기반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 에요." 기다렸다는 듯 심려려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아마 지난밤 사이에 상황은 많이 변했을 거예요." 심려려는 육황야 주소운을 쳐다보았다. "폐하의 환후는 어떠신가요?"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태의원(太醫院)의 어의(御醫)들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전혀 효험이 없어 영험하다는 고승(高僧)이 와서 독경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육황야의 말에 심려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더 이상 기다릴 것 없어요.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소집합시다." "어전회의? 폐하이신, 형님께서 참석치 못하실 것인데요?" 육황야 주소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용렬한 위인!' 심려려는 내심 혀를 차며 설명했다. "폐하께서 참석치 못하셔도 회의는 성립되니까 거기서 결판을 내는 겁니다." "당신... 자신있소?" 이황야 주뢰운이 흥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심려려는 기가 막힌 듯 주뢰운을 건너다보았다. "하하하..." 백문우는 호탕히 웃으며 일어섰다. "비마마가 하는 일인데 어련하겠소이까? 난 지금 나가 우리측 대신들을 우선 소집하겠소이 다!" * * * 봉천전(奉天殿). 황제가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곳이다. 곧 자금성의 정전(正殿)인 것이다. 정오가 가까워오는 지금, 봉천전은 쇳덩이도 녹일 듯한 열기에 가득 차 있었다. 옥좌(玉座) 의 주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지금, 덩그라니 빈 용상을 두고 좌우에 늘어선 만조백관들이 핏대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서열이 있잖소? 서열이! 당금 황상께 적자가 계시지 아니하시니 당연히 이황야께서..." 이황야의 죽은 어머니 이귀비의 숙부인 형부상서 이귀가 서열을 주장했다. 그가 지지하는 것은 당연히 이황야였다. "차례대로 가는 것이 보좌라면 아무나 할 것이오. 문제는 능력이외다." 이부상서 팽가림이 목청을 돋우었다. "이황야의 흉금을 누가 모른단 말이오? 그분의 능력 또한..." 도찰원(都察院) 좌부도어사(左副都御士)가 나섰다. "능력만 따지자면 문무겸전의 사황야를 따라올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까?" 이제까지 사황야를 지지하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최유가 근엄히 외쳤다. "무슨 소리를? 서열을 흐트리는 것은 국기(國基)를 흔드는 것이외다. 서열은 결코 무시할 수 없소이다!"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좌도독(左都督)이 나서면서 언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당연하오. 장유유서이거늘..." "천하의 안정을 위해서도 이황야를 황태자에..." "혼란한 시국일수록 능력있는 사람이 나서야 하는 법, 적임자는 사황야!" "무슨 소리! 이황야이외다!" "이황야는 이미 천하의 지지를 받고 있소." 가열(加熱)! 설전(舌戰)은 더욱 가열되가고 있으나 사태는 점점 이황야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어지고 있 었다. 서열이라는 것은 그만큼 간단하지 않은 무기였다. * * * 어둠이 깃든 천기각의 서제에 주천운은 깊숙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결정이 되었소?" "내일 다시 의논하기로 되었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은 지난날의 그로 돌아온 패도무적 정문수였다. "내일? 둘째 형 측에서 그것을 용인했던가? 결정적으로 유리했을 텐데?" "뜻밖의 변수가 있었습니다." "변수?" "예, 압도적인 우세로 기울어지는데 느닷없이 제독태감(提督太監)이 나서서 사태를 완전히 뒤집어놓았습니다." "제독태감?" "예, 그가 나서서 폐하께서 자신에게 평소 사황야와 오황야 중 한 사람에게 뒤를 잇게 하겠 다고 말했다는 바람에..." 중국. 특히, 명(明)의 황권(皇權)은 절대적이었다. 후계가 결정되지 못해 신하들이 그것을 의논할 때 황제의 뜻은 곧 법인 것이다. '이미 삼 대째 황제를 섬겨오는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지. 환관 중에 유일하게 청렴하던 그 가 넷째 형의 복병이었던가?' "그렇다면 병부상서 등 중도파가 나서서 우선 휴회토록 유도했겠군?"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패도무적 정문수가 놀란 듯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내가 시킨 거니까." "예?" 패도무적 정문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이미 사태가 이렇게 변할 줄 알고 계셨다는 뜻인데... 갈수록 지존을 측량할 수가 없다!' 내심 다시 한번 주천운을 바라본 정문수가 입을 열었다. "하오나 지존, 그 자리서 결정이 되도록 해버렸으면 오히려 사태가 쉽게 안정되지 않았겠습 니까?" 주천운은 담담히 웃었다. "만백성을 다스리는 천자(天子)의 위(位)는 아무렇게나 정하는 것이 아니오. 더구나..." 그의 눈에 힘이 스쳐갔다. "곪은 것은 한꺼번에 터뜨려버려야 하는 법!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오늘밤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오." "오늘밤... 입니까?" 폐도무적 정문수는 신음했다. 그는 새삼 주천운의 모습이 거대하게 느껴짐을 보았다. '천하(天下)에 당신을 능가할 제왕지재가 어디 있으리까?' 주천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어둠의 세월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끝에 만난 주인이다. 그 주인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으랴. "조사는 어떻게 되어가는가?" 주천운의 음성이 그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십여 군데의 수상한 곳을 발견했으나, 그 중 세 군데가 가장 의심쩍었습니다." "필요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존위를 모두 대기시키도록 하시오! 상황이 급전직하(急轉直下) 될지도 모르니까." * * * 어둠이 자꾸만 짙어가는 삼경 초다. 사황야의 거처인 성덕전(星德殿). 숙위(宿衛)하는 위사들이 이따금 횃불 그림자 사이로 오갈 뿐,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성덕전 내부가 환한 것으로 보아 사황야 흥문왕 주성운의 측근들이 모여 밀담에 여념이 없 는 듯하였다. 어느 순간이었다. "...!" 천천히 타오르는 횃불 옆을 지나던 위사가 갑자기 굳어지며 창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는 허우적거리며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무슨...?" 서너 마장 밖에서 그것을 본 위사 둘이 놀라 외치다가 두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헤집었다. 피보라가 선명히 뿌려지는 가운데 쓰러지는 위사의 곁을 그림자처럼 스쳐가는 흑영(黑影)! 그 손에서 서릿발 같은 장검이 빛나는 시각에 성덕전 주위를 경계하던 위사 삼십육 명은 영 문도 모르고 떼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침-입-자-" 호전위장이 안간힘을 쓰며 내뱉는 외침은 곁에서 들어도 알아듣기 힘든 미약한 것이었다. '이따위 허깨비들로 경비를 세우다니...' 앞장선 흑포인이 냉소하며 호전위장의 몸을 꿰뚫었던 검을 빼내는 순간, 경비위사 중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전신을 먹물 같은 야행의로 휘감은 무사들이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성덕전을 둘러싼 그들의 수효는 대략 삼사백, 이 돌연한 변고는 너무도 신속히 진 행되어 아무런 기척조차 나지 않았다. 성덕전의 외관은 변함없이 횃불로 밝혀져 있으나, 이제 거기에 다가서고 있는 것은 죽음의 검은 그림자였다. 도대체 이들이 누구기에 자금성 내부를 이토록 무인지경 드나들 듯 침입한 것인가? 그때 그들의 뒤에 네 명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갑주(甲胄;갑옷과 투구)를 갖춘 그들의 모습은 어둠에 잠겨 잘 보이지 않으나, 그 네 명의 뒤에는 흑의몽면인(黑衣蒙面人) 들 십여 명이 옹위해 있었다. 네 명의 인영 중 가장 왜소한 자가 손에 든 섭선을 쳐들었다. 와장창! 그것을 신호로 가장 앞선 흑포인을 선두로 무사들이 번개같이 성덕전 안으로 난입했다. 그 속도는 말할 수 없이 빨랐다. 한데, 아무도 상상치 못한 일은 그 다음에 발생했다. 그와 동시에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성덕전 내의 모든 불빛이 일시에 꺼져버렸던 것이 다. "으-윽!" 차-창! 우당탕탕! "끄으-으..." 한 가닥 격렬한 싸움 소리가 이는가 싶은 순간, 성덕전은 다시금 괴이한 고요 속에 잠겨들 었다. 한바탕 소란 다음의 침묵은 너무도 조용했다. 성덕전은 무려 팔십여 명의 고수를 집어삼키고는 검은 괴물처럼 숨도 쉬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 성덕전을 쳐다보는 중인들의 눈에 의혹과 당황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데?" 왜소한 인영의 곁에 있던 훤칠한 체구의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여보, 혹시 오히려 우리가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닐까?" 뚱뚱한 인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성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사황야는 과연 만만치 않군요.이미 조용히 해결하긴 글렀어요. 제이대!" 왜소한 인영의 차가운 음성은 여인의 것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섭선이 펼쳐지는 순간, 성덕전을 포위한 무사들 중에서 십여 명이 앞으로 나 섰다. 그들의 손에는 쇠구슬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그 순간, 우렁찬 호통이 터져나왔다. "형제지의(兄弟之義)를 돌보지 않고 화기(火器)를 사용하려 하다니..." 번쩍-! 꽝! 꽈르릉! 꽈꽈-꽝! 한 가닥 섬광이 빛났다 싶은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앞으로 나섰던 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으-아-악!" "크-악!" "와-아-악!" 화기의 위력은 엄청났다. 거대한 화광(火光)이 사위를 뒤덮으며 성덕전의 외부는 물론, 그곳을 포위하고 있던 무사들 칠팔 명이 즉사하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퍼퍼펑! 펑! 쉭-! 쉬이이익! 혼비백산한 무사들이 물러서는 순간, 그들을 향해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것은 일반 화 살이 아니라 연환노(連環弩)에서 쏘아지는 것이라 무서운 위력이 있었다. "으-악!" "크-으으!" 뽑고 뽑은 고수들이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쓰러져갔다. "은폐물을 찾아 후퇴하라!" 왜소한 인영이 십여 명 흑의몽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외쳤다. 그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쏟아지던 화살이 뚝 멈췄다. "으하하하..." 성덕전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성덕전의 입구에 팔척거구의 인영이 나 타났다. "셋째!" 후퇴하던 뚱뚱한 인영이 그를 보고 눈을 끔뻑거렸다. 팍-! 팔척거구의 대한의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불꽃 같은 전포(戰袍)를 걸친 대한의 모습은 용맹스러운 기운이 넘쳤다. 바로 삼황야인 무성 왕(武成王) 주용운(朱龍雲)이었다. "둘째 형! 우리 형제는 비록 황위 계승을 놓고 다투었으나 그래도 형제였소! 그런데 언제부 터 상대의 목숨마저 도외시하게 된 것이오?" 무성왕 주용운은 넉 자나 되는 금배대도(金背大刀)를 짚고 서서 두 눈을 부릅떴다. 원래 이곳을 습격한 것은 이황야 일행 네 명의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 그건...!" '삼황야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니... 사황야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황야가 더듬거릴 때, 심려려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두 이곳을 벗어나라!" 심려려는 다급히 부르짖으며 이황야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 순간이다. 차차-창창! "으으-윽!" "크으-" 앞서 후퇴하던 이황야쪽 고수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들의 앞에는 완전 무장한 갑사(甲士)가 나타나 창을 번뜩이고, 그 뒤에는 흑의를 차려입은 인영들이 또 나타나고 있었다. 이중의 포위망, 그 수효는 무려 오백 이상이었다. 그때 이황야쪽의 남은 인원은 겨우 백여 명에 불과했다. "하하하... 올 때는 쉬웠으나 갈 때는 소제의 허락이 있어야 할 것이오."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며 포위망의 가운데가 쏵 갈라지고 당당한 체구의 인영이 나타 났다. "넷... 째 형님!" 육황야가 절망에 찬 신음을 터뜨렸다. 나타난 인영은 바로 사황야 주성운인 것이다. '사황야가 이 정도의 인물일 것은 상상도 못했다.' 심려려는 안색이 납덩이같이 굳어진 채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나는 골육상쟁으로 피를 흘리기는 싫었기에 어젯밤의 일을 당하고도... 하나!" 사황야 주성운은 냉소했다. "오늘밤의 이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소!" 사황야 주성운은 손을 쳐들었다. 차차! 차착-! 갑사들이 창을 거누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그 뒤를 흑의무사들이 검을 꼬나들고 따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네, 넷째야!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봄이 어떻겠느냐?" 이황야가 겁먹은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하하하... 형님을 봐선 그러고 싶지만 형수씨를 보니 도저히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호호호... 넷째 전하께선 이미 승리라도 한 듯한 착각에 빠져 있으신 모양이에요." 갑자기 심려려가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음성으로 웃었다. "착각인가 사실인가 어디 한번 봅시다!" 사황야가 위엄있게 외쳤다. 사황야의 한마디는 대격전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와아-" 창! 창창-차창! "으-악!" "으아-압!" 오백 대 백, 오 대 일의 싸움은 결국 빤한 것이었다. 차갑게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심려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흑포에 복면을 해 두 눈만 음산히 빛나고 있는 괴인이 서 있었다. 그의 키는 칠 척 가량이나 되는데 온몸은 비쩍 말라서 마치 장작개비에다 헝겊을 걸쳐놓은 것 같았다. "그는 방심하고 있어요." 심려려가 나지막이 외치는 순간에 흑포괴인이 무서운 기세로 허공으로 치솟았다. 사황야와 이황야 등과의 거리는 약 십육칠 장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 거리를 흑포괴인은 무서운 기세로 단숨에 날아들어 사황야에게 덮쳐가는 것이 었다. 그 빠름은 번개와 같아 번쩍 하는 순간에 이미 사황야를 덮치고 있었다. "흥! 또 한 수가 있을 줄 알았지!" 사황야는 그것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코웃음쳤다. 그의 좌우에서 폭발하듯 십여 명의 인물이 솟아나와 그를 맞아갔다. 그들의 기세 또한 절정 고수의 그것이었다. "흥!" 그런데, 흑포괴인은 자신의 정면을 덮치는 두 명의 공세를 상관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날아들 지 않는가?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콰-쾅! 사황야의 좌우에서 튀어나온 그들의 공세가 흑포괴인의 몸에 여지없이 격중했다. "크-윽!" 하지만 그를 공격한 그들이 오히려 철판을 때린 듯한 충격에 신음했고,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머리는 수박이 깨지듯 터지고 있었다. 날아오는 기세조차 죽이지 않고 절정고수 두 명을 박살낸 흑포괴인의 공세는 이미 벼락과 같이 사황야를 덮쳐내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중주이패(中州二覇)가 어떤 인물인데...' 그토록 심기 깊은 사황야조차도 안색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흑포괴인의 무공은 가공한 것이다. 제 10 장 후주(后主) 나타나다. "넷째!" 넉 자나 되는 금배대도를 무섭게 휘두르고 있던 삼황야가 위기의 상황을 보고 대경해 눈을 부릅떴다. 그 찰나, 사황야가 날벼락 같은 호통과 함께 일권을 질러냈다. 쾅! 그 일권은 어느새 자신의 앞에 도달한 흑포괴인의 가슴에 여지없이 격중하며 벼락치는 굉음 을 토해냈다. 동시에, 흑포괴인의 뼈만 남은 손도 사황야를 후려갈겼다. 펑! "으-윽!" 사황야는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면서 비틀, 물러났다. 그러나 흑포괴인도 땅에 내려서며 주춤하고 있었다. 그가 사황야의 일격에 충격을 받지 않 았다면 사황야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파옥권(破玉拳)을 맨몸으로 받아내다니..." 그를 보는 사황야의 얼굴이 긴장과 경악으로 굳어졌다. "크크... 파옥권이 비록 쇠조차 부술 수 있지만 화경에 이르지 않는 이상, 철마신(鐵魔身)을 해할 수는 없다!" 흑포괴인이 음산히 웃었다. 그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번뜩이며 뼈를 깎을 듯한 한풍(寒風)이 일어나 사황 야를 휘감았다. "구유한백살(九幽寒魄煞)?" 놀란 외침과 함께 사황야의 얼굴에 홍광(紅光)이 떠올랐다. 꽈르-릉! 벼락치는 굉음이 터지며 십여 장 방원이 뒤집어졌다. 가공할 위세 속에 나타난 결과는 막상막하. '사황야가 속가팔대신공의 하나인 원양대진력까지 지니고 있다니!' 뜻하지 않은 사태에 심려려의 안색이 납덩이같이 굳어졌다. 흑포괴인, 그가 누구인가? 도검을 두려워 않는 철마신을 연성하여 구대문파의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백 초 내에 피를 토하게 할 수 있는 초강고수가 아니던가. "포위망을 뚫어라!" 심려려가 차갑게 외쳤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황야 등을 옹위하고 방어만 하고 있던 흑의몽면인들이 검은 구름과 같이 앞으로 덮쳐갔다. 차-차창! "으-악!" 파파-팡! "와아-악..." 파죽지세(破竹之勢)! 열 명의 흑의몽면인은 무서운 위세로 사황야쪽의 포위망을 허물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들이 누굽니까?" 부마 백문우가 놀라 심려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욱!" "크으으..." 가장 앞장섰던 흑의몽면인 서넛이 참담한 신음과 함께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그들의 몸은 이미 불덩이로 화해 있었다. "화창영(火槍營)의 영반(領班) 벽력후(霹靂候)까지?" 한 중년인이 나타나 화기(火器)를 쳐내고 있음을 발견한 심려려의 안색이 놀람으로 가득 찼 다. "으-와악!" 하지만 다음 순간에 대내 화기의 제일인자라는 벽력후는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의 몸은 단숨에 시커멓게 변색되어가고 있었다. '무서운 독이다! 심왕비가 이 정도일 줄이야!' 심려려의 소매 속에서 섬전과 같은 빛이 쏟아져나갔음을 알아본 부마와 육황야는 내심 크게 놀랐다. 그때, 뜻밖의 상황에 심기가 흔들린 사황야는 아차 하는 순간에 결정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는 원래 자신의 승리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의 준비는 철저했던 것이다. 그런 데 그가 최후의 보루로 쳐놓은 벽력후라는 그물까지 터져버리는 것을 보자, 내심이 흔들리 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흑?' 그런데 무서운 기세로 주성운의 머리를 내려치던 흑포괴인의 눈에 갑자기 처절한 고통의 빛 이 떠오르며 주춤하는 것이 아닌가? 고수의 대결에서 틈이라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철칙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잠시 멈칫 했던 사황야가 위기를 맞았던 것에서 그것은 극명히 드러난 바 있었다. 더구나, 흑포괴인은 사황야의 머리를 후려치던 중이었기에 가슴이 모두 드러난 상황이었다. 쾅! "크-으-왁!" 사황야의 원양대진력이 포함된 파옥신권에 흑포괴인은 참담한 비명과 함께 오륙 장 밖으로 날아갔다. 내장토막이 섞인 피를 쏟아내는 흑포괴인은 마지막 힘으로 부르짖었다. '크으... 심... 맥이 완전히 가루가 되었... 도대체 무엇이? 사황야는 결코 아니었다!' 그의 외침은 밖으로 흘러나오지도 않았고, 그는 자신의 죽음이 소리없는 금음(琴音)에 의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는 듯 부릅뜬 두 눈을 감지 못했다. "은패령주가 패하다니!" 거의 포위망을 뚫어낸 심려려는 그 광경에 믿을 수 없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있을 수 없 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윽!" "으와악!" 그 순간에도 그녀의 손짓에 의해 그 앞을 가로막던 고수 두 명이 고꾸라졌다. "손을 멈추고 순순히 굴복치 않는다면 더 이상 사정을 보지 않겠소!" 사황야가 그 광경을 보고 꾸짖듯 외쳤다. "흥! 마음대로 하시지!" 심려려가 외침과 동시에 흑의몽면인들의 신위(神威)로 이황야측 남은 일원 약 삼십 명은 마 침내 포위망을 뚫어냈다. "크-윽!" 심려려의 소매 속에서 한 가닥 빛이 번뜩임과 함께 그 앞을 가로막던 고수가 대항도 못하고 한줌 혈수로 화해갔다. "그녀를 잡아라!" 사황야 주성운은 천둥같이 외쳤다. "호호호... 누가 감히 내 앞에 나설 수 있겠어요? 섬전탈명침(閃電奪命針)!" 심려려가 낭랑히 웃는 순간, 차가운 웃음소리가 그녀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방심은 금물이지!" 펑! "아-윽!" 심려려는 등판이 부서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고 앞으로 서너 걸음 튕겨져나갔다. "멈춰라!" 노한 외침과 함께 흑의몽면인들이 암습자에게 덮쳐들었다. "부마도위... 당... 신이?" 피를 토하며 뒤를 돌아본 심려려는 믿을 수 없는 듯 굳어졌다. 놀랍게도 그녀에게 암습을 가한 사람은 부마도위 백문우였던 것이다. "매부! 이게 무슨 짓이오?" 이황야가 혼비백산해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하하하... 천하의 주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오!" 백문우는 흑의몽면인들의 공세를 피하며 크게 웃었다. "무서... 운 자! 부마를 첩자로 만들다니..." 심려려는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조차 않고 신음했다. 사황야는 실로 간단한 인물이 아니었 다. "칭찬해주어 고맙소! 이제 싸움은 끝이오!" 사황야는 미끄러지듯 심려려에게 다가오며 힘있게 외쳤다. "흥!" 갑자기 심려려가 맹렬히 양손을 뻗어냈다. 파파-팟! 폭발하듯 섬광이 사황야에게 쏟아졌다. "지독한... 하나 독침 따위로는 나를 어쩔 수 없지!" 사황야 주성운은 피하지도 않고 느닷없이 덮쳐오며 일권을 질러냈다. 파파-팍! 사황야의 온몸이 고슴도치가 됨과 동시에... 펑! "아악!" 피분수가 쏟아지며 사황야의 일권을 격타당한 심려려가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여보!" 너무도 급변하는 사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이황야가 대경실색해 달려갔다. "아아... 윽... 지독한 권세로군! 내 호신진기를 여지없이 깨뜨리다니... 그러나...!" 피를 토해내면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광덕왕비 심려려의 백지장 같은 안색이 참혹하게 변 했다. 섬전탈명침! 무림 육대악독암기의 하나인 그 무서운 독침이 사황야의 온몸에서 가을낙엽처럼 우수수 떨 어져내리고 있지 않는가? "여, 여보... 아이쿠!" 걱정스레 그녀에게 다가오던 이황야는 그녀의 손짓에 사정없이 처박히고 말았다. 무공이 없 는 이황야는 그녀의 일격에 피를 토하며 그대로 혼절했다. "어, 어떻게 섬전탈명침에 격중되고도?" 심려려는 이황야를 보지도 않고 사황야만 쳐다보았다. "으하하... 당신이 여걸이라 알았더니 독부(毒婦)였군! 오늘 이후, 당신은 본왕의 형수가 아니 다!" 사황야가 분노한 웃음을 터뜨리며 심려려에게 무섭게 다가갔다. 그의 전신에 서린 기세는 그가 일대고수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호-옷!" "으야얍!" 세 명의 흑의몽면인들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채채-챙! 펑! 펑- "크에-웩!" "으-웩..." 참혹한 비명과 함께 흑의몽면인들의 가슴이 박살이 나 날아갔다. 믿을 수 없게도 그들의 검 은 사황야를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황야는 끄떡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사황야의 파옥신권은 그들의 넋을 으스러뜨렸다. "그 정도로는 만금보의(萬金寶衣)를 어쩔 수 없지!" 사황야는 코웃음치며 기세를 늦추지 않고 심려려에게 다가갔다. 그는 기보라 불릴 수 있는 보의를 입고 있었다. 그렇기에 흑포괴인의 일격을 맞고도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아... 한 순간의 실수로...!" 심려려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그 순간이었다. "만금보의가 막을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 이 세상의 음성이 아닌 듯 맑고 찬 냉혹무쌍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사황야 주성운은 자신의 앞에 한 인영이 스침을 느꼈다. 일성 호통과 함께 그는 벼 락같이 전력을 다해 파옥신권을 쏟아냈으나, 그의 권력이 채 쏟아지기도 전에 한 가닥 무서 운 잠경이 그를 휘감았다. "멈춰라!" "으-왁!" 창노한 음성이 다급히 터짐과 함께, 사황야는 광풍에 휘말려 실 끊어진 연과 같이 날아올랐 다. 심려려의 앞에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 서 있었던 듯 백의인영이 하나 서 있었다. 헐렁한 백 포로 인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인영에게서 드러난 것은 서릿발처럼 차게 빛 나는 두 눈밖에 없었다. 얼굴조차 백건으로 가려져 있는 것이다. "...?" 심려려는 의아한 듯 백의인영을 쳐다보았다. 그녀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심왕비... 내가 조금만 늦게 왔다면 일을 그르칠 뻔했습니다." 감정이라곤 전혀 서리지 않는 괴이하도록 찬 음성이 백의인영에게서 흘러나왔다. "후, 후... 후... 주...!" 심려려의 눈이 공포로 가득 차고, 벼락맞은 듯 떨던 몸이 그 자리에 그대로 무너졌다. "사, 사... 살려..." 그녀가 고개를 땅에 처박고 더듬거리는 소리는 너무도 떨려 무슨 소린지조차 알 수 없었다. 평소의 그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태도였다. 백의인영의 소매가 펄럭였다. 심려려는 공포로 덜덜 떨면서 저절로 일으켜졌다. "걱정 마시오. 내가 왔으니..." 백의인영은 차갑게 웃었다. '아, 아직은 내가 필요하구나!' 그 말에 심려려의 눈에 한 가닥 생기가 돌았다. 그것은 나타난 사람이 그녀에게 얼마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와아악!" "흑!" 그때, 백의인영을 덮치던 고수 다섯이 오장육부가 으스러져 날아갔다. 그 누구도 그가 어떻 게 손을 썼는지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그저 백의인영에게서 차갑게 빛나는 눈을 볼 뿐이었다. 사람의 감정이 서리지 않은 눈길이 었다. "당신은 누구요?" 창노한 음성이 침중히 울려나왔다. 백의인영의 무심한 눈이 그곳을 향했다. 관복을 걸친 노인 하나가 사황야를 부축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막강 한 기세가 어려 있어 가공할 초강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사황야의 경연사부(經筵師父;글선생)!" 심려려가 참지 못하고 부지중에 외쳤다. 사황야를 부축하고 있는 관복의 노인. 그 사람이야말로 사황야를 어릴 때부터 가르쳐온 학 자 유동(柳桐)이었다. 하지만, 그가 선황의 밀명(密命)으로 사황야를 보호하는 천하고수(天下高手)임을 아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선황은 주천운과 주성운 중에서 누가 자신의 꿈에 나타났던 주인공인지 알 수가 없자, 두 사람에게 각기 고수 한 사람씩을 붙여서 그들을 보호하도록 조치해놓았던 것이다. "금패사자, 그간 궐내의 사정을 잘도 알아놓았군!" 싸늘한 전음이 심려려의 귀에 파고드는 순간에 겨우 피어나던 심려려의 안색은 또다시 사색 이 되고 말았다. "금패령주!" 백의인영이 냉랭히 외쳤다. "여기 있습니다." 담장 위에서 눈만 내놓은 흑의인 하나가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모두 죽여라. 단 하나도 남겨두지마라!" 백의인영은 감정없이 냉담히 내뱉었다. 순간, 사방에서 이십팔 명의 흑의인들이 기척도 없이 날아들었다. "으-악!" 스-윽! "크-윽!" "와아아아... 악!" 그리고, 무자비한 도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적도 없고 아군도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한 악독무비한 것이었다. 격식을 갖춘 무공은 방비조차 할 여유가 없는 것이 그들이었다. "지독한! 도대체 너는 누구냐? 멈추지 못하겠느냐?" 사황야가 가슴을 움켜쥔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뜻밖에 그릇이 컸다! 하지만 시기를 잘못 타고났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이황야뿐이 다. 금패령주!" 백의인영이 차갑게 외쳤다. 스-윽! 금패령주라 불린 흑의인이 십 장을 가로질러 천마와 같이 사황야를 덮쳐갔다. 팟! 차가운 검광이 폭발하듯 쏟아졌다. "물러나라!" 경연학사 유동이 벼락같이 일권을 쏟아냈다. 패패-팽! 기향(奇響)이 미친 듯 일어나며 두 사람이 갈라섰다. "귀령참혼검(鬼靈斬魂劍)! 네가 참혼마군(斬魂魔君)인가?" 자신의 가슴팍 옷자락이 갈라졌음을 느낀 유동이 경악해 금패령주를 쳐다보았다. "파옥신권을 붕옥신권(崩玉神拳)까지 연성한 것은 개산권신(開山拳神)뿐인데...!" 금패령주도 자신의 검끝이 부서져나갔음을 보고 신음했다. 개산권신(開山拳神)!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권. 그러나 그의 이름은 구십 년이란 세월에 잊혀지는 중이었다. 그 엄청난 고수가 바로 대내에 있었음은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참혼마군(斬魂魔君)! 단 한번도 실수가 없었다는 공포의 살수. 살수에게 마군(魔君)이란 칭호가 붙은 것은 그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웅변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오십 년이 넘는다. "사부의 붕옥신권은 쇠를 분말로 만들 지경인데...!" 사황야가 신음하는 순간, 금패령주와 유동은 무서운 기세로 싸우기 시작했다. "위험하오! 이 자리를 떠나시오. 전하!" 유동의 전음에 경각한 사황야 주성운은 백의인영이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백의인영의 움직임은 천천히인 것 같지만, 그렇게 보여서 그럴 뿐이지 기실은 얼음에 미끄 러지듯 무섭게 빨랐다. 사황야는 백의인영의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음을 보았다. '능공답허(凌空踏虛)... 정녕 가공할 초강고수!' 이미 내상 입은 몸으로 피할 수 없음을 느낀 사황야는 안색을 굳혔다. 그의 온몸에서 홍광 이 떠올랐다. "그까짓 원양대진력으로 나를 막을 수 없지!" 냉소가 백의인영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얼음을 뱉는 듯한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 의인영이 상상키도 어려운 속도로 덮쳐왔다. "붕옥신-권!" 사황야가 양주먹을 합쳐 내질렀다. 위이-잉! 가공(可恐)의 권세가 일어나는 순간, 하늘을 뒤집을 듯한 백의인영의 수영(袖影) 속에서 푸 른빛 옥수가 번개같이 튀어나왔다. 수경(手勁)과 권력(拳力)이 마주쳤다. 꽝! "으으-윽!" 굉음이 터지면서 사황야는 울컥 피를 토해내고 잇달아 물러났다. 하지만 숨쉴 여가도 없이 청옥수(靑玉手)는 사황야를 따라오고 있었다. "지독하군! 파천마라수(破天魔羅袖) 속에 살수가 또 숨었을 줄이야...!" 사황야는 피할 틈도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덮쳐오던 백의인영이 비틀하더니 재주를 넘으며 이삼 장 밖에 내려섰다. "흑!" "으...!" 그것과 함께 양 떼 속의 이리 떼 같이 횡행하던 금패고수들 몇이 느닷없이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파-파팡! 거의 같은 순간에 땅 위에 내려선 백의인영의 몸 앞 한 자 거리에서 매서운 폭음이 터져나 왔다. "누구냐?" 백의인영은 비틀하더니 살기 어린 어조로 외쳤다. 그는 이미 암중에 가공할 공격을 두 차례나 받은 것이다. 그의 공력이 초강하지 않았다면 이미 내부가 가루가 되고 남음이 있었으리라! "호국신위(護國神威)!" "지존현신(至尊現身)!" 그가 경악해 외치는 순간에 우렁찬 외침이 사방을 뒤흔들며 금갑무사(金甲武士) 백 명이 섬 전과 같이 날아들었다. 앞장선 금의장군. 그는 지난날 금군총교두였으며, 지금은 지존위의 대장인 패도무적 정문수였다. '이건 또 뭐야?' 모두가 의혹 어린 눈이 될 때, 금갑무사들의 가운데가 쫙 갈라지며 용포의 몽면인 하나가 나타났다. 그의 눈빛은 밤하늘의 한성(寒星)과 같고, 전신에는 만인을 경복(敬伏)시키는 기세가 어려 있었다. 사방을 쏘아보는 그의 태도는 제왕(帝王)의 그것이었다. 주위를 쓸어보는 복면인의 눈빛에 차가운 빛이 스쳐갔다. "범인(凡人)으로서 범궐(犯闕)한 자, 그 죄는 사죄(死罪)다! 지존위는 역도를 하나도 남기지 말라!" 복면인의 우렁찬 외침. 그것은 호국지존(護國至尊)의 초현(初現)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격전(激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 명의 지존위(至尊衛), 그들이 누구인가? 오늘을 기다리며 수십 년을 보낸 대명(大明)의 마지막 보루가 아니었던가! 그토록 무섭던 금패고수들도 지난 세월의 한을 토해내는 듯 위력을 토해내는 백 명의 지존위에게는 기세에 서부터 수세로 밀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어디서 난데없이 이런 자들이?' 백의인영은 북경, 그것도 자금성 내의 모든 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 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너는 누구냐? 방금 네가 나를 암습했느냐?" 백의인영이 차가운 눈빛으로 용포몽면인을 쏘아보았다. "당신이 후주(后主)인가?" 몽면인, 암중 신분인 호국지존으로 나타난 주천운은 천천히 그를 쳐다보며 대답 대신 오히 려 물었다. 백의인영의 온몸이 벼락맞은 듯 떨렸다. 그 놀라움을 어찌 형용하겠는가? "너는... 누구냐?" 백의인영의 눈에 경악과 의혹과 함께 무서운 살기가 떠올랐다. '이런 자가 있음을 몰랐다니! 내 일을 너무 급히 서둘렀다!' 그의 앞에 선 주천운의 태도는 침착하나 그의 내심은 긴장되고 있었다. '현천마금의 천심전(穿心箭)을 두 번이나 견디고도 끄떡없다니...' 그러나 그의 어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침착했다. "감히 황실에 손을 뻗어 대내의 기강이 문란토록 조롱한 자! 그것이 구족구멸(九族具滅)의 대역죄(大逆罪)임을 알 테지?" "그럴 능력이 있느냐?" 백의인영은 차갑게 웃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너는 이미 살아 있지 않다!" 주천운에게서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순간이다. 차-아-앙! 마치 창공에서 용이 신음하는 듯한 검명(劍鳴)이 터지며,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의 금광(金 光)이 백의인영을 덮쳐갔다. "으-흑!" 한 조각의 소매가 허공을 날며 백의인영이 튕겨지듯 오 장 밖으로 날아갔다. "피할 수 있다면 조화의(造化意)는 필요없는 것이지!" 주천운의 손에서 무서운 검망(劍芒)이 폭죽 터지듯 터지며 백의인영을 따라 덮쳐갔다. 그 신 속함과 변화무쌍함을 어찌 형용이라도 하랴! "파천마라수(破天魔羅袖)!" 백의인영은 다급히 양 소매를 쳐내며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파파팍! 소매가 갈가리 찢겨져 날았다. 희디흰 팔뚝이 드러나며 허공 중에 피가 뿌려졌다. '이럴 수가? 천잠사로 된 소매가, 더구나 내 공력까지 깃든 파천마라수가...!' 백의인영은 실로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란 말인가?' 그러나 드러난 희디흰 팔뚝을 보고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암중 주지인이 설마 하니 여자란 말인가? 하지만 그 찰나적인 틈을 최고고수가 어찌 놓치겠는가? "벽운천강수(碧雲天 手)!" 꽈르-릉! 백의인영의 팔이 새파랗게 빛나며 무서운 위세를 쏟아냈다. 그 위세는 십수 장을 휘몰아치고 남음이 있었다. "음-" 주천운의 검세가 흩어지며 사오 보 가량 밀려났다. "귀영무(鬼影舞)를 보여주겠다!" 백의인영은 단숨에 선기를 만회하고는 차갑게 외쳤다. 푸른빛 손그림자가 귀신의 그림자인 듯 천지를 뒤덮었다. "어디서나 가장 빠를 수 있기에 여의섬(如意閃)이지!" 그러나 주천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팟! 그의 손에서 무서운 금광이 폭사되며 여지없이 백의인영의 장세를 뚫고 들어갔다. 그 속도와 각도는 불가사의(不可思議)했다. '물러서던 자세가 안정되지 않았는데 이런 발검이 있을 수 있다니!' 백의인영은 크게 놀라 장세를 바꾸었다. 그러나 주천운의 변화는 더욱 빨랐다. "모든 변화가 마음에서 생기도다! 조화의!" 파파- "아-윽!" 백의인영이 신음과 함께 물러났다. 그의 어깨에서는 피가 솟아 백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검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귀영무(鬼影舞)! 그것은 사도제일장법(邪道第一掌法)이라 불리는 것이었으며, 그 변화는 천하를 덮는다는 것 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여의섬(如意閃)에 이어진 조화의(造化意)의 신묘(神妙)를. "대단하군!" 주천운은 그가 잇단 공격에도 겨우 검기에 어깨가 스치는 것에 그치자 놀라 낭랑히 호통쳤 다. 싹! 호국지존병이 완전한 사각(死角)에서 마치 폭발하듯 백의인영을 향해 덮쳤다. 그것은 마치 번갯불과 같아 피할 수조차 없었다. 찰나, 백의인영의 온몸에서 자광(紫光)이 찬란히 솟았다. 우우-웅! 호국지존병과 자광이 부딪치며 굉량(宏量)한 외침을 토해냈다. "음...!" 미친 듯한 흙먼지가 일어나는 가운데, 백의인영은 십 장 밖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목과 가슴팍에서 선혈이 가늘게 번져가고 있었다. '무, 무서운! 이런 검법이 있을 수 있다니...' 백의인영은 종전의 상황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의 공력이 나보다 높았다면 자부육합신공(紫府六合神功)조차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백의인영은 온몸에 자광을 떠올린 채 천천히 품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들의 격돌은 정녕 너무도 찰나적이었고 빨라 그것을 끝까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서운 자다! 강기로 호국지존병에서 몸을 빼내다니... 그의 공력은 나보다 높다! 애석하게 도 내 여의섬과 조화의가 아직 완벽히 조화되지 않아서 실기(失機)했다!' 주천운은 내심 신음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때, 백의인영은 냉혹무정한 어조로 내뱉으며 품속에서 손을 꺼냈다. "궁중에 이와 같은 검신(劍神)이 있음을 모른 것이 본좌의 실책! 하나, 두번 다시 그와 같은 기회는 없을 것...!" 휘이-잉! 그의 전신의 자광이 더욱 짙어지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한데, 백의인영이 품속에서 꺼낸 물건을 본 순간에 주천운의 눈에 경악이 떠오르며 전신이 부르르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백의인영의 손에는 찬란한 자광이 어리는 퉁소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한 자 일곱 치의 퉁소. 맙소사! 어찌 저 퉁소를 잊어버리겠는가. "대-려-군-?" 주천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순간, 백의인영의 가슴이 온통 경악으로 출렁였다. 그의 놀람, 그의 눈에 떠오른 그 경악을 어떻게 형용하겠는가? "당신은?" 백의인영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목소리, 그것은 방금까지의 그 얼음과 같은 목소리가 아닌 여인의, 이루 말할 수 없이 맑은 여인의 것이었다. 눈〔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안다! 보았던, 아니 잊지 못할 인상(印象)을 심어주었던 그 사람의 그 눈이 아니던가? "오-황-야?" 백의인영이 신음했다. -천하에 삼대천음(三大天音)이 있으니, 그 하나가 자미천소(紫薇天簫)요, 그 둘이 혈천마경 (血天魔磬)이며, 마지막 하나가 현천고금(玄天古琴)이다. 자미가 모습을 드러내매 천하가 핏빛으로 물들고, 마경이... 자미천소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천하에 가공할 혈겁(血劫)이 일어남을 뜻한다. 주천운의 뇌리에 천하기밀부에서 본 무림사(武林史)가 떠올랐다. "그랬었나? 정녕 후주가 당신이었던가? 설마 했었는데..." 주천운은 믿을 수 없는 듯 믿고 싶지 않은 듯 신음했다. 그는 천하기밀부에 든 후 이미 대려군의 옥소가 자미천소임을 알았고, 대려군이 심상치 않 은 변수로 작용할 것임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적의 괴수(魁首)라니. "..." 극히 짧은 침묵이 마치 영겁(永劫)인 듯 흘렀다. 갑자기 백의인영, 대려군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우우-웅! 자광이 뻗으며 무서운 기세가 일어났다. "려군!" 주천운의 전음이 대려군의 귓전을 강타했다. "려군이라고?" 대려군의 눈빛에 흠칫 파동이 일어났다. "나는 당신을 만난 후, 한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 늦지 않소! 마음을 돌린다면 지금이 라도..." "오호호호..." 돌연, 대려군이 미친 듯 웃었다. 구천에까지 사무치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뭘 잊고 뭘 어떻게 한다는 거죠? 당신은 오황야! 나는 후주일 뿐!" 그녀는 전음으로 외치며 냉랭한 태도로 자미천소를 들어올렸다. "오-황야! 당신이 이런 무서운 인물임을 알았다면 그때 살려두지 말 것을... 하나 지금도 늦 진 않았지!" 그녀의 입술에 자미천소가 닿았다. 부-웅! 자미천소에서 괴이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윽...!" 순간, 주천운은 가슴을 철퇴로 후려맞은 듯한 충격에 하마터면 호국지존병을 놓칠 뻔했다. 어찌 그뿐이랴? 꽈르르- 대려군 옆 십여 장 거리의 건물이 흔들리고, 담장에 금이 쩍쩍 가며 광풍이 일어났다. "으-악!" "우-으-윽!" 마지막 결전을 벌이고 있던 고수들 중 공력이 약한 자들이 심맥이 박살나 쓰러졌다. "무슨 짓이오! 멈추지 못하겠소?" 주천운이 힘있게 호통쳤다. 대려군의 눈이 차갑게 웃었다. "천뢰살(天雷殺)을 견디다니, 어디 천붕후(天崩吼)도 한번 감상해보시지요, 오황야?" 주천운의 가슴속에 한기가 일어났다. '삼대천음의 위력은 가공무쌍(可恐無雙)하다! 더구나 천붕후가 방금의 소음(蕭音)보다 강하 다면?' 아무도 견뎌내기 힘드리라! "멈추어라!" 주천운이 천둥같이 외쳤다. 그의 외침에는 항거할 수 없는 기세가 어려 있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싸우던 모든 사람이 손을 멈추었고, 대려군조차도 막 입에 대던 자미천소를 멈칫하고 말았다. 파-앗! 그 순간에 호국지존병이 한 가닥 금광으로 화해 그녀를 덮쳤다. 대려군은 대경해 자부유운 신법(紫府遊雲身法)으로 몸을 피하며 자미천소를 불려고 했다. 그러나 여의섬이 왜 여의섬이겠는가? '너무 빠르다!' 대려군은 자신이 자미천소를 부는 순간, 자신의 몸은 두 쪽이 나고 말 것임을 깨달았다. "자미천소무(紫薇天簫舞)!" 자미천소가 엄청난 위세로 뻗어났다. 땅! 자미천소와 호국지존병이 맞부딪쳤다. 위-웅! 무서운 강기가 일어나며 주천운은 손목이 끊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정말로 나보다 공력이 강하다! 자미천소가 제대로 위력을 발한다면 지금의 나는 당할 수 없다.' 주천운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온몸에서 서기가 장엄히 치솟았다. 용화대수미선공이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대려군을 가리키고 있는 호국지존병이 금빛 찬란 한 서광을 쏟아냈다. 태산이라도 짓눌러버릴 듯한 기세가 대려군의 전신을 엄습했다.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소! 당신의 나이로는 이 일의 주재자가 될 수 없소! 손을 멈추시오!" 주천운이 전음으로 외쳤다. "죽이고 싶지 않다고? 당신은 내가 어떤 신분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요?" 매섭게 외치는 그녀의 음성, 그러나 거기에 미미한 떨림이 어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 다. 와르릉- 자광서기(紫光瑞氣)가 뒤덮인 두 사람의 주위에는 무서운 경기가 십여 장을 휩쓸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들이 전음을 주고 받는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그만큼 가공하고 급박히 전개되고 있었기에. 위위이-이잉! 자광이 무섭게 일어났다. "멈추지 못하겠소? 내가 펼치는 무공은 거둘 수가 없소!" 전신이 터져나가는 압력이 쏟아지고 있음을 느낀 주천운이 침중히 외쳤다. 그러나 자광은 더욱 짙어지고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 속에서 탄식하듯 울부짖듯하는 처량한 음성이 들릴 듯 말 듯 전해졌다. "당신은... 명(明)... 나는..." 주천운은 그 말의 뜻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그가 받는 압력은 만 근 이상인 것이다. 꽈르-릉! 무서운 금빛 서광이 자광을 깨뜨리며 폭사되었다. "불광멸-겁뢰(佛光滅劫雷)!" 꽝! 꽈꽈-꽈르릉...! 낭랑한 외침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일어나고 가공할 강기( 氣)가 수십 장을 퍼져나갔다. 와르릉- 담장이 폭풍을 만난 짚단처럼 무너지고 황진이 하늘을 가렸다. 제 11 장 또 하나의 변수(變數) 폐허 속에 주천운은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면목을 가리고 있던 복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눈을 감고 서 있는 주천운, 그의 앞에는 굳은 안색의 지존위 대장 정문수 가 패도(覇刀)를 빗겨들고 서 있고, 지존위 위사들이 철통같이 주천운을 에워싸고 있었다. "다섯째...!" 사황야 주성운이 석상인 듯 서 있다가 주천운에게 다가갔다. "멈추시오. 아무리 사황야이시라도 더 이상 다가오면 용서치 않겠소!" 정문수가 두 눈을 부릅뜨며 패도를 겨누었다. "그대는 누군가?" "지존위 대장이오. 지존께서 기력을 회복하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자리서 움직이지마시 오!" 그때였다. "그대는 혹 지난날의 금군총교두였던 정문수가 아니신가?" 개산권신 유동이 물어왔다. "유대협의 기억력은 매우 놀랍소!" 정문수가 담담히 대꾸했다. 그 순간. "정대장!" 나지막한 주천운의 음성이 그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예, 지존, 괜찮으십니까?" 정문수가 황급히 돌아섰다. 주천운은 창백한 빛으로 천천히 호국지존병을 거두어넣고 있었다. "나와 상대하던 사람은 어찌 되었나?" "워낙 엄청난 대결이라 완전히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중상을 입고 도주한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정문수의 대답에 주천운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 중에 도망간 자는?" "황공합니다. 금패령주란 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정문수가 고개를 숙였다. "음-그들이 정말 갔는지 확인해보라!" 주천운이 나직이 말했다. "봉행하겠습니다!" 정문수는 어리둥절한 듯하더니 번개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섯째...!" 사황야가 침중히 불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주천운은 사황야의 눈에 경악과 불신, 그리고 격한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음을 보았다. "의외이십니까?" 주천운의 입에서 담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진인(眞人)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더니... 네가 이토록 속이 깊은 사람임은 몰랐 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헛고생을 한 듯하다!" 사황야는 침울히 말했다. 주천운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져갔다. 그때, 정문수가 돌아왔다. "아무도 없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이미 자금성을 벗어난 듯합니다." "욱!" 그 순간, 주천운의 안색이 돌변하며 입에서 선혈을 왈칵 토해냈다. "지존!" 주천운이 쓰러질 듯하자 정문수가 대경실색해 주천운을 부축했다. "괜찮소.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면 우리 모두는 살아날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나... 간 이상, 시간이 있소." 주천운은 천천히 말했다. "후주가 그토록 강합니까? 지존께 중상을 입고 겨우 도주했는데...!" 정문수는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 주천운은 담담히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무공은 나보다 강하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결과는 자명했으리라! 제아무리 기연이 겹쳤어도 그는 무공을 익힌 지 겨우 나흘이고 상대는 무림삼대천음의 하나 의 자미천소를 가진 절대초강고수가 아닌가? 그녀의 수중에 있는 자미천소는 결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나의 용화대수미선공은 아직 채 칠 성이 되지 못했다. 불광멸겁뢰의 위력도 아직은 본연의 그것이 아니었다!' 문득, 그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대려군이 외치던 음성이 되살아 났다. "당신은 명의 황족(皇族), 나는 원의 황-족!" 원의 황족! 그것은 너무도 거대한 울림이 아닐 수 없었다. '원의 황족? 대려군이?'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태는 너무도 심각한 것이다. 황가의 제위계승에 멸망한 원이 관계한다... 삼척동자라도 긴장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은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가 죽은 후 몽고(蒙古)에 웅거하며 제오대인 곤첩목아(坤帖 木兒)가 피살당한 후, 그 부하 귀립적(鬼立赤)이 달단가한(革達革旦可汗)이 되면서 정통대한 (正統大汗)의 황통(皇統)이 끊겼다! 한데, 또 무슨 황족이란 말인가?' 주천운은 사태가 심각하게 꼬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려군... 몽고의 황족이라고?' 주천운의 뇌리에 불해사 밑에서 만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그 한번의 만남은 너무도 강한 인상을 주천운의 가슴에 심어 놓았던 것이다. 기혈이 대강 안정됨을 깨달은 주천운은 눈을 떴다. 사황야, 이황야, 삼황야, 육황야 등의 모습이 차례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 중 평소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사황야뿐이었다. '역시 그릇이 다르다!' 그러나, 주천운은 기가 팍 죽은 육황야의 모습이 매우 평범함을 미처 유의치 못했다. 그는 언제나 튀지 않고 평범하기만 한 것이다. 어색한 표정의 부마도위 백문우가 스쳐 보이고 이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심왕비(沈 王妃)가 눈에 들어왔다. 주천운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심왕비는 주천운이 다가오자 더욱 고개를 숙였다. "형수님!" 조용한 주천운의 음성에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것은 내가 마지막 부르는 호칭이오." 담담한 그의 음성에 심려려는 전신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다, 다섯째... 네 형수를 너무... 그, 그녀는 나를 위해..." 이황야가 더듬거리며 기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십니까? 형수는 형님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주천운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이용...?" 이황야는 신음하듯 말문을 닫았다. 제아무리 바보라도 이 상황에서 그 말뜻을 모를 리 있으 랴. "당신은 천제문에서 무슨 지위에 있는가?" "...!" 심려려는 침묵을 지켰다. "대답하시오. 이 마당에 뭐가 더 숨길 것이 남았다고 믿소? 몸까지 뒤지도록 하지는 말아주 시오!" 단호한 주천운의 음성에는 항거불능의 위세가 있었다. "죽음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도저히 기세의 억압을 견딜 수 없음을 느낀 심려려가 고개를 들었다. "죽음?" "소신이 그녀를 제압하면서 입 속의 독을 제거하고 혀를 물 수 없게 해두었습니다." 지존위 대장 정문수가 대신 대답했다. "죽음... 그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던가? 천제문은 인간을 기이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허락하... 시... 겠습니까?" "내게 조건은 걸지마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대답일 뿐이니까." 주천운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심려려는 문득 고개를 들고 주천운을 올려다보았다. "전하는... 더 무서운 분입니다." "과찬이오. 이제 대답할 수 있겠소?" 주천운의 어조에 심려려는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천제문의 살아남은 인물들은 믿을 수 없는 듯 심려려를 쳐다보았다. 고문조차 않았는데 몇 마디 말에 항복한다는 것이... 그것은 용화대수미선공이 서서히 주천운의 기세와 동화(同和)되어간다는 증거였다. 시간의 지남에 따라 그의 말 한마디를 거역할 사람은 아마도 점점 적어지리라! "당신의 신분은?" "후단(后檀)의 금패사자입니다." "지위는?" "후주 아래 금패령주를 제외한 은, 동패령주와 비슷한 격(格)입니다." "언제부터 금패사자가 되었소?" "십 년... 되었습니다." "십 년?" 주위에서 경악한 신음이 들렸다. 십 년이라면 그녀가 왕비가 되기 전인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소?"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고 이황야를 황제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심려려의 이마에 진땀이 솟아났다. "그... 리고는 정사(政事)를 어지럽게 하고 국력을 쇠약케 하며, 천제문에서 전하는 인물로 대신(大臣)을... 삼아...!" "흥미있군, 계속하시오." 담담한 주천운의 음성은 무한한 위력으로 심려려의 심지를 핍박해갔다. "그분을 없... 애고 후사로 제위를 계승케 해 제가 수렴청정을... 죽여주십시오!" 심려려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 나를 없애버린다고?" 이황야는 넋이 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 후사도 아마 형님의 피를 받지는 않게 되겠지?" "...!" 심려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 사방의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지켰다. 주천운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로부터 권력투쟁이란 추잡한 것이었는데, 이제 우리 형제들이 권력에 눈이 어두워 폐하 께서 위중하신 이때에 감히 자금성 내에서 골육상잔이라니...!" 그의 어조는 준절(峻節)했다. "거기에 외부의 힘을 아무렇게나 끌어들여서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니 이러고도 대명 황 족의 자격이 있소이까?" "...!" 누가 그의 외침에 대꾸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황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리 나서시오." 주천운은 냉담히 말했다. 창백한 그의 안색은 말할 수 없이 위엄스러웠다. 조용한 가운데 사황야가 홀로 앞으로 나섰다. "나는 한 가지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말하시지요." "제위(帝位)의 임자는 받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나서기로 한 것이 확실한 것이냐?" "묻는 의도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깨끗이 물러서겠다! 네가 우리 중에서 가장 뛰어남을 인정하기 때 문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주천운의 어조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렇다면 나는 물러날 수 없다!" 사황야 주성운의 어조는 단호했다. "이런 지경으로 일을 만들어놓고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입니까?" 주천운이 냉랭히 웃었다. "그렇기에 물러날 수 없는 것이다! 벌여놓은 이상 수급의 책임도 있는 것, 네가 아니라면 그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자부심이 대단하군요?" 사황야 주성운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으나, 네가 나선 이상 모두 옛 이야기다. 우리 형제 중 진정한 제왕지재(帝王之材)는 너뿐이다! 나는 너에게 양보하겠다." 사황야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버려야 할 때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 과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천운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쳐감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전하!" 휘-익! 다급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날아내렸다. "화로!" 주천운은 흠칫했다. 뜻밖에 나타난 사람은 화로인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다급한 빛이 어리고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주천운의 창백한 안색에 화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염려 마시오. 한데 무슨 일이오?" 그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천운이 물었다.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뜻밖의 사태?" "예, 봉천전과 폐하의 침궁이 점거당했습니다." "뭣이? 그게 무슨 소리요?" 천하의 주천운조차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봉천전이 점거당하다니?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경운공주와 함께 봉천전의 후전 침궁에 계시는데 우선은 별일이 없으십니다!" "상세히 말해주시오! 어떻게 된 일이오?" 화로가 기막힌 듯 입을 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동창(東廠)의 전고수가 폐하를 시위한다는 명목하에 봉천전 을 점거하고...!" "동창의 고수가?" "예, 그리고 제독동창(提督東廠;동창의 長)인 장인태감(掌印太監)이 어지(御旨)라고 칠황야를 태자(太子)에 봉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일-곱째를 말이오?" "예, 바로 일곱째 전하입니다." 일곱째, 칠황야 숭덕왕(嵩德王) 주서운(朱瑞雲)! 숨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던 그 칠황야 주서운이 행동을 개시했다는 말이었다. 주천운은 느닷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기가 막힌 때를 택했군! 일곱째다운 심기(心機)다! 내가 잠시 일곱째를 잊고 있었군." 사황야 주성운이 어이없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다. < 제1권 끝 >제 12 장 의혹(疑惑)은 구름처럼 일어나고... 제 13 장 사랑은 별리(別離)의 고통으로... 제 14 장 강호제일보(江湖第一步)5 장 장진도(藏珍圖)에 이는 풍운(風雲)6 장 무영개신(無影 神) 17 장 무림제갈의 출현(出現)8 장 자결하는 마왕(魔王)9 장 신마금검뢰(神魔琴劒雷)의 전설(傳說)0 장 나타난 천지회(天地會)1 장 대호친왕부(大昊親王府) 22 장 대혈풍(大血風)의 서곡(序曲) 제 12 장 의혹(疑惑)은 구름처럼 일어나고... 봉천전(奉天殿)은 평소 황제가 만조백관하여, 천하 기무(機務)를 보던 곳이다. 황제가 병석 에 누운 후에 봉천전은 허전한 바 있었으나 오늘 낮은 용암 같은 열기로 들끓은 바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각, 봉천정전(奉天正殿)은 물론이고, 그 주위 동서의 문루(文樓)와 무루(武 樓), 봉천전 뒤편의 침궁(寢宮)인 건청궁(乾淸宮)까지 대낮같이 횃불이 밝혀져 있고, 요소요 소에는 금군위사(禁軍衛士)와 동창(東廠)의 전고수가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이고 있었다. 그 엄중함은 개미새끼 한 마리 드나들 수 없을 정도였다. "멈추시오!" 돌연 우렁찬 호통이 터지며 위사들이 쫙 늘어섰다. 봉천전의 앞에 백여 명의 인영이 나타난 것이다. 그 앞에 선 것은 주천운이었고, 그 좌우에 화로와 정문수가 따르고 있었다. "무엇 하는 자들이냐?" 주천운이 그들을 쏘아보며 꾸짖듯 말했다. 위사 중 앞장선 자가 주천운과 그 뒤에 이, 삼, 사, 육황야를 발견하고 궁신했다. "문안드리옵니다." 그는 동창의 칠대고수 중 하나인 철사자(鐵獅子) 도걸(陶杰)이었다. "감히 봉천전에 군사를 풀다니, 무슨 짓이냐?" 주천운이 냉담히 외쳤다. "어명이옵니다." 철사자 도걸이 태연히 대답했다. "어명?" "예!" "혼수에 드신 폐하께서 네게 어명을 내리셨단 말이냐?" 주천운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졌다. '으으... 무서운 기세다. 문약한 오황야가 어찌?' 배짱 좋기로 이름난 철사자도 내심 기가 질렸다. "소인이 직접 받은 것은 아니고 제독동창께서 받고 내리신 명령이옵니다." 그때였다. "돌아가소서! 황야들께서는 아무도 거처에서 움직이지말라는 어명이십니다." 간사한 음성과 함께 동창의 모사(謀士)라는 환관 유겸(劉兼)이 나섰다. "정대장, 어명을 사칭한 죄가 어찌 되느냐?" 주천운이 냉담히 물었다. "어명 사칭은 대역적이니 당연히 사죄(死罪)이옵니다." 지존위 대장 정문수가 힘있게 외쳤다. "이 역도들을 처단하라!" 주천운이 여유를 두지 않고 차갑게 외쳤다. 말과 함께 그의 신형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무... 무슨? 감히 어명을 능멸... 으-악!" 새파랗게 질려 뒷걸음 치던 유겸의 목이 화로의 검에 잘려 피를 뿌리며 날아올랐다. 일개 환관이 어찌 화로의 검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탕! "우-와악!" 철사자 도걸은 고수인지라, 벼락같이 내리쳐오는 정문수의 패도를 방극(方戟)을 들어 막았으 나, 방극이 수수깡처럼 반 동강나며 그의 몸도 두 쪽이 나고 말았다. 패도무적(覇刀無敵)이란 그냥 붙은 칭호가 아닌 것이다. 주천운은 그 모든 것을 보지 못한 듯 그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를 따르는 지존위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어명을 능멸하다니!" 그때 동창 칠대고수의 하나인 대력금강(大力金剛)이 노해 외치며 달려나왔다. 이미 금군과 동창의 고수들은 개미 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물러나라! 감히 지존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살아남지 못하리라!" 패도무적 정문수가 두 눈을 부릅뜨고 벽력같이 외쳤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가히 지난날 장비가 조조의 백만대군을 벽력 같은 외침으로 꾸 짖던 것을 방불케 하여 기세에 질린 금군과 동창고수들은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돌아가시오! 우리도 황야들께 죄를 짓고 싶지는 않소이다. 하나 신하된 몸으로 어명을 지키 지 않을 수는 없소." 대력금강이 앞으로 나서며 종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외쳤다. 한눈에 보아도 그가 우직하고 충성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대로 돌파하오리까?" 정문수가 지존위대의 앞에 서 난처한 빛이 되었다. "명에 복종하는 것뿐인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만두라." 주천운은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인원은 이쪽의 네 배 가량에 이르고 있는데 점점 많아지고 있었 다. 주천운은 그 속에서 적지 않은 고수가 숨어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간을 길게 끌 수는 없는 일, 지금의 내가 현천마금을 전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천운의 안색이 갑자기 더욱 창백해졌다. 동시에 그의 소매가 기이하게 파동쳤다. 디디-이이이잉! 다음 순간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괴기한 음향이 주위에 울려퍼졌다. 그것은 악마의 속삭임과 같은 소름 끼치는 음향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머리는 갑자기 텅 비고 말 았다. "..." 대력금강 등의 눈빛이 꿈꾸듯 몽롱히 변했다. 글자 그대로 몽유병에 걸린 사람과 같이 보였다. "길을 비켜라!" 주천운이 침중히 외쳤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대력금강 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결 갈라지듯 일제히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저럴 수가?" 주천운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놀람을 어찌 형용하랴! 탈심혼(奪心魂)! 현천마라금보의 제이음이 주천운의 소매 속에서 암중으로 펼쳐진 것이다. 금성(琴聲)을 듣는 자를 현천마금의 노예로 만든다는 가공기학(可恐奇學). 소매 속에 숨겨진 현천마금을 본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 역시 무리였다. 제대로 연마하지 못한데다가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는...' 주천운은 내심 겨우 가라앉혔던 기혈이 또 들끓음을 깨달았다. 그의 안색은 백지장같이 창 백했으나 천천히 옮겨 놓는 그의 발걸음은 태산과 같았다. 지금 주천운이 전개한 탈심혼은 본연의 위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대로 정신을 뺏기지 않은 자들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감히 주천운의 앞을 막을 생 각도 하지 못했다. 서기(瑞氣)가 어린 주천운의 모습, 용화대수미선공을 운기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장엄하기조 차 한 것이기에. 봉천전에 이르기까지 백사십여 장의 거리를 막고 나서는 자는 없었다. 대낮같이 밝혀져 있는 봉천전은 철통같이 경비되고 있었다. 굳게 닫힌 봉천전 앞에는 동창 의 정예인 용호삼십육위(龍虎三十六衛)가 버티고 서 있었다. "멈추시오!" 용호삼십육위의 수좌 천풍검객이 차갑게 외쳤다. "여구양(呂九揚), 네가 내 앞에서 검을 겨누느냐?" 패도무적 정문수가 운풍검객 여구양을 알아보고 냉랭히 웃었다. "저, 정교두-님?" 천풍검객 여구양은 정문수를 알아보고 대경실색해 소리쳤다. 이십 년 간이나 소식없어 죽은 것으로 된 그가 아니었던가? 오늘날의 천풍검객은 정문수가 일개 위사인 그를 돌봐 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를 알아본다면 길을 비켜라." 정문수가 냉담히 말을 잘랐다. 청풍검객 여구양의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죄... 죄송합니다. 어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어명? 무엇이 어명이냐? 이런 맹추 같은 놈!" 정문수가 냉랭히 외쳤다. "일곱째는 어디 있느냐?" 주천운이 손을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안에 계시오나 만나실 수는 없습니다!" 천풍검객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이었다. "하하... 내일 아침이면 황태자 책봉식(冊封式)이니 그때 만나시지요." 한소리 웃음소리와 함께 봉천전의 문이 열리며 갑주(甲胄)를 갖춘 인영이 한 사람 나타났다. 칠 척의 마른 체구에 세모눈에서는 신광이 번뜩이니, 그가 바로 장인태감(掌印太監:옥새를 관리하는 환관)이자 동창의 제독동창(提督東廠)인 관이오(管夷五)였다. 스스- 봉천전에서 홍의무사들이 소리도 없이 밀려나와 그의 좌우에 늘어서기 시작했다. 붉은 물결 이 밀려나오는 것 같았다. 결코 평범한 신수(身手)들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그대를 믿고 장인태감과 제독동창을 겸임케 했거늘 그 동안 사병(私兵)만 키웠 군..." 주천운이 담담히 웃었다. "하하... 천하의 대학(大學)이신 오황야께서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나신 것은 그보다 더 경악스 러운 일이외다!" 제독동창 관이오가 껄껄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나 사황야가 아닌 오황야가 앞서 있음에 제독동창 관이오는 놀람을 금치 못 하고 있었다. 오늘의 일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황야들께서 오신 뜻을 신(臣)이 모르는 바 아니나 이미 폐하께서 어지(御旨)를 내리셨으니 그 일은 변경될 수 없습니다." 제독동창 관이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것은 따로 여러 황야들께 내리신 어지이니 신이 읽어 드리겠습니다." 두루마리가 쫙 펴졌다. "짐은 고심 끝에 칠제(七弟)를 태자로 임명하였으니 아우들은 가벼이 움직이지말라. 짐은 태 자에게 전위(傳位)하기까지 모든 전권을 제독동창에게 위임하였으니, 만약 이에 불응하여 국 기(國基)를 흔드는 자가 있다면 대역죄인을 면치 못하리라." "개소리다. 모두 저 자식이 꾸민 가짜다!" 삼황야 주룡운이 울분을 터뜨렸다. "삼황야께서는 이 어인(御印)도 가짜라 하시겠소?" 제독동창 관이오는 태연히 두루마리를 뒤집어 거기 찍힌 옥새인을 보여주었다. 옥새를 관리하는 책임자가 그다. 이런 사태하에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옥새를 찍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심증이 갈지라도, 일단 옥새가 찍힌 문서를 누가 거역할 수 있겠 는가. 하지만 주천운은 두루마리는 본체만체 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말씀드리기 곤란하외다." 제독동창은 고개를 흔들었다. "감히 폐하를 인질로 삼으려 하는가?" 사황야가 차갑게 그를 쏘아보았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다만 혹시 있을지 모를 변고를 대비해 대내가 안정될 때까지의 잠정적으로 폐하를 보호하는 조치에 불과하외다." 말은 매끄러우나 뜻은 명백했다. "흥! 폐하께선 혼수에 드셨거늘, 어떻게 어명을 내리실 수가 있단 말인가? 감히 어명을 날조 하다니..." 사황야가 냉랭히 웃었다. "천만의 말씀! 폐하께선 잠시 정신이 드셔서 신에게 하명을 하셨소이다. 비록 지금은 다시 혼수에 드셨으나 어김없는 일이오이다!" 제독동창은 태연자약하게 말을 받아넘겼다. "우리가 굳이 폐하를 뵈어야 되겠다면?" 주천운이 담담히 제독동창을 쳐다보았다. "어지(御旨)에 불응하면 황야라 하셔도 역적의 누를 벗기 힘듭니다. 그냥 돌아가심이 좋을 것입니다." "돌아가지 않겠다면?" "...?" 일순 제독동창은 멍청한 빛이었으나 이내 크게 웃었다. "핫하하... 그랬다가는 후회하실 것이외다. 지금 이곳에는 동창과 금군의 정예가 총집결해 있 소이다!" "이들로 충분하리라 믿소?" 주천운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제독동창은 주천운의 태도에 은근히 질리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오황야가 아니다! 더구나 이, 삼, 사황야 등이 모조리 오황야의 뒤를 따르고 있으 니 괴이하지 않은가?' 그는 내심 꺼림칙했으나 자신이 있었다. "물론이외다. 어명을 지키는 데 이들의 능력이면 충분하리라 믿습니다. 오황야께서는 쓸데없 는..." 그의 말은 도중에 끊어졌다. "금의위는 어디 있는가?" 주천운이 느닷없이 낭랑히 외쳤기 때문이다. "금의위, 여기 지존의 부르심에 현신입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금의대한 한 명이 낙엽처럼 날아내렸다. 그 뒤에 금의를 걸친 무사들 수백이 나타났다. "금의위장(錦衣衛將) 희검룡(姬劍龍)?" 제독동창 관이오가 대경실색하는 순간이다. "채장군!" 주천운이 다시 외쳤다. "신 채광, 삼가 병부(兵部)의 고수들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갑옷을 입은 병부상서 채광이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병부시랑 유위가 병부의 정예고수를 이끌고 있었다. "병부상서...?" 제독동창이 신음할 때, 봉천전은 금의위와 병부고수들로 오히려 포위되고 말았다. "지난 이틀 동안 내가 한 일 중 제법 잘한 일이 바로 금의위와 병부를 장악한 것이었지." 주천운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주위는 갑자기 쥐죽은듯 조용해진 터라 그의 말은 매우 잘 들렸다. 특히 제독동창 관이오의 귀에는 천둥처럼 잘 들리는 소리였다. 그의 안색은 납덩이같이 굳 어 있었다. "어떤가? 아직도 자신이 있는가?" 주천운이 담담히 웃으며 그를 보았다. 제독동창은 그 웃음에 소름이 끼쳤다. 우뚝 버티고 선 주천운의 모습은 위풍이 당당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그의 좌우로는 사황야 등이 늘어 서 있으며, 화로와 정문수 등의 지존 위 고수에서 이젠 금의위와 병부의 군사들까지 기치창검을 번뜩이며 위세를 돋우고 있는 것 이다. '무... 무서운! 이제야 왜 사황야 등이 오황야의 뒤에 서 있는지를 알겠다!' 제독동창 관이오는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아직까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오황야! 황야의 병세(兵勢)가 소신보다 강함은 인정하리다. 하지만 설사 이 자리에서 죽을 지라도 소신은 어명을 어길 수는 없소이다!" 소리친 제독동창은 음랭히 금의위장 희검룡을 쏘아보았다. "폐하께서 당신을 가장 믿었거늘... 중립을 지키는 체하고 이제 와서 오황야에게 가담하다니, 이 어명이 보이지 않는가?" 그의 꾸짖음은 논리정연했다. 금의위장 희검룡은 당금의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의위장 희검룡은 안색조차 변치 않았다. "어제까지였다면 나는 그 어명에 무릎을 꿇었을 것이나 지금은 다르다." "뭐가 다르단 말인가?" 관이오의 말에 금의위장 희검룡은 코웃음 쳤다. "그 어명이 날조된 가짜임을 알기 때문이다." "뭣이? 감히 그따위 망발을!" "닥쳐라! 관이오! 너는 오황야께서 뉘신지 아느냐?" 금의위장 희검룡이 오히려 두 눈을 부릅떴다. "누구라니?" 관이오는 어리둥절해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본들 알 리 없었다. 주천운은 여전히 오황야일 뿐이었다. 그것은 지금 이곳에 있는 거의 대 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존이시여, 신분을 밝혀 주소서!" 금의위장 희검룡이 허리를 굽혔다. '지존이라니? 아까부터 그들은 오제를 지존이라 불렀다. 거기에 무슨 다른 뜻이 있었단 말 인가?' 사황야가 기이한 빛을 떠올리는 순간에 주천운은 품속에서 천천히 금빛 찬란한 단검을 꺼냈 다. 주위의 횃불을 무색케 하는 그 단검이야말로 호국지존병이었다. "저건 일개 단검...?" 사황야를 비롯해 제독동창까지도 어리둥절했다. 그 순간이다. "호국신위(護國神威)!" "지존현신(至尊現身)!" "삼가 호국지존을 뵈옵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지존위와 금의위, 병부고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호국-지-존?!" 얼떨떨해 중얼거리던 제독동창 관이오의 안색이 금빛(?)으로 돌변했다. 그뿐 아니었다. 이황야를 비롯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천하가 어지러울 때 호국지존이 나타나 난(亂)을 평정하니 설사 황제라 할지라도 호국지존 앞에 경복하리라!" 주천운이 호국지존병을 세우며 낭랑히 외쳤다. "지존을 뵈옵니다!" 이, 삼, 사, 육황야 등이 모두 주천운의 뒤에서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천하에 호국지존이 나타났음이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으으... 이, 이럴 때 호국지존이... 나타나다니...!' 제독동창 관이오는 사색이 되어 식은땀을 흘렸다. "관이오, 네가 호국지존병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냐?" 주천운이 차갑게 웃으며 천천히 관이오에게 다가갔다. "으으...!" 관이오가 부지중에 물러날 때였다. "섯거라!" 호국지존이 뭔지 모르는 관이오의 심복 몇이 호통을 치며 덮쳐 들었다. 팟! 금광이 번개같이 번뜩이는 순간에 주천운은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그들을 휘청, 스쳐 지나 고 있었다. 아무리 내상을 입었어도 여의섬의 빠르기는 천하제일인 것이다. 힘도 들지 않았 고, 마치 갈대를 헤치고 나가듯 그저 그의 앞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그들이 보였을 뿐 이다. "호국지존병에 거역함은 죽음뿐, 예외는 없다." 관이오는 주천운의 음성에 자신의 모든 야심이 통째로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호, 호국지존은 화, 황제의 권리 포기가... 있어야..." "닥쳐라! 아직도 어명을 사칭할 생각이냐?" 주천운이 차갑게 호통 쳤다. 팟! 금광이 무섭게 관이오를 덮쳤다. "으-악!" 피보라가 일며 관이오가 혼비백산해 바람같이 물러났다. 그의 눈을 부릅뜬 얼굴은 경악과 공포로 넋이 나간 듯했다. 그의 일신 무공은 하수가 아니었지만 주천운의 손이 슬쩍 뒤집어 지는 것만 보았지, 어떻게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지조차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제법이군! 네가 호국지존병을 피할 수 있다면 천년 만에 초현(初現)한 호국지존의 이름에 누가 될 것이다!" 주천운의 음성은 조용했으나, 그의 신형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고 있어 호국지존병은 이미 관이오의 목과 불과 한 치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관이오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금광뿐이었다. "으으-!" 피보라가 검기에 휘날리며 그의 목이 피투성이가 되는 순간이었다. "형님!" 다급한 음성이 봉천전 안에서 터져 나왔다. '일곱째?' 주천운이 멈칫하는 순간에 관이오는 그 틈을 놓칠세라 꽁지가 빠져라고 봉천전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아마 그의 평생 가장 빠르게 신법을 구사한 때였으리라. 주천운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뒤를 따랐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홍의무사 들도 감히 주천운을 막는 자는 없었다. 이 마당에 그를 막는다면 미친 자에 다름이 아닐 것이었다. * * * 거대한 침상이 있었다. 거기에는 기식이 엄엄한 중년인이 누워 있었고 화려한 궁장의 소녀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바로 당금의 황제와 그 딸인 경운공주 주소영이다. 입은 옷조차 백의이고 얼굴빛조차 백지장처럼 희다. 전신에 음산한 사기(邪氣)가 도는 네 명 의 괴기한 형색의 백발노인이 그 침상을 에워싸듯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들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한 노승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쓰러져 있고, 침상 앞 에 놓인 용교의에는 눈빛이 깊은 용포소년이 앉아 있었다. 그의 무릎에 단정히 놓인 장검은 어딘지 그의 기도(氣度)가 평범치 않음을 말해 주는 듯했 다. 그 앞에는 구사일생한 관이오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앞에 주천운은 조용한 태도로 서 있었다. "..." 마주보고 있던 용포소년의 입가에 문득 자조(自嘲)의 웃음이 번져 갔다. "천하에 나보다 심기가 깊은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했더니... 설마 다섯째 형과 여기서 마주 보게 될 줄은..." 그의 이름은 주서운, 바로 칠황야인 숭덕왕(嵩德王)이었다. 그때였다. "오숙(五叔)!" 경운공주 주소영이 그제야 주천운을 발견하고 안타까이 외쳤다. 이 며칠 사이에 그녀는 매 우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괜찮으냐? 소영아." "한걸음만 더 움직이면 폐하와 영아의 안전을 소제는 장담치 못하오!" 주천운이 다가가려는 순간, 칠황야 주서운이 담담히 외쳤다. 주천운의 발걸음이 멎었다. 천천히 그를 돌아보는 그의 눈에는 무서운 분노가 들끓고 있었 다. "네가 감히 폐하의 안전으로 나를 위협하고자 하느냐?" 내뱉듯 외치는 그의 음성에는 무서운 기세가 어려 있었다. 그토록 침착하던 칠황야조차도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소제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소. 하지만 전혀 뜻밖에 다섯째 형님이 나서는 바람에 지난 세 월 동안 소제가 공들인 것은 모두 사상누각이 되고 말았소!" 칠황야는 검을 잡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네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주천운은 냉담히 그를 쏘아보았다. "이곳에서 안전하게 벗어나는 것입니다." 칠황야는 침착히 말했다. "그것이 다냐?" "그렇습니다. 다만 거기에 소제가 데리고 있던 고수들이 모두 포함될 뿐입니다." 칠황야는 자신의 요구를 주천운이 들어 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주천운의 충 후한 성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너는 내가 옥새를 제멋대로 사용한 자들을 용서하리라 믿느냐?" "용서는 필요없습니다. 다만 북경을 벗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칠황야의 침착한 대답에 주천운은 전광석화와 같이 한 가닥 의혹이 머리를 스치는 것을 느 꼈다. "너는 북경만 벗어나면 배후 인물이 다시 너를 도와 주리라 생각하느냐?" 순간, 주천운은 칠황야의 눈에 당황하는 빛이 찰나적으로 스침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하하... 하지만 너는 착각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이상, 너는 쓸모가 없다." 주천운은 그가 부인할 여유도 주지 않고 머리를 저으며 차갑게 웃었다. "흐흐... 형님이야말로 무섭군요. 하나, 소제가 그런 시험에 넘어갈 것 같습니까? 소제에게는 소제대로의 길이 있습니다." 칠황야는 음랭히 웃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주천운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북경을 무사히 떠나는 조건으로 폐하 부녀를 석방하겠다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칠황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들이 폐하 부녀를 잘 지켜 낼 것 같으냐?" 문득 주천운이 엉뚱한 말을 던졌다. "걱정은 고마우나 저들의 연수합격(聯手合擊)은 강호일절로 그 어떤 고수도..." 그의 말은 갑자기 흐려졌다. 주천운의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보았으므로. "너는 나를 보고 심기가 깊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내가 폐하에 대해 너무 소홀했다고 생각 지 않느냐?" 주천운의 입가에 번지는 웃음은 예리무비한 비수가 되어 칠황야의 가슴에 박혔다. "그 중[僧]...!" 그가 대경실색해 외치며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퍼-펑펑! "크-윽!" "우우-욱..." 침상쪽에서 벼락치는 음향이 진동하며 신음이 터져나왔다. 네 명의 백의노인 중 두 명은 마치 탄환과 같이 날아 벽에 부딪치고 위기를 경각한 두 명은 피를 토해내면서도 무서운 흉성을 드러냈다. 그들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쏟아낸 일격 은 침상을 박살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침상이 부서지는 그 순간에 황제와 경운공주는 대들보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껴안고 대들보 위에 내려선 사람은 바로 조금 전까지도 죽은 듯 바닥에 쓰러져 있 었던 그 노승이었다. 그 노승은 바로 다름아닌 불해사의 회오대사였다. 백약(百藥)이 무효라 불력(佛力)이 영험하다고 모셔놓았다는 그 고승이야말로 주천운이 만 에 하나 있을 수 있을지 모르는, 황제의 안전을 위해 배치해놓은 포석이었던 것이다. 차-창! 파-파팡! 대경실색해 벼락같이 날아오르는 회오대사를 덮쳐가던 칠황야와 관이오는 화로와 정문수에 의해 격퇴되고 말았다. "아미타불... 죽은 체하여 남을 기만하고 암수(暗手)까지 썼으니 노납의 죄가 크도다..." 불가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 사기이며, 거짓말이다. 회오대사의 탄식은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그 탄식 어린 어조는 칠황야의 오장을 긁는 소리에 다름이 아니었다. "으, 음산사노(陰山四老)의 연수진이 단번에 파괴되다니..." "부... 분명히 사혈을 짚었었는데..." 제독동창 관이오가 사색이 되어 더듬거렸다. 그들을 쳐다보는 주천운의 태도는 처음과 같이 침착했다. "일곱째, 이제는 내가 너에게 요구할 차례인 것 같구나." 그의 침착한 음성은 무서운 중압감으로 칠황야 주서운의 가슴을 짓눌렀다. "무... 서운... 진정, 당신이 이... 토록 무서운 사람임은 짐작도 못했소." 칠황야는 드디어 냉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주천운과 마주서게 되면 자신(自身)을 잃고 말 것이리라. "누구냐? 너를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주천운의 음성이 조용히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유도하지마시오! 그런다고 내가 댈 것 같소?" 소리치던 칠황야의 안색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미 유도당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과연 대혜왕답군! 하나 내 입에서 더 이상을 기대하진 마시오!" 칠황야는 내뱉듯 외치며 검을 세웠다. "마영수라검(魔影修羅劍)의 기수식이군... 그것으로는 너를 지킬 수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없다." 주천운의 담담한 어조는 칠황야의 김을 있는 대로 다 새게 만들기에 족했다. "모, 모르는 게 없군! 서역(西域) 비전밀검(秘傳密劍)까지 알다니..."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을 슬쩍 한번 휘둘러보더니 말했다. "호국지존의 권위는 천하무쌍... 따라서 나는 너를 용서할 수도 있다." "?" 칠황야의 눈에 기광이 스쳐갔다. "너의 대답에 달렸다!" 주천운은 칠황야를 직시했다. "으..." 칠황야의 눈에 갈등의 빛이 드러났다. 이윽고, 칠황야는 고개를 떨구었다. "좋습니다..." 한데 그 순간, 스르르 밑으로 내려가던 그의 검이 전광석화처럼 주천운을 덮쳐 오는 것이 아닌가. 음독한 계략이고 허를 노린 무서운 일격이었다. "지존!" 경악한 외침이 사방에서 터졌다. "어리석은 놈!" 주천운의 입에서 싸늘한 노갈이 터져 나왔다. 캉! 분명히 주천운을 베었다고 느껴지던 검이 썩은 무우 토막과 같이 잘려져나가며 칠황야의 가 슴에서 피가 솟았다. 여의섬(如意閃), 삼백육십오세의 그 가공할 쾌검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 느 때, 어느 순간 어느 자세에서라도 가장 빠르게 검을 발출해낼 수 있으니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으으... 믿을 수 없는 일! 마영수라검의 마영참혼보다 더 빠른 검식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튕기듯 물러난 칠황야는 가슴의 통증에 신음했다. "대답해라. 너를 조종한 자가 누구냐?" 주천운은 차갑게 말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원래 내상을 입고 있던 주천운인지라 그 안색은 얼음보다 더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 에게는 살기로 느껴지는 것 또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칠황야는 그의 기세에 핍박받아 숨쉬기조차 거북해졌다. "그는 형님보다 더 무섭소... 흐흐...! 내가 죽으면 그가 나서게 될 것이고 그가 나서면 아무 도 당할 수 없소..." 그는 주천운의 무형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듯 갑자기 소리쳤다. 그 순간이었다. 따르르르릉!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방울 소리가 봉천전 밖에서 들려왔다. "으아-악!" 동시에, 칠황야가 처참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펄쩍 뛰어올랐다가 나뒹굴었다. 바닥에 떨어 진 칠황야 주서운의 칠공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밖을 수색하라!" 너무도 뜻밖의 사태에 흠칫하던 주천운이 급히 외쳤다. 휘휘-잉! 정문수와 화로가 그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번개같이 봉천전을 벗어났다. "일곱째..." 주천운은 칠황야 주서운이 곁에 무릎을 꿇으며 신음했다. 칠황야는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때, 주천운은 칠황야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청각을 최대한 확대하는 순간이었다. "... 삼(三)..." 단 한마디, 뭔가 더 이어진 것 같은데 도저히 더 이상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한마디는 칠황야가 세상에 남겨놓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 순간에 칠황야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 속에서 보기에도 끔찍한 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기어나왔다. "고(蠱)... 묘강의 마령추혼고(魔鈴追魂蠱)?" 주천운의 안색이 돌변했다. 마령추혼고, 묘강구대고독(苗彊九大蠱毒)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것의 하나. 평소에는 몸 속 에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나 일단 섭혼마령이 울리면 동면상태에서 깨어나 단숨에 생명 을 빼앗는다. 그때였다. "아미타불... 시주는 끝내 도도(屠刀)를 버리지 않는구려..." 회오대사의 불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팡! "크에엑!" 검이 산산이 부서지며 제독동창 관이오가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주천운을 암습하려다 회오 대사에게 들킨 것이다. 주천운은 그것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미동도 않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었다. 일곱째를 움직이는 인물이 있을 줄은... 일곱째는 효웅의 기질이 있는 아이였다.' 주천운의 뇌리에 칠황야의 태도가 떠올랐다. '그의 태도로 보아 일곱째는 암중 인물을 매우 두려워했고... 그것은 하루 이틀에 형성된 것 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곱째의 심계(心計)도 그에 의해 길러졌다고 봐야 한다.' 주천운은 칠황야의 시체를 조사했으나 아무것도 발견치 못했다. '천제문은 아니다. 또 하나가 있었다! 그 힘은 천제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일곱째의 말대 로 그는 정말로 무서운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주천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삼(三)...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암중 인물의 정체? 그가 속한 단체? 지명?' 일곱째 주서운은 그에게 수수께끼 하나를 남겨 준 셈이었다. 단서도 없는 너무도 막막한 수수께끼 하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지존위장 정문수가 돌아왔다. "흑흑흑... 오수욱(五叔)..." 경운공주가 주천운에게 달려와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다. 이제 다 끝났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주천운이 그녀를 부드럽게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끝이 아니다. 어쩌면...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제 13 장 사랑은 별리(別離)의 고통으로... 소문(所聞)! 북경성(北京城)을 뒤집고 천하를 진동하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반란이 일어났다. 황야들 간에 왕자지난(王子之亂)이 일어났다. 피바다로 변한 자금성에 천여 년 만에 호국지존이 나타났다. 그는 놀랍게도 단 하룻밤 사이 에 황궁의 모든 암투를 깨끗이 해결했다... 호국지존의 정체는 천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오황야, 대혜왕 주천운! 그는 책 속에서 도(道)를 얻어 이미 신선(神仙)이 되었다. 그가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천하의 그 누구라도 그의 앞에 이르면 저절로 무릎을 꿇 게 된다. 오오-호국지존이시여! 민간에서는 그를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들고, 그에 대한 소문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 난비(亂飛)하는 가운데 단 한 가지, 확인되고 공포(公布)된 것이 있 었다. 황위(皇位) 계승자(繼承者)가 생긴 것이다. 사황야 주성운이 호국지존의 명으로 태자에 책봉(冊封)되었다. 여론도 들끓고, 조정의 대신들도 외쳤다. "호국지존이시여! 왜 보위를 남에게 넘겨주십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영원히 황가(皇家)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호국지존은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군림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 다!" * * * 천기각(天機閣). 주천운은 서재에서 운기조식하고 있었다. 그의 내상은 지독한 것이었다. 대려군의 무공은 삼대천음에서 연유된 것이라 일반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고, 주천운은 내상을 입은 몸으로 칠황야를 상대하기 위해 그것을 억눌렀던 터라 그 상세는 매우 엄중했 다. 그러나 지금 주천운의 모습에서는 찬란한 서기(瑞氣)가 연꽃 모양으로 휘황히 떠오르고 있 었다. 그것은 내상은커녕, 용화대수미선공 구성지경을 넘어서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주천운의 머리에 은은히 어리던 후광(後光)이 점차 엷어지고 주천운이 눈을 뜰 즈음에는 전 신에 어린 서기는 주천운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용화대수미선공은 점차 깊어지고 주천운의 신체는 하루하루 금강불괴가 되어가는 것이다. "장보고 안에 만년삼왕(萬年蔘王)이 없었다면 족히 한 달 정도는 폐관 잠수(潛修)해야 했으 리라..." 주천운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만년삼왕이라는 희세의 영약이 있었기에 그는 내상회복은 물론 오히려 용화대수미선공을 구 성 이상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황제의 가문은 일반인들의 가문과는 같지 않았다. "폐하께서 반 년 계획했던 것이 단 하룻밤에 끝났다. 대내의 모든 일은 해결(解決)되고 넷째 형을 태자로 봉함으로 황실은 안정을 되찾았다." 주천운의 안색은 침중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일 뿐, 암중의 위험은 더 크다! 대려군의 천제문, 그리고 칠제의 막후 인물..." 주천운의 안색은 더욱 굳어졌다. "그 세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난처한 것은 그들 이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주천운은 손을 뻗어 서탁에 놓인 두루마리를 스르르 펼쳤다. "대내에 모두 백이십 명, 조정에 백사십구 명, 그 중 절반이상이 일곱째의 첩자였다. 이로 보았을때, 그 암중인의 능력은 대단한 것이다! 더구나..." 스스... 그의 손짓에 두루마리가 가루가 되었다. "이 첩자들의 대부분은 자결을 했고 겨우 알아 낸 연락 방법과 장소는 이미 소용이 없는 것 이었다..." 주천운은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밤하늘이 아스라이 차다. 그저 책에 파묻혀 있을 때에는 늘 정답고 좋기만 하던 하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천하가 그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것은 나의 모든 배치가 기병돌출(奇兵突出)의 묘(妙)가 있었다고 하나, 적의 세력이 너무 쉽게 허물어진 느낌도 든다. 마치 일부러... 허허실실(虛虛實實)?" 주천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범인들이 추측할 수 없는 경인(驚人)할 지혜로 그의 생각은 끝없이 번져가고 있었다. "일곱째가 죽은 지 이제 이틀째, 오늘밤이면 모든 안배가 끝난다. 느닷없이 나타난 호국지 존, 그는 천기각에 은둔해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그 허실을 짐작치 못하게 되겠지..." 그의 이 말은 그가 지금 무엇인가 다른 생각을, 일을 꾸미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주천운은 품속에 손을 넣어 호국지존병을 꺼냈다. 한 자 일곱 치의 단검, 호국지존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국지존병을 휘감은 두 마리의 금룡은 천년신비를 간직한 채 여의주를 물고 있었다. "여의섬과 조화의가 함께 구사되자 그것은 정녕 천하제일이었다. 더구나 이 호국지존병의 날카로움이 가세되니 무엇도 나의 일검을 배겨내지 못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대려군의 자미천소이리라! "불광멸겁뢰의 위력은 너무 가공스러워 용화대수미선공이 구 성을 넘어선 지금에는 결코 함 부로 전개할 수 없다!"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을 응시하였다. "여의섬과 조화의를 더 완벽히 연마하리라. 의형수검(意形隨劍)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거의 양대검법이 조화된 상태가 될 것이다!" 스르-릉! 호국지존병이 검집을 벗어나며 청아한 울림을 토해 냈다. 주천운의 온몸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 문득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의 손잡이가 뭔가 이상함을 감지(感知)했다. 지난 몇 일 간 거의 호국지존병을 손에 쥐고 생활하다시피 했던 그인지라 잡히는 감촉만으 로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손잡이를 살펴본 주천운은 당혹한 빛이 되었다. "큰일났군! 그저께 대려군과 싸우면서 검을 통해 불광멸겁뢰를 전개한 충격 때문에 이렇게 된 모양이다!" 호국지존병의 손잡이에는 두 마리의 금룡이 물고 있는 여의주가 조금 튀어나와 건들거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이게 피사벽독(避邪酸毒)의 관음보주(觀音寶珠)가 아닌가?" 주천운은 내심 놀라 다시 한 번 여의주를 만져 보았다. 그는 너무 바빠 호국지존병조차 제 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데 그가 관음보주를 만진 순간에 관음보주가 미끄러지듯 천천히 돌아가지 않는가? "어?" 흠칫하던 주천운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호국지존병에서 그토록 찬란하게 눈을 찌를 듯 빛나던 금광이 불현듯 감소되어 부드럽게 변 해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주천운의 뇌리에 황제의 말이 떠올랐다. -호국지존병에는 비밀이 있으나 그 누구도 풀어 낸 적이 없었다! 제아무리 침착한 주천운이라 할지라도 이 상황에서는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두근 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천천히 관음보주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그토록 찬란하던 호국지존병의 금광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절세신검이 단숨에 평 범한 단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외에는 기대했던 다른 변화가 없었다. "결국 호국지존병의 진체(眞體)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나? 신기하긴 하나..." 내심 실망한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을 들어 곁에 있던 연적(硯滴)을 슬쩍 그어 보았다. 혹시 날카로움에 지장이 있는가 시험해 보는 것이다. 삭! 가벼운 음향과 함께 연적은 여지없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하긴 남의 눈에 너무 드러나면 좋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담담히 중얼거리며 관음보주를 다시 돌리려던 주천운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관음보주가 꽉 박혀 끄덕도 않는 것이다. "낭패로군!" 주천운은 이리저리 호국지존병을 살펴보다가 관음보주에 점차 힘을 가했다. 일 성, 이 성, 오 성, 육 성... 딸깍! 놀랍게도 육 성이나 되는 공력에서야 비로소 관음보주가 튀어나왔다. "이토록 엄청난 힘이 필요하기에 그 동안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없었군..." 주천운이 관음보주를 돌리자 관음보주는 빙그르 돌더니 다시 찰칵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호국지존병에 찬란한 빛을 되찾아 주고서... "이제야 제대로 되었군." 중얼거리던 주천운의 눈에 한 가닥 의혹의 빛이 스쳐 갔다. "매우 비범한 장치이긴 하나, 이 정도로 호국지존병의 비밀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 다! 호국지존병의 비밀을 풀게 되면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생각이 동한 주천운은 또다시 힘주어 관음보주를 돌려 보았다. 달깍! 가벼운 음향과 함께 관음보주는 빙그르 돌더니 다시금 안으로 박혀 들어갔다. 팟!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찬란한 금광이 호국지존병에서 폭사되었다. 그 광도(光度)는 평소의 몇 배나 되어 주천운은 눈조차 뜨기 거북함을 느껴야 했다. "오오!" 가늘게 눈을 뜨고 호국지존병을 살피던 주천운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보라! 저 찬란한 호국지존병의 검신을, 그 검신에 깨알보다 더 작은 보일 듯 말 듯한 문양이 새겨 져 있지 않는가? "고전(古篆)이다..." 이윽고 주천운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그 문양이 도형과 글씨임을 알아본 것이다. 드디어, 호국지존병의 천년신비(千年神秘)가 풀리는 순간이다. 주천운의 얼굴에도 흥분의 기 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호국지존신공(護國至尊神功)! 호국지존은 천하의 제왕(帝王)이니 그의 능력은 천하에서 가장 강해야 한다. 여기 양대호국 신공(兩大護國神功)을 남겨놓으니 이 앞에서 파괴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뇌정군림신법(雷霆君臨身法)! 천하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강력한 신법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법 이전에 하나의 절대신공(絶代神功)이다. 뇌정군림신법을 펼치면 주위에 광풍이 몰아치며 은은한 뇌성이 터져나오게 된다. 그 위세는 신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강력해져서, 뇌정군림신법이 최고에 이르면 벼락치는 음향이 터져 나오면서 그가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못한다. 이 신법의 최대장점은 시전하면 할수록 전신의 진기가 충일(充溢)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 는 뇌정군림신법이 주위의 기(氣)를 빨아들이면서 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이대로라면 이것은 과연 제왕신공(帝王神功)이다!" 주천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법으로서 신공의 경지에 이른 것 중에는 전설의 금강부동신법이 있다. 그 금강부동신법이 최고의 정(靜)이라면 뇌정군림신법은 극강한 동(動)이라 할 수 있었다. <제왕무적검강(帝王無敵劍 )! 검강지존(劍 至尊)이라 불릴 수 있는 최강의 검강! 그 무엇도 제왕무적검강 앞에서는 한낱 두부 조각에 불과하게 된다. 여기에 소모되는 엄청 난 공력을 보충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뇌정군림신법인 것이다. 뇌정군림신법 속에서 제왕무적검강이 펼쳐진다면 그 위력은 불문가지. 가히 무적일 것이었 다.> "엄청나다. 날카로운 면에서는 불광멸겁뢰를 오히려 능가한다!" 이윽고 호국지존병의 검신에서 눈을 뗀 주천운이 신음했다. "결국 호국지존은 단독으로도 그 어떠한 난이라도 진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를 거역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기에..." 주천운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관음보주를 다시 가운데로 돌려 놓았다. 원래의 호국지존병 이 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주천운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는 호흡을 끊고 그 자리에 굳어졌다. 숨막히는 찰나간이 지나가면서, 들려 왔다. 그가 잘못 들었던 것이 아닌 것이다. 퉁소음(簫聲)! 언젠가부터 들릴 듯 말 듯한 가냘픈 퉁소 소리가 바람을 타고서 이어지고 있었다. 귀에 익 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소리였다. "천부화락(天府和樂)... 대려군!"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천운은 나지막이 외치며 바람과 같이 밖으로 몸을 날렸다. 퉁소 소리는 끊일 듯 말 듯 평화로이 들려 오고 있었다. * * * 묘봉산(妙峯山)은 북경성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이다. 산이 높지는 않으나 숲이 깊고 산세가 험했다. 그 중 비선애(飛仙崖)는 지난날 선녀가 하늘로 승천했다는 묘봉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 다. 그 비선애 정상(頂上)에는 유난히 밝은 달빛을 받으며 백의선녀(白衣仙女)가 하강해 있었다. 밤바람에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는 백의선녀의 입에는 천상의 옥소가 닿아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음률을 울려 내고 있었다. 가히 천연입화(天然入畵)의 절경이 아닌가. 휘휘-휙- 밤바람이 요란히 비선애를 쓸고 간 순간, 비선애에는 천상선인(天上仙人) 하나의 모습이 더 늘어났다. 그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맑고 심연(深淵)보다 더 깊었다. 선인은 그윽한 눈으로 백의선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윽고 퉁소음이 멎고 주위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백의선녀는 퉁소를 거두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백견(白絹)으로 감싸 있으나 드러난 두 눈만으로도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웠 다. 마음의 창(窓). 두 사람의 눈은 가슴을 통해 떨리고 있었다. "이음전의(以音傳意)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소. 당신이 나를 찾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소..."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주천운의 조용한 음성은 대려군의 차가운 음성에 절단되었다. 흠칫하던 주천운의 입가에 담담한 웃음이 피어났다. "그럴 자신이 있소?" "호호호..." 대려군은 차갑게 웃었다. "당신의 무공이 초강지경(超强之境)에 이르러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자 미천소를 막을 수 없어요!"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세상에는 의외라는 것도 있소." 주천운의 음성은 여전히 침착했다. "북경은 물론, 천하가 호국지존의 신화로 떠들썩하더군요. 호국지존이란 이름이 당신을 지켜 주리라 믿나요?" "호국지존은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 필요할 뿐이오." 주천운은 담담히 대꾸하며 대려군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원의 황족이란 것이 사실이오?" 대려군은 차갑게 웃으며 주천운의 시선을 피했다. "본문이 지난 이십 년 간 공들였던 것이 당신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 요!" 대려군의 음성은 시리도록 차갑게 변했다. "나는 당신에게 그 대가를 받아 내야겠어요!" 그녀는 자미천소를 천천히 쳐들었다. "당신을 죽인 후, 나는 자미천소의 제일공(第一功)인 천멸지곡(天滅之曲)으로 북경 전체를 초토로 만들고 말겠어요!" "려군!" 주천운이 갑자기 크게 외쳤다. 그 소리는 천둥과 같고 사람의 폐부를 울리는 힘이 있었다. "당신이 누구라도 좋소! 하나, 나는 대명의 친왕(親王)이며 나아가 호국지존이오! 당신이 나 라면 어떻게 했겠소?" "..." 대려군은 말문이 막혔다. 세상 일이란 언제나 그렇다. 스스로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려군의 입장에서는 주천운이 복수의 대상이지만 주천운쪽에서 본다면 그는 영웅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당신의 말솜씨는 천하제일이군요? 그만큼 본신의 실력도 천하제일인가 보겠어요!" 이내 대려군은 날카롭게 웃으며 주천운을 덮쳐 왔다. 위-이잉! 무서운 굉음이 일어나며 천지가 소영(簫影)으로 뒤덮였다. "멈추시오, 려군!" 주천운은 벼락같이 물러나며 외쳤다. "누가 당신의 려군인가요? 닥쳐요!" 대려군이 소리쳤다. 쐐애-앵! 귀청을 찢는 소성이 미친 듯 일어나며 광풍이 휘몰아쳤다. 꽈르-릉! 주천운의 뒤에 있던 바위가 흔적도 없이 박살이 나는 순간, 주천운은 광풍에 몸을 실어 하 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흥! 자미구류천소(紫薇九流天簫)가 피할 수 있는 것인 줄 알아요?" 와르릉! 마치 부챗살이 수백 수천 개가 소용돌이치듯 소영이 주천운을 휘감아왔다. '지난번과는 틀리다!' 주천운은 자미천소에서 울리는 소성만으로도 일반인은 즉사를 면치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하-아앗!" 낭랑한 호통과 함께 벼락 같은 금광이 그에게서 뻗어나 무서운 속도로 소영에 부딪쳐 갔다. 챙! 차차-앙! 놀라운 음향이 터짐과 동시에 가공할 강풍이 일어났다. "그사이에 공력이 더 깊어졌군..." 대려군은 충격을 받고 어깨를 흔들다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땅으로 표표히 내려서고 있는 주천운을 놀란 빛으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오. 그새 이틀이 흐르지 않았소?" 바닥에 내려선 주천운이 담담히 웃었다. "그까짓 이틀로는 당신이 입은 내상을 치료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이었을 텐데..."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오? 그날이 내가 무공을 처음 배운 바로 다음날이라는 것을 당신은 믿을 수 있겠소?" 주천운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가 며칠이나 흐른 것 같소?" "칠 일?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려군은 어이도 없는 듯 코웃음 쳤다. "내가 거짓말이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주천운은 낭랑히 웃었다. 그 모습은 천하를 가슴에 담고도 모자라는 거대한 모습이었다. 여인이 그러한 남자를 본다 면 그 가슴에 스스로를 의지하고픈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와도 같다. '내가 왜 이따위 생각을!' 가슴이 설레임을 느낀 대려군은 갑자기 눈빛을 매섭게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천재(絶代天才)로군요? 어디 그 절대천재가 북경 을 구할 수 있는가 보겠어요!" 쏴아아- 그녀의 온몸에서 자광이 폭사되며 엄청난 경기가 일어났다. 미처 발동하기도 전인데도 그 위세는 비선애를 날려 보낼 듯했다. 그에 반해 주천운의 모습은 태연하기조차 했다. 전신에 장엄한 서기가 어린 그의 손에는 호국지존병이 자연스레 쥐여져 있었다. '정중동(靜中動)! 저것은 정력이 강한 자만이 시전할 수 있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태 산이 될 것이다!' 대려군은 자신이 일으킨 위세는 동(動)이므로 그 기세가 시간이 갈수록 약화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움직인다는 것은 결국에는 멈추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틀 전만 해도 내가 얕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나의 적수가 아니었었는데... 그가 정말로 그 런 천재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대려군은 내심 크게 외치며 자미천소를 들어 천천히 주천운을 찔러 갔다. 위-이잉... 그 속도는 지루할 정도로 느린데도 매서운 음향과 함께 무서운 기세가 거기에서 일어났다. '전공력이 실린 일초다!' 그토록 평정하던 주천운의 눈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웅웅... 주천운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자미천소는 더욱 거센 음향을 토해 냈다. 꽈지-직! 자미천소의 끝이 가늘게 떨림에 따라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의 바위가 바스러져 갔다. 주천운의 호국지존병이 찬란한 금광과 함께 천천히 이동했다. 마치 빗겨들 듯 호국지존병을 가슴에 세운 그의 전신은 이미 장엄한 서기로 뒤덮여 있었다. "자-미-천-겁-폭(紫微天劫爆)!" 대려군의 외침과 동시에 주천운과 팔 척 거리로 다가온 자미천소에서 벼락치는 음향이 터지 면서 가공할 소영이 주천운을 온통 뒤덮었다. "빠름[閃]과 변화(變化)가 모두 마음에서 연유된다!" 그 순간에 주천운이 무엇을 토해내듯 낭랑히 외쳤다. 그의 호국지존병이 찬란한 금광이 되어 뻗어났다. 떨리지도 않고 변화도 없이 그저 뻗어났 을 뿐이다. 따라랑-꽝! 소영과 금광이 부딪치자 기이한 음향이 이는가 싶은 순간에 엄청난 굉음이 터져나왔다. 파파팍! 십 장 밖의 고송(古松)이 찢겨져 버리고 천년 세월을 자랑하던 바위가 갈라지고 깎여 나갔 다. "윽...!"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을 쥔 손목을 움켜잡으며 휘청 한걸음 물러났다. 뿌드드... 진흙 속으로 들어가듯 바위 속으로 발이 쑥 빠져 들어갔다. '무변(無變)으로 만변(萬變)을 포함할 수 있다! 조화의 삼십육 형을 단 일 형으로 합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들끓는 기혈은 아랑곳없이 주천운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이 정도라니..." 대려군이 경악한 음성으로 신음했다. 그녀는 사방에 소용돌이치는 강풍 속에 천천히 내려서고 있는데 백의가 찢어질 듯 펄럭이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백견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 절염(絶艶)한 모습은 창백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미천겁폭은 자미구류천소의 정화인데 그것을 수세(守勢)로 받아 내고 나와 평수라니... 설 마 그의 무공이 나보다 높단 말인가?' 그녀의 경악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녀의 일격은 단언하되, 당금 강호에서 막아 낼 자가 다섯 손가락도 남아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용화대수미선공이 오직 호신만을 위한 무공임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주천 운은 수세였으나, 그녀가 공격해 오자 그 엄청난 반탄지기가 그녀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결국 대려군은 자신이 공격한 만큼의 충격을 받았던 것이지만 일시지간에 그녀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당신의 무공진경은 과연 천하무쌍-이대로 결판을 내려면 수천 초가 필요하겠군요?" 한참만에 대려군은 싸늘히 말했다. "그래서 살려주겠다는 것이오?" 주천운은 빙그레 웃으며 담담히 대꾸했다. 대려군은 그의 변함없는 태도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내심 기가 질리기도 했다. "당신이 나를 이길 수 있다면 싫어도 그렇게 되겠지요." 그녀는 차갑게 말하며 자미천소를 두 손으로 잡았다. "자미천소에는 세 가지 살음(殺音)이 있어요. 당신이 그것을 견딜 수 있다면 내가 진 것으로 치겠어요." "그것은 필시 천하무쌍이겠군?" "물론이죠! 제일음인 천뢰살은 당신이 이미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요?" "그렇군. 한데 만약 내가 그 삼음(三音)을 다 견딜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소?" 대려군은 일순 흠칫하더니 냉소했다. "천뢰살에 비해 천붕후는 두 배 강하고 마지막 천멸지곡(天滅之曲)은 나도 아직 완벽히는 연마하지 못한 필살지곡인데..." "다 연마치 못했다면 나에겐 살 가망이 조금 있겠군?" 주천운은 또 빙그레 웃었다. 대려군은 주천운의 미소가 형언할 수 없는 힘으로 자신의 마음속으로 파고듦을 느꼈다. 그녀는 평생을 고고오만하게 살아왔으며, 그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제대로 고개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자라왔었다. 주천운과 같은 사람이 특별하게 보임은 당연하였다. 부정하려고 해도 주천운의 영상은 그녀의 가슴에 더 선명히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는...' 대려군은 머리를 저으며 더욱 차게 외쳤다. "당신이 이긴다면 그때는 당신의 마음대로겠지요!" "고맙소. 마음대로까지는 필요없고 다만 몇 가지 질문에만 대답해 주면 되오." "얼마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럼 시작할까요? 제일음 천뢰살이에요! 말해 두 지만 이것은 지난번보단 두 배 이상 강할 거예요!" "걱정해 주어 고맙소." 주천운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흥!" 뭔가 자꾸만 어색해짐을 느낀 대려군은 냉랭히 코웃음 치며 뒤에 있던 바위에 가벼이 몸을 걸쳤다. 휘날리는 백의자락에, 흐드러지는 긴 흑단과 같은 머릿결, 그녀의 자태는 과연 절세이립(絶 世以立)하였다. 자미천소가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녀의 저 아름다운 자태가 죽음을 준비하는 전주임을 누가 믿을 수가 있겠는가. 주천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바위에 등을 기댔다. 연화(蓮花) 모양의 서기가 그의 전신에 흐르고 있었다. 대려군의 봉안(鳳眼)이 빛났다. 그 순간이었다. 부-웅! 대려군의 입에 닿은 자미천소에서 격렬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천뢰살이 전개된 것이 다. 뿌지직- 바위에 금이 쫙쫙 가며 광풍이 미친 듯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용화대수미선공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대려군은 이미 그것을 예상한 듯 진기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눈을 감았다. 꽈르-릉! 그리고 이어서 자미천소에서 천둥벽력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상상할 수도 없는 위세였 다. 비선애 위에 솟아 있는 모든 것이 박살나 흩어졌다. "으...음!" 주천운은 무서운 압력이 자신을 짓누름을 깨달았다. 그것은 천뢰살보다 두 배 강한 천붕후(天崩吼)였다. '그러나 마금의 사멸령(死滅靈)보다는 약하다!' 주천운은 하마터면 들끓을 뻔한 기혈을 안정시켰다. 대려군은 실눈을 떠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지기 싫어하는 그녀 특유의 자존심이 들끓어오르는 것이다. 다음 순간에 그녀의 온몸은 자광으로 뒤덮였다. 두두두-둥! 그와 동시에 자미천소에서 괴이하게도 북소리와 같은 음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한소리 한소리는 주천운의 뇌리를 쇠망치로 후려갈기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두둥! 파-파팍! 바닥의 암석이 깨어지고 박살이 나 흩어졌다. 삐르르... 그리고 그 소리가 퉁소음으로 바뀌며 곡조(曲調)를 띠게 되었을 때, 비선애는 완전히 대폭풍 에 휩싸이고 말았다. "으-흑!" 주천운의 입에서 선혈이 피어났다. 그리고 고통의 빛이 선명히 드러났다. 하마터면 즉사할 뻔한 것이다. 너무도 엄청난 압력에 그가 기댄 바위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는 바람에 거기 기대 있던 주천 운은 중심을 잃게 되었으니, 그런 허(虛)를 그토록 가공할 위력을 가진 천멸지곡 앞에서 보 이고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겠는가? 낭패다! 정(定)을 되찾지 못하면 난... 반 각도 버틸... 수 없다...' 주천운은 마치 굼벵이가 움직이듯 천천히 자세를 바로해 갔다. 꽈르-릉! 무서운 광풍 속에서 그의 안색은 백지장같이 창백해지고 선혈은 입에 이어 코에서도 흘러나 왔다. 그러나 결국 그의 전신에는 다시 서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우르릉! 그의 사방에서 소용돌이치는 강풍( 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몸에 가해지는 압 력에 대해 일어나는 용화대수미선공의 반탄지기였다. 처음의 그것은 미약했으나 그 위세는 점차 강해져 갔다. 그렇다고 주천운이 편안한 상태인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일 각여가 흐르자, 비선애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깎여진 암반조차 금이 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인가? 퉁소음의 위력이 미치는 비선봉 아래에는 동물은 물론, 초목까지 모든 생물이 전멸했다. 하 긴 바위가 모래로 화해 휘날리는 판이니 어찌 요행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이미 일반무공의 척도를 넘어서는 경지였다. 그러한 가공할 위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림 삼대천음의 전설이 세상을 풍미(風靡)할 수 있었으랴. 그 속에서 주천운의 모습은 심히 조용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더할 수 없이 창백하고 흐 르는 선혈은 멈추지 않아 이미 견딜 수 있는 한계에 이른 것 같았다. 용화대수미선공이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하더라도 구 성의 경지로는 절세기학인 자미천소의 천멸지곡을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대려군의 상태 또한 주천운보다 조금도 낫지 않았다. 그녀는 용화대수미선공의 가공할 반탄지기를 견디면서 자미천소를 연주해야 하는데, 그녀의 천멸지곡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라. 그 타는 듯 붉었던 입술도 이미 잿빛이었고 가늘게 뜬 그녀의 눈에서는 고통과 갈등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만상구멸(萬象具滅)... 그 최후의 장(章)을 전개하면 이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전개하면 지금의 나는... 살아나기 힘들... 다.' 그녀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주천운에게 향했다. 때마침 그녀를 쳐다보던 주천운의 눈과 그녀의 눈이 부딪쳤다. '아...!' 대려군은 부지중에 신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 그 지독한 압력과 고통 속에서도 그의 눈은 조용할 뿐만 아니라, 맑고 깊었다. 언제라도 자신을 받아들일 듯 아늑하고 부드러운 그 눈 속으로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대려군은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녀의 감정을 막고 있던 한 가닥 벽도 허 물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대려군은 부정하듯 속으로 크게 외치며 전신의 남은 공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삐리이이-윙! 그녀가 잡은 자미천소에 힘이 들어가고 거기에서 가공할 음향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만! 둘 다 죽는다!" 주천운이 두 눈을 부릅뜨며 벽력같이 외쳤다. 그 기세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과 같이 엄청났다. 대려군은 찬서리를 맞은 듯 부르르 떨며 부지중에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진기를 거두고 말았 다. "아-윽!" 동시에, 한소리 참담한 비명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선혈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자미천소가 원을 그리며 그녀의 손을 벗어나는 순간에, 그녀의 몸은 강풍에 휘말려 낙엽처 럼 튕겨져 올랐다. "려군!" 주천운의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그 외침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몸은 날아 떨어지는 대려군의 몸을 받아 들고 있었 다. "우-욱!" 그리고 주천운 자신도 마침내 선혈을 토해 내고 말았다. 무리하게 소림(少林) 고심종(叩心鍾)을 전개하고도 다시 신법을 전개하니 금강불괴라도 견 뎌 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그 상세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쿠-웅! 날아올라 대려군을 받는 것까지는 성공을 했지만 주천운 또한 더 이상 어떻게 할 힘은 없었 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나뒹굴고 말았다. 파스스- 그들이 떨어진 곳의 바위가 가루가 되며 밑에 깔린 대려군의 몸이 바위 속으로 파고들었다. 바위 가루가 먼지처럼 휘날아올랐다. 천멸지곡의 위력으로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한 가닥 천행이었다. 딱딱한 바위가 아니라, 푹신한 재 위에 떨어진 셈이 되었기에. "괜... 찮아... 요?" 밑에 깔린 대려군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미약한 음성으로 그를 보았다. 거기에는 평소 그녀의 차가운 기운은 반 점도 없고 오로지 염려의 기색만이 가득했다. "견딜... 만..." 주천운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에 대려군은 눈을 스르르 감으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려... 군?" 크게 놀라 외치던 주천운. 그의 입에서 왈칵 한 모금의 선혈이 쏟아져 대려군의 가슴을 적심과 함께 그의 눈에서도 빛 이 꺼졌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대려군의 가슴에 떨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천운은 전신이 차가움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후두둑 후두둑- 쏴아아아! 장대 같은 폭우(暴雨)가 그의 전신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으-윽..." 불현듯 놀라 몸을 일으키던 주천운은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격통(激痛)을 느꼈다. 내부가 모 조리 박살이 나고 뒤틀린 듯 선혈이 울컥 스며올라왔다. 극심한 통증에 몸을 웅크리던 주천운은 밑의 물컹한 감촉에 흠칫했다. 번쩍! 그 순간에 한 가닥 섬광(閃光)이 사방을 환히 밝혔다. "려... 군?" 그 섬광에 주천운은 자신의 밑에 깔려 죽은 듯 미동도 않고 있는 대려군을 알아볼 수 있었 다. 섬광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희다 못해 푸르렀다. 꽈르-릉! 꽝! 그녀의 얼굴이 다시 암흑 속에 잠기는 순간에 천둥 치는 소리가 사위를 뒤흔들었다. 벼락이 가까운 곳에 떨어진 듯 그 소리는 귀청이 찢어질 듯했다. 그 소리 때문인가? "으-으음..." 대려군의 입술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죽지 않은 것이다. "정신이... 드시오?" 주천운의 눈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몸 위에 있음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주천운의 음성이 들렸음인가? "누... 구?" 대려군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며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요. 주천운!" 그녀의 눈이 무엇에 끌리듯 떠지고 빛이 살아났다. "살... 아 계셨... 군요..." 마치 무엇을 새기듯 눈을 크게 뜨고 주천운을 바라보던 대려군이 신음하듯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이 못마땅... 하오? 욱!" 빙그레 웃던 주천운은 기혈이 뒤틀림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대려군의 얼굴에다 선혈을 토해 낼 뻔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면 죽어도 열 번은 죽었을 만큼 그들의 내상은 그토록 지독했다. 그의 미간에 고통의 빛이 떠오른 것을 본 대려군의 눈에 안쓰러운 기색이 스쳐 갔다. 그녀 의 옥수가 느리고도 힙겹게 주천운의 뺨에 가 닿았다. 그의 뺨은 얼음과 같이 찼다. 그녀의 손도 얼음처럼 찼다. "미... 안해요... 천... 운..." 그녀의 떨리는 음성은 벼락과 같은 충격을 주천운에게 주기에 족했다. "지금... 뭐라고 했... 소?" "..." 대려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눈, 불과 한 자도 떨어져 있지 않은 그녀의 눈에서 주천운은 모든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믿을 수 없게도 사랑이었다. "려군!" 주천운의 입에서 격정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외침에 다름이 아니었다. "읍!" 대려군은 눈을 크게 떴다.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난폭한 남성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꽈르릉... 뇌성이 포효하며 그녀의 비음을 집어삼켰다. 대려군의 두 팔이 무엇에 끌리듯 주천운의 목으로 돌아갔다. "...!" 두 사람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언제 그들이 싸웠으며, 언제 그렇게 지독한 상처를 입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 듯했다. 그 저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를 확인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오묘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타오르는 사랑도 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운명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인연(因緣)도 분명코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것을 행동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다 지쳐 있는 두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다 잊고 그저, 지금 이 순간만이 소중한 두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뒤의 결과를 알고 있기에 이처럼 숨이 가쁜 것인지도 몰랐다. 주천운은 더욱 거세게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사랑하오, 려군!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래요. 나도 그랬어요..." 대려군이 그의 등을 감싸안으며 말했다. 꽝! 꽈르르릉-! 하늘이 두 쪽 나는 듯한 굉음이 천지를 뒤집어 놓을 때, 주변은 다시 일순간 밝아졌다. 대려군의 비에 젖은 옷은 어느새 벗겨져 눈부신 나신이 어둠 속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서툰 주천운의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천운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 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뚜렷이 떠오른 그녀의 나신은 가히 순백의 결정이었다. "아!"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 문득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스며 나왔다. 그녀의 즈려감은 눈 매는 고통의 빛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축축했다. '그래... 이것은 어쩌면 내가 원하던 것...' 꽈르릉! 쏴-쏴아아-! 그녀의 생각은 천둥과 폭우에 묻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숨가쁜 호흡만이 어둠 속에서 이어질 뿐이었다. 조양(朝陽). 비 온 후의 아침해는 눈부시게 밝다. 지난밤새 천지개벽의 조화가 일어난 비선애에도 아침해는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으-음..." 나직이 신음을 흘려내며 몸을 뒤척이던 주천운의 몸이 굳어졌다. 허전한 것이다. "...!" 그의 눈이 떠졌다. 없었다. "려군!" 불길한 예감에 주천운은 크게 외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윽!" 그 순간 가슴이 칼로 에는 듯한 격동에 주천운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그 격정의 순간에는 느껴지지도 않던 통증이었다. 그러나 그 통증보다 더 아픈 것은 마음의 아픔이리라! 대려군. 지난밤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친 그녀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려군..." 주천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뇌리에 그녀와의 그 뜨거운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갑자기 주천운은 한없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사방을 둘러보던 주천운의 눈이 멈칫 멎었다. "바보 같은..." 잠시 후, 주천운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형상을 보존하고 있는 바위, 거기에는 지력으로 새겨놓은 대려군의 글이 있었던 것이다. <천운. 저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습니다. 비록 그것을 부정하고 당신을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후단(后壇)의 황실 정복은 당신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단(帝壇)의 무림 정복은 눈앞에 있고 아무도 그것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제단의 세력은 후단에 비할 수 없으며, 본문의 문주와 천제구로(天帝九老)까지 당신 때문에 중원에 나온다면, 명조(明朝)의 운명은 풍전등화이며 당신의 능력이 아무리 놀라워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부디 본문과 맞서지 말고 물러나 후일을 도모하십시오. ...中略... 천운, 저는 이제부터 당신의 여인입니다. 그러나 저와 당신은 맺어질 수 없습니다. 신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사생(死生)을 결(決)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려군은 당 신을 그리워하면서도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지 않길 바랍니다. 下略... 려군 읍필(泣筆).> "어리석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그까짓 신분! 그대가 정녕 원의 후예라도 나는 그대 를 단념치 않으리라!" 주천운의 중얼거림은 단호한 것이었다. 땅에 떨어져 있는 호국지존병이 마침 햇살을 받아 찬란한 금광을 주천운의 몸에 뿌리고 있 었다. 온몸이 금광으로 물든 주천운의 모습은 장엄하기조차 했다. 그것은 그의 다짐이 헛소리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천제문... 제단... 무림! 려군, 당신은 보게 될 것이오. 천제문의 몰락을!" 갑자기 주천운은 크게 외쳤다. 그리고 그 울림은 천하로 퍼져 가기 시작했다. 제 14 장 강호제일보(江湖第一步) 그로부터 열흘 후 북경성(北京城). 석양이 내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때였다. 두두두... 북경의 외성(外城) 정문인 영정문(永定門)을 벗어나는 건마(健馬)가 있었다. 황진을 휘몰며 미친 듯 질주하는 쾌마(快馬)! 몽고 대완종(大宛種)과 같은 준마가 아니고서는 그토록 빠를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더한 것 은 그 말이 감히 북경성을 그토록 쾌주(快走)하여 벗어나는 데 있었다. 수문위사(守門衛士)들도 막지 않으니 그 대완신구에는 누가 타고 있는 것일까? 두두두... 그 시각, 또 한 필의 대완준구가 외성 측문인 광안문(廣安門)을 쏜살같이 벗어나고 있었다. 그 역시 북경성 내를 질주했음에 대해 관여하는 사람은 없었다. 두두두... 그와 같은 시간, 내성 후문인 안정문(安定門)에서도 천리준구 한 필이 네 굽을 모아 내닫고 있었다. 조양문(朝陽門), 덕승문(德勝門), 동편문(東便門), 서편문(西便門)까지... 평소에는 열지 않았던 문까지 합해 북경에서 외부로 통하는 십삼 개 성문이 모조리 열리고, 그곳을 통해 열세 필의 대완준구가 일제히 북경을 벗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가? 푸드득-푸드득- 열세 필의 대완준구가 성을 벗어나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성 주변 여기저기서 비둘기들이 날개를 치며 날아올랐다. 비둘기들이 날아올라 원을 그리다 방향을 잡은 쪽은 대완준구(大 宛駿驅)가 사라진 쪽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치고 간 듯 열세 필의 준마가 북경성을 벗어난 후, 사위가 어둠에 잠겨 막 성문이 닫히려는 때에 한 필의 백마(白馬)가 우안문(右安門)을 통해 나타났다. 잔털 하나없이 전신이 백색인 말. 말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귀동냥으로 그 말이 설총(雪聰)이라 불리는 천리준구임 을 알 것이었다. 그 설총마 위에는 백의귀공자가 앉아 있었다. 칼끝 같은 검미와는 대조적으로 그 밑의 두 눈은 맑고 조용히 가라앉아 태산이 무너져도 그 를 놀라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용모는 매우 수준(秀俊)했으나 그의 기도(氣度)는 용 모보다 더 비범(非凡)했다. 필시 명문호족(名門豪族)의 귀공자인 듯하였다. 따가닥-따각! 설총은 북경을 벗어나자 쭉 뻗은 관도로 네 굽을 모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랐다. 설총이 쏘아진 탄환과 같이 사라져갈 때, 관도 옆의 숲속에서 한 인영이 빠르게 움직였다. 푸드득- 동시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날개를 치며 날아올랐다. 그 속도는 쏜살 같았고 그 방향은 설총이 사라진 쪽이었다. 그것은 검은 비둘기였다. "흐흐흐... 비록 하룻밤에 천 리를 달린다는 설총마라 해도..." 비둘기를 날린 자는 그것을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에 냉담한 음성이 그를 혼비백산케 했다. "천리보다 지척이 가깝지!" "누구...?"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쌍장을 갈겨대던 자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쾌도(快刀)! 그렇게 불리는 삼척도(三尺刀)가 그의 목에 바짝 붙어 있었던 것이다. 두두두... 딩! 미친 듯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던 설총마 위에서 기이한 금음(琴音) 한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 순간, 백여 장 상공을 날아가고 있던 비둘기가 멈칫하더니 선회하기 시작했다. 따가닥-따각! 설총마의 걸음이 서서히 늦추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비둘기가 내리꽂히며 백의귀공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비둘기를 날 린 자가 그것을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으리라! 추적신구(追跡神鳩). 지상의 물체를 추적하는 영금(靈禽)으로 특수호각의 신호가 없으면 죽어도 땅에 내려오지 않는 것이 그 비둘기이기에. 구구구... 추적신구가 머리를 끄덕이며 나직이 울었다. "마금의 탈심혼이 금수(禽獸)까지 제압할 수 있음은 나도 며칠 전에야 알았지..." 백의미공자는 담담히 중얼거리며 추적신구의 발목에 매단 죽통을 열었다. 쪽지가 있었다. <십삼 필의 쾌마는 계속 추적 중. 이 백의서생의 출현은 매우 신비함. 어쩌면 앞서는 쾌마는 눈속임일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됨. 밀탐(密探) 제오향주(第五香主) 일신(一信).> "제법 명석하군..." 백의귀공자는 가볍게 미간을 찡그리며 쪽지를 다시 추적신구의 죽통에 넣었다. "지존!" 나직한 음성이 관도 옆 송림 속에서 들려 왔다. "밀탐 오향주라는 자가 어디 속한 자인지 알아 내었는가?" "그것이 잠종문(潛踪門)이었습니다." "잠종문?" 백의미공자가 나직이 되뇌었다. 잠종문(潛踪門)은 대단한 세력이 있는 파는 아니다. 그러나 잠종문은 추적(追跡)과 정보수집에 발군의 능력이 있다. 개방보다 그 정보망이 방대 하지는 못하나 한곳을 집중 추적할 때에는 가히 천하제일이다. 백의미공자는 천하기밀부 무림문파록(武林門派錄)에서 읽은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누구의 부탁을 받았다고 하던가?" "부탁이 아니라 이미 적당의 주구가 된 것 같습니다." "주구? 어느쪽?" "그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잠종문주인 만리추종(萬里追踪)을 잡아야 단서가 될 것 같습니다." 전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그렇다면 계속 미끼가 되어야겠군..." 푸드득- 비둘기가 날아올라 그의 머리 위에서 선회했다. "계획대로 되었는가?" "예, 호국이로(護國二老)까지 나서신 이상, 실수가 있겠습니까? 감시자들은 귀신도 모르게 처단되었고 나머지도 순조롭습니다." 백의귀공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총을 몰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추적신구가 그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주천운(朱天雲). 그는 역용한 주천운인 것이다. 그는 지금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것일까? 설총의 빠름은 대단하여 이 경이 채 넘지 않아 북경을 백여 리 벗어나고 있었다. '열세 필의 말은 지금쯤 감쪽같이 사라졌을 것이다. 호국지존은 대내에서 한걸음도 움직이 지 않고... 느닷없이 달려나간 쾌마 열세 필, 그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짐과 함께 그를 쫓던 추적자들도 사라진다...' 주천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거기에 북경 내의 동정을 감시하던 자들도 사라졌다. 그 후, 대내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다...' 따가닥-따각... 설총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시선은 열세 필의 쾌마가 어디로 간 것이냐에 쏠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 뜻대로 되는 것이다. 시간을 벌 수 있게 되겠지... 적명아암(敵明我暗)!' 주천운의 계획은 매우 깊고 치밀했다. 호국지존은 북경에 남아 있으되, 그 자신은 강호로 나서는 것이다. 그 준비는 단 열흘 동안 에 말할 수 없이 치밀하게 이루어졌으며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인가는 차차 드러나게 될 것이 었다. 그때, 하늘을 날던 추적신구는 소리도 없이 짙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번이 세번째, 백 리 지점까지가 잠종문의 감시 영역... 이제 제사신(第四信)이 추가되겠 지?' 주천운은 추적신구의 움직임을 모르는 듯 계속 말을 몰았다. 그런데 추적신구는 더 이상 그를 쫓아오지 않았다. 주천운은 눈을 감았다. 회오대사가 준 달마역근경 주해, 거기 있는 불가육통(佛家六通) 중 천이통(天耳通)을 전개하 는 것이다. 모든 소리가 엄청나게 그에게로 확대되어 왔다. 스스스... 바람소리인가? 미약한 소리가 관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주의를 끌 작정이었으나 이토록 쉽게 될 줄은 몰랐군..." 주천운은 담담히 중얼거리며 설총을 몰아 모퉁이를 돌았다. 이히히히힝! 두두두... 그 순간, 설총이 갑자기 울부짖으며 번개같이 내닫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어둠을 가르며 일 어나는 가운데 설총의 모습은 대번에 어둠 속에서 한 점이 되어 버렸다. '설마 눈치를 챘단 말인가?' 소리도 없이 그 뒤를 따르던 인영이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경공은 놀라울 정도여서 소리조차 없었다. '윽?' 잠시 후, 천천히 관도변에서 속도를 줄이는 설총을 보고 흑영은 일순 굳어졌다. 그 위에 있 어야 할 주천운이 어느 틈인지 사라져 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천하에 내 눈을 피할 자가 있다니!' 흑영이 내심 크게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에 낭랑한 음성이 흑영의 뒤에서 들려왔 다. "하하... 나를 찾는가?" '상대하기 곤란한 고수다!' 흑영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것은 대단히 교활한 행동이었으나 상대가 상대였다. 와르르-릉! 일진 광풍이 몰아치면서 단숨에 이십 장을 도망친 흑영 앞에 백영이 불쑥 나타났다. 주천운이었다. "헉? 이렇게 빠르다니..." 흑영이 혼비백산해 다시 몸을 날리려는 순간이다. "서라!" 주천운이 낭랑히 외쳤다. 그 목소리, 거기에 어린 위엄을 어찌 설명하겠는가? "...!" 흑영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주천운을 쳐다보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눈과 주천운의 눈이 마주친 것이다. 섭혼대법(攝魂大法)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흑영은 주천운의 기세에 완전히 거미줄에 걸린 파 리꼴이 되었다. "그대가 잠종문의 만리추종인가?" "아, 아니오. 그분의 사제(師弟)..." 흑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제? 그렇다면 천리비영(天里飛影)인가?" "그... 그렇소." '괴... 괴, 괴이하다. 어떻게 대답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한단 말인가?' 흑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천리비영이라면 잠종문 제이인자로 강호 일류고수인 것이다. 그런데도 숨조차 제대로 못 쉬니 누가 이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주천운이 어떠한 사람임을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불가사의일 수밖에 없었다. "북경을 감시하는 것은 누구의 지시인가?" "그, 그것은 으... 사... 에잇!" 천리비영은 더듬거리다 갑자기 전력을 다 쏟아 일격을 가했다. 퍽-! "에이고!" 그의 손이 여지없이 주천운의 가슴을 가격하는 순간에 천리비영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뒹 굴었다. 그의 손목은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부러져 있었다. "자업자득이지, 대답해라!" 주천운의 목소리가 더 세차게 변했다. "으... 사형께서 시... 키시는 일... 으...!" 천리비영은 몸서리를 치며 억지로 대답했다. "만리추종은 누구의 명령을 받았느냐?" "그... 그것은..." 피피핑! 어디선가 미세한 음향과 함께 비침(飛針)들이 전광석화처럼 날아들었다. 그것은 주천운이 아 니라, 천리비영을 노리고 있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주천운이 코웃음 치며 소매를 저었다. 파팟! 천리비영을 노리고 쏘아오던 비침(飛針)이 수경(袖勁)에 흩어지는 순간에 천리비영은 소림 십이금룡수(十二擒龍手)에 제압되어 혼절하고 말았다. "게 서라!" 와르릉-! 일진 광풍이 주천운의 몸에서 일어나는가 싶은 순간에 그의 몸은 이미 수십 장을 날아가고 있었다. 가공할 빠르기였다. "저... 저런 신법이 있다니!" 천리비영은 쓰러진 채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꿈벅였다. 황궁비전(皇宮秘傳), 뇌정군림신법(雷霆君臨身法)이 강호상에 처음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와르릉! 우두둑! 와지끈... 무서운 기세가 회오리치며 주천운이 지나가는 곳의 수목이 꺾이고 뽑혀져 날았다. 그 기세 는 마치 벼락이 휘도는 듯 도저히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단숨에 백팔구십 장을 쏘아간 주천운은 아무것도 발견치 못하자 낭패한 기색이 되었다. "속았군!" 그가 내심 외치며 운리번신(雲裏蒜身)하며 몸을 트는 찰나에 천리비영이 있는 곳에서 나직 한 신음이 들려 왔다. 주천운이 그곳에 도착한 순간에 십수장 밖 숲속에서 한 인영이 번뜩이더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천리비영은 이미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 강호 경험이 없는 주천운은 호랑이를 산에서 떠나 보내는 너무도 간단한 계략에 속고 만 것 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경각심은 앞으로 그에게 오히려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네가 도망칠 수 있다면 뇌정군림신법은 가치가 없으리라!" 주천운은 차갑게 웃었다. 주천운이 번개처럼 그 인영의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꽈르-릉! 우레와 같은 굉음과 함께 일진광풍(一陣狂風)이 그의 뒤를 따르며 일어났다. '대단하군!' 단번에 수십 장을 가로지르는 주천운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쳐 갔다. 앞선 인영의 속도 또한 그에게 별로 뒤지지 않는 것이다. "만리무영술(萬里無影術)이 강호칠대신법의 상위에 있으나 뇌정군림신법에 비할 수는 없다!" 주천운은 전신의 진기를 모조리 끌어올렸다. 꽈-르르릉!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회오리치며 하늘을 가리는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백 장을 가로지르 고 있었다. "으-흑?" 처음에 오십 장 앞서 달리던 인영은 자신의 앞에 주천운이 나타나자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그는 몸을 비틀며 그대로 주천운을 스쳐 가려 했다. 미꾸라지가 조상으로 섬길 만한 기막힌 신법이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주천운은 낭랑히 외치며 한 손을 쾌속히 뻗어 내 그를 잡아갔다. "그럴 줄 알았다!" 인영은 나직이 코웃음 치며 벼락같이 단검을 꺼내 주천운의 손을 베어 갔다. 그것은 매우 악독쾌속한데다 시기적절했다. 주천운이 손을 거두지 않는다면 그의 손은 잘리고 말 것이고 거둔다면 그는 주천운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노회(老獪)한 인물로 그 모든 것을 이미 계산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천운은 인영의 단검을 보지 못한 듯 그대로 인영의 완맥을 잡아챘다. 그와 동시에 단검은 그의 팔뚝을 잘랐다. 땅! 놀랍게도 그 순간에 맑은 음향과 함께 팔뚝이 아니라, 그 팔뚝을 친 단검이 두 동강이 나며 인영의 완맥은 주천운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금... 강... 불괴가 실제로 있... 다니?" 인영이 학질에 걸린 듯 부르르 떨며 눈을 부릅떴다. 부릅떠 보았자 보통 사람의 눈보다 작 은 눈을 그는 갖고 있었다. 체구는 다섯 자를 좀 넘으나 다리는 보통 사람보다 더 길었다. 그래서 그는 선천적으로 남보다 빨랐다. 주천운의 손은 주천운의 신체 중 가장 강한 곳이었다. 그의 전신은 이미 용화대수미선공으로 보호되고 있었고, 특히 그의 손은 현천마금을 퉁기기 위해 현천백옥수를 이미 십일성의 경지까지 연성했으니, 그것은 손이 아니라 일종의 신병이 기(神兵利器)와 같은 신력(神力)을 가진 상태였다. 평범한 공격으로 상해할 수 있을 리 만무였다. "네가 만리추종 요불위(姚不偉)인가?" 주천운은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 인영은 복면 속의 눈에 흠칫하는 빛을 스쳐 보냈으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주천운은 차갑게 웃었다. 인영은 그 웃음에서 거만함을 느끼기 이전에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 인간에게 이런 기세가 있을 수 있다니!' 그제서야 그는 천리비영이 순순히 입을 연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완 전히 주눅이 든 것과 흡사했다. 그의 눈길 한번에 전신이 오그라붙는 듯한 느낌. 뱀 앞에 얼어붙은 개구리와 같다고나 할까. 그의 앞에서는 반항은커녕, 감히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러한 느낌... 모두 다 그러하리라. 주천운 앞에 마주서 보기 전에는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을 것이기에. "그, 그... 렇소. 노부가 만리추종 요불위요." 만리추종 요불위는 결국 신음하듯 입을 열고 말았다. "북경을 감시하도록 시킨 것은 누군가?" "고객의 신분은 죽... 어도 말할 수 없소." "고객이라고?" 주천운은 냉소하며 만리추종 요불위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요불위는 마치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잠종문이 이미 천제문의 수중에 떨어진 것을 아는데도 거짓을 말하려 하다니..." "그, 그것을 어떻게?" 복면 속 요불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과연 그렇군!' 주천운은 내심 생각을 굴렸으나 그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당신은 어떤 지위에 있는가?" "기, 기찰당(機察堂)의 정탐향주(偵探香主)..." "겨우 그까짓 지위에 나라를 팔다니!" 주천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엄청난 고통이 완맥을 통해 만리추종 요불위의 몸에 쏟아졌다. "끄으윽! 무, 무슨 소리요? 나... 라를 팔다... 니?" 요불위는 전신을 덜덜 떨면서도 의혹을 드러냈다. 주천운은 그의 눈빛을 보고 한 가지 생각을 스쳐 보냈다. "설마 천제문이 원의 잔당임을 몰랐다고 하겠는가?" "워... 원의 잔당? 천제문이 말이오?" 요불위의 온몸이 굳어졌다. "노부는 극독에 제압되었고 더구나 문인(門人)들도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터라, 그들의 명령 을 듣지 않을 수 없었소." 복면을 벗은 요불위의 단추구멍처럼 작은 두 눈이 흥분해서 번들거렸다. "노부는 일신의 공명을 바라거나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아니외다! 제자들만 아니었다면, 하 지만 그들이 명을 전복하려는 오랑캐라고는..." "말은 잘 하는군! 그토록 제자들의 목숨을 아낀다면서 자신의 사제를 손수 죽인다?" 주천운의 음성은 한마디마다 쇠망치와 같았다. 만리추종 요불위의 눈에 괴로운 빛이 스쳐 갔다. "그는 기찰당의 조종을 받는 감시자였소. 본문의 일거일동... 그리고 제자들의 중독까지도 모 두 그의 소행..." "당신이 나라를 배신치 않았다면 천제문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말해보아라!" 주천운이 담담히 그의 말을 잘랐다. 만리추종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노부는 명령만 받지, 아는 것이 없소. 기찰당이 무림 대소사를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는 것 과 기찰당이 제단(帝壇)의 외오당(外五堂) 중의 하나이며 기찰당주의 경공이 나보다 빠르고 노부가 그의 십초지적에 불과하다는 정도요." 그는 매우 힘들게 말했으나 주천운은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기찰당이나 제단(帝壇)의 소재지는?" "명령을 받고 그것을 이행한 후 전서구를 이용, 보고만 할 뿐... 전혀 알지 못하오." "허수아비로군!" 주천운은 중얼거리며 그를 놓아 주고 한걸음 물러났다. "무... 무슨 뜻이오?" 갑자기 자신을 풀어주자 만리추종 요불위는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멍청히 그를 쳐다보았다. "두 가지 길이 있다!" 주천운은 그의 태도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이고 하나는 남을 위해 죽는 것이다." 주천운은 힘있게 한마디 한마디 내뱉으며 만리추종을 바라보았다. 만리추종, 그가 어떤 사람 인데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노... 노부를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노부는 그들의 금제를 받고 있거늘..." 만리추종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작은 눈을 껌벅거렸다. "금제는 몸에 있는 것이지,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니다." 주천운의 조용한 음성이 벼락처럼 그의 귓전을 울렸다. "으..." 만리추종은 신음하고 말았다. 그는 마침내 태산을 본 것이다. 도저히 반항할 수 없는 기도(氣度)! 그와 마주대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은 더욱 강해지는 것이 아닌가? "누... 누구... 시오?" 그는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 나라, 이 백성, 이 산천을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주천운은 조용히,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은 일견 광오하게 들렸지만 그의 앞에서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결코 그 말을 그렇게 들 을 수 없었다. 그것이 사실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오! 호국지존...!" 멈칫하던 만리추종은 외마디 신음과 함께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절감했다. 소문이란 것이 얼마나 진실보다 못한 것인지를. "바치리다! 지존을 위해 이 늙은 몸 하나, 기꺼이 바치리다!" "으-악!" 만리추종이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순간, 팔십 장 떨어진 숲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나 왔다. 주천운의 소매 속에서 현천마금이 가늘게 울고 있었다. 천심전(穿心箭)! 현천마금의 필살금음이 다시 위력을 발한 것이다. "당신을 감시하던 자의 목숨으로 당신의 목숨을 거두는 증표로 삼겠다." 주천운의 음성은 장중했다. "이 전하라. 호국지존은 북경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열세 필의 쾌마는 엄청난 비밀을 가지 고 있는 것 같다고..." * * * 황하(黃河). 천년을 가도 변치 않고 흙탕물이 용솟음치는 야성(野性)의 강, 이 강이야말로 수없는 세월 동안 세상을 지켜본 산 증인이라 할 수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따갑게 느껴질 때, 강변에 서서 흐르는 황하의 황톳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 는 흑영 하나가 있었다. 전신에 걸친 흑의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칠흙같이 검고 대조적으로 그의 얼굴은 관옥과 같이 맑고 희니, 그 선명한 대조는 이 흑의유생(黑衣儒生)에게 수절(秀絶)하게 만들기에 족 했다. '강물은 꺾어지고 굽이치며 부서지나 그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검도 그렇지 않은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면 여의섬과 조화의는 완전한 하나가 된다...' 흑의유생은 이미 반나절을 홀린 듯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평범한 유생이 아니었다. 바로 주천운이 강호에 나온 모습인 것이다. 황하를 건너려고 하다가 문득 영감이 스쳐 이 자리에 못박힌지 이미 반나절, 그 동안의 깨 달음을 범인(凡人)이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주천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제단의 세력은 아직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 만리추종을 얻음으로 그 시간 은 앞당겨지게 되었다..." 문득 그의 눈이 빛나며 황하를 주시했다. "사람이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떴다 잠겼다 하면서 떠내려가고 있는 물체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거리는 십육칠 장, 주천운이 보고 있는 사이에 사람인 듯한 물체는 이미 이십여 장을 떠 내려가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거리다. 하지만 지금의 주천운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와르릉-! 일진 회오리바람이 치면서 주천운의 신형은 단숨에 그 위에 도달했다. '소림 대접인신공(大接引神功)!' 주천운의 손에서 막강한 흡력이 뻗어났다. 쏴아아아... 물기둥이 솟구치면서 사람 하나가 삼 장 높이의 주천운에게 빨려 들었다. 그가 막 축 늘어진 그 사람을 잡는 순간이다. "그 계집애를 내놓아라!" 음랭한 외침이 터져나오며 매서운 경풍이 주천운에게 쏟아졌다. 어느새 쾌속선 한 척이 나 타나 있는데 그 선수(船首)에서 노인 한 명이 낚싯대를 휘둘러 주천운을 공격하고 있었다. 촤-악! 낚싯줄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주천운은 낚싯대를 피해 오히려 쾌속정의 선미(船尾)에 내려 서고 있었다. "어엇!" 어부차림의 노인은 놀란 외침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차르르- 낚싯대가 흔들리며 그물 같은 공세가 주천운을 덮쳤다. 낚싯줄이 펴진 것이다. 그 응변의 신 속함은 고수라 불리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대단한 공세가 주천운이 벼락같이 내민 한 수에 씻은 듯 사라져 버리지 않는가? 주천운이 불쑥 손을 내밀어 낚싯대를 낚아채 버렸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내 포천조(抱天釣)가...!" 주천운은 혼비백산한 노인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건져 올린 것은 이제 십육칠 세 가량의 황의소녀였다. 죽은 듯 주천운의 품에 늘어져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온몸은 물에 젖어 벗은 것이나 다름없 었다. 그야말로 온몸에서 싱싱한 탄력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황의소녀는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도록 심한 내상을 입고 물을 먹은 탓에 기식이 엄 엄했다. "당신이 이렇게 했소?" 주천운은 어부차림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태도는 당당하여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힐책(詰責)하는 듯했다. "노... 노부가 한 것은 아니..." 얼떨결에 대답하던 노인은 실태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에 배를 젓던 장한 두 명이 주천운의 좌우에서 소리도 없이 덮쳐들었다. 그들의 손에서 분수자(分水刺)가 번뜩이고 있었다. 따당! "크-윽!" "컥!" 쾌속정이 요동하며 그들의 몸은 훌쩍 날아올랐다 황하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누런 황톳물 에 선혈이 떠올랐다. '소, 손도 안 대고 호신진기로 분수자를 박살내고 고수들을 처리하다니...?' 주천운의 신위에 노인은 소름이 돋았다. "이 소녀를 쫓은 이유가 무엇인가?" 주천운이 그를 돌아보며 묻는 순간에 낚싯대를 잡아 당기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낚싯대를 불쑥 내밀어 주천운의 후결혈(喉結穴)을 노렸다. 그것은 의외인데다 잡아당기던 기세가 있어 그 빠름은 번갯불 같았다. 팍! 그러나 가벼운 음향과 함께 낚싯대는 주천운의 손에 의해 두 동강이 되고 말았다. "자... 자단죽(紫檀竹)이...? 캑!" 혼비백산하던 노인은 눈앞에 별이 번쩍임을 느끼고 그대로 선창에 처박히고 말았다. "무엇 때문에 쫓았느냐고 물었다." 그가 정신을 차릴 여가도 없이 주천운이 차갑게 물었다. "모... 모르오. 화, 황하맹(黃河盟)에서 내린 명령일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이쯤되면 정신이 있을 리 없었다. 반쯤 혼이 나간 노인은 황급히 주워섬겼다. 공포가 전신을 휘감고 있는 것이다. 황하맹(黃河盟)은 황하수로 삼십육채(三十六寨)의 연합이다. 맹주(盟主)인 황하신룡(黃河神龍)은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인으로 일 년 내내 싸움이 끊이지 않던 황하 유역을 단 일 년 만에 황하맹으로 통일한 고수였다. 그로부터 십 년, 황하맹은 구파일방을 제외한 일회이맹삼가사곡(一會二盟三家四谷)의 하나가 되었다. 천하기밀부 내에서 이미 그것을 알고 있던 주천운이다. "황하신룡이 내린 명령이란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저 계집애는 어젯밤 실종되었었는데 밤새 백여 리나 떠내려..." 노인은 입에서 선혈을 흘려 내며 더듬거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암중으로 교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쓸데없는 심기는 명을 채촉한다." 하지만 담담한 주천운의 음성에 그의 안색은 납빛이 되고 말았다. "황하신룡에게 전해라! 이 소녀는 내가 구해 간다고." 꽈르-릉! 주천운의 말이 끝내기도 전에 그 자리에 태풍이 일어남과 함께 쾌속정이 뒤집어져 강에 처 박혔다. 물기둥이 일어나는 가운데 주천운의 신형은 황하 맞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크으으... 이... 이런 경공법이 세상에 있다니!" 물속에 처박힌 노인이 흙탕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듯 외쳤다. 가공스럽게도 주천운이 뇌정군림신법을 펼치자, 쾌속정이 부서져 뒤집어져 버리고 노인은 황하의 흙탕물 속에 처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 * * 속눈썹이 긴 황의소녀의 아름다움은 백합꽃처럼 청초했지만 핏기 하나없이 푸르른 얼굴은 이미 시체와 같았다. "악독한 장력에 폐부가 상하고 물을 먹었기에 기혈이 응체되었다..." 주천운은 황의소녀의 상세를 진단하고는 품속에서 옥병을 꺼냈다. 거기에는 장보고(藏寶庫) 에서 가지고 온 천년설연실(千年雪蓮實)이 들어 있었다. "설연실 한 알이면 능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군데 혈도를 짚어 물을 토해 내게 한 주천운은 황의소녀의 입에 천년설연실을 넣어 주었 다. 천년설연실은 천고기약(千古奇藥)이라 황의소녀의 입에서 금세 액체가 되어 넘어갔다. 그리고 주천운은 격공타혈(隔空打穴)로 그녀의 대혈을 타통해 주었다. 그러나 황의소녀의 안색은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장력을 맞은 곳이 가슴이라 약효가 퍼지지 못하는군!" 까닭을 알아 낸 주천운은 잠시 망설이다 착 달라붙은 그녀의 옷으로 손을 가져 갔다. 상의가 벗겨졌다. 내복에 이어 노란빛의 가슴 가리개가 나타났다. 출렁! 주천운의 손에 의해 가슴 가리개가 풀어 내려지자 두 개의 육봉이 용솟음치며 드러났다. 누 운 상태에서도 옆으로 퍼지지 않고 우뚝 솟은 젖가슴은 추위 탓인지 탱탱하게 뭉쳐 있었고 조그마한 유두는 잔뜩 성이 나 곤두 서 있었다. 그러나 주천운의 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광경이라도 눈썹 하나 까딱치 않을 그였다. 그녀의 왼쪽 가슴에는 자흑(紫黑)의 장인(掌印)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마도 칠대공력의 하나인 오귀적살강(五鬼赤煞 )... 이 나이에 무엇 때문에 이런 중수(重手) 에 당하고 쫓기는 몸이 되었을까?" 주천운은 의혹 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리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뭉클한 감촉이 그의 손을 통해 전해졌다. 그런데도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용화대수미선공과 그의 정력이 최고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 여인의 그림자가 너무도 굳게 그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의 전신에서 서기 어린 연화가 피어오르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녀의 온몸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으...으응... 아, 안 돼! 하... 할아버지!" 갑자기 소녀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소리쳤다. 그와 함께 그녀의 입에서 검은 선혈이 왈칵 쏟아졌다. 동시에 그녀가 눈을 떴다. "이곳은...? 아앗!" 잠시 멍청히 있던 소녀는 자신의 가슴에 낯선 남자의 손이 대어져 있음을 알고 대경실색해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움직일 수 없소!" 주천운은 그녀의 가슴을 눌렀다. 그 손에 가슴을 눌려 일어나지 못하게 된 황의소녀는 새파랗게 질려 발버둥이치려고 했다. "함부로 움직이다가 기혈이 뒤엉키게 되면 주화입마가 될 것이오. 잠시만 그대로 있으시오." 주천운이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그 목소리에 묘한 힘이 있어 황의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아!' 주천운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부지중에 탄성을 울리고 말았다. 비록 지금의 모습이 주천운의 진면목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눈빛과 그 기도를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내가 이끄는 대로 운기(運氣)하시오." 그 웃음, 그 음성에 놀라고 지쳐 사경을 헤매던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포근히 가라앉음을 느꼈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가슴에 대어져 있던 주천운의 손에서 부드러운 열류(熱流) 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그녀의 몸을 녹여 주고 있었다. 파르르... 내리감은 그녀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었다.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이 격심하게 뛰었다. 백마 탄 왕자를 보고 싫어할 여자가 없다는 것은 고금의 진리였다. 만약 지금 주천운의 모 습이 흉신악귀와 같았다면 그가 아무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해도 그녀는 눈을 감고 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정신을 바로잡고 진기를 도인하시오!" 주천운의 음성이 꾸짖듯 그녀의 귓전에 메아리쳤다. "죽음에서 살려 주시고 공력까지 높여 주셨으니 그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을 숙인 황의소녀는 주천운에게 큰절을 하려고 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마음에 두지 마시오." '아!' 무형의 암경에 도저히 몸을 굽히지 못하게 된 황의소녀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오귀적살강은 중원사마(中原四魔)의 하나인 적발신마(赤髮神魔)의 독문절기, 그리고 황하맹 까지... 소저의 나이는 아직 어린데 어쩌다 그들과 원한을 맺었소?" 그러자 황의소녀의 안색이 싹 변했다. "도와 주세요. 대협! 할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당하고 계십니다. 흐흐흑... 할아버진 소녀를 탈 출시키느라..." 황의소녀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진정하고 자세히 말해 보시오." 주천운은 그녀의 처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연자경(燕紫瓊)이다. 은거기인인 황하조수(黃河釣 )의 손녀가 그녀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였으나 할아버지의 자상한 보살핌 속에 걱정없이 자라 나이 열일곱에 이 미 황하조수의 진전을 팔 성이나 이어 황하미인(黃河美人)으로 불리는 고수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황하소축(黃河小築)에서 오손도손 살아 온 그녀는 그때까지 부러울 것이 없었다. 최소한 그녀의 생각에는 그러했다. 거기에 돌연 암운(暗雲)이 밀려온 것은 그녀가 어느 날 황하에서 헌 상자 하나를 건져 올 리면서부터였다. 상자를 열어 본 황하조수는 그것을 극비에 붙였으나 어떻게 소문이 퍼져 나갔는지 그날로 그들의 평온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어젯밤 드디어 일단의 신비인들이 밀어닥쳐서 황하소축은 풍지박산이 나버리고, 그 녀만이 황하조수의 도움으로 겨우 중상을 입은 채 황하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하맹이었다. "소저의 할아버지는?" "흐흑... 알 수가 없... 소녀가 황하에 뛰어들 때..." "그 상자에 뭐가 들었기에..." 갑자기 주천운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가 밖을 쳐다보는 순간에 밖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려 왔다. "황하맹의 부맹주 철비룡(鐵飛龍)이 뵙기를 청하오." 진가구(陣家口)는 황하 연변에 위치한 약 이십호 가량의 조그만 어촌이다. 강변에는 어구(漁具)가 널려 있고, 평소엔 이맘 때가 되면 밥짓는 연기가 마을의 굴뚝에서 피어나고 개 짖는 소리가 껑껑, 울리는 법이었다. 개구쟁이 꼬마들이 졸랑거리고 뛰어다니다 어른들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 인지 진가구는 황혼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이때에 쥐죽은듯 고요할 뿐이었다. 이유는 그 중 외곽에 있는 한 채의 초가를 둘러싼 삼십여 명의 병장기를 가진 대한들 때문 인 것 같았다. 그들의 기세는 흉흉한지라, 이런 경우에는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그들인 것이다. 그 초가의 앞에는 규염의 위맹한 모습을 한 노인이 버티고 서 있고 그 뒤에는 냉막한 안색 의 두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서 차갑게 초가를 쏘아보고 있었다. 끼이... 초가의 문이 열리며 흑의유생이 나타났다. 그의 태도는 조용하고 침착하여 주위의 살벌한 기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묘한 느낌이었 다. 마치 늑대들의 무리에 던져진 철모르는 양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겨우 이런 책벌레였단 말인가?' 규염노인의 눈에 의혹이 스쳐 갔다. "귀하가 황하조수의 손녀를 강탈해 간 사람인가?" 규염노인의 음성은 종소리와 같이 우렁우렁했다. 그것은 그의 공력이 이미 비범한 경지에 이르러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황하에서 죽어가던 소녀를 구하긴 했으나 강탈한 적은 없소." "거짓말! 네놈이 노부에게서 그 계집애를 뺏아가지 않았느냐?" 입에 개거품을 무는 노인이 있었다. 주천운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 소녀를 당신에게서 뺏아 갔다고?" '으으...!' 노인은 그 눈빛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나면서 발악하듯이 외쳤다. "그... 그렇다! 네놈이 그... 그러지 않았느냐?" "나는 거짓말하는 자를 가장 싫어한다! 이리 오너라!" 주천운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그가 그 노인을 가리키는 순간, 노인은 무서운 흡인력이 일어나 자신을 잡아당김을 느끼고 그대로 딸려 갔다. 버둥거리며 저항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가 저항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혼비백산한 그에게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멈춰라!" 그 광경에 규염노인이 벼락같이 외치며 주천운을 향해 삼 권을 잇달아 쏟아 냈다. 그 위세는 배산도해(排山倒海)였다. 순간, 주천운의 왼손이 기묘하게 원을 그렸다. 규염노인은 자신의 권세가 기이하게 미끄러짐을 느꼈다. 퍼펑! "으-왁!" 주천운에게 끌려가던 노인이 피분수를 뿜어내며 날아올랐다. 어이없게도 규염노인의 권세가 그 노인을 후려 친 것이다.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상승공력으로 주천운이 규염노인의 권세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자신의 수하를 공격한 꼴이 된 규염노인이 신음하는 순간 주천운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철비룡이라는 막광이오?" "그렇다... 귀하의 대명은 어찌 되는가?" 규염노인, 철비룡 막광의 말투가 은연중에 변했다. "근래에 황하맹이 욱일승천함은 들었으나, 나이 어린 소녀를 부맹주까지 나서서 추적할 정 도로 발전한 줄은 몰랐군..." "...!" 철비룡 막광의 안색이 돌변했다.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지독한 풍자(諷刺)가 아닌가? "본좌가 모든 예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음에 대답도 없이 감히 본맹을 무시하다니! 네놈 은 황하 유역이 누구의 관할인지도 몰랐더란 말이냐?" 철비룡의 규염이 살기로 부르르 떨렸다. 철비룡(鐵飛龍) 막광(莫廣)은 황하맹 구대고수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폭뢰신권(爆雷神拳)은 이미 오십 년 동안 강호를 종횡해 온 상태였다. 철비룡의 장포가 바람이 없는데도 펄럭이고 규염이 빳빳이 곤두섰다. "황하뿐 아니라 천하가 대명천자(大明天子)의 황법 아래에 있음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주천운은 그의 기세를 보고도 태연히 대꾸했다. "건방진 애송이! 하늘 높은 줄 알게 해주겠다!" 철비룡이 부르짖는 순간에 그의 좌우에서 인영이 폭사되어 주천운을 덮쳐 갔다. 퍼펑! "으-윽!" 그러나 그처럼 빠른 공세가 이루어졌음에도 일진 폭음과 함께 답답한 신음을 내뱉으며 진퇴 되는 사람은 주천운이 아니었다. 그들은 철비룡의 뒤에 있던 냉막한 안색의 두 노인이었다. 공중을 휘돌아 내려서는 그들의 눈에는 경악이 충만했다. '저럴 수가? 황하이살(黃河二煞)을 저토록 간단히 격퇴시키다니...!' 철비룡의 안색이 굳어졌다. 황하이살(黃河二煞)! 그들이 누구이던가? 황하맹의 구대고수 중 둘이며 그 나이조차 구십이 넘는 마두들이 아닌 가. 황하신룡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면 결코 남의 밑에 있을 자들이 아닌 것이다. 그때였다. 펑! 와지끈! "아-앗!" 초가 안에서 폭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상황에서 벌어진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주천운의 안색에는 미동 도 없었다. 비명 소리가 채 가시지도 않아 초가 속에서 연자경이 나타났다. "괜찮소?" 주천운의 물음에 연자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러주신 대로 적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들어오는 것을..." 그 소리에 철비룡의 안색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원래 그는 시간을 끄는 사이에 초가 뒤로 고수를 침투시켜 연자경을 납치할 작정이었다. 그 런데 상대는 그의 모든 생각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누구냐?" 그의 음성에는 의혹과 경악이 한데 어울려 있었다. "철비룡 정도로는 내 이름을 알 자격이 없다!" 주천운은 대답은커녕,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황하조수는 어디 있느냐?" "으와아하하... 건방진 놈! 능력이 있다면 알아보아라!" 철비룡이 대노하여 광소를 터뜨리며 벼락치듯 주먹을 휘둘렀다. 쐐액- 그의 폭뢰신권은 원래 강맹무쌍한데다 분노한 나머지 전력을 다했기에 그 위세는 가공스러 웠다. 그리고 때를 같이하여 황하이살이 소리도 없이 좌우에서 덮쳐 왔다. "물러나라!" 주천운이 낭랑히 외치는 순간, 그의 전신에 천 개의 손그림자가 일어나며 그들을 뒤덮었다. 꽝! "크-윽!" "케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황하이살이 가랑잎처럼 날아가고 철비룡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서 쿵 쾅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처... 천불수(千佛手)! 소림 천불수? 너는 소림과 무슨 관계...?" "황하조수의 행방을 물었다." 주천운이 경악한 철비룡의 음성을 잘랐다. 성큼-주천운이 한걸음 옮기자 그의 신형은 미끄러지듯 이미 철비룡의 앞에 도달하고 있었 다. "야아-합! 굉폭뢰(宏爆雷)!" 태산 같은 기세가 자신을 덮쳐옴을 느낀 철비룡이 벼락같이 선제공격했다. 대적경험이 많은 그는 상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기선을 제압하고자 한 것이다. 우르릉! 그의 최고절학이 폭발하듯 주천운을 덮쳤다. "네 권세가 나를 한걸음이라도 진퇴시킬 수 있다면 나는 강호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주천운은 그것을 보고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미친 애송이! 죽어 봐라!' 천비룡의 두 눈에서 흉광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의 전력이 주천운의 가슴에서 작렬했다. '심상치 않다!' 한데, 쇠라도 뚫어 낼 듯한 그의 주먹이 주천운의 가슴을 후려 갈긴 순간에 철비룡은 속으 로 다급히 부르짖어야 했다. 바위라도 산산조각을 내버릴 그의 권세가 마치 솜을 두드리고 모래 속으로 물이 스며들 듯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끌어올린 진기가 모조리 그의 주먹을 통해서 주천운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주천운 의 몸에서 주먹을 뗄 수조차 없었다. "사... 사술(邪術)...!" 철비룡이 혼비백산해 물러났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 그의 주먹은 주천운의 가슴에 못박히고 진기는 계속 주먹을 통해 흘러나가고 있었다. "황하조수는 어디 있느냐?" 주천운이 조용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이럴 때의 조용함은 오히려 더 무서운 압박이다. "크으-모... 모른다!" 철비룡은 이를 갈며 다른 손으로 주천운의 눈을 노렸다. "황하조수의 행방을 물었다." 상대의 손이 자신의 눈을 노리고 날아오건만 주천운은 그것이 보이지도 않는 듯 여전히 담 담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철비룡의 손목이 부러져 나갔다. "끄-윽!" 철비룡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려 냈지만 장중의 그 누구도 주천운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알 아본 사람은 없었다. "손을 거둬라!" 주천운의 등뒤에서 황하이살이 단극(短戟)을 휘두르면서 덮쳐 왔다. 도저히 맨손으로는 상대 할 수 없음을 절감했던 것이다. "위험해요!" 연자경이 크게 놀라 그들을 막아 갔다. 그러나 황하이살은 그녀보다 더욱 빨랐다. 황하조수에게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녀와 황하이살의 무공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들의 단극이 주천운에게 도달하는 순간, 주천운의 손이 슬쩍 쳐들리면서 단극을 막아 냈 다. '제까짓 게 무슨 쇠뼈다귀라고?' 그것을 본 그들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차창! 쇳소리와 함께 주천운의 손과 부딪친 그들의 단극이 부러져 나갔다. 막강한 반진력에 그들 은 선혈을 토해 내며 진퇴되어야 했다. 한데, 황하이살의 노대가 물러난 곳은 재수없게도 바로 연자경이 덮쳐 오는 곳이었다. "으-악!" 황하이살의 노대는 연자경의 손에 의해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나뒹굴고 말았다. "이... 이년이!" 황하이살이 내상을 무릅쓰고 연자경을 덮쳐 왔다. 때를 같이해서 주천운에게는 초가를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덮쳐 왔다. "어리석은! 물러가라!" 주천운이 벼락치듯 호통 쳤다. 그것은 불문의 사자후(獅子吼)보다 더 엄청난 위세였다. 위-잉! 사방에 일진 광풍이 일어나면서 공력이 약한 자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나뒹굴었다. 주천운은 싸늘한 눈빛으로 철비룡을 쏘아보았다. "나는 반 각 이내에 도반귀원신공(導反歸元神功)으로 당신의 진기를 모두 뽑아 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겠지?" "도... 반귀원신공? 사... 사심귀존의 제자?" 수천 초를 싸운 것보다 더 탈진한 철비룡이 학질 걸린 듯 덜덜 떨면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 다. "사심귀존 따위가 어떻게 나의 사부될 자격이 있겠는가? 대답하라!" '자... 자격이 없다고? 사심귀존! 그 얼마나 공포로 점철된 끔찍한 이름이었던가? 그런데 자 격이 없다니?' 철비룡 막광은 주천운이 도처히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절감해야 했다. 그 기세에 당해 보고서야 누가 대항할 마음이 나겠는가? "마... 말하겠소..." 그가 항복하는 순간, 주천운의 몸에서 흡력이 사라졌다. 죽어라 손을 잡아당기고 있던 철비 룡은 비칠비칠 물러서다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의 평생 언제 이러한 일을 당하기는커녕, 상상이라도 해보았으랴. 다리가 절로 덜덜 떨렸 다. "화... 황하조수는 어, 어젯밤 신비객에게 납치되었소...보, 본맹은 그들이 태산쪽으로 갔음을 알고 추적 중이오." "사실인가?" "조금도... 어김이 없소." 묻는 대로 순순히 주워섬기는 철비룡에게서 처음의 기세는 찾아볼 수도 없고 꼬리 빠진 수 탉 같은 몰골이었다. "황하조수를 뒤쫓고 이 낭자를 뒤쫓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 그것은...!" 철비룡이 더듬거릴 때였다. "필부는 죄가 없으되, 구슬을 가진 것이 죄라는 말이 있소."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동시에, 황의인 한 사람이 장내에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나이는 채 오십이 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백과 사각형의 얼굴 가운데 자리한 빛나는 두 눈은 그가 평 범한 인물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경공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족하지 않 은가? "맹주님을 뵈옵니다!" 그가 나타난 순간에 철비룡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황하맹(黃河盟)! 구름 속에 가린 신룡 같다는 황하맹주인 황하신룡(黃河神龍)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부맹주로 봐서는 황하맹이 별것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맹주가 맹주에게 무릎을 꿇는 다는 것은...' 그것은 부맹주로서는 맹주가 쳐다볼 수 없는 정도의 인물이라고 승복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맹의 위신을 무너뜨린 속하를 죽여 주십시오." 철비룡 막광은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돌아가 본좌의 명을 기다려라!" 황하신룡의 말에 철비룡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고개를 숙였다. 황하신룡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천운을 보았다. 그는 그 찰나적인 틈에 이미 장내의 상황을 모두 판단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주천운의 맑은 눈이 미동도 하지 않음을 보자 황하신룡의 눈에 비로소 경악의 빛이 스쳐갔 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찰나간이라 거의 드러나지도 않았다. "본맹의 수하들이 고인을 몰라 뵙고 무례를 범한 듯, 대신 사죄하겠소." 그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포권했다. "별말씀을..." 주천운도 마주 포권했다. "본좌는 황하맹을 이끌고 있는 황하신룡이외다. 존명은?" 황하신룡이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이런 정중한 태도는 파격적이었으나 그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것 이기도 했다. "상관천(上官天)이라 합니다." 주천운은 가명을 댔다. "상관... 천? 본좌의 견식이 천박하여 존명이 조금 생소한 듯한데 혹 사문을 알 수 있을지?" 주천운은 가볍게 미소했다. "내게는 사문이 없소이다." "사문이 없다? 하하... 설마 그 나이에 자수성가(自手成家)했다는 말은 아닐 것인데?" 황하신룡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몇 분의 도움은 받았으나 사부로 모신 적은 없소." "밝히기를 꺼려 한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소이다." 말끝을 흐린 황하신룡은 주천운의 뒤에 서 있는 연자경을 바라보았다. "본맹주가 알기로는 상관공자는 이 일과는 무관한 것 같은데 그만 손을 떼시는 게 어떻겠 소?" "미안하오." 주천운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본맹주는 상관공자가 다시 한 번 생각해 주기 바라오." 황하신룡은 여전히 웃는 빛이었다. 그의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초가 주위는 열두 명의 황의대한이 나타났다. 첫눈에도 그들의 능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저들 개개인은 철비룡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주천운의 얼굴은 조용했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의혹이 일고 있었다. "황하십이룡(黃河十二龍)은 본맹의 정예이오." 황하신룡이 담담히 외치는 순간, 황의대한 하나의 손에서 새파란 빛이 초가를 향해 폭사되 었다. 확! 초가가 대번에 화염에 휩싸였다. 가공할 화력이었다. 이제 보니 황의대한들의 손에는 길쭉한 쇠통이 들려 있었다. "추혼신화통(追魂神火筒)?" 주천운의 눈에 흠칫하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단한 안력이오! 열두 개의 추혼신화통이 이루는 개천신화진(蓋天神火陣)이 멋지리라 생각 지 않소?" 황하신룡이 크게 웃었다. 그의 공력은 과연 대단하여 산천초목이 흔들리는 듯 굉량한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내 심 주천운의 안목에 놀라고 있었다. 추혼신화통(追魂神火筒)은 무림 오대악독암기(五大惡毒暗器)중의 하나다. 그 화세(火勢)는 비할 바 없고, 불길의 속도가 지독하게 빨라 십 장 안을 모조리 불바다로 만드는데 일단 한 번 붙은 불은 물속에 들어가도 꺼지지 않는다. "대명이 쟁쟁한 황하신룡이 한낱 소녀를 상대로 화기까지 들이대다니 너무 한다고 생각지 않소?" 주천운이 은연중에 한걸음 물러나 연자경의 앞을 가리며 말했다. "누구라도 별수없소. 그 물건은 무림지보(武林之寶)이며 그것이 나타난 곳이 바로 본맹의 관 할인 황하이기 때문이오." 황하신룡은 침중히 말하며 한걸음 물러났다. 스스스- 황하십이룡이 추혼신화통을 겨눈 채 다가왔다. 삼엄한 살기가 터질 듯 피어났다. 화르르-탁탁! 주천운의 뒤로 초가가 완전히 불덩어리로 화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황하맹주가 원하는 것을 낭자가 가지고 있소?" 주천운의 음성에 연자경은 떨리는 음성으로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예, 할아버지께서 주셨어요. 그런데... 정신을 잃은 동안 없어져 버렸어요." "들으셨소?" 주천운이 황하맹주를 바라보았다. "본맹주는 본 것 외에는 믿지 않소." 황하신룡은 담담히 대꾸했다. "으하하하하..." 갑자기 주천운이 앙천대소(仰天大笑)했다. 우르르- 불타던 초가가 그 웃음소리에 무너지고, 주위의 공기가 파동치며 황하십이룡의 눈에 고통의 빛이 나타났다. "황하신룡이 겨우 이 정도 그릇이었던가? 실망했군! 추혼신화통 몇 개를 내가 두려워할 것 같은가?" 제왕지도(帝王之度)! 주천운의 온몸에서는 만인을 굴복시키는 당당한 위세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이리 오시오." 주천운은 성큼 연자경의 손을 잡았다. "...!" 연자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추혼신화통에서 펼치는 개천신화진이 어떤 것인지 우리 한번 견식해봅시다!" 주천운의 음성은 맑은 종소리와 같았다. 그가 한걸음 떼어놓는 것을 보고 황하신룡이 외쳤다. "멈추지 않으면..." 황하신룡이 소리치다 안색이 변했다. 주천운의 전신에서 서기가 뻗어남을 보았던 것이다. '심상치 않다!' 황하신룡은 다급히 외쳤다. "쏴라!" 파파파- 슈슈슈-! 새파란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다. 꽈르-릉! 그와 동시에, 일진 광풍이 일어나며 서기로 뒤덮여 보이지도 않는 주천운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저... 저럴 수가?" 황하신룡이 두 눈을 부릅떴다. 파파-촤아! 그 가공할 추혼신화통의 화염이 주천운의 몸에서 뻗어나는 서기가 닿자 튕겨지고, 그의 주 위에 몰아치는 광풍에 휩쓸려 주위로 마구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극히 찰나에 불과했다. 일진 굉음이 주위를 뒤흔드는 순간에,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개천신화진을 통과하여 황하신 룡을 지나치고 있었다. "게 서라!" 황하신룡이 벼락같이 호통 치며 일지를 찍어 내었다. 쌔-앵! 매서운 음향이 터져 나오며 지풍이 주천운의 몸에 격중되었다. 그의 이 일지(一指)는 일대절 학인지라 무엇이라도 꿰뚫어 내는 것이었다. 혈육지구로서는 감당해 낼 바가 아니었다. 땅! "으..."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우르르릉- 주천운에게 일격을 가한 황하신룡의 손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순간에, 주천운 의 신형은 광풍(狂風)을 휘몰면서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백 장 밖을 날아가고 있었다. 제 15 장 장진도(藏珍圖)에 이는 풍운(風雲) "대단하군...!" 주천운은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고 중얼거렸다. 흑의의 가슴팍에는 칼로 오린 듯한 구멍이 나 있었다. "그가 밀종(密宗)의 검영수라지(劍影修羅指)를 연성했을 줄이야..." 주천운의 가슴팍에 난 구멍은 바로 마지막에 황하신룡에게 당한 것이었다. 검영수라지(劍影修羅指)는 서역 밀종의 절기(絶技)다. 그것의 최고 장점은 호신강기를 파괴할 수 있으며, 극도에 이르면 쇳덩어리라도 구멍을 뚫 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연자경이 걱정스러운 듯 그의 가슴팍을 보면서 물었다. "조금 쓰리기는 하나 지장은 없소..." 주천운이 가볍게 가슴을 문지르면서 대꾸했다. '검영수라지는 밀종비전으로 중원에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그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주천운은 내심 의혹이 일어남을 금할 수 없었다. 이미 석양이 지고 어둠이 밀려오는 때, 이곳은 주천운이 떠난 초가와 육십여 리 떨어진 곳 이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태산(泰山)의 웅자가 바라다보이고 있었다. "..." 잠시 묵묵히 있던 주천운은 연자경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주천운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이 주천운과 마주쳤다. '저-눈빛은!' 주천운은 흠칫했다. 연자경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대려군에게도 있었고, 채설지에게도, 그리고 그의 시비인 설란과 매향에게서도 보았 던 그런 눈빛이었다. "황하에서 얻은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주천운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연자경의 눈에 한 가닥 쓸쓸한 빛이 지나갔다. "그것은 장진도(藏珍圖)였어요..." "장진도?" "예, 잘은 모르지만 지난날 천외쌍기(天外雙奇)가 남긴 것이라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 요." "천외쌍기?" 주천운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천외쌍기(天外雙奇). 사백 년 전 무림의 태두(泰斗)로 존칭되는 절대기인 두 명을 말함이다. 남천신제(南天神帝) 뇌승업(雷承業)과 북천마존(北天魔尊) 서문달(西門達). 정사양대지존(正 邪兩大至尊)으로 불리던 그들은 평생을 마주치지 않다가 그들이 행도한 지 오십 년 만에 태 산 관일봉(觀日峯)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의 종적은 지난 사백 년 동안 강호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들 양인의 심득을 한몸에 지닌다면 천하무적이 될 수도 있겠지..." 천하기밀부의 그들에 관한 기록을 떠올린 주천운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잘 보관하시오. 잃어버리지 말고." 주천운의 말에 연자경은 흠칫했다. "보관하다니요? 그것은 이미 황하에서 잃어버렸는데..." 주천운은 담담히 웃었다. "나는 믿으나 다른 사람들은 아마 믿지 않을 거니까..." 연자경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그녀가 안색이 변해 급히 뭐라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덜그덕 덜컹! 덜컹... 삐그덕거리는 바퀴 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의 앞을 뻗어 있는 산길에 수레를 끌고 있는 황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황소의 등에는 비쩍 마른 농부 한 사람이 타고 연신 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려! 이려, 이놈의 소야..."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은 둥 만 둥 황소는 어슬렁거리며 느릿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따름이었 다. 삐그덕-덜컥! "이려! 이려어..." 조용하던 산길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좁은 산길을 우차(牛車)가 우당탕거리며 내려오고 있으니 두 사람은 타던 말을 멈추고 길 옆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음메에...!" 그런데 그들이 비켜서는 순간에 갑자기 황소가 크게 울부짖더니 네 굽을 모아 돌진하기 시 작했다. "워! 워어-서라! 이놈의 소..." 소 등의 농부가 혼비백산해 외쳤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두두두-덜컹! 덜커덕... 흙먼지가 하늘을 가릴 듯 일어나고 수레가 부서질 듯 튀어오르면서 우차는 주천운과 연자경 의 곁을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 그뿐인가? 수레에 쌓여 있던 지푸라기 등의 거름이 그 바람에 마치 폭포수와 같이 주천운과 연자경에 게 쏟아졌다. "사람 살려어..." 연자경이 질겁을 하고 물러서는 순간에 이미 저만큼 사라져 가는 황소의 등 위에서 농부가 죽어라 구명(救命)을 외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요? 도와 주어야지요?" "도울 필요 없을 거요. 아마 그는 목적 달성을 했을 테니까..." 연자경이 그걸 보고 발을 동동 구르다 몸을 날리려는 순간에 주천운이 태연히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일순 어리둥절하던 연자경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을 받고는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 그녀는 다급히 가슴속으로 손을 가져 갔다. "어, 없다!"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를 깨닫고 그녀가 우차가 사라지는 쪽을 바라보는 순간에 주천운이 몸을 날렸다. 우르-릉! 일진 굉음과 함께 거기서 일어난 광풍에 그녀는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다.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뇌정군림신법(雷霆君臨身法)으로 우차를 덮쳐 가고 있었다. "아이고! 미친 소에다 날벼락까지 온다!" 농부가 소 등에서 허우적거렸다. 펑! 펑! 그것과 함께 일진 폭음이 잇달아 터져 나오면서 우차 주변에서 연막(煙幕)이 일제히 치솟았 다. 그 연막의 확산 속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음과 함께 단숨에 그 범위는 십 장을 뒤 덮었다. "신무은신탄(神霧隱身彈)이로군!" 주천운이 난감한 표정으로 탄성을 토했다. 신무은신탄(神霧隱身彈)이라는 것은 인체에 아무런 해도 없다. 그러나 일단 이 신무은신탄이 터지면 그 속에서는 태산이 있다 해도 발견할 수 없다. 불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신무은신탄. 세상에서 그것을 쓰는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하나 뿐이다. '공령천수(空靈天手) 왕가달(王家達)?' 주천운은 그 비쩍 마른 농부가 누군지 알아 내었다. 주천운은 그가 누군지를 알아 내는 순간에 크게 진기를 한 입 들여마시고는 발에 힘을 주었 다. 과아-앙! 그의 신형이 제자리에 선 채 팽이처럼 맴돌았다. 그러자,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그의 몸 주위에 일어났다. 일각(一刻:십오분)이 지나기 전에는 태풍이 일어나도 흩어지지 않는다는 신무은신탄의 연막 이 그 회오리에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뇌정군림신법이 제자리에서 펼쳐진 결과인 것이다. 연막이 흩어지면서 사라지자, 바위를 들이받아 박살이 난 수레와 피투성이가 된 황소의 모 습이 오 장 밖에 보였다. 그러나 그 농부의 모습은 약에 쓸래도 없었다. 신무은신탄이 터진 것과 제거된 것은 거의 동시라 할 정도, 그런데도 그 농부의 모습은 씻 은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 어떻게 되...?" 황급히 달려온 연자경은 농부의 모습이 없어졌음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공령천풍신법(空靈天風身法)은 무림 칠대신법 중에 이위니 이미 십 리는 벗어..." "그, 그럼 그 농부가 공령천수 왕가달이란 말인가요?" 연자경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공령천수(空靈天手) 왕가달(王家達)은 소매치기의 조종(祖宗)이라는 공령문(空靈門)의 문주 다. 공령이란 말은 그가 흔적도 없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고, 천수라는 것은 그가 무엇 이든 훔쳐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에게 도둑맞은 것이 있다면 일찌감치 단념하는 것이 현명하다. "도와주세요!" 갑자기 연자경이 주천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어깨는 애처로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황하에서 잃어버린 것, 잊어버리시오. 낭자의 무공으론 어차피 그것을 보존할 수 없소..." 주천운이 담담히 말했다. 그들의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은공! 은공을 속인 죄...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습니다. 하나 흐흐흑... 장진도가 없으면 소녀의 할아버지는 죽습니다! 도와주세... 요... 제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주천운에게 매달렸다. "할아버지가 죽다니? 낭자가 할아버지의 행방을 안단 말이오?" 주천운은 의아한 빛이 되었다. 연자경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 공께서 철비룡을 상대하려 나가... 셨을 때... 전음이 들려 왔습니... 다." "전음이?" -오늘밤 삼경, 태산 어귀의 허물어진 토지묘(土地廟)로 아무도 몰래 장진도를 가져 오너라. 만약 이것을 어긴다면 황하조수의 목숨은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으흐흐흑... 그... 목소리는 어젯밤 할아버지를 공격했던... 그 수뇌의 무서운 음성... 할아버지 때문에 은공을 속였... 용서해... 으흐흐흑... 제발..." "그만! 울음을 그치고 일어나시오." 주천운은 담담히 말하며 생각을 굴렸다. '초가 주위에 누가 있었는데 내가 몰랐다면 그자는 대단한 고수...' 주천운이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보고 연자경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분은 내가 속인 것을 용서하지 않으시려는 것이다...' 무림의 여인이 개방적(開放的)이기는 하지만 여인임에는 틀림없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 던 속살을 내보인 상대가 천하위장부(天下偉丈夫). 비록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하나 소녀의 마음속에는 지울 수 없는 인상과 함께 사랑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생각에 잠긴 듯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주천운의 모습에 연자경은 견딜 수 없는 회한(悔恨) 과 함께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렇게 울기만 하고 언제 장진도를 되찾으러 가겠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용솟음칠 때, 주천운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 그럼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자경의 눈이 깜박였다. "용서고 말고가 어디 있겠소? 장진도는 원래 낭자의 물건이고, 그것을 감춘 것도 욕심이 아 닌 효심에서 비롯된 것인데..." "고, 고마워요! 고마..." 주천운의 말은 끝나지도 못했다. 연자경이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것이다. 졸지에 연자경을 끌어안은 꼴이 된 주천운은 난색을 떠올렸다. "다 큰 처녀가 이 무슨 어린아이 같은 짓이오. 이러고 있는 사이에 공령천수는 백 리 밖을 벗어날 것이오." 잠시 등을 다독이던 주천운은 그녀에게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뚝! 주천운의 그 말은 거짓말같이 연자경의 울음을 멈추게 했다. "공령천수에게 탈취당한 것은 그 누구도 찾지 못한다는데... 공자께선 그를..." "설마 내가 그를 찾지 못하리라 믿는 것은 아닐 텐데?" 주천운이 빙그레 웃었다. '아아... 저 웃음...' 연자경은 전신이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주천운의 모습이 본 모습보다 못하더라도 그의 눈빛과 그 기도를 보고 천하의 그 어떤 여인 이 자신을 주체할 수 있겠는가? "나는 농부의 손이 낭자를 스쳐 감을 보고 그의 몸에 약간의 천리유흔향(千里遺痕香)을 뿌 려 놓았소. 어디 한번 따라가봅시다." "어, 어느새?" 연자경의 눈에 또다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옷 한 벌이 있었다. 그것은 꾀죄죄한 농부의 옷이었다. 그 농부의 옷은 맑은 연못가에 단정히 개어져 있었고, 그 옆의 바위에는 삼 푼 깊이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덕분에 작년 여름에 하고 한 번도 안 한 목욕을 하네그려. 몸에서는 향기(;천리유흔향) 나고 맑은 물에 목욕하며 그림(;장진도)을 보니 이 아니 신선놀 음인가?> 그 글을 어이없는 듯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주천운과 연자경이었다. 이곳은 그들이 있던 곳과 사십여 리 떨어진 태산 경내였다. "내가 공령천수를 너무 가볍게 보았군..." 주천운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쩌지요?" 연자경은 울 듯한 얼굴이 되었다. "장진도는 내 반드시 찾아 주겠소." 주천운은 천색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곧 이경이 될 것이니 우선 토지묘부터 찾고 보아야겠소." "장진도가 없는데 토지묘에는 가본들..." "장진도가 하나밖에 없으란 법은 없을 것이오." 주천운의 말은 신비한 울림을 갖고 있었다. * * * 토지묘(土地廟)라는 것은 땅의 신이라는 토지공공(土地公公)을 모시는 기복구원(祈福求願)의 사당이다. 마을이 번성하면 따라서 토지묘도 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토지묘는 버려진 채 폐허가 되는 것이니 사찰이나 도관 등에 비해 더 토속적인 사당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과 같이 숨을 쉰다고나 할까. 낡은 토지묘는 어둠에 의지한 채 아름드리 고목에 둘러싸여 삐걱거리고 있었다. 삼경 무렵. 어둠이 사위를 지배할 때, 그 토지묘 앞에 크고 작은 두 인영이 나타났다. 흑의유생과 황의소녀였다. 흑의유생의 관옥 같은 얼굴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으나, 황의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긴장과 초조로 굳어져 있었다. "멈춰라!" 그들이 토지묘에 막 들어서는 순간에 얼음을 깨뜨리는 듯 차가운 음성이 터져나왔다. 흑의유생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히 혼자 오라고 했는데 외인을 데리고 오다니! 네 할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싶으 냐?" 황의소녀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빈손으로 혼자 오길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둘이 오더라도 물건을 가지고 오기를 원하는 것인가?" 흑의유생이 태연히 말을 받았다. "..." 그 말에 토지묘는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네가 상관천이냐?" 잠시 후, 예의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단한 이목을 가지고 있군..." 주천운은 담담히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는 변함이 없지만 내심으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자들이 정체가 무엇인지 보통이 아니로구나. 상관천이란 이름은 단 한번밖에 쓰지 않았 는데...' 그때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 장진도를 내놓아라!" 차가운 음성이 다시 토지묘 안에서 말했다. "순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황하조수의 목숨이 우리에게 있음을 잊지마라!" "장진도가 내게 있음도 잊지말아야겠지?" 주천운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러나 그 한마디 한마디는 여지없이 상대 말의 맥을 끊어놓고 있었다. "으흐흐... 제법 까다로운 놈이군..." 토지묘 안에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다. 이리 들어오너라." 주천운은 아무 대꾸 없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토지묘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막 토지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리도 없이 그의 좌우에서 검이 뻗어 나왔다. 문 옆 에 바짝 붙어 있던 흑의인들이 습격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노리고 있던 기습인지라, 악독하 고도 빨랐다. 차-앙! "흐-으!" 금속성이 터지며 끊어지는 듯한 숨결이 일어났다. "인사치고는 거칠군..." 주천운이 담담히 말하는 순간, 두 눈을 부릅뜬 흑의인 둘이 그의 앞에서 짚단처럼 나뒹굴었 다. 그들의 검은 각기 상대의 가슴을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쓰러졌다. 분명히 주천운을 찔렀는데, 그 순간 주천운은 허깨비처럼 사라졌고 그들은 자신들의 가슴을 찌른 상대의 검 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팟! 그들이 쓰러지는 순간에 예리무비한 검세가 일직선으로 주천운의 목을 노리고 정면에서 폭 사되었다. 바깥은 어둠이라도 달빛이 있으나 안은 칠흑과 같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이런 공격에는 당황치 않을 수 없다. 그 어둠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주천운, 그토록 빠른 검도 주천운의 목과 일곱 치를 남겨 놓고 멈추고 말았 다. 그 검날은 주천운의 손가락 사이에 끼여 있었다.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 습격한 자가 신음할 때, 주천운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겨우 이 정도라면 실망했는데?" "삼호 물러나라. 너의 상대가 아니다!" 차가운 음성이 안에서 들려 왔다. 거기에는 은은히 놀람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삼호로 불린 자는 그 말에 따를 수가 없었다. 검을 주천운의 손가락 사이에서 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땅! 그 순간, 맑은 음향과 함께 검의 가운데가 두 동강났다. 죽어라 검을 잡아당기고 있던 흑의 인은 신음을 뱉어 내며 나뒹굴었다. 주천운은 그것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인 듯이 천천히 사방을 쓸어보았다. 토지묘 안은 넓이가 약 삼 장 가량이었다. 정면에는 토지공을 모신 제단이 있는데, 토지공공은 엉망이 된 채 넘어져 있고 그 자리에는 몸집이 우람한 복면인 하나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좌우에는 어둠 속에서도 눈빛이 강한 두 흑의인이 서 있고 제단의 옆에는 흑의인 들이 축 늘어진 노인 하나를 부축하고 있었으며 그 앞을 흑의인들이 다시 막고 선 상태였다. "할아버지!" 방금 나가떨어졌던 흑의인이 비틀거리며 일어날 때 주천운의 등뒤에서 연자경이 외치며 달 려나왔다. "그대로 있으시오!" 주천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녀의 팔이 주천운에게 잡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목 소리 때문에. "황하조수는 여기 있다! 장진도를 내놓아라." 제단 위의 우람한 흑의인이 차갑게 말했다. "황하조수에게 금제를 가하지 않았는지 알아야겠다."흐흐... 건방진...! 서툰 수작은 생각도 마 라! 조금만 함부로 움직이면 황하조수의 목숨은 없다." 우람한 흑의인이 차갑게 내뱉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진도지, 쓸모없는 늙은이가 아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흑의인이 다시 입을 열면서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에게 잡혀 있던 노인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겨... 경아...! 어, 어서 이곳을 떠나라! 이들은 너를 살려 두지 않..." 다급히 입을 열던 노인, 황하조수는 흑의인의 손짓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시 아혈이 봉쇄 된 것이다.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 이제 장진도를 내놓아라." 흑의인이 차갑게 주천운을 쏘아보았다. "장진도는 여기 있다. 하나, 황하조수를 풀어 주기 전에는 넘겨 줄 수 없다." 주천운은 품속에서 유지(油紙)에 싼 물건 하나를 꺼냈다. "우후후... 건방진 놈! 그까짓 몇 수 가지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참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흑의인의 음성과 함께, 사방에는 소름 끼치는 살기가 형성되었다. 황하조수의 목에는 좌우에 서 검날이 세워졌다. "유치하군! 협상이 결렬되면 장진도는 내 차지가 된다. 내가 떠나는 걸 막을 자신이 있느 냐?" 주천운은 그 광경에 코웃음 쳤다. "?" 어이가 없는지 흑의인은 주천운을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다. "크흐흐흐... 교활한 놈이군! 좋다. 네놈을 믿어 보겠다." 흑의인은 마침내 결정을 한 듯했다. "황하조수를 데려가고 장진도는 동시에 넘겨라." 그의 음성에 따라 황하조수가 목에 검이 대인 채 앞으로 끌려 나왔다. "삼호, 장진도를 받아라!" 좀 전에 검을 부러뜨린 흑의인이 손을 내밀었다. 검이 황하조수의 목에서 거두어지고 그들이 물러서는 순간에 장진도는 삼호 흑의인의 손으 로 넘어갔다. "할아버지!"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황하조수를 주천운이 부축함과 동시에 연자경이 애처롭게 부르짖으며 황하조수를 부축했다. 스-윽! 삼호 흑의인의 손에서 장진도가 제단 위 흑의인이 전개한 격공흡물에 빨려 날아올랐다. 그 순간, 아무도 생각지 않았던 대격변(大激變)이 일어났다. 와르르- 토지묘의 지붕이 무너져 버리고 한 인영이 유성과 같이 지붕을 뚫으며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 인영이 나타난 곳은 바로 장진도가 날아가는 곳이었다. 지붕이 무너짐과 동시에 장진도 는 당연히 그 인영의 손에 들어갔다. "웬 놈이냐?" 뜻밖의 사태에 대경실색한 우람한 흑의인이 노호를 토해 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의 행동보다 느렸다. 장진도가 인영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에 그는 허공 을 가르며 인영을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파아! 붉은 기류가 가공할 경력을 일으키며 나타난 인영을 덮쳤다. "오귀적살강(五鬼赤煞 )이로군!" 인영이 그것을 알아보고 놀란 외침을 토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 역시 말보다 빨랐다. 한 손으로는 장진도를 잡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흑의인의 공세를 막아간 것이다. 그의 손 이 칼날[手刀]과 같이 세워져 붉은 경력과 부딪친 순간에 일진 굉음이 터지며 인영은 허공 에서 한 바퀴 재주를 넘으며 내려섰다. 하나 내려설 여가도 제대로 없었다. 우두머리 흑의인의 뒤에 유령처럼 서 있던 흑의복면인들이 바람같이 몸을 날려 그를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기형검(奇形劍)이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차-앗!" 인영의 입에서 맑은 호통이 터졌다. 동시에 그의 몸이 회전하며 양발을 번개같이 뻗어냈다. 그 양발은 믿을 수 없게 덮쳐오는 검날의 등을 차고 있었다. 디-딩! 한소리 울림과 함께 인영은 그 반동으로 몸을 솟구쳐 방금까지 흑의인이 있던 제단에 가 내 려섰다. 펑! 그 바람에 우두머리 흑의인이 벼락같이 쏘아내리며 갈긴 일장은 토지묘에 웅덩이 하나만 판 꼴이 되었다. 글로 설명하기는 길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번개가 치듯 한 순간에 일어나 지붕이 무너진다 싶은 순간에, 인영은 이미 제단 위에 내려서 흑의인들과 자리바꿈을 하고 있었다. 한데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붕이 무너지는 순간에 주천운의 부축을 받고 있던 황하조수가 돌연 주천운의 가슴팍 오 개 대혈을 후려 갈긴 것이다. 파파팍! 느닷없이 나타난 인영을 쳐다보던 주천운은 무방비상태에서 연속 삼 장을 얻어맞고 말았다. 제아무리 주천운이라 할지라도 어찌 이런 상황에서야... "으-윽!" 막대한 충격에 주천운이 비틀하며 물러났다. "할아버지,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연자경이 대경실색해 황하조수를 잡았다. "비켜라!" 황하조수가 양손을 떨치자 연자경은 그대로 밀려나고 말았다. 황하조수는 다시 벼락같이 주천운을 덮쳤다. 그는 무림의 일류고수다. 그 일 장은 바위라도 부숴내는 위력이 있고, 지금의 그는 평소보다 공력이 증가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그토록 빨랐으나 주천운 또한 그대로 있지 않았다. 펑! "으-윽!" 주천운의 일격에 황하조수는 신음하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주천운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의 용화대수미선공은 아직 십성지계(十成之界)에 이르지 않았기에 강기가 항상 완벽히 몸 을 보호하는 경지는 아닌 것이다. "크으흐흐... 네놈을 죽이겠다!" 황하조수는 밀려나자 괴성을 지르며 다시 덮쳐 왔다. 그 공세는 더욱 강렬했다. "물러나시오. 무슨 짓이오?" 주천운이 호통 치며 일 장을 때려 냈다. 불문의 반야장(般若掌)이었다. 펑-! 일진 폭음과 함께 황하조수가 선혈을 왈칵 토해 냈다. 흰 수염에 선연(鮮然)한 핏자국이 어 둠 속에서 섬뜩했다. 주천운의 안색은 더 창백했다. "크으... 그냥 두지 않겠다!" 비틀거리던 황하조수가 주천운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황하조수의 눈에는 살기가 들끓었 다. 눈에는 핏발이 곤두서 있고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정상이 아니다!' 주천운은 황하조수의 기세가 점점 강해지고 난폭해짐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할아버지, 이분은 할아버지를..." 연자경이 황하조수의 앞을 막아 서며 외쳤다. "네년이 사내와 배가 맞다니, 죽여버리겠다!" 황하조수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백발이 절로 펄럭였다. 욕 한번 들어 보지 않고 귀여움만 받으며 자란 연자경이 아닌가? 그녀는 할아버지의 돌변한 모습과 욕설에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크으-황하범천수(黃河汎天手)로 모조리 쓸어 버리겠다." 황하조수의 양손이 엄청난 기세로 쏟아졌다. 그것은 그의 전공력이 다 집중된 것으로 평소의 두 배나 되는 위력이 있었다. "위험하오!" 주천운은 연자경을 밀어 내며 벼락같이 일권을 쓸어 냈다. 아미파 진산(鎭山)의 복호금강권(伏虎金剛拳)이었다. 강맹무비한 권세가 황하조수 필생의 절기인 황하범천수와 부딪쳤다. 꽈-앙! "으악!" 경력이 소용돌이치며 황하조수의 입에서 선혈이 튀어나왔다. 낙옆처럼 뒹구는 그는 다시 덮 쳐 온 주천운에게 제압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할아버지!" 연자경이 달려왔다. "영조부는 지금 정상이 아니오." 주천운은 황하조수의 대혈 몇 군데를 점해 연자경에게 넘겨 주며 사방을 살폈다. 폐허. 가뜩이나 무너져가던 토지묘는 이미 절반은 무너져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그 인영이 태산같이 버티고 서 있는데, 주천운은 그를 본 순간 부지중에 나직 이 중얼거렸다. "황하신룡..." 나타난 인영은 뜻밖에도 황하신룡이었다. 황하신룡은 주천운의 말을 들은 듯 주천운을 슬쩍 바라보더니 낭랑히 웃었다. "하하하... 상관공자, 태산도 본맹의 관할 구역인데 본맹주가 버린 물건을 줍는 것에 대해 어 찌 생각하시오?" "그것은 이미 내 손을 떠난 물건이오." 주천운은 서슴없이 대답하더니 연자경을 이끌고 슬쩍 물러났다. "당신이 황하맹의 황하신룡인가?" 우두머리 흑의인이 침중하게 외쳤다. "나요!" 황하신룡은 완전 포위된 상황에서도 태연했다. "음... 황하맹주의 체면을 봐서 물건만 돌려주면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 흑의인은 음산히 황하신룡을 쏘아보았다. "당신이라면 돌려주겠소?" 황하신룡의 모습은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했다. "으흐흐... 그까짓 알량한 재간으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흑의인의 온몸에서 붉은 기류가 스며나왔다. "오귀적살강을 그 정도까지 연마한 사람은 백년 이래 적발신마(赤髮神魔)뿐이었지!" 태연히 중얼거리는 황하신룡의 눈에는 긴장이 돌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적발신마(赤髮神魔)는 백년 전부터 흉맹(兇名)을 떨치는 노마두이다. 그를 비롯한 중원사마 (中原四魔)는 삼십 년 전에 홀연히 사라졌었다. 그 나이의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었다고 믿었던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관을 보여 주겠다." 흑의인 적발신마가 차갑게 외치며 덮쳐 갔다. 꽈르릉! 제단이 박살나는 가운데 황하신룡의 몸이 날아올랐다. "수라!" "참-혼!" 악독무비한 검광이 좌우에서 황하신룡을 덮쳐 왔다. 적발신마 곁에 있었던 두 복면흑의인이었다. 그 위세는 적발신마에 못지않았다. "이제 보니 잔혼쌍검(殘魂雙劍)이었었군!" 검광 속에서 황하신룡이 놀란 외침을 토했다. 잔혼쌍검(殘魂雙劍) 풍가형제(馮家兄弟). 그들의 합격(合擊)은 악마지검(惡魔之劍)이라 불리도록 무섭다. 정사 중간의 인물이었지만 일단 손을 쓰면 상대를 살려 두지 않는다. 역시 삼십 년 전에 사라졌었다. 쨍! 째-앵!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황하신룡이 팽이처럼 맴돌며 잔혼쌍검의 검세에서 벗어났다. 그의 손에는 백옥선(白玉扇)이 들려 있었다. "명불허전이군! 황하신룡을 토룡(土龍:지렁이)으로 만들어 주마!" 적발신마가 벼락같이 덮쳐 들었다. 황하신룡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칠대마공의 하나인 적살강이 얼마나 대단한가 보겠다!" 백옥선의 선영이 구름이 흩어지듯 폭사되었다. 꽝! "으!" 그와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오며 두 사람이 물러났다. 황하신룡은 꿈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버티고 섰지만 적발신마는 어깨를 흔들다 결국은 한걸 음을 물러났다. 그 결과는 황하신룡의 반 수 우세였다. 정면대결에서는 초식의 변화와는 달리 요행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두 갑자 내력의 나보다 내력이 강하다니?' 적발신마가 경악할 때였다. "두 호랑이가 싸우는 데 한 호랑이가 결과를 기다리니 재미있지 않은가?" 황하신룡이 껄껄 웃었다. 흠칫 주천운을 쳐다본 적발신마는 차갑게 웃었다. "차례로 잡으면 되겠지!" "으하하... 당신은 본맹주가 혼자 왔으리라 생각한단 말이오?" 황하신룡이 잔혼쌍검의 검세하에서 선영으로 몸을 보호하며 대소했다. 그와 동시에 이십여 명의 인영이 토지묘로 날아들었다. 단숨에 대역전극이 벌어진 것이다. '황하십이룡과 구대고수가 모두 다 동원된 모양이다.' 주천운은 연자경의 손에서 황하조수를 받아 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젠 그가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관공자, 전송치 못하겠소." 황하신룡이 통쾌히 웃었다. 문득 주천운이 황하신룡을 보며 빙긋 웃었다. "나라면 물건부터 확인하고 싸우겠소." "?" 황하신룡이 어리둥절하는 순간, 일진 광풍이 일어나며 주천운과 연자경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황하신룡이 다급히 품속에서 장진도를 꺼내 펼쳤다. 대저 장진도라는 것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지도를 의미한다. 보물이 파묻힌 곳을 그 려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진도는 매우 특별해서 한 줄의 글자밖에 없었다. <장진도는 오늘 공령천수에게 빼앗겼으니 알아서 하시오.> "이... 이런!" 황하신룡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 귀중한 장진도는 고개를 빼밀고 있는 적발신마에게 간단히 넘어갔다. "가... 감히 본좌를 속이다니!" 적발신마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황하조수에게 수작을 부려 주천운과 연자경까지 살려두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설 마 남이 자신을 속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제 16 장 무영개신(無影 神) 태산 계곡, 산세가 우거진 곳에 동굴 하나가 절반쯤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주천운은 그 동굴 안에서 황하조수의 상태를 막 살펴본 참이었다. 동굴은 깊지 않았지만 일 단 몸을 숨길 만은 했다. 거기서 살던 늑대 두 마리가 집을 뺏기고 쫓겨나긴 했지만. "어... 어떠세요?" 연자경이 초조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기독(奇毒)에 의해 대뇌경락에 이상이 생긴데다 섭심공(攝心功) 따위에 당해서 본 정신을 상실하고 명령만 듣게 되었소." "그럼, 영영 제정신을...?" 연자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 걱정하지마시오. 어제 제압된 것이니 어렵지 않게 풀 수가 있을 것이오." 주천운은 가볍게 미소 지어 보였다. "몸은 좀 어떠세요?" 연자경이 걱정스러운 듯 주천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진정이 가득 차 있었다. "기혈이 약간 엉켰으나 노인께 맞은 것이니 대단치는 않소." 주천운은 담담히 말하며 황하조수에게 천년설연실 하나를 먹여 주었다. 그 다음에 품속에서 보광이 감도는 용안만한 구슬 하나를 꺼내 황하조수의 입 속에다 물려 주었다. "그건 뭐지요?" "피독주(避毒珠)라 불리는 것인데 대뇌에 스며든 기독을 흡수할 것이오." '말로만 듣던 전설상의 기보(奇寶)!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연자경은 다시금 주천운을 바라보았다. "손상된 원기는 설연실이 보충해 줄 것이고 기독은 피독주가 해결할 것이니, 섭심공은 이제 부터 내가 깨뜨리겠소." 용화대수미선공은 천하 사마(邪魔)의 극성인 것이다. 주천운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서 장엄한 서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연자경은 자신의 심신까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저 신공(神功)은 그 엄청난 추혼신화통의 화염까지도 접근치 못했었지...' 주천운은 눈을 뜨더니 양손을 황하조수의 가슴에 댔다. 서기가 그의 몸에서 퍼져 나가 황하 조수의 몸까지 감쌌다. 그의 머리 뒤에 둥근 후광이 은은히 드러났다. '세상에! 부처님 같아...' 연자경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그때였다. "우으으..." 괴로운 신음과 함께 황하조수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거기에는 흉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너... 를 죽일 테... 다..." 그의 은빛 수염이 떨리며 입술이 일그러졌다. '일반 섭심공이 아니다. 사심귀진(邪心鬼眞)에서 말한 절전된 제령강마대법(制靈降魔大法)이 다! 적발신마에게 이와 같은 능력이 있을 리 없다...!' 뜻밖에 황하조수의 상태는 대단했다. "내 눈을 보시오..." 주천운이 조용히 말했다. 그 음성은 한없이 부드럽고 은은했다. "으-으! 비... 켜라!" 주천운의 눈을 본 황하조수는 이를 갈며 몸을 돌리려 했으나 눈조차 감을 수가 없었다. 시 간이 지남에 따라 떨리던 그의 몸이 조용해지고 사납던 눈빛이 부드러워져 갔다. "할(喝)!" 그 순간 주천운이 나직이 부르짖었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황하조수가 울컥 한 모금을 토해 내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 나지막한 외침에는 복마신후(伏魔神吼)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천운이 그의 수혈을 눌러 주며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황하조수는 잠에 빠져들었다. "되었어요?" 초조하게 자신을 뚫어져라고 쳐다보는 연자경을 보고 주천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에 무서운 사공(邪功)에 당하셨소. 하지만 푹 자고 나면 다시 예전의 자상한 할아버지 가 될 것이오." "고, 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해야...!" 연자경이 기쁨을 금치 못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동굴 안은 좁다. 황하조수가 쭉 뻗고 누워 있으니 두 사람은 다리를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그녀가 주천운의 손을 잡자 두 사람의 거리는 지척지간이었다. 서로의 숨결마저 느껴지는 판이다. 연자경은 주천운의 이마에 솟은 땀방울을 발견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옥수를 내밀어 땀을 닦아 주었다. 주천운은 그녀의 대담한 행동에 흠칫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주천운의 이마에 있던 그녀의 손이 어디로 갈 줄 몰라 당황해 허둥거렸다. "죄, 죄송해... 요. 힘드시는 것 같고... 미안하고... 그냥..." 그녀는 크게 당황해 더듬거렸다. "고맙소. 낭자의 손은 매우 포근했소." 주천운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분이 아니면 나는 살아 갈 가치가 없다!' 연자경은 문득 그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를 한없이 대담하게 만들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 가 없음을 잘 알기에. 그녀가 갑자기 주천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천한 계집애라고 욕하지는 말아 주세요. 소녀는... 소녀는..." 연자경은 주천운의 품에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 서러운가... 눈물이 쏟아졌다. 주천운은 자신의 가슴이 축축이 젖어 옴을 느꼈다. 그의 손이 연자경의 얼굴을 쓰다듬어 내 려가 턱을 받쳐 올렸다. 얼굴. 아름다운 얼굴. 유난히 긴 속눈썹에 맺힌 수정의 빛남과, 타는 듯 붉은 단순(丹脣) 사이로 드러난 호치(晧齒).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사향과 같은 숨결은 천하의 그 어떤 미혼향보다 유혹적이었다. 지척에서 주천운을 보게 되자, 감히 마주볼 수 없음을 느끼고 연자경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운 숨결과 함께 자신의 입술 위에 내려앉는 또 다른 입술을 느꼈다. 용광로. 남자의 입술이 이처럼 세찬 불길과 같은 것임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주천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세차게 타버리는 것을 느끼고 연자경은 몸을 떨었다. 뛴다. 가슴이 터질 듯 뛴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 그녀의 팔이 주천운의 목을 친친 휘감았다. 그녀의 몸은 주천운의 몸에 파묻혀 갔다. 전율이 그녀의 몸을 엄습했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아 온 듯, 갑자기 타오른 정염(情炎)에 그들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혼수상태에 있는 황하조수조차 생각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데, 탄력의 결정체인 듯한 연자경의 가슴을 쓸어 내리며 밑으로 내려가던 주천운의 손 길이 문득 멈추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결코 떨어지지 않을 듯하던 주천운의 입술이 연자경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연자경은 주천운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감을 느꼈다. 미지의 것에 대한 기대와 묘한 공포로 상처 입은 비둘기와 같이 주천운의 품에서 할딱이고 있던 연자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묻고 있었다. "왜?" 주천운은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누가 오고 있소. 고수요. 하나가 아니고... 매우 급하오." "으흐흐흐..." 그의 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음산한 웃음이 들려 왔다. 연자경으로 보자면 겁나기는커녕, 갈아 마시고 싶은 저주스러운 웃음소리였다. * * * 가벼운 미풍이 스치며 한 인영이 번개같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그 속도는 섬전과 같았다. "윽...!" 땅에 내려선 인영은 나직이 신음을 흘려내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인영의 옷은 쓰다 버린 걸레보다 더했다. 얼굴에는 땟국물이 흘러 나이를 분간할 수 없었으나, 허옇게 센 수염과 얽히고설킨 주름살 은 그의 나이가 이미 칠순은 쉽게 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흐르고 있는 선혈과 전신의 걸레 같은 옷을 비집고 흐르는 선혈은 한눈에도 엄 중했다. 그런 상세를 입고도 방금과 같은 경공을 전개할 수 있음은 그의 공력이 대단한 것 임을 말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으..." 노화자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희미해진 눈을 부릅뜨며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그가 막 다시 몸을 날리는 순간에 음산한 음성이 들려 왔다. "흐흐흐... 이곳은 사로(死路)다!" 노화자(老化子)는 막강한 잠력이 자신을 덮침을 깨달았다. "으-야합!" 노화자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전신의 모든 공력을 쏟아 잠력에 맞서갔다. 펑! "으윽!" 폭음과 함께 비틀하는 노화자의 입에서 다시금 선혈이 뭉클 솟아올랐다. 그러나, 비틀하던 그의 신형은 놀랍게도 그 반동을 이용하여 다음 순간에는 십 장을 날아가 고 있었다. "킬킬킬... 과연 무영개신(無影 神)답게 질기군! 하지만 여기도 죽음의 길이다!" 날아가는 노화자 앞에서 사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노화자의 안색이 대변했다. 펑! "으-악!" 그는 미처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돌연 앞에서 날아온 기습에 격중되고 말았다. 그는 가 슴이 으스러지는 통증에 피분수를 뿜어 내며 그대로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끄으..." 노화자는 땅바닥에서 꿈틀거렸으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것만 해도 장한 일이었다. '이...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데... 이것을 알려야... 그러나 틀렸다... 심맥이... 끊어지고 오 장육부가...' 울컥! 노화자의 입에서 부스러진 내장토막과 함께 핏덩이가 올라왔다. 스스스... 노화자의 좌우에 두 명의 인영이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눈만을 내놓은 복면인, 그들의 전신에는 음악(陰惡)한 살기(殺氣)가 어려 있었다. "지독한데? 아직도 숨을 쉬다니..." 왼쪽 복면인이 뜻밖이라는 듯이 음산히 웃었다. "무영개신(無影 神)이란 이름이 허명은 아니니까! 흐흐... 그러나 이젠 유영귀신(有影鬼神)이 지!" 오른쪽 복면인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노화자의 머리를 눌러왔다. 무영개신이라면 이름이 방계명(方啓明)으로서 개방의 제일장로이다. 공령천수와 만리추종, 운해비영(雲海飛影)과 더불어 당금 강호의 가장 빠른 발을 가졌다. 그들을 일러 중원사신(中原四神)이라 한다. 무영개신은 비록 거지이되, 불의를 보면 목숨을 거는 일대의 기인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자신의 머리를 눌러 오는 죽음의 손을 보고도 피할 수 없었다. '개죽음이라니!' 무영개신은 손이 채 이르기도 전에 한 가닥 잠경이 자신의 머리를 누름을 느꼈다. 그는 저 손이 얼마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상상치 않은 외침은 그 순간에 터져 나왔다. "잔인한! 손을 거둬라!" 낭랑한, 그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세가 어린 음성이 분노를 담고 터져나왔다. 가공할 위 세가 무영개신을 노리는 오른쪽 복면인을 휘감아왔다. '무영개신을 죽이면 나도 성할 수 없다! 무영개신은 어차피 버려 두어도 살 수 없다!' 오른쪽 복면인은 미련없이 손을 거두어 그 공세를 막아 갔다. 팡! "윽!" 복면인은 막강한 충격에 비틀거리며 잇달아 물러났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무영개신의 앞에 나타났다. "웬 놈이냐?" 왼쪽 복면인이 괴이한 경력의 일 장을 쪼개 내어 덮쳐 갔다. "음풍투골장(陰風透骨掌)이로군!" 우직! "으-끄-악-!" 냉담한 음성이 흑영에게서 흘러나오자 소름 끼치는 으스러지는 음향과 함께, 왼쪽 복면인이 참담무비한 비명을 지르며 훌쩍 물러났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박살이 나 있었다. "으으... 이럴 수가? 육장(肉掌)이 이토록 무섭다니..." 복면인이 고통에 치를 떨며 앞을 노려보았다. 관옥 같은 고귀한 기도가 풍기는 흑의유생이 무영개신의 앞에 천신과 같이 나타나 있었다. 주천운이었다. 주천운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번개같이 무영개신의 삼십육 개 대혈을 단숨에 점해 내었 다. "노인이 무영개신이 틀림없습니까?" 주천운은 그의 출혈이 멈춰짐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 그렇... 피... 피하시...!" 무영개신이 희미한 눈을 부릅떴다. 주천운의 등을 노리고 오른쪽 복면인이 소리도 없이 덮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장세는 기막히고 빨라 무영개신이 경고하기도 전에 주천운의 등을 격타하고 있었다. 펑-! 주천운의 몸이 흔들렸다. "으웩!" 동시에 복면인이 손목을 움켜잡으며 나뒹굴었다. 오 장 밖에서 일어서는 그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드러나고 앞섶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 "크으-이... 이런 반탄지기가... 있다니..." 복면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생각보다 대단한 공력을 가지고 있군." 주천운이 천천히 말하며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피곤한 상태의 그는 기혈이 흔들림을 느꼈던 것이다. "너... 너는 누구냐?" 손목이 박살난 왼쪽 복면인이 외쳤다. "너희들은 누구냐?" 주천운이 오히려 되물었다. "그... 그들은... 신비세력의... 추살자(追殺者)들... 이오... 그 세력은 무림..." "닥쳐라!" 무영개신이 쥐어짜듯 입을 열자 왼쪽 복면인이 다급히 외쳤다. 쏴아! 동시에 무영개신을 향해 무수한 독침이 쏟아졌다. "흥!" 주천운이 코웃음 치자 경기가 소용돌이치면서 그 독침은 모조리 그의 소매 속으로 빨려 들 어갔다. "만... 만류귀원신공(萬流歸元神功)?" 복면인들의 눈이 마주쳤다. 피융! 신호탄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순간에 그들은 주천운과 무영개신에게 덮쳐 들 었다. 목숨을 돌보지 않는 동귀어진의 타법이었다. "마... 막으시오. 저 신호탄..." 무영개신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짐과 함께 핏물이 다시 올라왔다. 그의 안색은 타는 듯 다급했다. '중대한 무엇이 있다!' 주천운은 번개같이 생각을 스쳐 보내곤 생각을 바꾸어, 소매를 휘둘러 이미 빨아들였던 독 침을 무영개신을 덮치는 자에게 쏘아 보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한 가닥 검광이 번갯불같이 폭사되어 오른쪽의 복면인을 휘감았다. 비명이 고막을 찌를 듯이 일어났다. 여의섬의 일격을 그들이 피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주천운은 그들의 피해를 살피지 않았다. 덮쳐 오는 두 사람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 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은 풍뢰 소리를 동반한 채 일직선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오르고 있 었다. 그 속도는 믿을 수 없게도 먼저 쏘아진 신호탄보다 빠른 것 같았다. 뇌정군림신법 중의 뇌정충소(雷霆沖)가 발휘된 것이다. 그리고 신호탄이 가루가 되어 분쇄되는 순간, 주천운의 신형은 낙엽같이 무영개신의 앞에 내려서고 있었다. "어... 엄청... 나... 군...!" 무영개신은 너무 놀라 눈동자에 오히려 생기가 돌아왔다. 복면인 한 명이 독침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 넘어지고,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사이 에 나머지 복면인의 가슴이 갈라졌다. 게다가 이미 십 장을 치솟은 신호탄이 분쇄(粉碎)되는 가 싶은 순간에 사람은 이미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누... 누구... 시... 오...?" 무영개신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상관천이라 합니다. 그대로 계십시오." 주천운이 얼른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상관... 천? 공... 자에... 게 부탁이... 있소..." 미간을 슬쩍 찡그렸던 무영개신이 안간힘을 다해 말을 계속했다. "무슨 부탁인지는 모르나 상처를 돌본 후에 하십시오." 무영개신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미 틀... 렸소! 심맥이... 끊어지고... 으으으... 노. 화자가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죽기를 바랍니까?" 느닷없는 주천운의 말에 무영개신의 감기는 눈에 의혹이 드러났다. "?" 대저 심맥(心脈)이라 함은 인간의 생명이나 같은 것으로 그것이 끊어지면 인간의 생명도 끝 이다. 그러나, 여기 붉은빛이 번뜩이는 침(針) 열두 개는 그 끊어진 심맥을 이어 놓고 있었 다. 뚝! 마지막 침을 중극(中極)에 놓은 주천운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져내렸다. "화령신침의 신효(神效)로 보아 내일이면 심맥이 완전히 이어지고 열흘이면 전과 같이 될 것입니다." 주천운은 피곤한 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장보고 안에서 잠자던 전설로 전하는 기사회생의 의보(醫寶)가 십이화령신침(十二火靈神針) 이었다. "으으... 고... 공자..."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무영개신이 안간힘을 썼다.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주천운이 고개를 저으며 무영개신의 수혈을 점해 갔다. "내 생명보다 중한 일이오!" 무영개신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 바람에 그의 몸의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솟았다. 그의 눈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생명보다 중하다?" 주천운의 말에 무영개신이 다급히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습니다. 반 각 정도만 시간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주천운은 용화대수미선공을 다시 일으켜 무영개신의 몇 군데 요혈을 찍고 심맥을 보호했다. 주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영개신은 다시 입을 열었다. "시... 시간이 없소... 들어... 주시오... 부디... 부탁... 공... 능력이면..." "무슨 말씀입니까?" 무영개신은 자신의 옷을 더듬었다. "여기 병이... 하... 나 있소..." 주천운이 그의 손짓에 따라 찾아 낸 것은 기이한 형태의 옥병이었다. "만리신향(萬里神香)?" 주천운의 중얼거림에 무영개신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불과 이십의 나이에 모르는 게 없다니?'"그... 그렇소. 그 향을 따라가... 면 모종의... 장소가 나타날 것... 이오. 그곳을... 본방의 방주에게 알려주시오." "장소?" 무영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 리 범위... 를 벗어나면... 향을 따라... 갈 수가... 없소. ... 쩌면 이미 백... 리를 벗어났는 지... 시... 간이 없소." "이 문제 때문에 이렇게 되신 겁니까?""그... 렇소. 그들을 미... 행하다가... 사흘째... 되... 는 날, 발각되어 무서... 운 추격을 받았... 소..." "그들이 누굽니까?" 말하는 주천운의 이마에 진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노화... 자도 모... 르오. 다만 무서운 암중세력... 근래에... 들어서는 무림고수의 은거와 실종 이... 그들의 소... 행인 것... 만은..." "실종?" 주천운의 뇌리에 천하기밀부에서 본 내용이 떠올랐다. -삼십 년 전부터 무림고수들이 하나둘 없어지고 있다. 그것이 은거인지 실종인지 불분명(不分明)하다. "노화자는... 이십... 년의 추... 적 끝에 단... 서를 잡았소... 그들의 세력은 생각... 보다 엄청나 고... 실종된 고수들은 그... 들에 이... 용..." "천제문이란 말인가?" 주천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천... 제문이 무... 엇...이오?" 무영개신의 눈에 의문이 드러났다. "무림을 뒤엎고 천하를 삼키려는 자들입니다." 주천운의 대답에 무영개신은 주천운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공... 자는 추측... 할 수 없는 기인이오... 뉘시오?" 추천운은 담담히 웃었다. "상관천이라면 아시겠습니까?" "상관... 천?" "깊이 생각지마십시오. 제가 나타난 것이 무림에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이제 쉬십 시오." "자... 잠깐." 주천운이 그를 잠재우려는 순간에 무영개신이 그를 저지했다. "이것이 혹... 쓰일 때가... 있을 것이오. 받아... 주... 시오." 그의 손이 허리춤에서 움직였다. 주천운이 받아든 것은 까맣게 반들거리는 죽패(竹牌)였다. 정면에는 정교한 솜씨로 호랑이가 그려져 있고, 후면에는 조사감법 견패여주(祖師監法見牌 如主)의 여덟 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이것은 개방의 감법장령(監法掌令)인 것 같은데?" 주천운의 말에 무영개신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주천운을 주시했다. "모르... 는 게 없구려..." "아는 것보단 적습니다. 내가 알기로 이 감법장령은 개방의 전제자를 감독할 수 있다는데 생면부지인 저에게 맡기셔도 괜찮겠습니까?" 무영개신은 신음했다. '보지는 못했어도 무림제갈(武林諸葛)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노화자...는 공자가...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감법장령이 없어도 천하를 뒤집을... 인물임을 믿소!" 주천운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뒤집히는 무림을 바로잡으려 나왔지, 뒤집으러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함께 무영개신은 눈을 감고 잠에 빠져 들었다. 웃음,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웃음을 보았기에 마음놓고 잠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다. 손을 거둔 주천운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이마의 땀을 닦아 주었다. 주천운은 가볍게 그 손을 잡았다. 그의 옆에서 연자경이 그윽히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나는 가야겠소. 이분들을 잘 보살펴 주시오." "너무 피곤해 보이세요." "괜찮소. 내 여기 몇 가지 안배를 해둘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는 동굴에서 나오지 않도록 하시오." 그녀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려 준 주천운은 천천히 일어났다. 연자경의 눈에 그의 너른 등은 대평원과 같이 거대해 보였다. 제 17 장 무림제갈의 출현(出現) 가장 유명한 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거의 틀림없이 튀어나오는 산이 산동성(山東省)에 위치한 태산(泰山)이다. 태(泰)라고 하는 글자는 크고 넉넉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태산이 그 처럼 거대하다는 뜻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태산의 웅위(雄偉)함을 찬양했다. 공자가 태산에 올라가보니, 천하가 손바닥만해 보였다[孔子登泰山而小天下] 하는 것은 수백 리에 걸쳐 뻗어 있는 태산이 그처럼 거대함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태산은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다. 드넓은 평야에 불쑥 솟아 있기 때문에 다른 산에 비해 그처럼 높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산을 어찌 높이로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창송취백(蒼松翠栢)이 어우러진 웅위(雄偉) 발준(拔峻)한 산세에 휘늘어선 칠십이 봉우리는 천하명산(天下名山)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에 중원오악(中原五嶽)의 하나인 동악(東 嶽)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태산 기슭에 은일장(隱逸莊)이라는 장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 깊은 곳은 아니나 아주 훌륭한 지세를 등지고 있었으며 그 규모도 웅장했다. 주민들은 그 장원의 주인을 왕대인이라 불렀으나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주민들과 접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조정고관의 별장이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은일장의 대문이 열리는 것을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따금 깊은 밤에만 그 장원의 후문이 열리는 것을 본 사람은 더욱 없었다. 사경 말(四更末:새벽 세시경). 맑은 눈 한 쌍이 은일장의 후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리신향의 유향(遺香)은 저곳으로 사라졌다. 여기에 저런 장원이 있을 줄이야!' 흑의를 입고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천운이었다. 그는 만리신향의 향기를 쫓아 여기에 도달한 것이다. 연자경 등이 있는 동굴은 외진데다가 그가 기문진(奇門陣)을 설치하여 감추어놓았고, 연자경 에게는 삼초절기를 전수했으니 고수를 만나지 않는 한, 그녀의 자질로 보아 별다른 변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장원은 매우 조용했다. 모두 잠든 듯이...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일 것이다. '뇌정군림신법은 천하제일이나 잠입하는 데는 적당치 않다!' 스-윽! 주천운의 신형이 은폐물을 이용하여 어둠을 가르기 시작했다. 천하기밀부에서 본 마도(魔道)의 은신과행술(隱身過行術)이었다. 빠르기로는 천하무쌍이랄 수 없어도 흔적을 나타내지 않는데는 독보적인 것이 은신과행술이다. 주천운의 몸은 미끄러지듯 담장을 넘어갔다. 지금 그의 공력은 만패검성이 그의 몸에 전해 준 백년 내력을 거의 본신의 것으로 한 상태 라 하루가 다르게 무공이 높아 가고 있었다. '만리신향의 향기는 왼쪽... 저쪽으로 쭉 뻗어 있다. 그러나 그 좌우에는 매복이 있다!' 숨을 죽인 주천운은 공력을 모아 천이통(天耳通)을 시전했다. '십 장 밖에 둘, 좌우에 셋, 그리고 나무 위에 지붕 위에...' 약 삼사십 장 거리 내에 있는 매복은 모두 이십 명이 넘었다. '일류급이기는 하지만 내 종적을 발견할 정도는 아니다!' 주천운은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우회하며 그곳을 통과했다. 눈앞에 또 높다란 담장이 나타났다. 그 높이는 무려 삼 장. '만리신향이 사라진 곳은 이 안이다!' 주천운은 소리도 없이 담벽에 달라붙었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뜻밖에 감시자 는 없는 듯했다. '역시 안에 있군! 그대로 담벽을 넘었다간 들키기 쉬울 것이다.' 담장 안에 매복이 있음을 알아 낸 주천운은 소리없이 담벽에 붙은 채 이동했다. '담벽의 두께는 두 자!'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담벽을 마치 두부 속을 뚫고 들어가는 듯 서서히 들어갔다. 현천백옥 수를 연성한 그의 손은 신병(神兵)에 못지않은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담벽 밑에는 순식간에 한 자 가량의 구멍이 생겨났다. 돌로 만든 것도 아니고 흙담벽인지라 현재의 주천운으로서는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주천운의 신형은 소리도 없이 담벽 안으로 스며들었다. 눈앞에 바위 하나가 보였다. 한데, 주천운이 그 바위를 발견한 순간에 공교롭게도 그 바위에 숨어 사방을 감시하고 있던 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자의 눈이 커지며 입이 벌어지는 순간에 한 가닥 섬광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부릅뜬 눈 에서는 경악과 고통이 천천히 꺼져 가고 있었다. 그의 목에 박혀 있는 것은 금광이 사라진 호국지존병이었다. 어떠한 자세에서도 가장 빠르게 발검할 수 있는 여의섬의 놀라운 쾌검이 아니었다면 그처 럼 창졸간에 벌어진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큰일날 뻔했군...' 주천운은 감시자가 숨었던 바위에 기대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거대한 삼층 누각이 중앙에 솟아 있고 가산과 연못 등이 삼층 누각을 중심으로 조경되어 있 는데, 누각의 앞에는 네 대의 사두마차(四頭馬車)가 늘어서 있었다. '한 대가 아니었군!' 주천운은 내심 놀라 중얼거렸다. 원래 그가 따라온 것은 마차였던 것이다. 그때, 차가운 음성이 어디선가 음산하게 고요를 깨뜨리면서 들려 왔다. "왕주(王主)께서 납십니다..." 누각 주위가 환히 밝아졌다. 어느새 네 대의 마차 좌우에는 청의무사가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누각 안에 서도 사오 명의 인영이 나타나 그 앞에 섰다. 소리도 없이 사인교(四人轎) 하나가 장내에 나타났다. "연혼전주(煉魂殿主)가 왕주(王主)의 행차를 마중합니다!" 누각에서 나온 자 중 앞선 홍포노인이 사인교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다 도착했는가?" 사인교 안에서 냉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늘 도착한 인원으로 부족한 수는 모두 채워졌습니다." 연혼전주라는 홍포노인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언제 끝날 수 있는가?" "한 달 정도면..." "늦다! 늦어도 보름을 넘겨서는 안 된다!" 사인교 안에서 날카로운 질타가 터져 나왔다. 연혼전주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왕주각하,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성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고막을 찌르는 듯이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사인교 안에서 흘러나왔다. "대법을 정상으로 시행하려면 그럴지 모르겠지만 역행하면 가능할 텐데?" 연혼전주의 안색이 백납같이 변했다. "그, 그렇게 되면 시술자들은..." "흥! 본문이 필요한 것은 실혼마인(失魂魔人)이지! 그들이 아니다!" 차갑게 말을 자른 사인교 안의 목소리. "..." 갑자기 그 뒤부터 말소리가 끊기며 주천운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방금 그들이 말한 실혼마인이란 이름만으로도 주천운을 경악케 하기에 족했다. 실혼마인(失魂魔人)이라는 것은 전설상의 마교에서 연유되었다는 공포의 연혼대법(煉魂大 法)이다. 일단 연혼대법에 단련되고 나면 그 사람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백치가 된다. 하 지만 그 대신에 체내의 모든 잠력이 일어나 범인(凡人)이라도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무림고수를 납치해서 실혼마인으로... 무서운 일이다! 그들의 능력이 최소한 십 배는 강해질 텐데...' 주천운은 내심 한기가 듦을 의식해야 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평범한 무예인이라 할지라도 일순간에 절정고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 다. 주천운이 내심 신음할 때 연혼전주의 음성이 들려 왔다. "명심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김이 없어야 한다. 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대업을 끝낸다면 전주의 공은 일등이 되어 상 (相)의 반열(班列)에 오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인교 안에서 냉담한 음성이 대꾸했다. "왕주의 보살핌만 바랍니다." 연혼전주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 네 대의 마차가 오늘 도착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다 옮겼는가?" "예, 빈 마차입니다. 곧 치우도록 하려는 참입니다." 연혼전주가 손짓을 했다. 마차가 움직이려는 순간 싸늘한 음성이 다시 사인교 안에서 흘러나왔다. "근래에 이곳의 경비는 어떤가?" "천라지망을 펴, 나는 새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연혼전주라는 노인은 단언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인교 안에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예?" 연혼전주의 안색이 달라졌다. "아직도 본주(本主)가 더 말하기를 기다린다면 실망인데, 본주가 모셔야만 하겠는가?" 사인교 안에서 냉랭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서야 무슨 뜻인지를 안 연혼전주와 청의무사 등의 안색이 돌변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내 종적을 눈치챘단 말인가? 대단하군... 어쩌면 만리신향이 들통난 것인지도 모르지!' 주천운이 사인교 안의 왕주라는 자에게 경각심을 굳히고 막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와하하핫하...!" 낭랑한 웃음소리가 가산쪽에서 터져 나왔다. "외인이 침입하다니!" 연혼전주의 안색이 흙빛이 될 때, 눈같이 흰 백삼(白衫)을 입은 중년인 한 사람이 가산 뒤에 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의 나이는 삼십 남짓 보였는데, 눈은 깊어 심기를 말해주는 듯하고 각진 단아한 용모에 검은 수염은 한층 품위가 있어 보였다. 그의 좌우에는 회의를 걸친 노인 두 사람이 냉랭한 표정으로 따르고 있었다. "왕주의 이목은 개보다 더한 것 같군, 감탄했소." 백삼중년인은 낭랑히 웃으며 말했다. "...!" 입을 열자마자 개 운운하자 사인교 안에서는 기가 막힌 듯 일시지간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 지 않았다. 백삼중년인과 두 노인은 천천히 걸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청의무 사들에 의해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삼엄한 검광이 금세라도 그들을 난도질할 듯했으나 백삼중년인의 표정은 미동도 보이지 않 았다.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네놈이 누구기에 감히 본장에 침입해왔다는 말이냐?" 연혼전주가 음산히 외쳤다. "나는 원래 귀신 나부랭이와는 말을 섞는 걸 싫어하지. 미안하오." 백삼중년인은 그를 슬쩍 쳐다보더니 간단히 대꾸했다. "이이..." 연혼전주의 눈에서 흉광이 일어났다. 백삼중년인은 연혼이란 말을 트집잡아 그를 형편없이 취급해 버린 것이다. 그의 말솜씨는 매우 날카로워 입을 열자마자 장중의 중요인물 둘을 한꺼번에 깔아뭉개고 만 셈이었다. 주천운은 백삼중년인의 태도에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근래에 남궁가에 아가리가 개차반 같은 젊은 가주(家主)가 나타났다던데 귀하와 좀 닮은 것 같군..." 사인교 안에서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백삼중년인은 흠칫하더니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옳소, 옳아! 그 개차반이 바로 남궁모(南宮某)요... 귀하는 과연 개같이 귀가 밝소." "..." 사인교 안에서는 또다시 말이 끊겼다. 하지만 그 사인교 전체는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백삼중년인이 난데없이 나타나자마자 그를 잇달아 개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아마도 심중의 노화(怒火)를 참는 것이리라. '저 사람이 남궁가주인 무림제갈이란 말인가?' 주천운은 그들의 말에 내심 놀라 백삼중년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무림제갈(武林諸葛) 남궁천(南宮天)은 일회이맹삼가사곡 중 삼가의 하나인 남궁가(南宮家)의 가주이며 그의 나이는 금년에 서른셋이다. 그가 남궁가를 맡은 지 이제 십 년여이지만 그 십 년 만에 남궁가는 천하제일가(天下第一 家)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는 당금 무림의 제일기재로 꼽히는 사람이지만,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궁가주는 본주에게 시비를 걸고자 노력하는 것 같군..." 사인교 안에서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만에, 천만에! 내가 무슨 간담으로 제단(帝壇)의 제이인자인 왕주에게 시비를 걸 수 있겠 소?" 남궁천은 황급히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느냐는 듯이 고개까지 젓고 손까지 흔들어 보여 매 우 당황한 듯했지만 입가에 어린 한 가닥 미소는 시종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뱉어 낸 말은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본... 문을 아는군?!" 사인교 안에서 억눌린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단?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천제문이란 말인가?' 주천운은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금 강호상에 천제문을 짐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놀랍지만 이렇게 공교하게 천제 문과 조우하게 될 줄 또 어떻게 알았으랴. "당금 무림에 본문을 아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뜻밖이군! 무림제갈의 능력이 당년에 무후 (武候:제갈량)에 못지않는다기에 믿지 않았더니..." 잠시 말이 없던 사인교 안의 왕주(王主)가 냉담히 중얼거렸다. 그 음성에는 놀람이 역력했 다. "과찬이오, 과찬이야! 내 어찌 감히 무후에 비길 수 있겠소? 몸둘 바를 모르겠군..." 무림제갈 남궁천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흥! 가주가 이곳이 본문의 중지(重地)임을 알고도 야밤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 것은 본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왕주의 냉랭한 외침에 무림제갈 남궁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의 입가에 습관처럼 어려 있던 미소도 사라졌다. "무림고수들을 암해하여 그들을 실혼마인으로 만드는 것은 무림을 능멸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어조는 날카롭기 이를 데 없었다. 왕주는 일순 말문이 막히는 듯했으나 이내 냉랭히 말했다. "가주가 아는 것은 실로 적지 않은 것 같군! 그 외에 또 무엇을 알고 있소?" "제단의 내삼, 외오당 중에서 당신 직속의 천기당(天機堂)이 천하각파에 첩자를 깔고 있음도 알고 있지! 어디 그 첩자의 명단도 말해 볼까?" 무림제갈 남궁천은 태연히 사인교를 바라보며 말했다. "으흐흐..." 사인교 안에서 음산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뜻밖이군! 뜻밖이야! 본주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본주가 설마 가주를 그냥 보내리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 "와하하하..." 돌연, 남궁천이 앙천대소했다. 해일이 일어나듯 주위의 공기가 파동쳤다. '대단한 공력이다! 무림제갈은 잡학(雜學)에만 뛰어나다고 전하더니 이제 보니 대단한 고수 였구나!' 주천운은 내심 남궁천의 공력에 크게 놀랐다. 남궁천의 우렁찬 음성이 울려퍼졌다. "본가주가 아무런 준비없이 여기에 찾아왔다고 믿는다면 천제문을 너무도 과대평가한 것 같 은데?" 그의 두 눈에서는 위엄 어린 신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흥! 과대평가가 아니라 과소평가했음을 알게 해주겠다! 그의 능력을 알아봐라!" 왕주가 냉랭히 외쳤다. 파팟! 번-쩍! 순간 남궁천을 둘러싸고 있던 청의검수들이 벼락같이 그들을 덮쳤다. 그 위세는 대단하고 빈틈이 없었다. 창! 차창! 매서운 금속성이 잇달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궁천의 좌우에 있던 냉면노인 두 사람이 어느새 발검하여 남궁천의 주위를 풍차같이 돌면 서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스물여덟 명이라... 대천강검술(大天 劍術)이로군. 감태(坎兌)!" 남궁천은 신광이 감도는 눈으로 청의검수가 이루고 있는 검진을 바라보며 외치기 시작했다. 쨍! 냉면노인 하나가 벼락같이 남궁천이 지적한 방위를 덮쳐 갔다. 번개같이 돌아가는 검진에 틈이 드러났다. "건손(乾巽)! 곤진(坤震)!" 쨍쨍! 두 냉면노인의 움직임은 남궁천이 외치는 소리에 따라 점점 빨라졌다. 검광이 파도처럼 일 어나면서 청의검수들의 검진 속에서 종횡무진했다. '대단하군! 삼 초 이내에 검진이 깨어진다... 두 명의 노인 또한 초강고수다!' 주천운은 무림제갈의 호가 그냥 붙은 것이 아님을 알았다. "검진을 역회전하라!" 사인교 안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 늦었다!" 남궁천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울리면서 느닷없이 남궁천이 검진 안으로 덮쳐 들어갔다. 창! 차아-앙! "으악!" "으... 으..." 날카로운 쇳소리가 진동하더니 잇달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숨에 대여섯 명이 피를 뿌리며 날아오르고 검진이 깨어졌다. 청의검수들의 손에서 벗어난 장검들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 순간에 남궁천은 백의를 펄럭이며 이미 검진을 벗어나 사인교 앞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 의 손에는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는 보검이 들려 있는데, 바로 절금단옥(切金斷玉)의 남궁가 보(南宮家寶)인 창궁신검(蒼穹神劍)이었다. 그가 몸을 날리자마자 번개같이 열 명의 복면인이 사인교의 앞을 막아서며 나타났다. "흥! 호왕십위(護王十衛)로 본가주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남궁천은 코웃음 치며 창궁신검을 비껴들었다. "으-악!" "케에..." 그의 뒤에서는 두 냉면노인이 우리를 벗어난 맹수와 같이 검진이 깨어진 청의검수를 살육하 고 있었다. "두 늙은이가 은거했다던 창궁이로(蒼穹二老)임을 미처 몰랐군! 본주가 귀하를 과소평가했 다!" 사인교 안에서 침중한 음성이 차갑게 흘러나왔다. 창궁이로(蒼穹二老) 남궁룡(南宮龍), 남궁호(南宮虎). 두 사람은 남궁가의 전대 장로(前代長老)로서 바로 남궁천의 작은할아버지가 되는 사람들이 다. 그들은 일생을 검에 바쳤으며 남궁가의 비전인 창궁십팔검(蒼穹十八劍)을 연구키 위해 오십 년 전 폐관했었다. 그때, 연혼전을 중심으로 백 명에 이르는 흑의인들이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연 혼전을 보호하는 호전고수(護殿高手)들이었다. "창궁이로가 아니라 십로가 있어도 너희 셋은 원군이 도착할때까지 버틸 수 없다! 쳐라!" 왕주가 외치는 순간에 호전고수의 절반이 오 개 조가 되어 창궁이로를 덮쳐갔다. 그리고 그 것과 동시에 사인교 앞에 서 있던 호왕십위가 남궁천을 공격해갔다. "와하하... 이미 도착한 원군을 또 기다린단 말인가? 당형(唐兄)!" 남궁천이 창궁신검을 휘두르며 벼락치듯 웃었다. 찰나였다. 펑! 꽝! 이히-힝! "으-악!" 약간 물러나 있던 마차가 돌연 박살이 나면서 말이 죽어 넘어지고 주위에 있던 호전고수들 이 피를 뿌렸다. 꽝! "으-와-아..." 굉음과 함께 매케한 화약냄새가 진동하며 호전고수들이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한 채 피떡이 되어 나뒹굴었다. "으하하... 남궁가주! 조금만 늦게 불러주었다면 답답해 그대로 튀어나올 뻔했소!" 중년대한이 호탕하게 웃으며 호전고수들에게 잇달아 암기를 쳐내면서 어느새 그 가운데 나 타나 있었다. 그뿐인가? 다른 두 노인이 그의 좌우에서 신나게 암기를 쏟아 내는 중이었다. "으음... 마차 밑에 숨어 있었다니!" 왕주는 신음했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상대가 귀식지법(龜息之法)을 전개하면 기척을 느끼기 힘드는 것이다. 거 북이가 숨을 쉬는 것을 흉내낸 귀식지법 자체가 절정고수가 아니면 전개할 수조차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수송마차의 행로는 최고극비다! 그런데 그 마차 밑에 숨어...! 이런, 큰일났다, 연혼전이...!' 돌연 사인교의 지붕이 폭발하듯 날아가면서 한 인영이 연혼전으로 날아갔다. 펑! "으-악..." 그 순간, 연혼전 내에서 굉음 소리와 함께 싸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연혼전주!" 사인교 안에서 날아나온 인영이 연혼전 내에서 크게 외쳤다. 연혼전주가 대답할 여가도 없이 날아갔다. "이제 급한가? 하하... 사대가장(四大家將)은 어디 있나!" 남궁천이 크게 외쳤다. "남궁가 사대가장(四大家將)! 명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우렁찬 대답이 숨쉴 틈도 없이 들려왔다. "남궁가 창궁십팔검수(蒼穹十八劍手)도 여기 있습니다! 날렵한 인영들이 일제히 담을 날아 넘어왔다. "남궁가의 호한(豪漢), 사십팔걸(四十八傑), 이미 당도했습니다!" 정신이 없었다. 그토록 철저히 경비된다고 믿어지던 은일장의 후장에 남궁가의 전세력이 귀신도 모르게 나 타난 것이다. 호통 소리와 뒤이어 터지는 비명(悲鳴)! 그리고 피어오르는 피보라... 졸지에 연혼전 주위는 대혼전이 벌어졌다. '남궁가의 세력은 생각보다 강력하군, 대단하다!' 주천운은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의검수와 호전무사들의 무공은 대단해 능히 일류고수의 자격이 있어 보였다. 더구나 그들 은 연수합격(聯手合擊)의 검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림제갈 남궁천의 용병에 그들은 검진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몰리는 상태였 다. 용병이 아무리 좋아도 힘이 없으면 소용없을 것이었으나, 남궁가는 남궁천이 바라는 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남궁가가 근래에 이르러 천하제일가로 불리는 것은 헛된 것이 아 니었다. 그 중 창궁이로와 마차에서 뛰어나온 중년대한의 활약은 확실하게 돋보였다. 중년대한의 온 몸은 그야말로 암기의 덩어리와 같았다. '저 중년인은 아마도 당가의 소가주인 천수나타(千手咤) 당거종(唐巨鐘)인 모양이다!' 주천운의 생각은 틀림없었다. 그 중년인은 백여 년 이래 당가제일재(唐家第一才)라는 천수나타 당거종이었고, 그의 좌우에 서 그를 호위하고 있는 두 노인은 당가오독(唐家五毒) 중의 두 명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국의 주지자인 남궁천은 호왕십위에 둘러싸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제각기 일 갑자의 내력을 지닌 고수들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남궁천은 창궁신검으로 무서운 검세를 회오리바람처럼 쳐내고 있으나 그 기세는 계속 위축 되고 있었다. '연환패왕진(連環覇王陣)... 남궁천은 그들의 진세를 알고도 공력이 모자라 깨지 못하는구 나!' 주천운의 눈은 정확했다. 연환패왕진(連環覇王陣)은 비슷한 공력의 고수가 모여 이루는 연수합격진이다. 특별한 점은 없지만 그들 전체의 공력을 능가하지 않으면 깰 수 없는 괴진(怪陣)이다. "남궁가주! 소제가 돕겠소!" 천수나타 당거종이 우렁차게 외치며 추혼연미표(追魂燕尾 )를 잇달아 그곳에다 쏘아냈다. 당 가의 추혼연미표는 무림 중에 이름 높은 것으로 누구라도 피하지 않을수 없는 무서운 암기 다. 그러나 그 십여 개의 추혼연미표는 채 호왕십위의 곁에 이르지도 못한 채 튕겨져나가고 말 았다. 위-잉! 윙! 연환패왕진의 위세는 점점 강해져서 남궁천뿐만 아니라 수 장 주위까지 그 위세가 파급되고 있었다. "관청아! 네가 여길 맡아라!" 창궁이로가 그 상황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이 남궁가 사대가장의 수장(首將)인 남궁 관청에게 외치며 날아올랐다. "흥! 구독갈미(九毒蝎尾)도 안 통한다? 으핫하하-좋아! 남궁가주, 조심하시오!" 그 순간에 이미 이십여 종의 암기를 쳐내고도 효과를 보지 못한 천수나타가 갑자기 천둥처 럼 외치며 양손을 떨쳐 냈다. 쉬-익! 공과 같이 생긴 암기가 번개처럼 호왕십위에게 쏘아졌다. '당가삼절(唐家三絶)의 하나인 천뢰구(天雷球)다!' 주천운이 그것을 알아보고 암중 소리쳤다. 꽝! 파파팟! 진세에 휩쓸린 천뢰구가 폭발하며 그 속에서 수천 개의 파공강침(破功鋼針)이 폭사되어 나 왔다. 천뢰구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화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폭발하면서 안에서 튀 어나오는 파공강침 때문이다. 그것은 호신강기를 꿰뚫는 힘이 있어 무림인에게는 가히 공포 의 암기라 할 수 있었다. 빠다다-땅! 땅땅! 무서운 위세였다. 수백 년 이상의 내력이 모여 이루어진 가공할 강기( 氣)의 벽이 진세 외곽을 보호하고 있다 지만 그 파공강침마저 막을 수야 없었다. "윽!" "으윽!" 호왕십위 중 사오 명이 신음을 토해 냈고, 그곳을 향해 날아오던 창궁이로가 강기의 벽에 마구 튕겨져나오는 파공강침에 대경실색하여 몸을 피했다. "이야압!" 그 혼란의 와중에 남궁천의 입에서 용음(龍吟)과 같은 장소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이 찬란한 검망에 휩싸이며 연환패왕진을 덮쳤다. "으-악!" 피보라가 일며 처참한 비명이 뒤이어 일어났다. 호왕십위 중 두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질 때, 남궁천은 이미 진을 벗어나 있었다. "와하하... 멋진 신검합일이오! 소제는 공연한 걱정을 했소." 천수나타 당거종이 껄껄 웃으며 그의 옆으로 날아내렸다. "과찬이오. 당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장내는 이미 대승(大勝)의 국면이건만, 그에게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천의 눈길은 연 혼전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표정은 굳어 있었다. '과연 뛰어나다! 연혼전 내의 사정을 이미 간파한 모양이다!' 주천운은 남궁천에게 감탄하며 은신과행술을 펼쳐 소리도 없이 연혼전으로 접근하기 시작했 다. 방금까지도 함성과 격투 소리가 들리던 연혼전 내부의 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고요라는 것은 결코 남궁천 쪽에 유리한 것이 아닐 것이었다. 와장-창! 주천운이 소리없이 연혼전의 후면으로 접근했을 때, 연혼전의 좌측 문이 박살이 나면서 한 인영이 구르듯 뛰쳐나왔다. 반 동강의 검을 쥔 노인인데 온몸이 피투성이었다. "고노선배님!" 남궁천이 그를 보고 안색이 변해 몸을 날렸다. "나... 남궁가주... 시, 실패했소. 어서, 어서 피하시오!" 노인이 선혈을 토해내며 외쳤다. 그는 남궁천이 실혼마인을 파괴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제압된 것으로 위장하여 연혼전에 잠 입시킨 일곱 명의 원로고수 중 일인으로, 중주일수(中州逸搜) 고자양(古紫陽)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남궁천이 벼락같이 부르짖으며 중주일수에게 덮쳐 갔다. 그러나 그 순간에 중주일수의 목은 이미 피보라를 뿜으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중주일수의 목을 감아 버렸던 것이다. 따따-땅! 남궁천은 손아귀가 저림을 느끼며 몸을 뒤집어 땅에 내려섰다. 아주 차고 날카롭게 생긴 흑의노인이 어느새 남궁천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마치 해골뼈다귀를 엮어만든 듯한 고루편( ?鞭)이 들려 있었다. 중주일수의 목을 휘감아 잘 라 낸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남궁천! 너의 기도는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이까짓 조무래기 몇 놈으로 파괴될 연혼전인 줄 알았더냐?" 흑의노인이 남궁천을 쏘아보며 음산하게 외쳤다. 그 음성은 바로 왕주의 것이었고 거기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장내의 상황은 이미 남궁가의 압도적 승리였다. 왕주측에서 살아남은 것은 호왕십위 중 여섯 명을 비롯해 십여 명에 불과했다. 장내의 상황을 살펴본 왕주의 눈에서 흉광이 이글거렸다. "네가 호왕십위의 진을 깰 수 있을 줄은 몰랐구나. 으흐흐흐... 남궁천... 오늘 너의 어리석음 을 깨닫게 해주마!" 왕주의 음산한 음성과 함께 수중의 고루편이 저절로 덜거덕 거리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해골이 살아 일어나는 듯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고루마왕편( ?魔王鞭)! 설마 당신이 고루마왕( ?魔王)?" 중주일수의 시체를 착잡한 시선으로 내려보던 남궁천의 눈에 놀람이 드러났다. "으흐흐흐... 네가 본주의 명호를 기억하다니... 과연 아는 것이 적지 않구나!" 왕주가 음랭하게 웃었다. 고루마왕( ?魔王) 오도소(烏圖蘇). 육십 년 전, 느닷없이 중원에 나타나 고수라면 무조건 쳐죽이던 미친 마두가 그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겨우 석 달이지만 그의 손에 죽은 고수는 수백 명 이상이었다. 고루마공을 연성한 그의 전신은 창칼이 들어갈 수 없어 고루마왕편을 본 사람은 살아난 사 람이 없었다. 중원삼신에 의해 중상을 입고 죽었다고 전해졌던 그였다. 삐-익! 그때, 갑자기 연혼전 안에서 가슴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남궁천의 안색에 긴장이 돌았다. "대창궁무애검진(大蒼穹無涯劍陣)을 포성하라!" 남궁천이 침중하게 외치는 순간에 연혼전주가 연혼전 안에서 귀영과 같이 날아나왔다. 그 뒤를 이어 전신을 흑포로 감싼 괴인들이 줄을 이어 날아나오기 시작했다. 그 행동은 신 속하기 이를 데 없어 한눈에 절정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수효는 무려 삼십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는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걸친 흑포가 엉망 이 된 자도 약 열 명 정도가 있었다. "그것뿐이냐?" 왕주, 고루마왕 오도소가 차갑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삼십 구 정도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 연제되고 있는 것들은 무사합니다!" 연혼전주가 겁먹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단 한 놈도 살려보내지마라!" 고루마왕은 짧게 외치고는 느닷없이 남궁천에게 덮쳤다. 위-잉! 무서운 기세가 고루마왕편에서 일어나며 해골의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었다. 수백 수천 개의 해골이 하늘에서 우박처럼 남궁천을 향해 떨어져내리는 것 같았다. "공격해라!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동시에 연혼전주가 연신 괴이한 소리가 나는 호각을 불어대면서 남궁가의 고수들에게 덮쳐 갔다. "으으와아-!" "우우우-" 듣기에도 소름 끼치는 외침과 함께 흑포괴인들이 그 뒤를 따라 남궁가의 고수들을 덮쳐 갔 다. "창궁무한(蒼穹無限)!" 창궁이로의 노대인 남궁룡이 벼락같이 칠검을 쏟아내면서 외쳤다. "천지무궁(天地無窮)!" 창궁십팔검수와 사십팔걸이 한꺼번에 외치며 그 뒤를 이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검빛이 하늘을 뒤덮을 듯 일어났다. "으아-!" 흑포괴인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창궁일로의 노이(老二)와 검을 마주쳤다. 용이 울고 범이 노호하는 듯한 소리가 검에서 일어나면서 노이 남궁호의 안색이 싹 변했다. '백년의 공력을 지닌 나보다 공력이 강하다니...?' 그는 손목이 끊어질 듯하여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자 혼비백산해 검진의 변화 속으로 묻 혀들고 말았다. "절대 단독으로 맞서지마십시오! 그들은 실혼마인입니다." 남궁천이 그것을 보고 대경해서 외쳤다. 실혼마인! 그 얼마나 무서운 이름인가? 스스로의 혼을 잃어버린 채, 평소 능력의 십 배를 지니게 되는 괴물, 이십 년 내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백 년이란 믿을 수 없는 공력을 지니게 된다는 가정이 성립되는 것이다. "으흐흐... 네놈의 목이나 조심해라!" 고루마왕이 미친 듯 웃어대었다. 고루마왕편의 위세는 이미 주위 십 장을 뒤덮고 있었다. 따따따-땅! 고루마왕편과 창궁신검이 부딪치자 불똥이 튀며 무서운 기세로 창궁신검이 밀려났다. 남궁천은 안색이 변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흥!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고루초혼무( ?招魂舞)!" 고루편영이 그물과 같이 천지를 뒤덮으며 남궁천을 덮쳐 갔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궁천의 눈에 결심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청광이 치솟아올랐다. "태을청령(太乙淸靈)-태을분광(太乙分光)!" 그의 몸이 검과 함께 한 무더기의 청광으로 화해 고루마왕편영 속으로 폭사되었다. 그 속도 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 위세 또한 여직껏 남궁천이 보여준 것의 배나 되는 것이었다. 카아앙! "으헛!" 고루마왕이 경악한 외침을 토해냄과 동시에 매서운 금속성이 귀청을 찢어 버릴 듯 터져 나 왔다. 남궁천이 창백한 안색으로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내려섰다. "크으... 태을분광검이라니? 그럼, 네놈이 옥로(玉露) 소코의 제자였단 말이냐?" 고루마왕이 비틀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의 가슴에는 일곱 치 가량의 검흔이 나 있는데 치명상인데도 불구하고 피가 흐르지 않았 다. 남궁천은 놀랍게도 그 고루편영을 뚫고 들어가 고루마왕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안 것이 좀 늦었다!" 남궁천이 냉랭히 입을 열었다. "으흐흐... 육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태을분광의 최후 일검을 막아내지 못하고 바로 그 자리 에 다시 상처를 입다니... 크으흐흐..." 음산히 웃음을 터뜨리던 고루마왕 오도소의 눈에 살염이 이글거리며 피어올랐다. 옥로자(玉露子)는 주선(酒仙), 무산신모와 함께 중원삼신으로 불리는 전대기인이다. 그의 태을불광검은 당년의 천하제일검이라 불렸고, 육십 년 전에 고루마왕은 그 태을불광검 에 사경을 헤맨 전적이 있었다. "옥로 소코도 지금의 네놈과 같은 검세는 전개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의 공력으로는 본 주의 고루마공을 파괴할 수 없다!" 고루마왕은 촤아악-고루마왕편을 떨치더니 남궁천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 어디에 치명상을 당한 흔적이 있는가? '검강(劍 )까지 일으켰건만... 이자의 고루마공이 이미 금강불괴란 말인가?' 남궁천의 눈에 긴장이 맴돌았다. 방금의 일격에 그는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흐흐흐... 옥로 소코와 술귀신 등을 찾아가기 전에 네놈부터 처리하겠다!" 고루마왕편이 마치 막대기와 같이 빳빳이 서서 일직선으로 남궁천을 쏘아왔다. 그것을 피한다면 그 순간, 고루마왕편은 천지를 뒤덮게 될 것이다. 고수의 대결에 있어 선 기를 놓친다는 것은 곧 승리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지금 저 고루마왕편을 피한다 면 선기를 놓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단숨에 편세에 휘말려 십 초 이내에 피를 토하게 될 것이 분명할 것이었다.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창궁신검을 비스듬히 쳐내어 고루마왕편을 막아갔다. 땅! "윽!"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남궁천은 안색이 하얗게 되면서 잇달아 세 걸음 물러났다. 원래 그는 상대의 고루마왕편에 깃든 힘을 시험해 보며 기회를 볼 생각이었지만 상대의 능력은 그의 상상을 넘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천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고루마왕이 음산히 웃었다. "네 나이에 그만한 공력을 지니고 있다니... 하나 고루흑풍삼겁( ?黑風三劫)은 옥로 소코가 와도 견디지 못한다! 흑풍제일겁이 간닷-!" 그의 외침이 장송곡과 같이 거대하게 울려퍼졌다. 말소리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며 고루마왕편에 휘말려오르면서 남궁천을 덮쳤다. 흑풍이란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루마왕편의 기세가 너무 거대해서 흙먼지가 사방에서 휘말려올라 주위 경물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인 듯했다. 그것을 본 남궁천은 이미 진재실학(眞在實學) 외에는 거기에 맞설 방법이 없음을 직감하고 는 이를 악물고 검강을 일으켰다. 그의 검에서 푸른빛 검광이 폭발하듯 일어나면서 고루마왕편에 부딪쳐 갔다. 땅땅! "으-윽!" 검과 마왕편이 부딪치는 순간, 격렬한 부딪침의 소리와 함께 일진 광풍이 일어나는 가운데 창궁신검이 남궁천의 손을 벗어났다. 선혈이 울컥,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악!" 대창궁무애검진의 일 각에 무너지면서 창궁십팔검 중 서넛이 쓰러졌다. 그 엄청난 위력을 가진 실혼마인들의 괴력을 검진의 힘으로 지탱했었건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 결국 검진은 사상누각이 되고 남궁가의 고수는 추풍낙엽과 같이 쓰러져 갔다. 당가의 그 무섭다는 암기조차 별무소용이었다. 실혼마인은 전신에 암기를 고슴도치같이 꽂고도 끄덕없었다. "으흐흐흐... 흑풍제이겁이 간다앗-!" 통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고루편영이 남궁천의 온몸을 갈가리 찢을 듯 휘감았다. '단 한 순간의 계산착오가 이런 결과를...!' 남궁천은 절망에 찬 부르짖음과 함께 두 눈을 부릅떴다. 막강한 적의 힘에 견디지 못하고 검조차 놓쳐 버린 그가 고루마왕이 지닌 육십 년 간 고련 한 고루흑풍삼겁에 견뎌 낼 재간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냥 죽을 수가 있겠는가. 남궁천은 전신의 모든 기력을 끌어올렸다. 꽈르르-릉! 바로 그 순간에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일진 광풍이 고루편영을 뚫고 들어왔 다. 그 광풍의 기세는 놀랍기 이를 데 없어 고루편영이 흩어질 정도였다. "이... 이게 뭐냐?" "손을 멈추어라!" 대경실색한 고루마왕이 두 눈을 부릅뜰 때, 위엄이 담긴 호통 한소리가 터지면서 가공할 암 경이 노도와 같이 일어났다. 꽈-르릉! 굉음과 함께 무서운 강기가 회오리치며 퍼져 나갔다. "크으윽!" 고루마왕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깨를 흔들다가 이를 악물고는 마침내 두어 걸음을 물러 났다. '고루흑풍겁에 뛰어들어 나를 진퇴시키다니...?' 고루마왕은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쏘아보았다. 제 18 장 자결하는 마왕(魔王) 고루흑풍삼겁( ?黑風三劫)은 그가 무림삼신에 의해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도주한 뒤, 절치부 심 복수를 위해 고련(苦練)한 일대의 절학이다. 일단 펼쳐지게 되면 전신의 모든 힘을 다 쏟아붓게 되며 고루편영이 동장철벽(銅牆鐵壁)을 이루어 그 위세에 휩쓸리는 것은 무엇이건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오죽하면 흑풍겁이라는 이 름을 붙였으랴. 그것을 증명하듯 일 장 구 척의 고루마왕편의 위세가 미쳤던 사방 십여 장 둘레는 거의 박 살이 나다시피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지 난데없는 일대광풍이 들이닥쳐서 흑풍을 깨뜨린 것이다. 남궁천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흑의의 귀공자다. 그의 흑의는 강풍( 風)에 미친 듯 펄럭였으나 그의 전신은 태산인 양 미동 도 없었다. 남궁천의 앞을 가로막고 홀연히 나타난 그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 었던 것처럼 침착하고도 조용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주천운이 나선 것이다. 연혼전 안으로 들어가던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되돌아나온 것이었다. "대단한 위세로군...!" 위기의 순간에 나서서 남궁천을 구한 주천운은 고루마왕편에 의해 박살이 난 일대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흔들더니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괜찮습니까?" 그의 물음에 남궁천은 흠칫 제정신을 차렸다. "덕분에...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너는 누구냐?" 남궁천이 황급히 공수하는 순간에 고루마왕이 음침히 외쳤다. 주천운이 고개를 돌려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태산 같군!' 고루마왕은 그의 태도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신음했다. 적을 앞에 두고 저렇게 태연 할 수 있는 것은 분명코 간단한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미쳤거나, 확실한 자신이 있거나. 조금 전, 자신을 격퇴시킨 것이 저 애송이라면 저 애송이는 미친 것이 아니라 다루기 힘든 존재일 것이 분명했다. "네가 천제문 제단의 이인자인 왕주(王主)가 틀림없느냐?" "너...?" 손자도 몇째 손자뻘이 될 주천운이 대뜸 입을 열자마자 너라고 하자 고루마왕의 얼굴은 돼 지 간이 민망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으-아-악!" 그 순간 당가오독 중의 하나가 피곤죽이 되어 처박혔다. 검진이 궤멸되자 실혼마인의 위세는 만부막적이라 상황은 완전히 도살이었다. "멈춰라!" 남궁천의 안색이 변해 달려갔다. "저들을 멈추도록 해라!" 주천운이 미간을 찡그린 채 소리쳤다. 그 음성에는 은은히 분노가 어림과 함께 손가락 하나 로 남을 부리던 사람의 성정(性情)이 그대로 반영되어 명령조가 역력했다. "해라? 뭐 이따위 놈이 있어? 우후후후... 네놈에게 능력이 있으면 멈추도록 해봐라!" 고루마왕이 이를 갈며 외쳤다. 이 빌어처먹을 놈이 나타나자마자 반말이 아닌가? 웬만하면 당장 쳐죽였을 테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눈치챈 고루마왕은 노마두답게 분노 를 드러내면서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의 상상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좋다!" 고루마왕이 외친 순간에 주천운이 짤막히 외치더니 불쑥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말이 한걸음이지, 그 보폭은 무려 삼 장(三丈)이나 되었다. 결국 '좋다'라는 말의 '다'가 채 끝나기도 전에 주천운의 신형은 고루마왕의 코앞에 이른 것이다. 이 한 수는 고루마왕을 혼비백산케 하기에 족했다. "어헛!" 심장이 튀어나오게 놀란 그는 몸을 옆으로 틀면서 벼락같이 고루편을 휘둘러 주천운을 휘감 아갔다. 대저 편이라고 하는 것은 부드럽고 긴 것이므로 상대가 이처럼 가까이 접근하면 치명적으로 불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을 이 고루마왕편에 바쳤으므로, 고루마왕편은 그의 수족과 같아서 가까운 거리임에도 고루마왕편이 영활한 뱀과 같이 핑핑 돌면서 주천운을 덮쳐 갔 다. "늦었다!" 그러나 그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에 그의 귀에 파고드는 주천운의 냉소가 들림과 동시에 가 슴팍을 불로 지지는 듯한 화끈함을 느껴야 했다. "이, 이건... 이럴 수가?"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본 고루마왕은 좀 전에 남궁천에게 베인 곳이 쩍 벌어져 피가 솟아 남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주천운은 한걸음 물러나 아슬아슬하게 고루마왕편을 피하고 있었다. 눈앞으로 고루마왕편이 스쳐감에도 그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리고 그의 손은 막 품속에서 다시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 침착한 태도가 천하제일의 쾌검인 여의섬을 전개하고 난 다음의 자세임을 고루마왕이 어 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더더구나 검이 이미 검집으로 들어갔음을... "고루마왕의 신체는 도검불침이라고 하더니, 헛소리였던 모양이군! 자, 이제 실혼마인을 멈 추게 하겠느냐?" 주천운은 그를 쏘아보며 외치듯 말했다. 고루마왕은 마치 헛것을 본 것 같았다. 섬광 한 줄기를 보긴 보았기 때문이다. "방금의 것이 검이라고! 천하에 태을분광보다 더 빠른 쾌검이 있다고?"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발악하듯이 외쳤다. "어디 그 쾌검을 다시 한 번 시전해 보아라!"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력을 다해 고루마왕편을 쳐내며 주천운을 덮쳐 갔다. 쏴아앙! 쐐애- 글자 그대로 만천고루영(滿天 ?影)이었다. 온 하늘과 땅까지 세상 모든 것이 해골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하늘에서 해골폭우가 떨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자가 방금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가?' 흠칫한 주천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흥! 관을 봐야겠다는 말인가!" 팟! 그의 손이 보이지도 않도록 움직이자 한 가닥 섬광이 천지를 뒤덮은 고루편영을 뚫고 들어 갔다. 그 속도와 각의 예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이미 만패검성에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능가해가는 중이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따-땅! 예리무비한 금속음이 터지며 검세와 편영이 부딪쳤다. "흐흐... 제아무리 쾌검이라도 흑풍겁의 편세는... 흑?" 분명히 상대의 쾌검은 가공할 만했다. 하지만 그가 펼친 고루편영을 뚫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던 고루마왕은 혼비백산해 두 눈을 부릅떴다. "하늘 아래 가장 빠른 것이 여의섬이라면 그 조화를 이루는 것은 마음이니라!" 한데, 그 순간에 낭랑한 외침이 들리면서 마치 불꽃이 튀듯 주천운의 수중에서 검광이 겹겹 이 일어나 고루편영을 뚫고 그를 덮쳐 오지 않는가? "고루흑풍제이겁!" 대경실색한 고루마왕은 전력을 다해 고루마왕편을 휘둘렀다. 그의 고루흑풍삼겁은 천하제일검이라는 외호를 받던 옥로자의 태을분광의 쾌검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전력으로 시전되면 동장철벽이 생겨난 것 이상의 위력이 있었다. 더구나 고루마왕은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여의섬과 조화의조차도 단 한 순간에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으아악..." 그 순간에도 남궁가의 고수는 죽어가고 있었다. 어찌 다급하지 않겠는가? 주천운의 몸에서 서기가 뻗어남과 함께 금광을 잃어버린 호국지존병에서도 서기가 폭사되었 다. "여(如)!" 땅! 호국지존병과 부딪친 고루마왕편세의 위세가 갑자기 떨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지존병에 맞부딪친 고루편이 한 토막 툭 잘려져 나갔기 때문이다. "의(意)!" 싹-! 또다시 고루마왕편이 짧아졌다. "섬(閃)! 목을 내놓아라!" 따땅! 무려 일 장 구 척의 고루마왕편이 단숨에 채 일 장도 남지 않게 되었다. 거의 일순간이었다. '이럴 수가? 고루마왕편이 어떤 것인데... 썩은 새끼줄같이?' 고루마왕은 혼비백산할 시간조차 없었다. 호국지존병이 이미 그의 목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흑풍제삼-겁!" 그는 전공력을 쏟아내면서 미끄러지듯 단숨에 십 장을 물러났다. "흥! 피할 수 있다면 두 분의 백년 노력은 헛된 것이지! 조화의의 뜻이 뭔지 알게 해주마!" "으악!" 차가운 웃음이 터짐과 동시에 피보라가 솟구치며 고루마왕은 미친 듯 땅바닥을 뒹굴다 일어 났다. 고루마왕의 표식이라는 고루마왕편은 이미 그의 오른팔과 함께 그의 몸을 떠나 있었 다. 여의섬과 조화의. 거기에 천하에서 가장 예리하다는 호국지존병. 그것은 그 어떤 고수라도 자신의 실력조차 제대로 발휘할 여유를 주지 않는 가공기학(可恐 奇學)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고루마왕이 물러난 곳은 마침 연혼전주가 있던 곳이었다. "연혼전주! 실혼마인을 불러 저놈을 공격케 하라!" 누군가의 팔과 함께 자신의 애병(愛兵)인 고루마왕편이 땅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을 보고 나 서야 자신의 팔이 날아갔음을 깨달은 고루마왕은 그제서야 피가 터진 어깻죽지를 부여잡고 서 고함을 쳤다. 또다시 주천운이 덮쳐올까봐 혼비백산해서 목이 터져라 외친 것이다. "빨리!" 재촉하는 그의 부르짖음, 그 어디에 처음의 기세가 있는가? "물러나 저 흑의유생을 공격하라! 죽-여-라!" 고막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호각 소리를 불어대면서 연혼전주가 외쳤다. "우우..." 실혼마인들이 모두 주천운을 돌아보았다. 초점이 없는 그들의 눈은 투명한 가운데 살기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실혼마인을 조종하는 자는 죽어 마땅하다!" 와르-릉! 냉엄한 호통과 함께, 우렛소리가 진동하며 주천운의 신형이 일진광풍을 몰고서 연혼전주를 덮쳐 갔다. "무, 무섭게 빠르다!" 한 가닥 검광이 이미 자신을 향해 날아듦을 깨닫고 연혼전주가 연혼봉(煉魂棒)을 떨쳐내는 순간에 창!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터짐과 동시에 정강(精鋼)의 연혼봉이 어이없이 두 토 막이 났다. 뒤이어 연혼전주의 목에서 피가 솟았다. 세상에 목젖을 검기에 뚫리고도 살아 있을 사람은 없다. 연혼전주는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는 듯 불신과 경악으로 가득 찬 눈을 부릅뜨고서 뒤로 넘어졌다. '천하에 태을분광보다 빠른 검법이 있단 말인가?' 겨우 여유가 생긴 남궁천은 그 광경을 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고루마왕은 이미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도주할 기회를 보는 것이다. "우-!" 우람한 체구의 실혼마인 하나가 주천운을 덮쳤다. 가공할 장세가 주천운을 덮쳐 왔다. "멈춰라!" 주천운이 호통 치며 일 장을 뻗어 맞섰다. 꽈릉!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실혼마인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주천운도 기혈이 진동됨을 느끼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실혼마인의 위력은 대단하다! 이 하나의 공력이 나와 맞수라니...' "우우!" "죽-여-라!" 실혼마인들, 정확히 이십일 명의 실혼마인 모두가 연혼전주가 죽기 전에 남긴 명령에 따라 주천운을 공격해 왔다. 생전에 고수였던 실혼마인 개개인의 공력은 제각기 백년 이상, 그들 의 초식 또한 각문 각파의 절기. 그것은 가히 풍운변색(風雲變色)의 엄청난 것이었다. 천하제일가라는 남궁가가 왜 그토록 허무하게 깨졌는지 알고도 남을 일이었다. 용화대수미선공이라는 천하제일의 신공으로 보호되고 있는 주천운조차도 온몸이 갈가리 터 져 나가는 듯한 압력을 느껴야 했다.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지만 상처를 입히지 않고서는 상대할 수 없다!' 주천운은 심호흡을 하며 공력을 가다듬었다. 과아아- 화산의 육합검법이, 소림의 금강권법이, 악가(岳家)의 진악신권(鎭嶽神拳)이... 비록 정교한 초식의 변화는 지난날보다 더할 수 없을지 몰라도 주천운을 향해 날아드는 그 들의 공세에 깃든 기세는 각파의 장문인조차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가공했다. 찰나, 주천운의 신형이 뇌성을 동반한 채 팽이처럼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뇌정군림신법은 신법 이전에 또한 신공이다. 그것이 펼쳐지면서 회전하자, 엄청난 강기의 소용돌이가 되면서 주위로 퍼져나갔다. 마치 용 권풍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 강기의 회전력에 주천운에게 쏟아부어지던 가공무쌍의 공세 들이 튕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꽈르릉- 펑-펑-! 미끄러지고 무산되고 반탄되는 그 엄청난 힘의 소용돌이에 실혼마인들은 비틀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강기야말로 그들의 공세가 주천운의 뇌정군림신법에 더해 그들에게 쏟아진 것이므로 위력은 불문가지였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주천운의 몸이 물길을 거슬러오르는 은어와 같이 강기의 소용돌이 밖으로 미끄러지듯이 뛰 쳐나오며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의 빠름을 누가 눈으로 따라갈 수 있으랴! 팍! 팟! 그의 손에서 호국지존병이 마치 섬광과 같이 불을 뿜었다. 그것은 여의섬이라고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빠르기였다. 피보라가 마치 폭죽이 터지듯 섬광의 뒤를 이어 쫙쫙 피어올랐다. "크으윽...!" "우으으으..." 실혼마인들이 비틀거리는 순간, 주천운은 그들 모두에게 일검을 격중시키고 몸을 세우고 있 었다. "죽여라!" "우아아아-!" 음산한 외침과 함께 거의 열 명의 실혼마인들이 일순간에 그를 덮친 것이다. 호국지존병의 여의섬 일격에 의해 뼈가 드러나고 대혈(大穴)이 갈라졌음에도 아픔은커녕, 움직이는 데 지 장조차 없는 것 같았다. 이러한 상황은 누구라도 의표를 찔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주천운이라도 예외는 아니 었다. 그는 뜻밖의 상황에 크게 놀라 몸을 빙글 돌리는 사이에 그들의 옆으로 돌아가면서 다시금 호국지존병을 떨쳐 내었다. 꽈르르릉-! 그의 신형을 따라 뇌성이 일어나면서 섬광이 번뜩였다. 찬란한 변화가 검광에 따라 일어났다. 혈화가 피어올랐다. 열 명의 목에서 피분수가 약속이나 한 듯이 솟아났다. 쾅! 주천운이 서 있던 곳이 박살이 나는 순간에 그들의 몸은 그 강기와 주천운에게서 일어나는 뇌정군림신법의 힘에 휘말려 가랑잎과 같이 내동댕이쳐져서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거, 검신(劍神)이다!" 고루마왕, 심지어 남궁천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주천운은 강기의 여파를 피해 그 폭풍에 몸을 실었다가 솜털과 같이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 서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을 벤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호국지존병을 거두었다. 대신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너무도 작은 소금(小琴)이었다. 그의 신형은 아직 이삼 장 가량 허공 위에 떠 있었다. "우우-!" 인성을 상실한 실혼마인에게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나머지 실혼마인들이 흉폭하게 그를 덮쳐가려는 순간에 주천운의 손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현묘한 변화를 뿌리며 금위에서 흔들렸다. 디디-이이이잉! 그러자, 악마의 속삭임이 금위에서 튕겨져 나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작은 금에서 그토록 가슴을 쑤시고 뇌수를 뽑아내는 듯한 귀음 (鬼音)이 발출될 수 있단 말인가?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괴이한 느낌이 뇌리를 온통 뒤흔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그토록 흉폭하던 실혼마인들이 그 한소리 귀음이 터진 다음에 마 치 석상이 된 듯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흉광이 이글거리던 그 잿빛 눈에서 흉광이 사라졌다. 대신 떠오른 것은 고통의 빛... "끄으으..." 실혼마인들이 괴로운 빛으로 머리를 움켜쥐고서 그 자리에서 꿈틀거렸다. 갈피를 잡지 못하 는 것 같았다. 띠리리-이이이잉! 현천마금이 또다시 한번 귀호(鬼號)를 토해 내었다. "멈추어라! 너희를 속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너희들이 할 일은 쉬는 것뿐이다. 쉬 도록 하라!" 주천운이 지상에 내려서면서 타이르듯 낭랑히 외쳤다. "..." 실혼마인들의 눈에서 빛이 꺼지면서 암담해지더니 그들의 눈이 내리감겼다. 현천마금! 그 절대신기는 세상의 어떤 마법(魔法)보다 강렬한 것이다. 실혼마인은 연혼전주 대신 이제 현천마금의 제이음인 탈심혼(奪心魂)의 노예가 되어버린 셈 이었다. '으으... 저럴 수가?' 그때, 한 인영이 혼비백산하여 소리도 없이 이미 삼십여 장 밖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빠른 몸놀림이라 할 수 있었다. "왕주!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주천운이 그를 보고 냉랭히 외쳤다. 동시에, 그의 손이 현천마금 위에서 벼락같이 튕겨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으악!" 그러나, 참담한 비명과 함께 왕주가 이미 사십여 장 밖으로 나아갔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나뒹굴었다. 현천마금의 제일음, 천심전(穿心箭)이 펼쳐진 것이다! 꽈르-릉! 일진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고루마왕의 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뇌신(雷神) 같다!" 남궁천, 무림제갈이라는 그도 오늘은 얼이 빠진 듯 정신을 차리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저 멍청히 서서 주천운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또 하겠는가. "끄으으..." 고루마왕의 안색은 백지장 같고 그의 입에서는 연신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짙은 빛깔의 그 선혈은 그의 심맥이 이미 으스러졌음을 의미했다. 주천운이 그의 앞에 내려섬을 보자 고루마왕은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 했으나 그것은 꿈틀 거림에 불과했다. 고루마왕 오도소는 자신의 앞에 우뚝 선 주천운의 모습이 태산으로 보임을 다시 느껴야만 했다. "으으... 너, 너는 누구냐?" 그 목소리에는 의혹이 충만했다. 주천운의 입가에서 한 가닥 미소가 일어났다. "너에게 그것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으으..." 고루마왕은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고루마왕편 한 자루로 천하를 떨게 하던 그가 아닌던가. 누가 그의 앞에서 숨이나 크게 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의 그는 가슴이 갈라지고 심맥이 박살났다. 오른팔마저 잃어버린 처참한 신세의 패자에 불과했다. "욱!" 분노와 모욕으로 한 가닥 남은 진기마저 흩어짐을 느낀 고루마왕은 한 모금의 심혈(心血)을 토해내며 눈을 부릅떴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져갔다. 주천운의 손이 번개같이 그의 가슴팍에서 작열했다. "크-! 이, 이건?" 꺼져가던 고루마왕의 눈에 빛이 돌아오며 의혹과 경악이 어린 빛으로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제주(帝主)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너를 살렸다." 주천운이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으흐흐... 그것을... 대답하리라 생각한다면 의외로군!" 흠칫하던 고루마왕은 이내 냉소를 터뜨렸다. 주천운의 입가에 다시 예의 미소가 피어났다. "대답을 듣지 못할 질문을 내가 했으리라 생각했다면 의외로군! 왕주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제주의 바로 아래 지위일 터, 그러한 지위에 있는 자답지 않은 생각인데?" '으으...' 갑자기, 고루마왕은 전신이 얼음구덩이에 빠진 듯 섬뜩해졌다. 한기가 전신의 피부에 퍼지면 서 소름이 돋아나는 듯했다. '이... 이토록 무서운 인물이 강호에 있었다니...' 말로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무형의 기세가 주천운에게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제, 제주(帝主)도... 기세가, 남을 복종시키는 기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스러운 복종 (服從). 한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경복(敬伏)의 기세...' 그것은 결과는 같은 것 같지만 실상은 엄청난 차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군... 태산!' 고루마왕은 자신이 그 기세를 감당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동시에 그의 칠공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자결?" 주천운의 눈에 의외라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본문을... 막을 수는... 없..." 고루마왕은 고개를 꺾었다. 이제 그의 입은 두번 다시 열릴 수 없으리라. "이자는 억압이 아니라 진정으로 충성하고 있었다!" 죽은 고루마왕을 바라보는 주천운의 중얼거림은 무거웠다. 불길[火]. 새벽을 밝히며 화광(火光)이 충천하고 있었다. 은일장이라 불리던 천제문 제단(帝壇)의 연혼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불꽃이었다. 주천운은 그 불꽃을 바라보며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옆에 선 남궁천의 얼굴은 침통하게 굳어 있었다. 승승장구. 단 한번도 계획한 일에 실패를 해본 적이 없었던 그다. 그렇기에 무림제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일생 처음의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 컸다. "창궁이로 두 분 어르신께서 중상을 입으셨고 창궁십팔검 중 일곱이 죽었으며 여덟이 중상 입니다. 그리고 사십팔걸 중 열아홉이 죽었..." 남궁가 사대가장(四大家將)의 수장(首將)인 남궁관청이 창백한 안색으로 그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 또한 갈비가 네 대나 나가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고, 남궁가의 고수치고 조금이라도 상처 를 입지 않은 사람은 전무했다. "그리고 당가오독(唐家五毒) 중 한 분이... 나머지 한 분은 의식불명이십니다." 남궁천의 얼굴은 괴롭게 일그러졌다. "당형, 뵐 면목이 없소. 남궁모의 실책으로..." "자책하지마십시오. 남궁가주, 소제 또한 실혼마인이 그토록 가공할 위력을 지닌 것은 상상 도 못했습니다." 천수나타 당거종이 침통한 얼굴로 남궁천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우의(友意)는 매우 두터웠고 허물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당거종 또한 침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당가오독은 그의 숙부가 되는 사람들이고 그가 어리광부리며 자라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 기에. 두 사람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주천운에게 향했다.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결과는 너무도 자명했으리라! 때마침, 불타는 장원을 보고 있던 주천운이 몸을 돌리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남궁천은 주천운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대협이 아니었으면 남궁천은 평생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길 뻔했습니다..." 남궁천이 공수하며 허리를 굽히는 순간, 한 가닥 암경이 그의 몸을 받쳤다. "무림제갈의 영명(英名)이 천하에 진동하고 있는데 어찌 그렇게까지야... 내가 나설 수 있는 계제가 되었을 뿐입니다." '과연 대단하다!' 암중으로 힘을 써보았으나 몸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달은 남궁천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 다. "무림제갈이란 이름은 이 몸을 아껴주는 동도(同道)들이 붙여준 것이나... 오늘 이후 남궁천 은 감히 그 이름을 감당치 못하겠소." 주천운이 그 말에 가볍게 웃었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常事). 남궁가주께선 천제문의 힘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잊으신 것은 아닙니까?" 남궁천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복수할 기회가 있으며 오늘의 이 실패를 왜 발판으로 삼지 않느냐는 무언의 힐책이 아닌가? "남궁천은 당금 무림에 대협과 같은 기인이 있음을 들은 적이 없소..." "소생은 당가의 천수나타 당거종이외다! 당거종은 천하에 남궁형 이외에 영웅이 없는 줄 알 았었는데 오늘 이곳에서 또 한 분의 영웅을 보았소이다. 대명을 듣고 싶소!" 그가 신음하듯 입을 떼자, 천수나타 당거종 또한 우렁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내상 또한 한 달이나 요상해야 할 정도였으나 그의 태도를 보고 그가 그렇게 심한 내상을 입었음 을 짐작할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호한(豪漢)이다!' 암중에 내심 고개를 끄덕인 주천운이 당거종에게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상관천이라 합니다." "상관...천?" 당거종의 눈에 기이한 빛이 돌 때, 남궁천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럼, 황하신룡의 손에서 황하조수의 손녀를 구해낸 바로 그 상관대협이란 말입니까?" 이번엔 주천운이 놀랄 차례였다.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을 남궁천이 이미 알고 있다니? '무림의 소문이 빠르다더니... 과연 무림제갈은 그냥 얻은 이름은 아니다!' 주천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남궁가주의 소식은 너무 영통하군요." 남궁천의 얼굴에 쓴웃음이 다시 스쳐갔다. "천외쌍기의 장보도가 나타난 것은 이미 산동성(山東省)을 뒤흔들고 있는 일입니다." 남궁천은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구나 태산 일대는 지금 본가의 정보망이 그물같이 깔려 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습니까?" 주천운이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천제문에 대해서 남궁가주께선 어떻게 그토록 자세히 알고 계시는지...?" 남궁천은 주천운을 바라보았다. "그 말씀은 상관대협도 천제문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들립니다만?"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강호에 나온 것은 그들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분간이 서지 않는다... 말을 할수록 그의 정체는 더욱 미궁이로구나.' 무림제갈, 당금 정도 무림의 제일기재라는 그는 주천운의 정체가 점점 신비해짐을 느끼고 내심 신음했다. 무림 중의 인물이 아닌 주천운을 거기에 맞춰 생각을 하려니 짐작이 갈 리 가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천수나타 당거종은 단순한 편이다. "상관대협의 사문이 어찌 되십니까?" "아직 사문은 없습니다." "사문이 없다? 아니 상관대협의 그 엄청난 신공이 사문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란 말씀은 아 니겠지요?" 주천운은 담담히 웃었다. "그냥 인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그의 태도는 그의 정체를 더욱 오리무중에 빠뜨리고 남음이 있었다. 점점 신비해 보인다고 나 할까? '그의 태도에는 가식이 없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림제갈 남궁천은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머리가 둔한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을 놀린다고 화를 낼지 모르지만 심기절륜한 그인지라, 주천운이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심중의 의문이야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지만 상대가 시원하게 말을 하지 않는데야 계속 다 그칠 수는 없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을 구한 은인인 것이다. 남궁천은 주천운의 물음에 대한 답을 시작했다. "남궁모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무림고수의 실종에 의혹을 느끼고 암중에 뒤를 추적해오다 가 드디어 그 배후에 신비한 힘이 있음을 알아 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죽어 가는 한 노인이 찾아온 것이다. -천제문... 연... 혼전... 무서운 음모. 실혼마인... 무림고수를 납치. 나는 연혼전에서 구사일 생..." "그는 연혼전에서 도망친 사람이었고 연혼전의 소재를 내게 알린 다음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치밀한 조사와 준비... 주천운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그 뒤의 일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름대로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왕주가 고루마왕이었음을 모른 것과 실혼마 인의 위력이 그토록 큰 것을 제대로 파악치 못한 것은 모두 이 남궁천이 자만한 탓입니 다..." 남궁천은 나무토막과 같이 서 있는 십여 명의 실혼마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은 감겨 있었고 그들 몸 어디에서 살아 있다는 흔적은 없었다. 움직이지 않을 때 는 전신의 모든 기관이 가사(假死) 상태에 빠져들고, 일단 움직이면 전신의 모든 잠력이 한 꺼번에 폭발하는 그들은-사람 이전에 끔찍한 무기(武器)였다. "천제문에 대해 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천운의 눈빛이 왠지 가라앉았다. "담금 무림동도 중에 내가 알린 사람 외에는 그들을 짐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압니다." "음... 그 노인에 대해서 알아보신 적은 있습니까?" "신분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묻는 것은?" 남궁천의 눈에 의혹이 일어났다. "어쩌면... 내가 너무 과민했는지도 모르지요." 주천운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무림제갈 남궁천이 어떤 사람인데 그 말뜻을 못 알아듣겠는가? '이용? 내가!'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치자, 그의 안색이 돌변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주천운의 음성이 그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궁가의 힘이 닿는 일이라면..." 주천운은 실혼마인을 바라보았다. "저들을 남궁가주께 맡기고 싶습니다." "그거야 물론입니다만 저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될지가 문제로군요." 남궁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걱정 마십시오. 그들을 가주의 명에 따르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주천운은 품속에서 현천마금을 꺼냈다. 디디-이이이잉! 괴이한 금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에 죽은 듯 굳어져 서 있던 실혼마인의 눈이 일제히 번쩍 떠졌다. "이쪽을 봐라. 이분은 남궁가주! 이제부터 너희들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이분의 명에만 복 종한다! 이분의 명에만 복종한다!" 주천운이 낮게 반복해서 외쳤다. "으..." 실혼마인들의 눈길이 남궁천에게 모아졌다. 얼떨떨하던 남궁천은 주천운의 눈짓에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남궁천이다. 이제 너희들은 나의 명에만 복종한다! 잊지말도록!" "우...!" 실혼마인들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들의 힘이면 남궁가의 손상된 힘을 우선 메울 수 있을 겁니다." 주천운이 그 광경을 보고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는 그 짧은 순간에 남궁가의 손실된 힘을 메울 생각을 하고 실혼마인들을 남궁천에게 맡 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제삼의 눈이 있었다. 그는 암중에 주천운 등을 살펴보고 있었다. '으음... 전혀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도대체 저런 능력을 지닌 자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 단 말인가?' 침중한 눈빛이 된 감시자는 다급히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이어, 비둘기 한 마리가 새벽을 뚫고 날아올랐다. '저자는 어쩌면 중대한 장애가 될지 모른다!'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며 감시자는 생각을 굴렸다. 그는 천제문의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제 19 장 신마금검뢰(神魔琴劒雷)의 전설(傳說) 조용하던 강호는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천외쌍기(天外雙奇)의 장보도와 천제문(天帝門)의 음모가 남궁가에 의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난데없는 폭죽이 두 개씩이나 터진 것과 다름없었다. 근 백년간에 이르는 무림평화에 잠잠히 움직이지 않던 구대문파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강 호의 신흥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일회이맹삼가사곡(一會二盟三家四谷)이 모두 활발히 움직이 기 시작했다. 그 소용돌이 속에 한 인물이 너무도 갑자기 뚜렷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의 금(琴)은 천하인의 혼(魂)을 앗으며, 그의 검(劍)은 천하인의 넋을 날아가게 하고, 그가 가는 곳에 이는 뇌성(雷聲)은 천하마(天下魔)의 혼백(魂魄)을 깨뜨린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신마금검뢰(神魔琴劍雷)라 부르노라! * * * 금릉(金陵), 남경(南京)이라 불리는 이곳은 지금의 경사(京師)인 북경 이전에 명의 도읍지였 던 역대 왕조의 도읍지였으므로, 그 역사가 유구(悠久)한 고도(古都)였다. 회빈루(會賓樓)는 금릉의 손꼽히는 양대주루의 하나로, 막수호(莫愁湖)를 굽어볼 수 있는 곳 이다. 그 이층의 창가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막수호의 경치를 감상하는 흑의유생이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다면 고귀(高貴)하다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주천운이었다. 향설주(香雪酒)를 한 모금 넘기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고소(苦笑)가 감돌고 있었다. '남궁가주가 그토록 엉뚱한 짓을 할 줄이야!' 그는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는 막수호면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상관천이란 이름은 무서운 속도로 무림에 퍼져버렸다. 그의 의도는 좋으나, 오히려 행동하기에는 불편하게 된 것 같다!' 주천운은 남궁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와 태산에서 헤어진 지 이미 이틀, 황하조수와 연자경은 남궁천을 따라 남궁가로 갔고 무 영개신도 거기에 합류했다. 주천운에 제압된 열한 명의 실혼마인과 연혼 중에 있던 고수들 백여 명도 남궁가로 이송되었다. 그들의 신분은 대체로 확인되었으나 그들의 본 정신을 찾아주는 데는 아마 적지 않은 시간 이 필요할 것이었다. '연혼전에 있던 문서에 따르면 이미 이백 명의 실혼마인이 연혼전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 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가 문제다!' 이백 명의 실혼마인이라면 실로 가공할 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주천운의 눈에 막수호면(莫愁湖面)으로부터 천천히 미끄러져 오고 있는 놀잇배 하나가 들어왔다. 화방(畵舫)이라 불리는 놀잇배는 금릉의 명물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만리추종 요불위, 지존께 문후드립니다." 한 가닥 전음이 주천운의 귀에 파고들었다. 문사 차림의 노인 한 명이 기녀를 품에 안고 화방의 위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음이 보였 다. 주천운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늦었군... 미인이 곁에 있어서인가?" 누가 곁에서 보아도 그가 전음지술(傳音之術)을 전개함을 알 수 없으리라. "농담을 하실 때가 있으시다니, 죄만(罪萬)하옵니다." 만리추종 요불위가 품속의 기녀를 희롱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주천운은 이곳에서 만리추종 요불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호수 위에 나타나는 사람을 주루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알아 낸 것이 있는가?" "연혼전의 붕괴로 제단은 발칵 뒤집히고 제주(帝主)는 크게 노했습니다. 그는 일시지간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기찰당의 전력을 기울여 지존의 내력과 행방을 알아 내도록 명했습니다." "잘되었군!" 주천운의 담담한 태도에 만리추종 요불위는 다급히 외쳤다. "지존의 행적은 이미 기찰당에 발견되었습니다. 지금...!" "나를 감시하고 있는 눈이 있음은 알고 있소. 다른 것은?" 만리추종 요불위는 일시 말문이 막히는 듯했으나, 다시 말을 보내 왔다. "제단의 힘을 너무 경시하지마십시오! 그들의 힘은 막강합니다!" "알고 있소." "열세 필의 쾌마와 지존의 출현, 남궁가의 돌출 등에 제단은 주춤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제단이 더 일찍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해야만 희생을 줄일 수 있소." "신(臣) 요불위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제주의 행방이나 제단의 소제지에 대해서는?" "너무 철저합니다. 당주급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단서는 잡고 있습니다." 놀잇배는 천천히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저 정도의 거리로 멀어지면 천리전음(千里傳音)이라는 최상승의 신공이 아닌 다음에야 말 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만리무영 요불위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그들의 첫 움직임은 남궁가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옥체보중하십시오..." 주천운은 저만치 미끄러져가고 있는 놀잇배의 요불위를 바라보았다. 석양(夕陽)에 비친 놀잇배는 그림 같았다. 그의 모습은 호수의 경치를 감상하는 서생의 것에 조금도 다름이 아니었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빈 술잔에 술병을 기울이는 순간에 나지막한 전음이 이번에는 그의 등뒤에서 들려 왔다. "신, 정문수이옵니다!" 그의 등뒤 자리에는 언제부터인지 화복(華服)의 노인 한 명이 그와 등지고 음식을 들고 있 었다. 그의 모습은 영낙없이 부유한 상인이었으나 그는 바로 지존위 대장 정문수였다. 주천운은 그가 등뒤에 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무슨 다른 동정이 있던가?"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있으나 전혀 의심할 만한 행동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어르 신은 이미 병석에 누운 지 십 년째라 두문불출입니다." 정문수의 대답에 주천운의 미간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십 년째 병석에?" 술잔에 입을 댄 주천운의 입에서 전음이 흘러나왔다. "문밖 출입을 못할 정도로 중병인가 확인해 보았는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확인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정황으로 보아 전혀 의심할 바가 없었습니다. 자운군주(紫雲君主)께선 거의 매일 청량산(淸凉山)의 불일암(佛日岩)에 기 도하러 가고 있습니다." "자운군주... 주란지(朱蘭芝)!" 주천운의 눈에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은 이미 십 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그런데 의심을 하고자 해서인지 모르나 너무 깨끗한 것이 오히려 걸립니다." 정문수의 전음이 계속 들려 왔다. '너무... 깨끗하다?' 딱! 주천운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삼숙(三叔)을 만나보겠다!" "지존!" 경악한 정문수의 전음이 흘러나왔다. "염려 마시오. 내 종적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것이니." 주천운이 미소하는 순간에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군복을 입은 십여 명 병사들이 회빈루 이 층으로 올라왔다. "자운군주께서 납신다! 모두 내려가도록 하라!" 앞선 무장(武將)이 주위를 돌려보며 외쳤다. 서슬이 시퍼런 기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춤 거리고 일어났다. "군주께서 불일암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신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문수는 전음으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려갔으나 주천운을 비롯해 몇 명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비키라는 소리를 못 들었단 말인가?" 무장이 눈을 부릅떴다. "증위장(曾衛長), 번거롭게 하지말라고 했잖아요? 잠시만 쉬어가면 되는데 남을 쫓아내다 니!" 맑은 교성이 들리며 갑자기 어수선했던 회빈루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 꽃다운 나이는 이제 십칠팔 세, 마치 피어나는 모란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절세의 미녀가 영롱한 패옥 소리를 울리며 계단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주-란지! 저 미녀가 지매(芝妹)란 말인가?'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녹의궁장을 한 미녀를 쳐다보았다. 그가 생각하던 어린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지 않는가? 하긴 십 년 전의 모습이 어찌 그 대로 남아 있겠는가. "죄송하옵니다. 군주마마! 하오나 소장은 경호의 책임이...!" 시종위장인 증대덕의 음성을 흘려 들으며 사방을 둘러보던 녹의궁장 미녀의 눈이 때마침 주 천운과 마주쳤다. "...!" '몰라보게 컸고 정말 몰라보게 아름다워졌군...' 주천운은 천천히 눈길을 돌려 막수호쪽을 바라보았다. 녹의궁장 미녀, 자운군주의 아미가 가볍게 찡긋했다. '내 모습을 보고도 눈을 돌리다니?' 그런 일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누구라도 자신의 얼굴을 보면 그 순간 눈이 커 지는 것만 보았던 자운군주였던 것이다. 그녀의 입가에 문득 묘한 미소가 스쳐 갔다. 그리고 맑은 패옥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주천운의 앞이었다. "동석해도 되겠어요?" 영롱한 음성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천운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이 자리가 마음에 드신다면 비워드릴 수도 있습니다." 주천운이 담담히 말했다. "아뇨. 필요없어요. 그보다는 그대로 앉아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자리가 빛나는 것은 당신 때문인 것 같으니까요." 짤랑짤랑,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이 나풀거리며 토해내는 말을 듣고 있자니 이건 점입가경이 다. 노골적으로 네가 마음에 든다는 뜻이니, 당시의 규범으로 보자면 그녀의 신분이 지고한 군주만 아니었더라도 천박하게조차 느껴질 말이었다. 웬만하면 그냥 둘러칠 수도 있으련만 이렇게 직선적으로 말을 할 줄이야 주천운조차도 생각 지 못한 일이었다. 일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던 주천운은 다음 순간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군주께서 나와 같은 닭 잡을 힘도 없는 유생이 마음에 드신단 말이오?" 갑자기 주천운이 낭랑히 웃었다. 시종위장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어났다. 평소 하늘같이 우러러보는 군주가 아니던가? 아무리 군주가 말을 마음대로 한다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희멀건 유생놈까지 군주와 맞상대를 하려고 한단 말인가. '이 건방진 책벌레가 감히 어디라고!' 그는 다짜고짜 나서면서 주천운의 뺨을 후려 갈겼다. 팍! "으-악!" 하지만 돼지 멱따는 비명과 함께 손목을 움켜쥐며 펄쩍 뛰며 물러난 것은 당연히 주천운이 아니라 시종위장이었다. 나무젓가락 하나가 그의 손바닥을 꿰뚫고 있었다. "무(武)를 배움은 약자를 능멸하라 함은 아니지...!" 바닥에 있던 나무젓가락 하나를 집어 들어 가벼이 시종위장을 징계한 주천운은 담담히 중얼 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감히!" "죽여버리겠다!" 위사들이 외치며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흉흉한 기세가 일어나자 허겁지겁 달려온 주루의 주인이 울상을 지었다. 왕부의 일인지라 감히 간섭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치워라!" 맑은 호통이 터졌다. "이제 보니 무림의 고수이셨군요. 이 몸이 대신 사과를 드리겠어요." 자운군주가 주천운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자운군주(紫雲君主) 주란지(朱蘭芝). 금릉 대호친왕부(大昊親王府)의 천금(千金)이다. 대호친왕부는 선황의 셋째 아우이자, 당금 황제의 셋째 숙부인 주진(朱眞)의 왕부다. 그녀는 그 대호친왕의 유일한 혈육인지라 천금지체(千金之體)의 존귀한 신분이지만 성격이 활발하고 마음이 너그러워 백성들의 기림을 받는 군주였다. 따지자면 그녀는 바로 주천운의 사촌 누이이기도 했다. "별말씀을... 소생이 조금 과했던 것 같습니다." 주천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시렵니까?"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자운군주의 눈빛이 가볍게 일렁였다. "공연히 이 몸이 나서서 공자를 쫓아 보내는 것 같아 언짢군요. 나쁘게 생각지마세요. 이 몸 은 비록 아녀자의 몸이지만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해서..." 주천운은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군주께서 비범하다는 말은 금릉에 자자한 소문이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친 왕부로 한번 찾아가 뵙도록 하겠습니다." 자운군주는 그의 웃음에 담담히 미소를 떠올렸다. "이 몸의 비범운운이야 말 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불과하지만, 마지막 말씀은 겉치레 인사가 아니길 바래요." 두 사람의 말은 직선적인 듯하면서도 또한 묘한 감칠맛이 있어서 전혀 속되지 않았다. 전혀 뜻밖의 말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으허허허...! 보통 영복이 아닌데그래! 하나, 미인의 은혜란 끊기 힘든 골치 아픈 그물이란 말이거든..." 갑자기 한쪽에서 걸걸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칠팔십 세 가량 되었을까?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얼굴이 온통 주름살투성이인 백의노인이 한쪽 구석에서 껄껄 웃고 있었다. 이제 보니 그의 옆에는 열 근짜리 죽엽청(竹葉靑) 단지가 세 개나 쌓여 있었다. 말이 세 단 지지, 열 근짜리 세 단지라면 엄청난 주량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별다른 주목을 끌지 않은 것은 한쪽 구석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의노인은 취기가 몽롱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그대로 탁자에 엎어지듯 머리를 박고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코고는 소리가 마치 천둥과 같았다. "아무리 군주마마께옵서 너그러우시다고 하나 이따위 늙은이까지 감히..." 시종위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오늘 모양새를 심히 구긴 판에 드디어 한 건 올릴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증위장은 남은 손 한 쪽마저 구멍이 나고 싶은가요?" "예?" 일순간 얼떨떨했던 시종위장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 노인의 코고는 곳을 보다 안색 이 싹 변했다.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방금까지도 탁자에 머리를 박고서 코를 골고 있던 백의노인의 모습이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시종위장이 눈길을 돌린 것은 거의 찰나에 불과했음에도. "흐... 흑의유생도 사라졌다!" 시종위사 하나가 놀라 외쳤다. 어느새 주천운의 모습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방금까지 주천운이 있던 곳을 바라보는 자운군주의 눈에는 경악이 서리고 있었다. '그 유생이 내 이목을 속일 정도의 고수였단 말인가?' 그녀의 눈빛에 묘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늘 어떤 경우의 처음에 생기기 시작하는 호기심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 * * 금릉을 생각한 다음에 십리주렴(十里珠簾)으로 유명한 진회하(秦淮河)를 떠올리지 않을 사 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남자라면 더 더욱 그러하다. 강의 양안(兩岸)에 늘어선 수많은 기방주루(妓房酒樓)에 강 위를 떠도는 그림배[船]에서는 인구에 회자되는 수많은 꽃다운 미녀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춤[舞]이 끊이지 않 는다. 그것들은 어둠이 진회하에 내리기 시작하면서 절정을 이루고 진회하 전체는 밤을 모르는 불 야성(不夜城)이 된다. 주천운은 휘영청 늘어져 이제 새순이 돋아나는 수양버들에 몸을 기댄 채 활기를 띠어가는 진회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낮 동안 하방에 매어 있던 화방들이 강으로 나갈 차비를 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은은히 들리는 노랫소리와 비파의 애잔한 울림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천운의 눈은 그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지매의 태도는 매우 밝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었을까?' 주천운은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으허허... 진회하에 와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건 사내자식이 아니지!" 낄낄 웃는 음성이 진회하쪽에서 들려 왔다. 그림배 하나가 주천운쪽으로 미끄러져오고 있었다. 선창에서 백의노인 하나가 주천운에게 술병을 흔들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회빈루에서 사라졌던 그 백의노인이 아닌가? 마치 미륵불과 같이 뚱뚱한 백의노인이 두 눈은 거슴츠레하고 주먹코는 영롱한 붉은빛이다. 그가 평소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선(詩仙)이 주선(酒仙)이니, 유생이 술마심도 흉은 아니겠지요?" 무슨 생각인지 주천운은 빙그레 웃더니 가볍게 몸을 날려 화선 위에 올라섰다. 백의노인은 주천운을 바라보더니 가가대소했다. "으하하하... 노부가 지난 오십 년 간 속이 좋지 않아 하루에 술 백 근밖에는 못 마셨는데 오늘은 이런 지기를 만났으니 한번 통쾌히 마셔봐야겠는걸!" "백 근?" 흑의의 미공자가 돌연 선창에 나타나자 반색을 하고 선실에서 나오던 기녀가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모습은 보기 드물 정도로 요염했다. "하하하하... 늙은이는 본 척도 않더니, 젊은 공자를 보고서는 입을 벌리고서는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르는군그래!" 백의노인이 또다시 웃어댔다. 기녀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백의노인을 흘겨보더니 그래도 주천운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소녀는 홍앵(紅櫻)이라 부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주효(酒肴)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눈웃음을 치면서 교성을 발했다. "아니, 여기서 같이 들겠다!" 주천운은 간단히 고개를 저었다. 기녀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으하하... 그 얼굴 보기 좋군, 좋아! 들어가자 들어가. 실은 노부가 시킨 거라네." 박장대소하며 웃어댄 노인은 술병을 들더니 주천운이 따라오는지 마는지는 쳐다보지도 않고 비틀거리며 선실로 향했다. 주천운과 노인은 선실 안에서 마주앉아 있었다. "우선 입가심부터 하고..." 쏴아아- 열 근짜리 술단지에서 술이 치솟아올라 노인의 입으로 호선을 그리며 일직선으로 날아들어 갔다. "커어-거, 그런대로 마실 만하군! 자, 객도 한잔!" 단숨에 한 독을 삼켜버린 노인이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쏴아-아! 그러자 그 옆에 있는 단지에서 술 줄기가 치솟아 주천운을 향해 덮쳐갔다. 그 속도는 마치 화살과 같았다. "주량이 시원찮아서 노인장을 실망을 시킬 것 같군요." 주천운은 그것을 보고 태연히 웃었다. 순간, 술 줄기가 마치 눈이 달린 듯 주천운의 입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김이 서리더니 마치 안개가 피어나듯 뭉클뭉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뱃속으로 사라진 술이 주기(酒氣)가 되어 배출되는 것이다. 원래, 그의 주량은 그리 크지 않았으니 한꺼번에 그 독한 죽엽청 열 근을 마실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독에서 뻗어나온 술 줄기가 끝나는 순간에 그의 머리 위에 피어오르던 안개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술 한 독이 비워지는 시간은 백의노인 때와 거의 다름없었다. 그 신기한 광경에 기녀 홍앵은 얼이 나간 표정을 하고 정말 벌린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을 모를 정도가 되고 말았다. "과연 시험한 노부가 부끄럽게 되었군!" 백의노인이 정색을 했다. "과찬의 말씀을... 어찌 주선(酒仙)을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주천운은 담담히 웃었다. 주선(酒仙) 공야월휘(公冶月輝). 중원삼신의 일 인인 기인이다. 오십 년 전부터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던 중원삼신의 하나인 주선이 돌연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주선이란 이름..." 호탕히 웃으며 입을 열던 주선의 안색이 돌변했다. "가... 간악한 계집!" 거슴츠레하던 그의 두 눈에서 신광이 폭사된다 싶은 순간에 그의 손이 갑자기 무서운 속도 로 주천운의 곁에 서 있는 홍앵에게 쏘아갔다. 팍! "오호호호..." 술상이 마치 칼로 베인 듯 두 쪽이 되는 순간에 날카로운 웃음소리와 함께 홍앵은 이미 한 덩이의 붉은 구름과 같이 선실의 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우당탕- 몸을 일으키던 주선이 술상에 걸려 넘어지며 이를 악물었다. "크으... 지, 지독한 독이로구나!" 치를 떠는 그의 입가로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일순간 빛을 발했던 눈에서 빛이 꺼졌다. "노선배..." 그를 부축하려던 주천운이 미간을 찡그리며 주춤했다. "호호호... 쇄심단장(碎心斷腸)의 독은 가장 지독하고 가장 발작이 빠른 것으로, 고수를 위해 서 특별히 만든 거랍니다." 홍앵이 요기롭게 웃었다. "너는... 누구냐? 무엇... 때문..." 주천운이 괴로운 표정으로 신음했다. 뿌드득- 그의 발 밑 판자가 수수깡처럼 꺼져들었다. "아직도 모르겠나요? 호호호... 신마금검뢰의 명성은..." 홍앵의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돌연 선실의 좌우에 걸려 있던 산수화가 찢어지며 그 속에 서 무서운 속도의 쾌검이 주천운을 갈라왔다. 대저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한 기습이 이루어질 것을 예상하긴 힘이 든다. 더더구나 상대는 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흑령곡(黑靈谷)인가?" 하지만 주천운의 입에서 뜻밖에도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손은 그 말보다 더 빨랐다. 쨍쨍! 그의 손에 부딪친 검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산수화 속에서 뛰어나온 복면인들이 가슴을 부여 잡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 가슴에는 자신들의 부러진 검이 박혀 있었다. 그들이 두 눈을 부릅뜨는 순간에 그들과 거의 동시에 덮쳐온 홍앵의 손에서 쏟아진 유엽비 도(柳葉飛刀)가 폭포수같이 주천운을 덮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소리도 없이 배 밑바닥에서 독검이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다. 선실의 넓이는 일 장이고 길이는 이 장여에 불과했다. 거기에 쏟아부어진 공격은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한데다 거의 동시였다. 게다가 그 속도의 빠름은 문자 그대로 경신읍귀(驚神泣鬼)할 정도였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이로군!" 그런데도 주천운의 태도는 미동도 없었다. 따따-땅! 그의 혈천백옥수에 유엽비도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에 한 소리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예리 한 비수(匕首)로 주천운의 가슴을 찍던 홍앵이 주춤하면서 주천운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아랫배와 무릎에는 동강난 독검이 박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과... 과연...!" 주천운에게 비수를 든 손목을 잡힌 홍앵은 온몸을 떨더니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지독한 독이로군!" 주천운이 그녀의 손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아직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덮쳐온 복면인들이 자신의 검에 의해 죽고, 유엽비도가 부서지는 순간에 솟아오른 독검이 주천운의 발에 채어 부러져 홍앵의 몸에 가 박힌 것은 전광석화와 같은 한 폭의 그림과 같 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듯하였다. 그의 응변(應變)은 이제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천운의 중얼거림이 절반도 흘러나오기 전에 또다시 격변(激變)이 일어났다. 주선 공야월휘! 그의 발 아래 엎어져 있던 주선 공야월휘의 몸이 튕겨져오르며 그를 덮친 것이다. 그것은 전혀 의외인데다 그 속도는 홍앵 등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번-쩍! 주선의 손에서 새파란 청광이 빛나며 그대로 주천운의 가슴팍을 뚫고 들어갔다. 그것은 전 문적으로 내가강기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령신조(寒靈神爪)였다. "으-윽!" 경악에 찬 비명이 터지는 순간, 피분수가 확 솟아났다. "우우... 그 자세... 그 각도에서 어, 어떻게 그런...?" 신음을 흘리며 비틀,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주선 공야월휘였다. 한령신조를 낀 그의 손목이 바닥에서 괴롭게 펄떡거리고 있었다. 졸지에 손을 잃어버린 그의 팔목에서는 피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어떤 경우에도 가장 빠를 수 있기에 여의섬(如意閃)이지!" 주천운은 침착한 태도로 잡고 있던 홍앵의 손목을 놓으며 일어났다. 그의 오른손에는 빛 잃 은 호국지존병이 들려 있었다. "주... 중독되지 않았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듯 주선 공야월휘가 신음하며 주춤, 물러났다. "타!" 그 순간에 주천운이 입을 벌리며 검은 구슬 같은 것을 토해 냈다. 그 흑주(黑珠)는 번개같이 선창(船窓)을 뚫고 폭사되어 나갔다. "으-악!" 한소리 참담한 비명이 밖에서 터져 나왔다. 주천운의 입가에 비로소 담담한 웃음이 떠올랐다. "조금 전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고 느낀다면 도망쳐도 좋다!" 소름! 주선 공야월휘는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며 온몸이 그대로 굳는 것을 의식했다. 아무렇게나 들고 있는 것 같은 호국지존병, 그 볼품없는 단검이 그의 목에 대어져 있는 듯 한 착각이 일어남을 느낀 것이다. "무... 무서운! 설마 벌써 의형수검(意形隨劍)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의 음성이 공포로 흔들리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마구 솟아났다. 너무 놀라서 손목이 날아 간 고통조차 느낄 여유가 없는 듯했다. "너는 누구냐?" "누... 누구라니...?" 주선 공야월휘의 눈에 의혹이 일어났다. "아직도 내가 너를 주선으로 보기를 바란단 말이냐?" 주천운의 웃음에 주선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이토록 공포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 었다. "저... 전혀 빈틈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럼 처음부터...?" 주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몰랐지. 그러나 숨소리가 틀렸다." "수... 숨소리?" 주선의 눈에 의혹이 드러났다. "주선의 성품이 호탕함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는 남의 이목을 꺼리는 사람이 아니지. 그 런데 너는 내 앞에 앉아 있는데도 그 기척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은폐키 위한 습관적인 잠식(潛息)... 더 말할까?" 말은 쉬우나 그것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주선의 눈에 경악과 체념의 빛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 나는 주선이 아니다!" 그는 사납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속에서 차갑게 생긴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흑령곡의 색혼(索魂)!" 그는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흑령곡(黑靈谷)은 일회이맹삼가사곡 중 사곡의 하나이며 직업살수의 집단이다. 곡주 흑령사신(黑靈死神)의 정체는 신비스러운 것이고, 그 아래 육혼(戮魂), 색혼(索魂), 추 혼(追魂)의 흑령삼혼(黑靈三魂)은 실패한 적이 없는 대살수들이었다. 순간, 체념한 듯 늘어졌던 색혼의 입과 나머지 손의 소매 속에서 한망(寒芒)이 무서운 속도 로 주천운의 눈과 가슴을 노렸다. 방심(放心)의 허(虛)를 노린 일습(一襲)! 꽝! 그 결과는 보지도 않고 색혼은 선실 벽을 부수고 도망쳤다. 독침을 막는다면 그새 그는 도망칠 것이고, 막지 않고 쫓아온다면 주천운은 죽음을 부르는 것이다. 보통 고수라면 막을 수조차 없는 기습이었지만 그는 그 결과를 보고 싶지 않았다. 볼 마음 의 여유가 없었다. 주천운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도대체 상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흥!" 차가운 웃음이 그의 뒤에서 터졌지만 그 소리는 바로 다음 순간에 일어나는 한소리 뇌성에 묻혀 버렸다. 그 뇌성과 함께 선실은 박살이 났다. "으억!" 막 물속에 뛰어들려던 색혼은 섬뜩한 느낌에 혼비백산해 급급히 신형을 멈추었다. 그의 목 에는 단검 하나가 바짝 붙어 있었고 방금 그가 몸을 날리던 탄력으로 목이 반 치 가량 베어 져 피가 마구 용솟음치고 있었다. 만약 그가 멈추는 동작이 조금만 늦었다면 그의 목은 장터의 수박과 같은 꼴이 되었을 것 이 틀림없었다. "조금 전보다 느린 속도로는 안 된다고 했었지?" 담담히 들려오는 주천운의 음성이 색혼의 귀에는 악마의 속삭임과 같았다. 그렇게 소름이 끼치는 음성은 처음이었다. "이 제주에게 전해라. 조무래기로는 안 된다고..."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을 거두며 색혼의 등에다 일장을 가했다. 펑! 전신의 모든 공력이 산산이 흩어짐을 느낀 색혼은 채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서 그 대로 진회하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게 웬 천둥 소리인가?" 진회하에 떠 있는 화방들에서 소란이 일어나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선창에 나타났다. 회하 의 강변에 자리한 하방에서도 사람들이 모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뽑았다. 꽈르-릉!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우렁찬 굉음이 터지며 강물에 떠 있던 화방 하나가 박살이 나 흩어 지는 광경이었다. 콰아아! 쏴! 쏴아아아- 물결이 해일이 일어난 듯 용솟음쳤다. 그것은 역사에 남을 장관이었다. "아이쿠! 뢰신(雷神)이 나타났다!" "용신(龍神)이 출수(出水)했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일제히 부르짖었다. 제 20 장 나타난 천지회(天地會) 금릉성 밖 교외에 위치한 종산(鍾山)은 산상에 자기(紫氣)가 어린다 하여 자금산(紫金山)이 라 불리던 곳이다. 모산의 일맥인 종산은 그 전체가 하나의 명승(名勝)이었고, 곳곳에 널린 것이 고적(古蹟)이 었다. 산의 기복이 심한 것이 호랑이가 웅크린 것 같고, 웅위장려한 산세는 질펀한 평야를 굽어보니 푸른 들과 녹수(綠水)의 그림자는 시야에서 사라질 줄 모른다. 성밖 서쪽을 흐르는 진회하의 그 질탕한 풍정(風情)과는 대조적으로 종산은 조용하고 엄숙 했다. 영곡사(靈谷寺)는 종산에 위치한 유서 깊은 대찰(大刹)이다. 그 영곡사의 객방에는 시인묵객이 묵기도 하지만 과거에 응시하려는 유생들이 대부분의 객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새 밤은 깊어 달빛[月光]이 사위를 휘젓고 있다. 흑의유생 한 사람이 땅위에 제멋대로 흐드러진 달빛을 밟으며 천천히 객방으로 향하고 있었 다. "아미타불... 이제 오십니까?" 고희에 접어든 듯한 노승 한 사람이 흑의유생에게 합장했다. "좀 늦었습니다." 흑의유생은 마주 합장해 보이고 나서 자신의 객방으로 들어섰다. 흑의유생이 방에 들어가 돌아서서 문을 닫는 순간, 탁! 하는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방안이 밝아졌다. 누군가가 등뒤에서 불을 켠 것이다. 그러나 흑의유생, 주천운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이 태연히 몸을 돌렸다. 객방은 그다지 넓지 않았고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벽에 붙은 침상 하나와 가운데 놓인 탁 자와 의자 하나가 기물의 전부였다. 지금 그 탁자에는 촛불이 살아나는 중이고, 그 뒤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오륙십 세 가량의 화자(化子:거지)가 서 있었다. "감법장령을 발동하신 분이 공자이시오?" 화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을 빛내며 침중하게 물었다. "그렇소."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새까맣게 빛나는 죽패가 쥐여져 있었다. "개방 제삼십칠대 제자인 금릉분타주 장이신개(長耳神 ) 우신웅(尤信雄)이 감법장령을 배견 합니다!" 죽패를 보자 화자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시오." 주천운이 감법장령을 거두며 말했다. "신마금검뢰 상관대협이십니까?" 몸을 일으킨 장이신개 우신웅의 말소리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주천운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고소가 스쳐 갔다. 신마금검뢰(神魔琴劍雷)는 이미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거대한 위명(威名)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그렇소." "영광입니다. 총타(總陀)로부터 전력을 다해 도움을 드리라는 연락은 이미 받았습니다... 가 장 큰일은 두 가지입니다. " 개방 금릉분타는 개방 강북 지역 정보의 총타이므로 그 정보망은 대단히 신속했다. "두 가지라니?" "그렇습니다. 하나는 공령천수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상관대협에 관한 것입니다." "나?" 주천운은 어리둥절한 빛이 되었다. "예, 바로 대협에 관한 것입니다." 신마금검뢰(神魔琴劍雷)! 느닷없이 나타난 그의 이름은 갑자기 강호를 진동했다. 그것은 기이할 정도의 속도로 강호상에 퍼졌는데, 거기에 또 한 가지가 덧붙여 퍼지기 시작 했으니 그것은 바로 이러했다. -신마금검뢰가 지녔다는 소형금은 바로 신비의 무림삼대천음의 하나인 현천고금(玄天古琴) 이다! "그 소문은 누가 퍼뜨린 것이오?" 주천운의 미간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번거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시피 합니다." "그 소문의 확산 속도는 어느 정도였소?" 주천운의 물음에 멈칫하던 장이신개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그리고 보니 좀 이상은 합니다. 마치 대협의 대명이 퍼질 때 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건지..." 주천운의 이름이 세상을 진동시킨 것은 무림제갈과 개방의 공작이 작용한 바가 컸다. 그런 데 그러한 작용보다 더 빠르게 소문이 퍼진다면 이 또한 인위적인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이다. 누가 현천마금을 안단 말인가? 순리적으로 보 자면 내게 마금을 건네 준 철담대협을 쫓던 자들이다. 그 목적은?' 주천운은 장이신개를 바라보았다. "그 소문에 관한 반응은 어떻소?" "대단합니다. 공령천수가 가지고 있는 장보도 때문에 들떠 있는데다 그 소문이 나자, 천하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그걸 노렸군! 천제문은 아니다. 제삼의... 삼...!' 주천운의 뇌리에 문득 칠황야가 죽으면서 남긴 '삼(三)'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중원 각파는 물론, 은거했던 기인고수들까지 대협을 찾아 몰려들고 있 습니다." 장이신개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고맙소. 그리고 공령천수에 관한 것은?" 주천운은 담담히 대꾸하고 다시 물었다. "그게 묘하게 되어 군웅들이 한데 몰려들고 있는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공령천수 왕가달의 종적이 맨 처음에 발견된 곳은 개봉(開封) 방면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군웅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 다음에 발견된 곳은 개봉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대별산(大別山) 입구였는데, 그 이후는 잇달아 숨막히는 추격전이 계속되고 그를 쫓는 인원 이 많아져서 지금은 금릉에서 오백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황산(黃山)에 잠적하고 있었다. "공령천수의 경공이 아무리 대단해도 천하군웅의 추격을 벗어날 수는 없지요. 고수들이 황 산을 이 잡듯 뒤지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얼마나 모여들었는지 알 수 있겠소?" "그건 좀 시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만 봐도 일장의 대성회(大盛會)인 셈입 니다. 구대문파에서도 참가했고 이맹과 남궁가를 제외한 이가... 그리고 흑령곡을 제외한 삼 곡도 모습이 보이고 흑도의 세력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사람이 자꾸 불 어나고 있습니다." 잠깐 말을 멈춘 장이신개는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금릉쪽으로도 인원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 말뜻은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고소를 머금던 주천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낭패로군! 한 가지 부탁을 해야 되겠소." 주천운의 음성은 가라앉고 있었다. 미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도와 드리겠습니다." 장이신개의 대답을 뒤로 하고 주천운은 탁자에 있던 지필묵을 들어 번개같이 일필휘지하여 한 통의 봉서를 작성했다. "이것을 최대한 빠른 방법으로 남궁가주에게 보내 주시오." "남궁가주께, 알겠습니다!" 봉서를 받아든 장이신개는 뭔가 급박함을 느낀 듯 급히 공수하고 나서다 멈칫했다.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일?" "예, 서역쪽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인데... 그 소식을 보낸 사람이 실종되어 무 슨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몽고쪽이 아니고 서역이라고?" 주천운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렸다. "그렇습니다." "그 소문의 진위와 어떤 움직임인지 확실히 알아 내주시오." "알겠습니다." 주천운은 장이신개를 보내고 조용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하늘이 맑고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주천운은 눈을 감고 조용히 달빛 속을 거닐기 시작했다. 지난날이라면 그는 이백의 시구를 읊조리며 이 밤의 달빛을 감상했으리라. 하지만 지금 그 의 심중에는 그러한 여유가 없었다. '시간은 모자라는데 오히려 번거로운 일만 생기고 있다. 내일이면 금릉을 떠나야 한다!' 갑자기 주천운은 발걸음을 멈추며 눈을 떴다. "나 때문에 밤이슬을 맞으며 더 이상 고생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난데없는 그의 중얼거림에 모든 것이 갑자기 월광 속으로 빨려들 듯 적막 속에 잠겨드는 듯 했다. 풀벌레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굳이 내가 모셔 내야 하겠는가?" 주천운의 눈길이 처마의 그림자에 가려진 바위로 향했다. 팍- 한 인영이 바위 뒤에서 야조(夜鳥)와 같이 솟아올랐다. 그 속도는 비길 바 없이 빨랐다.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간다? 세상에 그렇게 쉬운일이 어디 있을까?" 주천운은 그것을 보고 픽 웃었다. 한편, 장이신개는 큰일을 맡았다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일 은 시간 단축이 최선임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금릉주변은 눈을 감고도 환한 그인지라 지름길로 번개같이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이신개는 갑자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누가 따라온다!' 장이신개란 소문에 밝은 것만 아니고 천성적으로 귀가 밝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연히 남 보다 잘 들을 수 있었다. '나보다 고수다!' 암중에 귀를 기울여본 장이신개는 갑자기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가 유성간월(流星刊月)의 신 법을 전력을 다해 전개하는 순간에 그의 앞에 한 인영이 유령과 같이 나타났다. 장이신개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이미 수십 년을 강호에서 눈치로 살아온 그인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미리 준비한 타구봉을 규화타구(叫化打狗)의 초식으로 휘둘러 나타난 인영을 덮쳤다. 인영이 막거나 피하면 그대로 도망칠 셈인 것이다. "흐흐-사람을 잘못 골랐다!" 인영은 그의 공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이런 경우는 미쳤거나 확실한 자신이 있을 때뿐이다. '잘못되었다!' 장이신개가 속으로 외치는 순간, 그는 자신의 타구봉이 격렬하게 진동함을 느꼈다. 인영이 유령처럼 덮쳐 오고 있었다. 그의 손이 타구봉을 쳤는데, 놀랍게도 그 일격에 장이신개는 기혈이 진동됨을 느끼면서 잇 달아 물러나야 했다. "거지치곤 제법이군..." 인영은 장이신개가 타구봉을 놓치지 않는 것이 의외인 듯 음랭히 외치곤 물러나는 장이신개 에게 유령처럼 덮쳐왔다. 장이신개는 타구봉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상대의 일격은 너무도 신속해 이미 기회가 없었 다. 단 한 수에 장이신개의 목숨은 경각에 놓인 것이다. "손을 치워라!" 바로 그 순간에 침중한 호통이 들려 왔다. 동시에, 강력무비한 도세(刀勢)가 폭우와 같이 인영에게 쏟아져내렸다. 인영은 도세가 너무 강해 도저히 맨손으로 막아 낼 수 없음을 경각하고 번개같이 몸을 굴려 물러났다. 대저,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몸을 굴린 다음에 다시 일어난다면 일어서 있는 것보다 응변 이 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경우라는 것은 절대적인 위기일 때뿐일 것이다. 삼 장 밖에서 번개처럼 일어나는 그의 손에는 이미 월아도(月牙刀)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과연 하수가 아니었다. "그까짓 쇠막대기를 든다고 결과가 틀려진다더냐?" 차가운 웃음소리와 함께 가공할 도세가 그대로 인영에게 덮쳐갔다. '한번만 막아내면 기회가 있다!' 인영은 전력을 다해 월아도를 쳐올리며 몸을 뒤로 빼내려 했다. 그는 처음부터 장이신개를 얕보고 행동했으므로 이 돌변한 상황하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와 도가 맞부딪쳤다. 쨍그렁! "으악!" 찰나, 피분수가 솟아나며 인영이 두 쪽이 되어 쓰러졌다. 인영이 날아오는 도를 자신의 월아도로 막기는 막았는데 그 도세가 너무 강력해 그의 월아 도가 부러져 나가고 만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가 막으려 했던 것은 패도(覇刀)라 불리던 것이었기에. "어서 가시오. 일을 끝낼 때까지는 보호해 주겠소!" 죽음에서 장이신개를 구해낸 복면인은 패도를 거두며 위엄 있게 말했다. 그의 기도는 일파 종사(宗師)의 것이었다. "누, 누구시오?" 반쯤 혼이 나간 장이신개가 얼떨떨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분을 모시는 사람이오. 서두르시오." 복면인은 손짓해 보이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분명히 방주님보다도 강해 보인다... 모시는 사람? 도대체 상관대협은 어떤 사람이기에?' 장이신개는 멍청한 빛이 되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전력을 다해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으헉?!" 바위 뒤에서 몸을 날리던 인영은 경악한 외침과 함께 급급히 몸을 세우고 말았다. 그의 앞, 채 이 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천운이 흑의를 펄럭이며 태산과 같이 서 있지 않는가? '이토록 빠를 수가?' 인영은 혼비백산해 번개같이 땅을 박차고 몸을 뒤집어 다시 돌아가려 했다. "서라!" 주천운이 그를 쏘아보며 침중히 외쳤다. 그 음성에 실린 절대(絶大)한 기도를 어찌 설명하겠는가. "으...!" 인영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날리려던 신형을 태산에 짓눌린 듯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청의복면인이었다. 체구는 왜소한 편이었으나 신형은 매우 날렵해 보여 경공에 특출해 보였 다. "너는 누구의 명을 받고 나를 감시하는 것이냐?" "가, 감시라니... 나, 나는 그냥 종산에 누구를 찾..." "나를 기만할 셈이냐?" 주천운의 음성이 종을 때리듯 울렸다. 그 음성은 크지 않았으나, 청의복면인에게는 유독 벼락을 치는 것 같았다. 그는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압력을 느꼈다. "으으... 이런 일이...!" 그는 입술이 말라오고 진땀이 솟아나 복면이 젖어오자 정신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주천운의 기도는 하루하루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속한 곳이 어디냐?" 주천운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으으... 처... 천지회(天地會)... 으으악!"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열던 청의복면인은 갑자기 악을 쓰면서 쌍수로 주천운의 가슴을 쑤셔 왔다. 그들의 거리는 지척인데다가 그 일격은 제아무리 일류고수라도 피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주천운은 그것은 보지도 못한 듯 중얼거렸다. "천지회?" 천지회(天地會)는 일회이맹삼가사곡 중 바로 일회를 지칭한다. 신흥 십대세력 중 가장 신비 한 곳이다. 그들이 강호에서 활동한 것은 이미 이십 년이나 되지만 아무런 뚜렷한 움직임을 보인 적도 없고, 천지회주가 누군지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조차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기 이하게 천지회는 십대세력의 수위(首位)에 있었다. 우직! "으-악!" 청의복면인이 참담한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크으으... 그, 금강불괴라니?" 청의복면인은 으스러진 자신의 두 손을 보고 온몸을 떨었다. 지독한 고통이 치를 떨게 전신 으로 엄습해왔다. "태산에서부터 너희들은 나를 따랐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 항거할 수가 없다아...' 청의복면인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모, 모르오. 그냥 감시하라는 명령만 받았..." "금릉 일대에 나를 감시하기 위해 깔린 인원이 몇이냐?" 청의복면인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그, 그것까지! 감시하는 상황을 다 알고 있었구나!' "비, 비령당의 영주 셋과 향주 열둘이..." "제이령주! 너의 간담은 실로 대단하구나!" 청의복면인이 완전히 주천운의 기세에 억압되어 신나게(?) 대답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사방에 메아리 치며 들려왔다. "헉!" 청의복면인의 눈에 공포의 빛이 드러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그는 짤막한 신음과 함께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독을 삼켰다!' 주천운의 눈빛이 굳어졌다. 청의복면인은 일류고수였고 그는 유사시 조금도 주저없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도록 훈련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주천운의 기세에 미처 자결할 생각도 못한 상태였다. 자결이나,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청의복면인이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주천운에게서 형성되기 시작하는 일종의 기세 때문이었다. '나의 심령공제(心靈空制)에서 대번에 벗어나도록 만든 것을 보면 평소 어느 정도의 훈련을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겠다.' 주천운은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칠 수 있어도 현신(現身)할 용기는 없는 졸장부였던가?" 그의 눈은 백여 장 떨어진 영곡사 석등(石燈)을 향하고 있었다. "으하하..." 뒤를 이어 한소리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한 가닥 청영(靑影)이 번개 같은 속도로 석등 뒤에서 날아올랐다. "허락도 없이 갈 수는 없다!" 주천운은 청영의 의도를 짐작하고 코웃음 쳤다. 순간, 그의 신형은 벼락같이 야공(夜空)을 가르고 있었다. 와르-릉! 일진광풍이 밤의 고요를 깨뜨리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 회오리치며 일어날 때, 주천운은 이 미 수십 장을 날아 청영에게 비스듬히 일 장을 갈겨내고 있었다. 그 장세는 매우 기이하며 춘풍(春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대반야장(大般若掌)?" 청영의 입에서 경악한 음성이 터졌다. 놀람의 외침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다음 순간에 청영의 전신에서 회색빛이 일어나며 주천운 의 대반야장을 막아갔다. 설명은 그러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거리는 아직도 근 오륙 장에 달하고 있으니 그 장세 들이 얼마나 가공스러운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독공(毒功)이군!" 주천운이 침중히 외쳤다. 꽈꽝! 벼락치는 음향과 함께 무서운 경풍이 소용돌이치며 일어났다. 곁에 있던 석등(石燈)이 그 경풍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날아갔다.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던 석등이었다. "윽!" 청영이 묵직한 신음과 함께 허공에서 재주를 넘었다. "으흐흐... 과연 신마금검뢰의 위명은 명불허전이로군! 다음에 다시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 다!" 청영의 입에서 음랭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에 청영의 몸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장세의 반동으로 화살과 같이 날아가고 있 었다. '회회천독공(灰灰千毒功)! 이것은 구대독공 중 실전된 사대독공 중의 하나인데?' 주천운은 번개같이 생각을 스쳐 보내며 냉소했다. "뢰(雷)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뇌정군림!" 꽈르-릉! 일진 굉음이 터져 나오며 그 자리에서 태풍이 일어났다. 우당탕! 휙! 휙! 영곡사 객방의 기와가 날아오르고 십오 장 밖의 불탑이 휘청거릴 때,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백 장을 날고 있었다. "뭐... 뭐야?" "지, 지진이야? 태풍이야?" 스님과 유생들이 혼비백산해 덜덜 떨면서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으아! 이건 사람의 속도가 아니다!' 백십여 장이나 떨어졌던 주천운이 단숨에 삼사십여 장 거리로 추격해오자 청영은 머리 끝이 공포로 곤두섰다. 그 또한 천하고수로 자부하는데 저런 신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지 않 는가? 무슨 놈의 신법이 저렇게 요란하단 말인가. 그때, 그의 눈앞 십여 장 앞에 종산에서도 가장 울창하다는 담림이 나타났다. '살았다!' 청영은 거세게 진기를 들여마시며 생애 최고의 신법을 전개했다. "게 서라!" 주천운이 담림 삼십 장 밖에서 그걸 보고 호통 쳤다. 쏴아-앙! 한 무더기 광채가 벼락 같은 기세로 주천운의 손에서 폭사되어 청영을 덮쳐갔다.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이다!" 혼비백산한 음성이 터지는 순간, 청영의 모습은 담림 속으로 사라지고 광채는 번개같이 그 곳을 휩쓸었다. 광채는 허공을 선회하며 담림 앞에 내려서는 주천운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호국지존병이었다. 비록 빛은 잃고 있으나 그 예리함은 여전했다. 우지끈! 퉁탕...! 그 순간, 호국지존병이 스쳐간 곳의 십 장 가량 내의 모든 수목이 반 동강이 되어 넘어졌다. 하늘을 가릴 듯 일어나는 흙먼지... 엄청난 위세였다. "대단한 자로군..." 주천운은 쓴 표정이 되어 쓰러지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청영은 아슬아슬하게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막 포기하려던 주천운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핏자국?" 주천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담림 속으로 쏘아져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이미 천안통을 시전하여 어둠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있었다. 이즈음 주천운은 달마 역근경주해(達磨易筋經註解)를 거의 다 터득한 상태였다. 주천운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內 家), 특히 권장(拳掌) 방면에서는 소림절학이 독보(獨步)임을 깨닫고 있었다. 청영은 상처를 입은 듯 십여 장 간격으로 핏자국이 나 있었다. "대단히 교활하군!" 빠르게 전진하던 주천운이 신형을 멈추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부터 핏자국이 사방으로 뿌려져 있고 그리고는 완전히 흔적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백여 장 주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안다..." 주천운은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눈을 감고 이번에는 천이통(天耳通)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스스스... 모든 소리가 엄청나게 확대되어 오기 시작했다. 바람소리와 같은 음향이 백 장 정도 밖에서 들려 왔다. 그것은 단숨에 수십 장을 미끄러지는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뜻밖에 참을성이 없군?" 주천운의 입가에 의미 모를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르릉! 일진광풍이 일어나는 순간에 그의 신형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졌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휘청 거리던 나뭇가지들이 안정을 되찾을 때, 주천운이 있던 곳에서 사십 장쯤 떨어진 곳에서 먼 지를 흠뻑 뒤집어쓴 인영이 나타났다. 그것은 뜻밖에도 바로 주천운이 쫓던 청영이었다. "무... 무서운 놈! 무당의 전대장교(前代掌敎)인 표운자(飄雲子)도 저놈과 같은 이기어검술은 전개하지 못했었는데..." 그는 온통 피로 물든 어깻죽지를 움켜잡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역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놈이다! 계획을 수정해야 된다..." 그는 이를 악물더니 번개 같은 신법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는 꿈에도 몰랐다. 그의 뒤를 뒤따르기 시작하는 그림자가 있음을, 그는 황궁제일고수라 불렸고 지금은 지존위 의 대장인 정문수라 불리는 초강고수였다. '대단한데?' 주천운은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가 쫓는 청영의 신법이 자신의 속도에 별로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갈 수 없다! 게 서라!" 꽈르-릉! 일진 굉음이 주위를 진동하는 순간, 주천운의 신형은 섬전과 같이 이십여 장 밖의 청영을 덮치고 있었다. "감히!" 엄청난 광풍이 몰아쳐 오자 청영은 경악하여 몸을 틀어 미끄러져 소매를 휘저었다. 파팟! 한성(寒星)이 폭발하듯 소매 속에서 쏟아져 주천운을 덮쳤다. 하지만 뇌정군림신법(雷霆君臨身法)은 신법 이전에 하나의 신공이 아니던가? 일단 신법을 전개하면 몸 주위에 강풍( 風)이 일어나 금성철벽(金城鐵壁)과 같은 보호막이 형성되어 그 어떠한 공격이라도 그를 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의 몸은 용화대수미선공으로 거의 금강불괴지신이 되어 가는 중인 것이다. 피피핑! 예리무비한 암기들은 주천운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강풍에 휩쓸려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튕겨져 나갔다. 찌-이익! "아악!" 비단폭 찢어지는 음향과 함께 그에 못지않은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가 잘못되었다!' 그대로 덮쳐 가려던 주천운은 괴이한 감촉에 문득 몸을 세우고 말았다. 그 쾌속한 주천운의 십이금룡수(十二擒龍手)를 청영은 놀라운 신법으로 벗어났지만 아슬아 슬한 차이로 가슴팍 옷이 잡혀 그대로 쫙 찢겨 나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터진 금속성의 비명과 손끝에 느껴지는 뭉클한 감촉은 대체 뭘 말하는 것인가. 휘청거리며 몸을 세우고 있는 청영의 체구는 뜻밖에 왜소했고 배까지 찢겨진 청의 사이로는 뿌연 여인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숲속의 어둠이 제아무리 깊다 해도 그 속에서 드러난 여인의 가슴은 처절하리만큼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낭패로군!' 주천운은 급히 외면을 했다. 청의여인이 황급히 가슴을 가리며 매섭게 소리쳤다. "신마금검뢰가 천하의 기남자(奇男子)라 하더니, 이따위 파렴치한일 줄이야!" 뭐라고 할말이 있을 리 없었다. 펑! 말도 채 끝나지 않아서 청의여인이 옥장을 휘둘러 주천운의 가슴을 쳤다. "윽...!" 짧은 신음과 함께 주천운은 비틀 한걸음 물러났다. 그의 가슴을 치고는 은은히 팔이 저림을 느낀 청의여인의 복면 속의 봉목(鳳目)이 경악으로 커졌다. '내 파옥신장(破玉神掌)을 피하지 않고 맨몸으로 받아내다니...?' "미안하오. 사람을 잘못 보았소." 주천운은 약간 당혹한 음성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감히 그녀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 다. 하지만 그는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호신강기가 흩어질 뻔했다. 도대체 이 여인이 누구이기에 이런 능력을...' 주천운은 몸을 돌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은 틀림없으나... 소저는 어떻게 나를 아시오?" 차라리 얻어맞되, 감히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것을 본 청의여인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 다. '이 사람은 무림인이 아니라 도학군자(道學君子) 같구나?' 그의 태도는 너무도 뜻밖인지라 노기충천했던 청의여인은 묘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밤바람이 돌연 서늘하게 불어왔다. 찢겨진 옷자락이 휘날렸다. 가슴이 서늘했다.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든 청의여인은 옷자락을 부여잡아 가슴을 가린 채 입을 열었다. "어찌 모를 리가 있겠어요? 바로 당신을 찾아왔는데!" 그녀의 말에 주천운은 의아한 빛을 떠올렸다. "나를?" "그래요. 신마금검뢰가 무림사신(武林四神)보다 빠르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정말인가 보러 왔어요!" 여인의 목소리는 은방울보다 더 낭랑했다. "무림사신?" 주천운이 의아한 빛으로 문득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여인의 신형은 이미 십여 장을 밖으로 쏘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이대로 가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쉽지 않을 거예요!" 여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왔다. 가슴을 드러내놓고서야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운해비영(雲海飛影)?" 그녀의 날렵한 신법을 본 주천운의 뇌리에 문득 네 글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운해비영이라는 이름은 중원사신 중에서 내력이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신비인(神秘人)을 일 컫는다. 운해비영의 운해유영비(雲海遊影飛)는 강호칠대신법에서도 손꼽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정말 운해비영일까. 제 21 장 대호친왕부(大昊親王府) 금릉(金陵) 대호친왕부(大昊親王府)! 선황의 셋째 아우[三弟]이자 당금 황제의 셋째 숙부인 주진(朱眞)의 왕부가 바로 이곳이다. 선황의 오남매 중 막내인 대호왕 주진은 총명절륜한데다 야심이 커 선황은 언제나 그를 주 시했었다. 그러나 그러던 대호왕 주진도 병석에 누운 지 이제 십 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대 왕부사상(王府史上) 가장 막강하다던 대호친왕부의 세력도 그 와중에 흩어지고 말았으 니, 아들 하나없이 자운군주 하나만 슬하에 둔 대호왕의 야심도 그와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무심한 것이 세월인 것이다. 주천운은 야행의로 몸을 감추고 복면을 한 채 대호친왕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마금검뢰의 신분은 이곳에서는 드러나지 않아야 했다. '태원(太原)에 있는 나의 대혜왕부(大慧王府)보다 그 규모가 배는 되는구나...' 주천운은 단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자신의 왕부를 문득 생각했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으나 그곳은 평화롭지 않은가. '천하가 안정되는 대로 황궁이 아닌 내 왕부로 돌아가리라!' 잠시 왕부의 상황을 살피고 있던 주천운의 신형이 기척조차 남기지 않고 대호친왕부의 후원 으로 잠입하기 시작했다. 은신과행술(隱身過行術)이었다. 삼(三)! 주천운은 칠황야 주서운이 죽으며 남긴 그 한 글자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바로 삼황숙(三皇 叔)인 대호왕 주진이라고 생각했고 드디어 몸소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비록 지난날의 세력이 흩어졌다고는 하지만 대호친왕부의 경비는 삼엄했다. 어차피 지난날의 세력이 그대로 있다고 해도 사심귀진(邪心鬼眞)에서 연유된 잠영술(潛影 術)까지 발휘하고 있는 주천운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주천운의 눈앞에 한 채의 고루(高樓)가 나타났다. 고루의 경비는 한층 더 삼엄하고 삼층 고루의 맨 윗층에는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간은 삼경을 넘어서고 있었고, 때마침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 사위가 더욱 짙게 어둠에 묻 혔다. 그 순간을 이용해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흔적도 없이 고루의 맨 윗층에 올라가 있었다. '사도(邪道)의 무학은 정명(正明)하지는 않으나 이럴 때는 정도지학을 능가한다.' 주천운은 사심귀진 등 몇 개의 사공비급을 떠올리며 소리없이 불빛이 흘러나오는 창문에 눈 을 가져 갔다. 찰나. '아이쿠!' 주천운은 하마터면 지붕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창문 안은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침실인데, 창문에서 조금 떨어진 곁에는 사람 서넛은 누 울 수 있는 커다란 침상이 놓여 있고 거기에는 방금 목욕을 끝낸 듯한 나체의 여인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물기 머금은 흑발(黑髮)은 어깨 위로 치렁치렁하고 그 삼단 같은 머리를 닦는 수건을 쥔 손 은 또한 은어를 방불케 한다. 한껏 부푼 두 유방은 손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듯 흔들리며 백옥 양지유와 같은 흰 옥부(玉膚)는 눈이 부시다. 엷은 목욕용 사의(紗衣)로 흐르듯 휘감은 밑으로 드러나 는 그 늘씬한 두 다리의 미묘한 곡선은 또 어떠한가. 물기 머금은 싱싱한 여인의 나신은 미의 극치라는 말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그 현란한 미녀도가 창문에서 채 일 장도 떨어지지 않은 지척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호국지존이 졸지에 목욕한 여인의 나신이나 훔쳐보는 치한이 된 셈이었다. 그런데 질색을 하고 눈을 떼던 주천운이 불현듯 다시 창문에 눈을 가져가지 않는가? '그녀란 말인가?' 고개를 돌리던 그는 나체미녀의 얼굴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그 탄력있게 흔들리는 젖가슴까지도. 거기에는 뭔가 그의 눈을 끄는 것이 있 었다. '지매(芝妹)...!' 주천운의 가슴은 갑자기 터질 듯 뛰었다. 그는 낮에 자운공주 주란지를 본 적이 있었다. 근 십 년 만에 몰라보도록 커버린 그녀의 모습을. 그런데 그녀가 이번에는 터질 듯 부푼 성숙한 여인의 나신(裸身)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겨우 일곱 살의 철부지 계집아이, 나이답지 않게 근엄한 주천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깜 찍한 계집애 주란지. -난 천운 오라버니가 제일 좋아! 이 다음에 나는 천운 오라버니에게 시집갈 테야! 반 년 만에 왕부로 돌아가면서 울음을 터뜨리던 잊혀졌던 그 꼬마 계집아이, 그 계집애는 이제 무르익은 여체를 가진 절세의 미녀가 되어 주천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 이다. '너무나 변했구나!' 주천운은 새삼 자운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막 목욕을 끝낸 미인의 청초한 얼굴은 가슴 떨리게 아름다웠다. 아니, 너무도 눈부시게 빛을 뿜는 나신으로 인해 얼굴이 빛을 잃는 느낌이랄까. 아니,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막 머리를 털어 낸 그녀가 양손으로 젖가슴을 받쳐드는 것이 아닌가? 탄력의 상징과 같은 부푼 가슴이 그 손에서 꿈틀거리며 튀어오르는 듯했다. 주천운은 다시 외면을 해야 했다. 그 순간에 자운군주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공력이 이토록 무서울 줄이야! 내 호신진기는 이미 한 치 앞의 모든 것을 막아내는 경지인데도 옷이 찢겨나가고... 스친 것인데도 이토록 멍이 들고 내부가 진동되다니..." 그제서야 주천운은 조금 전에 자신이 왜 방안을 다시 들여다 보았는지 생각이 났다. '전혀 나답지 않군...!' 그는 내심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정력은 당대 최고라 할 만하여 자운군주의 나신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것을 다시 훔쳐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리는 없었다. 그가 다시 자운군주의 나신을 본 것은 이유가 있 었다. 다시 방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길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자운군주가 받쳐들고 내려다보는 그녀의 왼쪽 유방에는 은은히 멍이 들어 있음이 보였다. "외간 남자의 손이 십칠 년 간이나 고이 지켜온 내 몸을 스치다니..."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던 자운군주는 문득 양손으로 가슴을 싸안으면서 털썩 침대에 몸을 실 었다. 출렁이는 침대에 앉아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단 두 번 만났을 뿐인데! 지난 십 년 간 천운 오라버니에게 지켜온 감정보다 그 인상이 더 강렬하다니..." 그녀는 뭔가 착잡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분홍빛 입술이 터질 듯했다. '나를 잊지 않았다니... 어린아이 때의 그 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단 말인가!' 자운군주의 중얼거림에 주천운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묘한 감동과 같은 것이 가슴 에 전해져왔다. 그 감정의 미묘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때, 문득 침상 옆에 내던져진 청의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 부분이 찢겨져 있었다. '정녕 그녀가 운해비영이었단 말인가?' 주천운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보고 놀라 신음했다. 황실의 천금이 무림 중에 알려진 고수라니? 그 놀람으로 인해 주천운은 자칫 미세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귀를 기울여도 듣기 힘든 음향이건만, 아미를 찡그린 채 이마를 짚고 있던 자운군주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누구냐?" 쉭! 쉭! 그녀의 손이 벌어지며 예리무비한 지풍(指風)이 격사되었다. 찰나간에 잠옷을 들어 몸을 가린 그녀가 창문 밖을 보았을 때,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있었다... 설마 그가?' 잠옷을 가슴을 가린 채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사방을 쓸어보는 자운군주의 멍든 가슴은 급격히 뛰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어둠과 이제 다시 구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달빛뿐이었다. 바람이 나뭇 잎들을 무심히 흔들고 있었다. '지매가 운해비영이었다니...' 소리도 없이 몸을 날리고 있는 주천운은 도둑질하다 들킨 심정이었다. '운해유영비... 그리고 조금 전의 쇄옥파운지(碎玉破雲指)! 이것들은 모두 실전되었던 것들이 고 최고절학이다. 과연... 우연인가?' 차츰 흥분했던 주천운의 가슴은 무겁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다시 높은 누각 하나가 나타났다. <만뢰전(萬賴殿)>. '삼숙이 있는 곳이다...' 이미 자운군주가 절세고수임을 안 주천운은 추호도 방심할 수 없었다. '진(陣)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상승진도(上乘陣圖)는 아니다...' 주천운은 조금의 흔적도 없이 번개같이 만뢰전 안으로 스며들었다. 만뢰전은 모두 삼층, 주천운은 만뢰전에 들어서자마자 만뢰전 전체가 약냄새로 가득 차 있 음을 알게 되었다. '고려산삼... 북해녹용... 와병이 진정인가?' 대강의 냄새를 분간한 주천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들은 있으나 일층을 수색하고 있는 주천운을 발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겨우 밖의 구구대환진(九九大幻陣)을 믿고 이런 정도의 경비라면...' 스-윽! 주천운의 신형이 소리도 없이 천정에 올라가 붙었다. 시녀 하나가 약그릇을 받쳐 들고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숙모를 여의시고 아직 혼자인가?' 주천운은 소리없이 시녀의 뒤를 따랐다. 이층 복도를 걸어가자 안광이 형형한 중년위사 둘이 지키고 선 방문이 나타났다. "탕제(湯劑;약)입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 들어가보아라." 위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시녀가 들어갈 때, 마도(魔道)의 잠영술로 한 인영이 안으로 스며든 것을 그들 은 미처 알지 못했다.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의자에 앉은 노인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비범한 고수... 저들의 눈을 속이기는 힘들다.' 시녀의 뒤를 본 노인들의 눈에 놀람이 드러났다. 그러나 놀람은 놀람으로 끝났을 뿐, 그들은 소리를 치지도, 일어나지도 못했다. 주천운이 그 들을 향해 격공점혈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것이 회오대사가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소림 탄지 신통임이었다. 그 문안은 침실이었다. 휘장이 늘어진 침상에는 한 노인이 자는 듯 누워 있었다. "전하, 탕제를 드실 시각이옵니다." 시녀는 약그릇을 내려놓고 망설임없이 휘장을 걷으며 말했다. 그것은 그녀의 행동이 일상임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음-벌써 그... 렇게 되었느냐?"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던 노인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침상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주천운을 발견한 것이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다 주천운을 발견한 시녀는 대경실색해 노인의 앞을 막아 서며 외쳤다. "누, 누구냐? 감히 예가 어딘 줄...!" "그만두어라. 예가 어딘 줄 모르고 힘들여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인의 음성은 말할 수 없이 침착했다. "걱정 마라. 전하께 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뜻밖의 태도에 흠칫하던 주천운은 시녀에게 조용히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신, 호경위(胡經偉), 호국지존의 명을 받들어 전하께 문후드리옵니다." "호국지존? 운아가 너를 보냈단 말이냐?" 노인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예, 지존휘하 지존위의 부위장이옵니다." 주천운은 몸을 일으켜 약그릇을 조용히 시녀에게 내밀었다. "약은 시간을 놓치면 효험이 덜한 법, 올리도록 하라." 그의 태도는 온건침착하여 실로 감탄할 만하였다. 시녀는 주천운에게 압도되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가져오너라." 노인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태도 또한 실로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십 년 와병에 늙고 병든 몸이나, 그의 눈동자와 사자코, 그 밑에 위엄있게 뻗어내린 반 백의 수염에는 군왕(君王)의 풍도(風度)가 어려 있었다. 이 노인이야말로 대호친왕부의 주인인 삼황숙 주진인 것이다. 단숨에 약을 비우는 삼황숙을 바라보고 주천운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녹용대보탕(鹿茸大補湯)에 육미지황(六味地黃)... 심폐(心肺)가 좋지 않으신 듯합니다?" 삼황숙은 흠칫 주천운을 바라보았다. "약의 향(香)만으로 그 성분을 알다니 호위장은 의도(醫道)에도 대단한 조예가 있군?" "가전(家傳)을 조금 배웠을 뿐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소장이 진맥을 해보고 싶습니다." "..." 삼황숙은 아무 말 없이 주천운을 바라보더니 껄껄 웃었다. "운아는 좋은 수하를 두었군! 좋아, 자네가 좋은 처방을 내려 주기 바라겠네." 삼황숙은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주천운은 이미 삼황숙이 반신불수임을 알아보고 있었다. 잠시 진맥을 하고 난 주천운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기공(奇功)을 연마하시다 심혈(心血)이 경맥을 역행(逆行)하여 주화입마에 드셨군요?" "과인의 욕심이 과했었지..." 삼황숙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회복할 처방이 있는가?" "지극화맥(地極火脈)의 화령지기(火靈之氣)가 있어야 하겠사옵니다." 주천운은 고개 숙였다. 그가 한 말은 대체로 맞는 것이었으나 실은 지금 그의 능력으로서 열흘 정도의 시간만 있으 면 삼황숙을 쾌차시킬 수 있었다. 그에게는 장보고의 영약과 화령신침 등이 있는 것이다. "지난날 가신의(價神醫)도 그런 말을 했었지..." 문득, 삼황숙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이제 의심이 풀렸는가?" "황공하옵신 말씀을, 의심이라니..." 주천운이 흠칫하자 삼황숙은 침중히 말했다. "비록 병중에 있으나 주진이 아직 노망까지 하진 않았지! 과인도 북경의 변고는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그리고 운아의 능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믿고 있다..." 삼황숙은 주천운을 바라보았다. "가서 전하라. 날개 얻은 맹호가 병든 노호(老虎)의 흉중을 염려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마음 은 있으되, 곁을 지나는 토끼도 잡을 수 없는 것이 병든 노호(老虎)의 서글픔이거든... 으하 하하하하..." 삼황숙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거기에는 비감(悲感)이 충만하였다. "윽... 쿨럭! 쿨럭..." 삼황숙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전하, 저, 전하...!" 시녀가 크게 당황하여 삼황숙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걱... 정할 것... 없다..." 삼황숙은 쿨럭거리며 손을 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주천운의 눈은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 * * 진회하에 뜬 그림배에는 날이 어두워지면 등이 하나 걸리게 된다. 유객등(誘客燈)이라 불리 는 그 등이 꺼지면 그 배에는 이미 손님이 있다는 표시다. 유객등이 꺼진 그림배 하나. 기녀조차 없는 선실에 주천운과 정문수는 마주앉아 있었다. "역시 삼황숙께서는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 칠황야를 조종한 것은 삼황숙이 아니시 겠..." "아직 단정할 수 없소." 주천운은 정문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의심이 가는 거라도? 지존께서 직접 확인을 하셨지 않습니까?" "삼숙의 태도는 의심을 살 만한 것이었소..." 정문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어조가 의심을 살 수 있음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만에 하나라 도 꺼리는 점이 있다면 그런 태도를..."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하지만 역(逆)을 찌를 수도 있소!" "장계취계(將計就計)?"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 잠시 침묵하던 정문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왕부에 대한 감시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더 강화시키되,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시오." "그럼 지존께선 아직 의심을?" "나는 삼황숙이 본인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소." "가짜? 그럴 리가? 지존께서 만나 본 인물은 보통 사람이 아님이 분명한데..." "그런 인물을 대신 내세울 수 있음이 더욱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소?" "..." 정문수는 질린 기색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나도 확신은 가질 수 없소. 내가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기를 바랄 뿐..." 주천운은 말끝을 흐렸다. '으음! 이런 머리싸움은 도저히 내가 지존께 미칠 수가 없구나!' 정문수의 생각은 주천운의 물음에 의해 중단되었다. "쫓아갔던 인물은 어찌 되었소?" "예, 그자는 뜻밖에 독심마유 우문술이었습니다." "우문술? 중원사마의 하나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독심마유(毒心魔儒) 우문술(宇文述)은 무려 백년 전부터 명성을 떨치다가 삼십 년 전부터 모습을 감춘 거마(巨魔)다. 그의 악독한 심계(心計)에 치를 떨지 않는 인물이 누구이겠는가? "그런 자가 천지회에 있다?" "그의 뒤를 쫓다 놓치기는 했으나 신이 알아 낸 바에 따르면 중원사마가 모두 천지회에 있 음이 거의 틀림없습니다." 그들 개개인은 능히 일방의 패주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일대의 거마인데 그들 모두가 한곳 에 몸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지회는 생각보다 더 엄청난 덩어리인지도 모르오..." "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지회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토록 이미 명령해 두었습니 다." "지존위의 행적이 드러나면 안 되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드러나지 않아야만 할 것이오." "명심하고 있습니다." "북경쪽은 어떻소?" "모든 것은 정상입니다. 호국지존과 태자께서 모든 것을 잘 처리하시고 계십니다." 호국지존이 북경에도 있다. 묘한 대답이었다. "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주천운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호국위의 훈련은?" 호국위(護國衛)라니? 주천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모두 신비로운 것뿐이었다. "예정대로인 것 같습니다." "암중에서 숨어 있는 제삼의 힘이 누구이건 간에 거기에 대한 대비는 있어야 하오. 어쩌면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단시간에 끝날지도 모르오." 주천운의 말은 묘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어 몰아칠 대혈풍(大血風)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 22 장 대혈풍(大血風)의 서곡(序曲) 기보(奇寶) 출현(出現)! 황산(黃山)에서 보광(寶光)이 솟아나고 있다. 신병(神兵)이나 절세기보(絶世奇寶)가 곧 모습을 드러내리라! 대풍운(大風雲)! 공령천수가 황산에 숨어들고 얼마 있지 않아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천하를 뒤흔들고도 남음 이 있었다. 천외쌍기의 장보도만 해도 가슴이 뛰는 판에 거기에 더하여 곧 모습을 드러낸다는 절세의 기보! 또 있었다. 금릉에 나타났다던 현천고금의 주인이라 전하는 신마금검뢰 상관천, 그도 황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나도 아닌 절세기보 셋! 천하의 모든 눈이 그곳으로 쏠리고 황산연도는 인파로 메워졌다. 황산은 일시에 풍운제회(風雲際會)의 장이 되었다. 관도. 두두두... 한 필의 백마가 급하게 네 발굽을 모으고 있었다. 눈이 부실 듯 흰 백마인데, 그 위에는 흑의의 유생이 타고 있어서 선명히 돋보이고 있었다. 유생(儒生)과 말은 원래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나 그에게는 부조화를 조화로 보이게 하는 힘이 있는 듯 오히려 그의 모습이 더 출중해 보였다. 세상에 상관천이라고 알려진 주천운(朱天雲)이었다. 마상의 그의 얼굴은 명경지수와 같으나 그의 내심은 먹구름이 일고 있었다. '내가 금릉을 출발한 것은 어제다. 그런데 내가 황산으로 출발했다는 소문은 이틀 전부터 나고 있었다!'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괴이하게 여길 일이었다. '뭔가 황산에서 꾸며지고 있다. 인원?' 주천운은 손에 쥔 종이를 다시 한 번 보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루가 그의 손가락 사이 로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그것은 개방에서 그에게 보내는 황산의 동정이었다. '황산에 모이는 인원이 너무 많다! 그곳은 이미 소무림(小武林)이다.' 주천운의 미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장백파(長白派)의 팔대고수가 황산에 도착하는 시간이 형산(衡山)의 원공(袁公)이 나타나는 시각과 같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장백산이라면 중원의 가장 동단이다. 황산까지의 거리는 형산에서보다 네 배 이상이나 되는 것이다. '장백산에 먼저 소문이 퍼졌다는 말 외에는 답이 없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찌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단 하나, 누가 소문을 조절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시간을 계산하면서 퍼뜨렸다는 가 정밖에는... 누구란 말인가? 누구든 간에 그 의도가 좋지 않음은 명백한 일이었다. 두두두... 풍(風)이라 이름 붙은 백마는 나는 듯 관도를 박차고 있었다. 황산까지는 오십여 리, 그는 이미 황산 지경에 들어서고 있었다. '잘못되었다!' 주천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쯤이면 상황 보고를 위해 개방의 고수가 마중을 나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주천운의 신형이 마상에서 날아올라 관도 옆의 숲속으로 들어갔다. 불과 십여 걸음도 들어가지 않은 곳에 중년거지 하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허리 의 매듭이 다섯이라면 오결 제자로서 개방의 일류급 고수다. 주천운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나를 기다리던 개방고수 같은데...' 엎어져 죽은 개방고수의 시신을 뒤집던 주천운은 그 참혹한 수법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였다. "음독(陰毒)하군! 시신 위에 무영지독(無影之毒)을 뿌려 두다니..." 주천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중년거지를 죽인 자는 그 시신에 무영지독을 살포하여 시신을 건드리는 자를 중독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무영지독보다 더 극독한 것이라도 혈천백옥수를 연성한 주천운의 손을 침범 할 수는 없었다. "개방고수가 함부로 종적을 드러낼 리가 없었을 것인데, 이것은 찾아내어 죽인 것이다..." 두두두... 저만치 갔던 풍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관도에 이상하리만큼 사람이 없다!' 미친 듯 사방으로 번지고 있는 소문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 다. 휙- 주천운의 몸이 낙엽처럼 백마 풍의 위에 떨어졌다. 이히힝! 백마 풍은 길게 울음을 터뜨리며 달리려 했다. 바로 그때, 주천운이 달려온 관도쪽에서 한 인영이 번개같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인영이 달려오면서 급급히 외쳤다. 인영의 경공은 상승수준이어서 단숨에 주천운의 앞에 도달했다. 그 인영은 뜻밖에도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열너댓 살 가량의 소화자(小化子)였다. "허... 헉... 사... 상관대협이십니까?" 숨이 턱에 차 소화자가 더듬거렸다. '육결(六結)?' 고개를 끄덕이던 주천운은 소화자의 신분이 육결임을 알아 보고 의외란 빛을 띠었다. 육결이라면 주요 분타주 이상의 신분이 아닌가? "혹, 소형제가 소신풍(小神風)?" "에헤헤... 과연 상관대협께선 안목이 높으십니다." 소화자는 주천운이 자신을 알아보자 기분이 좋은 듯 히쭉 웃었다. 소신풍(小神風) 악비룡(岳飛龍)은 다음 대 개방의 방주로 내정된 장문제자(掌門弟子)다. 그 는 개방제일기재로 호칭받는 만큼 나이 열다섯에 이미 개방의 모든 절기에 능통했고, 특히 사백인 무영개신에게 전수받은 무영섬(無影閃)은 무영개신를 능가하는 지경이라 소신풍이란 이름은 거기서 연유되고 있었다. 그는 장난의 천재라는 악동이기도 했다. "한데 무슨 일인가?" 주천운은 소신풍의 몸에 격투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았다. "연락망이 두절되어 직접 오는데 괴한의..." 침중한 안색이 되던 소신풍의 안색이 싹 굳어졌다. 죽어 넘어진 개방고수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건드리면 안 돼! 그의 몸에는 무영지독이 살포되어 있다!" 주천운은 다가가려는 소신풍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으으... 누가 그랬습니까?" 장난기는 없다. 냉철하고 분노한 기색만이 소신풍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이 아이로 인해 장차 개방이 크게 일어나리라!' 내심 고개를 끄떡인 주천운이 입을 열었다. "나도 방금 발견했으니... 황산 주위에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방 주는 지금 어디 계시는가?" "사부께선 이미 하루 전에 황산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말을 하자 소신풍의 눈에 다급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런데 통신망이 끊어졌다고?" "예, 그래서 제가 직접..." 소신풍 악비룡은 그제서야 생각이 미친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본방의 정보망에 의하면 천제문의 고수들이 남궁가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궁가? 천제문? 그게 틀림없는가?" 주천운의 눈에도 긴장이 일어났다. "틀림없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실혼마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오십 명 가량 거기 섞여 있었다 고 합니다." 오십 명의 실혼마인이라면 실로 가공할 세력이다. "남궁가에서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소식은 보냈습니다만 연락을 맡은 자가 도중에서 피살체가 되어 발견되었습니다. 어젯밤부 터 살해된 본방의 제자는 이미 팔십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통신망에 거의 와해 된 상황입니다!" 소신풍은 분노한 빛으로 죽은 개방의 고수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개방의 이목을 막겠다는 의도로군! 방주께 연락이 되겠는가?" 소신풍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소신풍 악비룡은 품속에서 매끄러운 동패를 꺼내더니 햇볕에 반사시키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본방의 경영전식(鏡影傳息)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연락방법이지만 중간의 전달 자가 없으면..." 그것은 전달자가 전달의 능력이 없어졌음을 뜻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전달자의 죽음이다. 주천운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대로 두면 남궁가는 멸망할 것이다. 그들의 힘을 남궁가 단독으로 맞설 수는 없을 텐 데..." "그리 가시겠습니까?"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조호이산인가? 공성계인가..." 주천운의 눈에 망설임의 빛이 나타났다. "사... 상관... 대... 협..." 바로 그때, 끊어질 듯 아주 다급한 외침이 관도 옆의 숲 저쪽에서 급박하게 들려 왔다. 주천운의 눈이 빛났다. 백사십여 장 밖, 한 인영이 나무 사이를 돌면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데, 그 바 로 뒤에 세 명의 청의인이 따라붙고 있음이 보였다. 한눈에 그 신수가 도망치는 인영보다 높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으-악!" 인영이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멈춰-라!" 주천운이 우렁찬 호통을 치는 순간, 그의 몸은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꽈르-릉! 우지끈! 일진 광풍과 함께 그가 지나간 곳의 나무가 부러지고 황진이 하늘을 가렸다. "차... 참말이었군! 움직이면 뇌성이 친다더니!" 소신풍은 그 엄청난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시... 신마금검뢰다!" 쓰러진 인영을 덮쳐 가던 자들이 그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호 출도 제구일째, 그 단시간에 이런 위명을 이룬 자가 고금사상(古今史上)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 우르-릉! 흙먼지가 일어나고 풀포기가 뽑혀오르고 나뭇가지가 머리를 푼 미친년처럼 춤을 추는 가운 데, 주천운은 이미 쓰러진 인영의 곁에 내려섰다. 인영은 복면을 하고 마른 체구인데 이미 치명상을 입고 있었다. 그가 막 인영의 곁에 내려서려는 순간에 그가 물었다. "사... 상관대협...?" "그렇소!" "주... 죽이시오! 저들이 살아가면 문주님께서 살아나시지 못합...!" 인영이 피를 토하면서 다급히 외쳤다. 주천운은 대번에 상황을 짐작했다. 청의인들은 고수였고 교활했다. 이미 오십 장에서 칠십 장을 도망친 그들은 제각기 반대방 향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그 세 곳을 다 갈 수는 없다. "트... 틀렸다...!" 인영이 절망에 찬 신음을 토해 냈다. 그 순간이었다. "으-악!" 칠십 장 밖에서 신나게 달리던 청의인이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훌쩍 뛰어올랐다 고꾸라졌 다. "케에에...!" 다음 순간에 막 육십여 장 밖의 바위를 돌던 청의인이 또 쓰러졌다. "크-!" 마지막 청의인이 허공을 헤집었다. 손을 거두는 주천운의 손에는 마치 장난감 같은 소금(小琴)이 들려 있었다. 천심전(穿心箭)! '어... 엄청나군!' 뒤쫓아온 소신풍 악비룡은 현천마금을 휘둥그런 눈으로 믿을 수 없는 듯 바라보았다. "대... 대... 협!" "잠종문도인가?" 주천운이 급히 복면인의 몇 군데 혈도를 짚으며 물었다. "그... 렇... 잠종문 호법..." 주천운은 그의 심맥이 이미 끊어진데다 십여 군데나 악독한 암기에 맞아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음을 알았다. "무슨 일인가?" 주천운은 그의 기해(氣海)를 짚어 기(氣)를 수(守)하며 급히 물었다. "무... 문주님의 전... 갈... 황산 음모... 너... 무도 갑작스럽게 제주(帝主)가 발... 동..." 잠종문 호법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제주라고?" 주천운은 벼락같이 잠종문 호법의 가슴을 쳤다. "켁!" 그의 입에서 한 덩이 응혈이 토해져 나왔다. "제주가 황산에 왔느냐?" 주천운의 음성이 맑은 종소리와 같이 울렸다. 잠종문 호법의 눈에 한 가닥 빛이 살아났다. 그의 고개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대... 협만이... 아무도 살... 아날 수... 가공... 할 음모... 천라... 지망(天羅之網)..." 그뿐이었다. 그가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기적이었다. 갈비뼈 일곱이 나가고 오장이 으스러진 상태에서... 호법의 눈을 쓸어주는 주천운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의 죽음으로 수많은 생명이 구함을 받을 것이다!" 주천운은 몸을 일으켰다. "소신룡!" "예!" 소신풍 악비룡은 주천운의 모습에 말할 수 없는 위엄이 어림을 느끼고 절로 부동자세가 되 었다. 그것은 주천운에게서 자연히 스며나오는 제왕지기(帝王之氣)였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남궁가에 그 사실을 알릴 수 있겠는가?" "평소 같으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변하고 있어서 장담할 수는..." "해야 한다! 알리기만 하면 내가 미리 안배해 둔 것이 있으니까 남궁가주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해보겠습니다!" 소신풍 악비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사부님을 부탁합니다." 장난기 사라진 소신풍의 얼굴에는 염려가 가득 찼다. 주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신풍은 급히 달려가려고 했다. "잠깐! 조금 전 여기 올 때에 제지를 받았다면서?" "예, 하지만 도망치는 데는 자신있습니다." 소신풍의 입가에 비로소 웃음이 떠올랐다. "가는 것은 올 때와 같지 않을 것이다. 이리 오너라." 주천운의 태도는 너무 당당해 오만하다는 생각조차 소신풍은 할 수 없었다. "개방 옥현귀진(玉玄歸眞)을 얼마나 익혔느냐?" "구 성까지 입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대단한 성취였다. "좋다. 충분하겠군... 내가 부르는 구결을 외도록, 시간이 없다." 주천운은 소신풍의 왼손 어깨 부분을 잡더니 나직이 구결을 외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과 열다섯 자밖에 되지 않는 구결이었다. "윽!" 구결이 끝나는 순간에 소신풍 악비룡은 왼손 전체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격동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토했다. "되었다. 구결은 다 외웠겠지?" 주천운이 손을 빼면서 물었다. "예, 그런데 무슨...?" 왼손이 갑자기 커진 듯한 느낌에 소신룡은 그 손과 주천운을 바라보며 의혹 어린 표정이 되 었다. "단 한번에 한해 그 왼손은 네가 가진 힘의 십 배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유사시에 너를 지 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십 배?" 경악한 표정이 되어 못 믿겠다는 듯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던 소신풍이 중얼거렸다. "결국 일회용 무적수로군..." 소신풍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가 스쳐 가고 있었다. "일회용보다는 이 손을 영구무적수(永久無敵手)로 만들 수는 없겠습니까?" 주천운의 입가에 빙긋 웃음이 번졌다. "그 구결과 옥현귀진의 구결을 잘 연구하면 될 수도 있지. 자, 시간이 없다!" "고맙습니다." 소신풍은 뭔가를 느낀 듯 희색이 만면하여 껑충 뛰어 날아갔다. "잠깐, 내 말을 타고 가거라!" "말보다는 다리가 더 편합니다!" "황산지경을 벗어나기까진 힘을 아끼는 것이 좋다!" 주천운의 말뜻을 짐작한 소신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려 백마 풍 위에 올라갔다. 히힝! 히히힝! 풍은 웬 꼬마가 냄새를 풍기며 올라타자 곤두서면서 소신풍을 던져 버리려 했다. "헤헤... 아직 뭘 모르는군! 몽고 야생마도 내 말 한마디면 순한 양인데... 맛 좀 볼래?" 소신풍은 태연히 고삐를 잡아채며 괴이하게 웃었다. 우히히히-힝! 풍이 갑자기 펄쩍 뛰더니 번개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주천운이 올 때보다 더 빨랐다. 두두두... '?' 주천운조차 어떻게 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침(針)을 이용하는 매우 간단한 것이었으나 그런 것을 사용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소 신풍이 단연 천하제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문득 주천운이 땅을 박찼다. 우르르-릉! 눈앞에 높이 솟은 황산을 향해 뇌성이 치달리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일어나고 풀포기가 뽑혀 날아오르고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일대장관이 연출되 니, 그것은 대혈겁의 서곡(序曲)과도 같았다. * * * 황산(黃山). 안휘성(安徽省)에 위치한 천하명산(天下名山)이다. 미인의 치마폭 같은 구름이 언제나 신비롭게 일어나는 곳, 그래서 황산운해(黃山雲海)라는 말도 생겨났으리라... 주천운은 발 밑을 떠도는 구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바람이 흑색유삼을 펄럭였다. 얼핏 보기에 황산의 경치를 감상하는 듯한 모습이지만 그는 지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만난 사람은 모두 육십 명... 그러나 산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황산 전체는 마치 깊은 밤의 절간과 같이 조용하기만 했다. 황산에 들어온 무림고수는 주천운이 알고 있는 수효만 해도 족히 천여 명이다. 그러나 그가 아는 인원이 어찌 황산에 들어온 사람들 전부라 하겠는가. '제주(帝主)... 이자의 움직임은 내가 생각한 이상이다. 그러나 무려 이천의 고수를 모아놓고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제아무리 함정을 잘 만들어놓는다 하더라도 고수 이천 명이라면 그건 수만의 군대를 능가하 는 가공할 힘이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무덤을 파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으으..." 그때 바람결에 희미한 신음이 들려 왔다. 휙- 주천운의 신형이 마치 끌리듯 그곳으로 날았다. 삼십여 장 떨어진 송림(松林) 속이었다. '피비린내...' 주천운의 눈빛이 싸늘히 식어 갔다. 참경(慘景)! 제멋대로 흩어진 시체가 엉망으로 널려 있었다. 얼핏 보아도 그 수효는 이삼십 명이 넘었다. "신음 소리는 산 사람이 있다는..." 주천운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으... 으...!" 곁에서 들어도 듣기 힘든 희미한 신음이 그의 우측에서 들려왔다. 수백 년생 노송(老松)의 곁에 쓰러진 황의노인에게서 들리는 신음 소리였다. 바람처럼 그의 옆에 날아내린 주천운은 그가 토해놓은 피를 보고 그의 오장육부가 이미 으 스러졌음을 알았다. "노인장!" 주천운은 황의노인을 부축하며 명문에 진기를 주입시켰다. "으으... 누... 구?" 노인의 눈까풀이 꿈틀거렸다. "어찌 된 일입니까?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주천운은 노인의 목숨이 경각에 걸려 있음을 알고 다급히 물었다. 순간, 황의노인의 몸에 가는 진동이 일어나더니 얼굴에 뚜렷한 공포의 빛이 드러났다. "크-으! 여! 여... 귀... 신...(女鬼神)!" 천하의 주천운이라도 그에게서 더 이상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여귀? 여자-귀신?" 어이없는 듯 주천운이 중얼거렸다. 어느새, 석양이 새빨갛게 지고 있었다. 산중의 어둠은 빠르다. 노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에 주위는 이미 어두워지는 것이다. 황의노인의 시체에서 손을 빼던 주천운은 손을 뻗어 시체의 가슴을 헤쳐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무서운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군. 겉은 전혀 다치지 않고 내부만 박살이 났다. 이것은..." 주천운은 몸을 일으켰다. "나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위력이다. 누가 이런 능력을?" 주천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십여 명이 한군데 죽어 있음을 보아 그들은 대항을 한 듯했으나, 나머 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죽어 있었다. "십여 명이 단숨에 몰사하자 대항하던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다가 차례로 당한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의 여자가 그들 모두를 공포에 질려 죽도록 만들었다는 뜻이다. 누구도 상대의 일 장을 막아 낸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악!"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무림인 모두를 죽이겠다는 말인가?" "으아-악!" 이번에는 우렁찬 비명이 처절하게 들려 왔다. 휙! 주천운은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이런 상황하에서 뇌정군림신법은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송림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곳에는 암석군(岩石群)이 널려 있고 그 사이에 맑은 계류가 흐르 고 있어서 백석계(白石溪)라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오늘부로 혈석참(血石慘)이었다. 정확히 삼십팔 구,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거기에 죽어 있었다. 그 비참한 모습은 내부만 박살난 송림의 시체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바위에 머리를 박고 머리가 완전히 박살이 난 자, 배가 터져 내장이 흘러나와 시냇물에 내장이 둥둥 떠 있는 자, 머리서부터 반 동강이 나 있는 자... 시내가 시뻘겋게 변해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으으..." 주천운은 이토록 참혹한 광경은 본 적조차 없었다. 그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것은...!" 괴이한 형태의 시체를 발견하고 거기에 다가갔던 주천운은 그만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으으... 천인공노할 만행!" 죽어 있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었다. 아무렇게나 사지(四肢)를 벌리고 죽어 있는 것은 나체의 여인이었다. 절반쯤 목이 꺾여져 죽 어 있는 여인의 머리는 반들반들해 여승이었던 듯, 중년 정도가 되어 보이는 여승의 두 눈 은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고 안면 가득 공포와 고통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여승의 전신은 참혹의 덩어리였다. 가슴은 짓뭉개져 피범벅이다. 그런데 상상도 할 수 없도록 여승의 비소(秘所)는 참혹했다. 거기에는 우람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머리를 박고 죽어 있는 것이다. 그 사내가 걸치고 있는 것은 승포였다.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외면하는 주천운의 눈빛은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불리(佛理)에도 조예가 깊은 그가 아니던가? "어떻게 이... 런...!" 뿌드드드드... 그의 발 밑에서 먼지가 피어오르며 그의 발이 바위를 파고 들어갔다. 쏴쏴-! 그와 두어 척 떨어진 거리를 흐르는 계류가 무형의 기세에 소용돌이치며 저절로 춤을 추었 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아-악!" 저편 계곡에서 또다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종적을 감추려고 할 때가 아니었다. 꽈르-릉! 무서운 돌풍이 일어나 암석을 휘말아올리는 순간, 주천운의 신형은 엄청난 위세로 비명 소 리가 난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속도는 천하제일이었다. 흙먼지와 우렛소리가 미친 듯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암벽이 솟아 있고, 그 암벽을 타고 올라가듯 거대한 노송 하나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가히 절경인 이곳은 지금 이 순간에는 지옥(地獄)이었다. 노송의 앞에는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진 시체가 이십여 구나 되는데 그 참상은 목불인견 이었다. 그 노송에는 두 명이 붙어 서 있었다. 노송에 등을 대고 있는 자는 구척장신의 엄청난 체구를 가진 자였는데, 그의 두 손은 쫙 벌 려져 있고 그 손바닥에는 검자루까지 박힌 장검이 뚫고 들어가 있었다. 짐승 가죽을 걸친 그의 가슴부터 배까지는 선혈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 그의 앞에 선 자는 멀쩡했다. "으흐흐..." "와아-악!" 흑포를 걸치고 백발을 늘어뜨린 그 괴인의 입에서 잔혹한 웃음이 흘러나오는 순간에 구척장 신의 거한의 목에서 처절무비한 고통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서히 백발의 흑포인이 그의 이마에다 몽둥이 하나를 쑤셔박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몽둥이는 거한의 두개골을 뚫고 노송에 박혔다. 으스러진 두개골로부터 선혈이 봇물처럼 거한의 이마를 덮으며 흘러내렸다. "크크크..." 소름 끼치는 웃음과 함께 흑포괴인은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경장을 한 아름다운 미녀 하나가 사색이 되어 기절해 있었다. 흑포괴인은 흉측한 미소와 함께 미인의 두 다리를 한 손으로 잡아 거꾸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이 단숨에 미녀의 치마를 찢어 내었다. "아-악!" 그 바람에 실신했던 미녀가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자 공포에 찬 비명을 토해 냈다. 여인의 두 발목을 잡아 거꾸로 쳐든 흑포괴인은 늘씬하게 드러난 여인의 다리를 보더니 마 지막 남은 속곳마저 찢어 냈다. 쫙- 짙은 어둠을 감춘 비소가 드러났다. "킬킬킬..." 흑포괴인은 괴이한 웃음과 함께 미녀의 비소에 손을 가져 갔다. 순간, 거꾸로 매달린 미녀는 이를 악물고는 번개같이 흑포괴인의 단전을 양손으로 공격했다. 황산에 들어선 이상, 그녀 또한 무림고수인 것이다. 퍽! 그러나 둔탁한 음향과 함께 그녀의 두 손만 부러질 듯 아플 뿐, 흑포괴인은 끄덕도 하지 않 았다. "크으흐흐흐... 괘씸한 년. 이렇게 해도 앙탈할 수 있나 어디 보... 자..." 흑포괴인은 머리 끝이 곤두서도록 소름 끼치게 웃으며 두 손으로 그녀의 양 발목을 나누어 잡았다. "아! 아아악! 사람 살... 아악!" 미녀는 양손으로 다리를 움켜잡으며 처절히 부르짖었다. 흑포괴인은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두 다리를 잡아 벌리는 것이다. 눈앞에 생생한 여인의 신 비 따위는 아랑곳도 없이 그대로 여인을 잡아 찢으려는 것이었다.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살인을 즐기는 살인귀(殺人鬼)였다. < 제2권 끝 >제 23 장 덫 24 장 제주(帝主) 나타나다5 장 백척간두(百尺竿頭)6 장 회오리치는 음모(陰謀)의 장(章)7 장 몽고대한(蒙古大汗)의 후예(後裔) 28 장 죽음의 매복(埋伏) 속으로... 제 29 장 오오! 혈천마경(血天魔磬)0 장 되찾은 세월(歲月)1 장 나타난 천제문주(天帝門主)2 장 숨막히는 반전(反轉)3 장 제왕천하(帝王天下) 제 23 장 덫 농담이 아니었다. 흑포괴인은 정말로 그 여인의 두 다리를 벌려 찢어 버릴 작정인 듯했다. 금방이라도 찢겨질 듯 벌려진 여인의 두 다리 사이를 보는 그의 두 눈이 괴이한 흥분의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 었다. 그것은 분명코 욕정(欲情)의 빛이 아니었다. 그는 살인을 즐기는 살인광(殺人狂)이었다. "아아- 아악!" 여인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멈추지 못할까?" 천인공노할 순간, 뇌성이 진동하면서 벼락 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절대(絶大)한 위세의 경력이 흑포괴인의 뒤를 엄습했다. "으흐흐! 웬 잡놈이 감히...!" 대경한 흑포괴인이 미녀를 내동댕이치며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쌍장을 쏟아 냈다. 핏빛 경기가 소용돌이치면서 뻗어났다. 꽝! 벼락치는 굉음과 함께 경기가 소용돌이치면서 흑포괴인은 충격을 받고서 백발을 휘날리며 비틀거렸다. "어, 어떤 놈이...?" 경악하던 흑포괴인은 흑영 하나가 번개같이 자신에게 덮쳐오고 있음을 보고 놀라 양손을 포 개 냈다. 총망중이라 하나, 그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자랑하는 천륙인도참(千戮人屠斬)이라는 수법이 다. 일단 펼쳐지면 수영(手影)이 만천(滿天)하면서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경기가 일어나 걸 리는 것은 모조리 찢어발기는 가공할 위력이 있는 것이다. 공력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위력을 발휘할 수 없지만 그가 살아 온 세월은 이미 백년에 가까 운 것이다. "흥!" 차가운 웃음이 터지는 순간 한 가닥 섬광이 빛살처럼 그의 장세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너무도 빨랐다. 피보라가 피어났다. "케엑!"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지르던 흑포괴인은 그만 입을 다물어야 했고 고개를 치켜들며 굳어져야 만 했다. 빛도 나지 않는 단검 하나가 어느새 그의 목을 반 치나 뚫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고함 치던 입을 조금만 늦게 닫았다면 그의 목은 이미 그 단검에 꿰뚫리고 있을 터였다. 희번덕거리는 흉광 어린 그의 눈에 저만치 잘려져 나가 꿈틀거리는 그의 두 손목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처럼 자랑하는 절기가 채 펼쳐지기도 전에 손목이 잘려져나가고 목에 검이 이르러 있는 것이다. 그가 어찌 여의섬이라는 쾌검이 세상에 존재함을 알 수 있었으랴. "너는 누구냐?" 주천운의 눈이 무서운 신광을 뿜었다. 그것은 형용할 수도 없는 무서운 기세였다. "이... 인도광(人屠狂) 지구(池九)!" 흑포괴인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대답했다. 주천운에게 압도되어 감히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도광?" 주천운의 눈에서 신광이 더욱 무섭게 일어났다. 인도광(人屠狂) 지구(池九). 이자는 살인에 미친 자다. 칠십 년 전에 불문제일기(佛門第一奇)인 무료성승(無了聖僧)에게 무공을 폐지당한 채 무인 도로 쫓겨났었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무공까지 회복하여 다시 나타난 것이다. "여기 이 사람들은 네가 죽인 것이냐?" 주천운의 기세가 점점 더 강해졌다. "그... 그렇다. 아직... 하나 못 죽였..." "닥쳐!" 주천운의 일갈(一喝)에 인도광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누가 시켰느냐?" "사, 사람을 죽이는 게 재미지! 무, 무슨... 누가 시키고 말고가... 큭!"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도광 지구의 목은 몸을 떠나 피를 뿌리며 날고 있었다. 격분을 금치 못한 주천운이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쳐 날려 버린 것이다. "이런 살인광이 있다니!" 주천운은 일시지간 너무도 어이가 없어 멍청히 서 있었다. "아아...!" 그때, 그의 옆에서 나직한 신음이 들려 왔다. 위기의 순간에서 구사일생한 미녀였다. 그녀는 집어던져진 충격으로 두 다리를 벌린 채 정신을 못 차리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본능 적인지, 고통 때문인지 그녀의 손은 희멀겋게 드러난 늘씬한 두 다리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희뿌연 여인의 다리와 비소는 유 난히 빛나 눈을 끌기에 족했다. 인도광이 던진 충격이 과했던 모양인지, 그녀는 입가에 선혈을 흘린 채 기절해 있었다. 그녀 가 쓰러져 있는 곳은 거한이 죽은 앞이었다. 주천운은 거한의 참혹한 죽음에 고개를 저으며 여인에게 몸을 숙였다. 옷자락을 여며주기 위해서였다. 꽝! 그 순간에 느닷없이 무서운 충격이 주천운의 등을 강타했다. "윽!" 전혀 의외의 습격에 눈앞이 캄캄함을 느낀 주천운은 그대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서너 걸음 밀려났다. 그가 번개같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뒤를 보았을 때, 놀랍게도 그의 등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는 쓰러져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구척거한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 소리도 없는 공격이 그의 등을 덮쳐왔다. 그것은 지독할 만큼 빨랐다. '다섯 군데나 된다!' 게다가 그것은 모두 일 장 이내였다. 주천운의 신형이 왼발을 축으로 빙글 돌았다. 그냥 돌았다는 표현은 옳지 못했다. 돌면서 그 의 몸은 숙여졌고, 또한 뒤집어졌다. 굳이 말하자면 앞으로 엎드리면서 상체는 하늘로 젖혀 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뒤를 이어 검빛이 서리처럼 일어났다. 째쨍! 쨍! "으악!" "으아-아악!" 비명이 터져나오면서 뒤이어 피어나는 혈화(血花)! 단 한 순간이었다. 다섯 명! 시체 속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가장했던 자 다섯이 그토록 무서운 발검을 했건만 그 들의 검은 자루만 남아 있었고 그들의 목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반 토막의 검이 굴러떨어지고 빛이 꺼져가고 있는 그들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져 있었다. '분명히 우리가 빨랐었는데! 그 자세에서는 제아무리 빨라도우리의 속도를 능가할 수는 없 는데!' 그들이 어찌 전도(顚倒), 회륜(廻輪)에서 분광(分光)으로 이어지는 여의섬 삼백육십오세가 언제 어떠한 상태에서라도 펼쳐질 수 있는 일세의 절학임을 알 수 있었으랴. 하지만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불과 석 자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던 거한의 가슴이 쫙 갈라지면서 그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온 것은 주천운의 호국지존병이 그들을 베는 도중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무섭게 시기적절했고 엄청나게 빨랐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산되어진 공격이기 때문이었 다. 앞선 다섯 명의 공격은 바로 이 출기불의(出其不意)한 한 수를 위해 준비된 것에 불과했 다. 하지만 주천운의 손에서 검빛이 뒤집어진 것은 또한 그토록 자연스러웠다. 팟! 호국지존병이 천만 개가 되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으-악!" 피보라 속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피를 뿌리며 땅에 나뒹군 것은 키가 석 자도 되지 않는 난쟁이였다. 온통 주름살투성이인 난쟁이의 눈에는 경악과 공포가 어리고 있었다. "처... 천하에 이런 검신(劍神)이 있다니..." 가슴을 움켜쥔 그의 심장에서는 선혈이 치솟고 있었다. 거한의 배를 가르고 그 속에 사람이 숨어 있음은 누구라도 상상치 못할 일이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조화의(造化意)가 여의섬과 함께 주천운에 게 있지 않았다면 이 일련의 기습은 분명코 성공할 수 있도록 무서웠다. "대단한 공력이군. 누구냐?" 기울어졌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는 주천운의 음성은 이미 조용했다. "유... 육혼...! 완벽했는데 실패라니..." 난쟁이 육혼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육혼(戮魂)이라는 이름은 흑령곡 최고의 살수를 의미한다. 단 한번도 실수가 없었다는 육혼 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난쟁이였던 것이다. "흑령... 곡이었단 말인가?" 중얼거리던 주천운은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 몸을 움직이려 했다. "내 독령비(毒靈匕)는 사정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얼음 같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주천운은 등에 차가운 감 촉이 닿음을 느꼈다. 두 다리가 찢겨져 죽을 뻔한 여인... 그녀를 잊었음이 생각난 것이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런데도 흘러나오는 주천운의 음성은 담담했다. "흑령사신이 여자일 줄은 몰랐군."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흑령사신(黑靈死神)은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진 흑령곡의 곡주이며 천하제일의 자객으로 알 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여자라니, 더구나 이제 삼십도 안 되어 보이는 미인이라니... "음...!" 그때, 나직한 신음과 함께 주천운의 입에서 가는 선혈이 스며나왔다. 난쟁이 육혼의 최심장 (崔心掌)은 쇠라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육혼은 그냥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가? 모두... 함정이었던가?" 그럼에도 주천운의 태도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태연자약했다. "금강불괴라더니 그렇지도 않군! 당신을 위해 우린 너무 큰 힘을 들였지!" 등뒤에서 흑령사신이 냉랭히 대꾸했다. 너무도 치밀히 계획된 함정이었다. 백석계의 혈겁(血劫)으로 주천운의 분노를 일으켜 생각할 틈도 없이 인도광이라는 살인광을 마주치게 했으니, 그 누가 시체더미 속에 최고급 살수들이 귀식지법으로 숨을 죽이고 있음 을 짐작할 것이며, 이미 죽은 거한의 뱃속에 난쟁이 살수가 숨어 있음을 생각이라도 할 것 인가? 그 치밀함 속에 다시 흑령사신이 연약하고 가련한 모습으로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가 히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함정이었다. "인도광 지구, 저자 또한 가짜였겠지?" 등뒤에서 차고 음산한 교소(嬌笑)가 흘러나왔다. "그는 진정한 인도광이지! 미친데다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로 변하긴 했어도 당신을 위 해 고심 끝에 모셔 온..." "금릉에서는 가짜, 이번에는 진짜. 그대는 나를 위해 많은 힘을 썼군..." 주천운이 낭랑히 웃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으니 아깝군!" 그의 태도는 너무도 당당하여 제압된 사람이 그가 아니라, 오히려 흑령사신인 것 같았다. "허사라고?" 흑령사신은 갑자기 벗은 아랫도리가 싸늘히 식어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보고 또 보아도 삭금절옥(削金切玉)에 황소를 단숨에 한줌 핏물로 만들 수 있는 맹독(猛毒)의 독령비는 조 금의 어김도 없이 주천운의 명문에 붙어 있었다. "믿을 수 없거든 시험해 보아도 좋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이 좋을걸? 그 순간에 너의 목 숨은 없을 테니까." 주천운이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담담히 말했다. 흑령사신의 얼음 같았던 얼굴의 이마에서 진땀이 방울방울 솟아났다. 그녀는 칼자루를 쥔 상태에서 칼날을 쥔 주천운에게 기세에서 제압당하고 있는 것이다. 살수냉심결(殺手冷心訣)을 체득한 흑령사신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나, 상대는 주천운 이었다. 주천운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나 흑령사신은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더할 것임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흥! 말도 안 되는... 내가 조금이라도 힘만 준다면!' 그녀의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일어났다. 그것과 함께, 그녀의 손이 전광과 같이 앞으로 찔러 갔다. 독령비가 무서운 속도로 주천운의 등으로 파고들었다. 질풍! 아니면 전광석화라고 할까? 번갯불이 번뜩이는 것 같은 순간에 모든 것은 끝이 났다. 그리고 주천운과 흑령사신은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서로 마주 포옹한 자세로 마주 서 있었다. 독령비는 주천운의 몸을 뚫고 나와 검은 광채를 뿌리고... 주천운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시험하지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천운의 입에서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흑령사신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이어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피어났다. "당... 신이 이토록 무서운 인물일 줄이야!" 그녀의 눈에서 빛이 꺼지고 있었다. "내가 이리로 올 것은 어떻게 알았나? 제주의 지시였던가?" 흑령사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주에게 몸을 바치지 않았다면... 당신을... 한번 더 눈여겨볼 수 있었을 것을... 당신과 같은 남자가 또 있을 수 있음을 나는 생각도 못했었지...' 흑령사신은 흐려지는 눈을 깜박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눈을 뜨려는 안간힘이 었다. 하지만 그녀의 뇌리를 맴돌던 그 말이 채 입밖으로 흘러나오지도 못한 채 댕그랑! 하 는 소리와 함께 주천운을 뚫고 나갔던 독령비가 그녀의 풀어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땅 바닥에 떨어졌다. "살인을 할 때는 여의섬과 조화의가 하나와 같이 연결되지만, 상대를 제압하고자 할 때는 아직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주천운은 탄식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녀의 옆구리에 닿아 있던 손을 거두자, 선혈이 솟구치며 그녀의 몸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천운의 몸을 꿰뚫었던 것 같은 그녀의 손은 주천운의 겨드랑이를 통과했고, 호국지존병은 그녀의 장문혈(章門穴)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심기(心機)의 승리였다. 주천운의 말 때문에 잔뜩 긴장한 흑령사신의 찌르는 속도는 평소와는 달리 틈이 있었고, 그 미세한 차이로 독령비는 주천운의 등을 찌르는 대신에 빙글 도는 주천운의 겨드랑이를 통과 했을 뿐이었다. 승부는 거기서 난 것이다. 뒤늦게 흑령사신도 그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끝난 다음이었다. 치부를 드러내는 것조차 불사하면서 완벽한 함정을 꾸몄던 흑령사신은 죽어 가는 노을의 마지막 그림자 속에 전신을 드러내 놓고 죽어 있었다. 노을 속에서 그녀의 옆구리에서 흐르 는 선혈이 검게 죽어 가고 있었다. 펄렁이며 찢겨진 그녀의 옷조각이 주천운의 손짓에 날아 그녀의 시신 아랫도리를 덮었다. 주천운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내가 올 것을 짐작하고 그 행로까지 계산할 수 있었다면 제주란 자의 능력은 과연 대단하 다! 적은 숨어 있고 나는 드러나 있단 말이지[敵暗我明]... 그럼 이제부터 상황을 바꾸어야겠 군!" 주천운은 현천마금을 꺼냈다. 그리고 그의 손짓에 의해 아주 미약한 금음(琴音) 한 줄기가 일어났다. 금음은 일직선으로 백여 장 밖에 있는 괴석더미로 쏘아갔다. 일선탄(一線彈)이라는 공부로 마치 전음과 같이 한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탈심혼(奪心魂)의 일종이었다. "나오너라." 금을 퉁기고 난 뒤, 주천운이 나직이 소리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복면을 한 흑의인 한 명이 멍청한 빛으로 괴석더미 뒤에서 일어 났다. 상황의 진전을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암중에서 흑령사신을 감시하고 있 었고 주천운은 그의 기척을 눈치채고 그를 탈심혼으로 제압한 것이다. "너의 직책은?" 바람처럼 그의 앞으로 날아간 주천운이 입을 열었다. "제단 기찰당의 순감사(巡監使)입니다." 흑의복면인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순감사라면 기찰당의 요인(要人)!' 만리추종에게 제단의 형세를 들어 알고 있는 주천운이었다. "제주는 지금 어디 있느냐?" "도착하신다는 말만 들었지, 알지 못합니다." "철저하군! 황산에 투입된 제단의 인원은?" 순감사의 눈에 일순 망설이는 빛이 나타나더니 대답했다. "외오당 중 삼 개 당과 내삼당 중에서 일 개 당이 참가한 것만 압니다..." "제단의 절반 이상이군. 어떤 함정을 설치했느냐?" "상좌(上座)들 외에는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 황산에서 살아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만 압니다!" 멍청하던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은 제주에 대한 믿음이었다. "충성스런 부하로군..." 말끝을 흐리던 주천운은 생각이 미친 듯 물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율도극(兀圖克)! 몽고의 용사!" 복면인이 나직이 외쳤다. 주저함이 없는 음성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주천운의 안색이 냉랭히 변했다. "감시는 몽고인이 하고... 싸움은 중원인끼리, 결국 남는 것은 죽음뿐이겠군...!" 괴석더미의 뒤는 백여 장이나 되는 낭떠러지였다. 주천운은 그곳으로 망설임없이 날아내리고 있었다. 저 멀리 황산 시신봉(始信峯)쪽에서 기이한 서광(瑞光)이 어리고 있었다. 그것은 신병이보 (神兵異寶)가 나타나기 전에 보인다는 보광(寶光)처럼 보였다. '저곳은 제주가 설치한 죽음의 함정일 것이다! 황산에 온 모든 고수가 저쪽으로 모이겠지...' 주천운의 마음은 급했다. 그렇기에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서 절벽으로 뛰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절벽을 오십 장 쯤 내려왔을 때였다. "으아-악!" "으으...!" 채 비명이 터지지도 못하는 듯한 기이한 신음 소리가 잇달아 좌측에 펼쳐진 숲속에서 들려 왔다. 그곳은 보광이 어리는 곳과 반대쪽이었다. '피하지도 못하고 떼죽음을 하는 소리다!' 쏴아앙! 주천운의 신형이 허공에서 꺾어지며 번개같이 그곳으로 쏘아가기 시작했다. * * * "오호호-!" 귓전을 울리는 웃음소리. 웃는다는 것은 대체로 즐거움의 표현이다. 이따금 다른 의미를 지닌 웃음이 있기도 하지만 소리내어 웃는다는 것은 흥겹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웃음소리는 달랐다. 마치 옥경(玉磬)을 부딪친 듯 청랑했다. 심산의 맑은 계류가 흘러가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 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 깃든 것은 심신을 뒤흔드는 요기로움이었다. "으흑-!" 그것을 증명하듯이 뒤이어 단말마의 신음이 일어났다. 그 신음 소리가 채 꺼지기도 전에 주천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그 자리에 나타났다. 자의노인 하나가 막 땅에 쓰러지고 있었다. '저것은?' 몸을 가누기도 전에 주천운은 벼락같이 서쪽으로 몸을 솟구쳤다. 언뜻 흰 그림자 하나가 사 라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마문의 은신과행(隱身過行)을 최고로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토록 빠르다니? 정말 귀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주천운은 좀 전의 요기로운 웃음소리를 생각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도 특별났던 것이다. 웃음소리 하나로 혼백이 흩어질 위력이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웃음소리라 듣지 않을 수 없었고, 듣는 순간에 넋이 나갈 웃음소리였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이 빛났다. 나무 껍질이 기이하게 벗겨진 곳을 발견한 것이다. "개방의 독문표기로군! 방주의 행적이다. 시신봉쪽... 군웅이동 방주도 그쪽으로... 공령천수도 거기!" 표기를 읽어보던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으으..." 시체더미 속에서 기척을 죽인 채 시체 하나가 천천히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지, 지독한 내가중수(內家重手)! 나의 신법으로도 피할 수가 없다니...'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일어나는 인영은 나무꾼 행색의 고희를 넘긴 듯 보이는 곰보노인 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고 있는 곳은 숲속이었다. 그 일대에는 여기저기에 십여 명의 무림고수들 이 제각기 칠공에서 피를 흘린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점창의 사일검수(射日劍手)와 관동의 관동이걸(關東二傑), 불면수라(佛面修羅)... 이들이 모 두 단 일 장을 견디지 못하다니...!" 창백한 빛으로 고개를 젓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혼비백산하여 그 자리에 꽝! 엎드렸다. "오호호호...!" 동시에 요기롭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이 깔리듯 메아리 쳤다. 웃음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흰 그림자 하나가 마치 허깨비(幻影)처럼 미끄러져 나타났다. 온 전신이 흰색[白色] 일색, 전신이 백사(白紗)로 휘감긴 채 너울거려 형체조차 알 아볼 수 없는 그 백영은 소리도 없이 일 장여 허공을 줄을 타듯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그것을 어찌 인간이라 말하랴! 귀영은 일순간 주춤하는 것 같더니 이내 유성과 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으... 저건 경공도 아니다...!" 노인이 처박았던 고개를 쳐들었다. 얼마나 다급히 고개를 처박았던지 코가 깨져 코피가 흐 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느낀 공포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저 요귀(妖鬼)가 또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는 몸서리를 치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어느 요귀 말이오?" 느닷없이 노인의 뒤에서 불쑥 말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죽었구나!' 머리 끝이 곤두선다는 느낌을 노인은 오늘 실감했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어짐을 느끼고 그 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욱-!" 간신히 참았던 내부가 진동되며 심혈(心血)이 터져 나왔다. 기실, 그의 내상은 극심해 그가 고강한 내가고수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정도였었다. "내가 도와 주겠소!" 손바닥 하나가 그의 등에 붙더니 노인의 명문이 진동되며 장강대하와 같은 내력이 쏟아져 들어와 그의 내부를 안정시켰다. '요귀가 아닌데...! 누가 이런 능력을?' 정신이 번쩍 든 노인은 급히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안색이 누렇게 변하고 말았다. "시, 신마금검뢰!" 나타난 사람은 바로 주천운인 것이다. 노인이 단숨에 자신을 알아보자 주천운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차!' 내심 실태를 깨달은 노인은 금세 죽는 시늉을 하며 어조를 바꾸었다. "저, 정... 녕 신... 마금검뢰 대협이시오?" 창백한 빛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땅을 짚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천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군!" 그 말에 낭패한 빛이던 노인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나타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번에 알아보다니..." "가르쳐 주는데도 못 알아볼 사람은 없겠지! 누가 이렇게 했소?" 주천운의 물음에 노인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바, 방금 지나간 여귀..." "여귀? 여자귀신 말이오?" "그, 그녀를 아는군!" 노인이 새삼 공포가 치미는 듯 가늘게 몸을 떨었다. 주천운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천하의 공령천수가 여귀(女鬼)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다니 그 멋진 경공은 어디다 버렸소?" "고, 공령천풍신법으로는 그 여귀의 신법을 도저히... 더구나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전신의 공력이 흩어져 버리니, 대항조차 할 수가 없소..." 치를 떠는 나무꾼 노인은 바로 변장한 공령천수 왕가달이었다. 그는 수십 번의 변장 끝에 겨우 군웅의 포위를 빠져 나왔다가 이곳에서 십여 명의 고수와 맞닥뜨렸다. 그들은 모두 일류고수라 그의 신법으로서도 대번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쉴 틈도 없이 쫓긴 터라 지치기도 한 터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여귀가 나타나 다짜고짜 그들을 쳐죽인 것이 다. "그, 여귀의 일 장을 빗겨 맞고는 그대로 죽은 듯 나가떨어지지 않았으면 나도 살아날 수 없었을 것..." 공령천수는 다시금 몸서리를 쳤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이오?" "그, 그렇소! 불문곡직하고 눈앞에 사람이 있으면 그저 쳐죽였소! 그건... 사람이 아니오..." 공령천수가 다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와 같은 사람이 그처럼 공포를 느낄 정도라면 그 백영의 위세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공령천수의 말대로라면 그 여귀의 무공은 대려군보다 뛰어나다. 과연 그런 고수가 천제문 에 있단 말인가?' 주천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천운이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본 공령천수는 눈알을 또르르 굴리더니 슬금슬금 몸을 미끄러 뜨리기 시작했다. 자세만 되면 뛸 작정인 것이다. "가는 건 좋은데 빌려 간 것은 다 보았으면 돌려주고 가는 것이 좋겠소." 주천운이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공령천수는 또다시 다리에 맥이 풀렸다. 그는 어색하게 얼굴빛을 고치며 물었다. "가, 가다니?" "장진도는 이미 당신이 지킬 수 없게 되었소. 이리 내놓으시오." 주천운이 손을 내밀었다. "으..." 잠시 망설이던 공령천수는 하는 수 없는 듯 품속에서 옥함 하나를 꺼내 주천운의 손에 올려 놓았다. 그러자 주천운이 빙긋 웃었다. "원래대로 해놓으시오." "원래대로라니? 그 속에..." 주천운이 공령천수를 쏘아보았다. "그 장보도의 유혹 때문에 이미 수많은 무림의 정영(精英)이 죽었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 하느냐? 왕가달! 그 책임을 어떻게 질 작정이냐?" 주천운의 어조가 칼을 내리치는 듯 변했다. 눈에서 번갯불이 튀는 것 같았다. 돌변한 모습이 었다. 공령천수 왕가달은 등골에 식은땀이 솟아났다. '가, 갑자기 이런... 엄청난 기세라니! 이게 대체... 제왕(帝王)의 기도(氣度)가...' 반말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갑자기 숨이 탁탁 막혀 왔다. 어른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는 어린애도 이렇지는 않으리라! 공령천수 왕가달은 더 이상 두 말도 없이 바지 속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 옥함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한 인영이 갑자기 소리도 없이 덮쳐 왔다. "물러가라!" 주천운이 꾸짖으며 일 장을 쪼개 냈다. 나타난 인영은 돌연한 기세가 자신의 전신을 덮는 것을 알고는 놀라 몸을 틀면서 일 장을 마주쳐 냈다. 펑! "윽!" 경악한 신음과 함께 한 인영이 허공을 돌아 떨어져 내렸다. 나타난 것은 팔괘도포(八卦道袍)를 걸친 노도사였다. 얼굴이 길쭉한데다 눈빛이 음침하고 튀 어나온 광대뼈 등은 대번에 그의 심성을 알 수 있게 했다. "구음마도(九陰魔道)!" 그를 본 공령천수가 신음했다. 구음마도(九陰魔道)라 불리는 구운자(九雲子)는 현 무당파 장문인의 사숙이지만 지난날 장 문인직을 노리다 들통나서 쫓겨다니는 처지다. 그런 그가 무당파의 추격을 삼십 년이나 따 돌릴 수 있었음은 그의 심기가 악독하고 무공이 높기 때문이다. "흥! 과연 애송이가 제법이군! 사정 봐줄 때 그걸 이리 내라!" 구음마도가 음산히 외쳤다. "구음마도 정도에게 이것이 가도 괜찮다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해 보겠다." 주천운은 태연히 옥갑을 열고 그 속의 가짜 양피지를 버리고 진짜를 넣고 닫으며 대꾸했다. 그것을 보고 눈에 탐욕의 불이 일어나던 구음마도의 눈빛이 그 말에 흔들렸다. 그 말은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현천고금의 주인이 천외쌍기의 장보도까지 욕심을 낸다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과연 음랭한 외침과 함께 음침한 모습의 노인이 나타났다. 회색빛 도포 비슷한 팔괘의를 입 은 그는 머리에 묘한 형상의 관(冠) 하나를 쓰고 있었고 눈빛이 찌르는 듯했다. 그의 뒤에는 역시 음산한 분위기의 노인 다섯이 따르고 있었다. "천사신군(天邪神君)?" 공령천수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천사신군(天邪神君)! 일회이맹삼가사곡 중 사곡의 하나인 천사곡(天邪谷)의 곡주가 그다. 사공(邪功)의 달인(達 人)이라 전하지만 그가 강호에 나선 적은 거의 없어 그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천사곡주까지 나서게 하다니 유혹이 크긴 크군..." "과찬을, 헛걸음을 않도록 해주면 좋겠는걸?" 천사신군이 주천운의 말에 음흉히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뒤질세라 구음마도도 거리를 좁혀왔다. 그때였다. "와아-." 시신봉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 왔다. 동시에, 시신봉에 어리던 보광 속에서 자광(紫光)이 솟아올랐다. 어둠을 밝히는 장엄하기조 차 한 광경이었다. 그것을 본 주천운의 눈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황산을 떠나시오." 주천운의 말에 구음마도가 음침히 웃었다. "으흐흐... 네가 장보도만 넘겨주면 있으래도 안 있겠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는 어리석은 자들!" 주천운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졌다. 순간, 그의 몸이 기우뚱하는 것 같은 순간에 무서운 속도의 섬광이 구음마도를 덮쳤다. "헉!" 구음마도는 대경실색하여 뒤로 물러나다 그대로 멈추었다. 그를 덮쳐오는 듯하던 주천운이 그 자리에 서 있음을 본 것이다. "아-!" 주천운이 자신을 놀린 것이라 생각해 두 눈을 부릅뜨던 구음마도는 다음 순간에 그만 사색 이 되고 말았다. 그의 눈 아래로 그의 염소 수염이 면도한 듯 그의 턱에서 떨어져 내려 흩날리고 있었던 것 이다. "방금의 일검을 막아 낼 수 있다면 장보도를 넘겨주겠소!" 주천운은 구음마도를 쳐다보지 않고 천사신군을 쳐다보면서 냉담히 말했다. "...!" 천사신군은 경악한 표정으로 침음했다. "오늘의 황산지회(黃山之會)는 군웅을 몰살하기 위한 만들어진 일장의 거대한 음모요. 살고 싶으면 속히 돌아가시오!" 주천운은 준엄히 그들에게 외쳤다. 그는 주위에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음모라면서 공자는 왜 시신봉으로 가는 것이오?" 공령천수가 의혹이 인 듯 물었다. "그럼 그들이 죽는 것을 두고 보란 말이오?" "...!" 주천운의 대답에 공령천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모두 돌아가시오!" 꽈르르-릉! 주천운의 음성이 메아리 칠 때, 그가 서 있던 곳에 굉음과 함께 광풍이 일어났다. 그의 모습 은 일진 광풍과 함께 이미 까마득히 날아가고 있었다. "이, 이런 경공이 정녕 존재하다니... 여귀보다 더하다!" 광풍에 나가떨어질 뻔했던 공령천수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제 24 장 제주(帝主) 나타나다 운해(雲海), 석해(石海), 송해(松海)라 일컫는 황산은 어둠에 잠겨도 그 빼어남을 감출 수 없 다. 시신봉(始信峯)은 황산의 최고봉인 천도봉과 함께 가장 빼어난 봉우리 중의 하나다. 어둠에 묻힌 채, 달빛에 드러난 시신봉은 낮과는 달리 밤의 절경을 이룬다. 만학천봉(萬壑千 峰)으로 치솟은 기암거벽(奇巖巨壁)들이 천태만상으로 어우러지면서 밤을 맞이하는 것이다. 달빛이 고즈넉이 깃들면 시신봉은 그 웅장함을 말없이 세상에 보이며 선다. 그러나, 오늘의 시신봉은 아늑하고 조용하지 않았다. 시신봉 정상은 십여 명 정도가 겨우 설 수 있는 곳이다. 지금 그곳에는 보광이 어리고 있고 그 가운데는 전신에 백사를 휘감은 여인의 모습이 보이 고 있었다. 산바람에 백사가 너울거려 그 형체조차 제대로 짐작할 수 없는 신비의 여인, 그녀는 일 장 여 높이의 대(臺) 위에 있어 시신봉 밑에 있는 사람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시신봉을 둘러싸고 삼삼오오 바위틈에서, 숲속에서 수많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 었다. 그 수효는 천오륙백 이상이나 되는 듯했다. 그 엄청난 수효에 그들 자신도 놀란 듯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그 눈길에는 적의와 경계가 서리고 있었다. "도대체 저 백의녀가 어디서 나타난 거지?" 백의녀가 어떻게 시신봉 정상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한 고수들이 의아해 중얼거릴 때, 갑자 기 시신봉 정상에서 자광(紫光)이 솟아났다. "저게 뭐지?" 웅성거림이 해일처럼 번져 갔다. 그리고 그들은 백의녀의 손에서 찬란한 자광을 뻗어 내는 퉁소를 보게 되었다. "퉁소 아닌가?" "저렇게 보광이 어리는 퉁소라니... 저, 저저... 저건!" 갑자기 누군가가 악을 쓰듯 외쳤다. "자미천소(紫薇天簫)다!" 그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십여 줄기의 인영이 시신봉 정상으로 치솟았다. "게 서라!" "멈추지 못할까!" 거의 동시에 백여 줄기의 인영이 그 뒤를 따르며 악을 썼다. 어이없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자미천소라면 대려군에게 있던 천고신물(千古神物)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백의 녀에게 있는 것일까. 경공이 탁월한 고수 십여 명이 가장 먼저 시신봉 정상으로 날아올랐다. 순간, 그들은 보았다. 자미천소가 백의녀의 면사로 가리워진 입 부분에 닿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것이었다. 부-웅! 엄청난 진동을 가진 기음(奇音)이 자미천소에서 터지는 순간에 가공할 살파(殺波)가 정상 주위 십여 장을 휩쓸었다. 일대의 바위를 뚫고 수백 년을 자리한 소나무들이 고통에 겨우 전신을 떨면서 솔잎을 사방 으로 흩뿌렸다. 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크으으...!" "케에엑-!" 추풍낙엽! 인간이 그렇게 불릴 수도 있음은 여기서 실감이 났다. 정상에 도달한 십여 명이 칠공에서 선혈을 쏟으며 나뒹굴고, 그 영향권에 든 자들 중 공력 이 강한 자는 즉사는 면했으나 산봉우리 밑으로 곤두박질하며 추락하니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뭐, 뭐야?" 산봉 밑에서 신나게 치달리던 고수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주춤거릴 때였다. 꽈르-릉! 시신봉 정상의 자광이 더욱 강해지며 천둥 같은 음향이 시신봉을 뒤흔들었다. 퉁탕거리며 시신봉에서 돌조각들이 굴러 내렸다. "으악!" "끄-으-이, 이건...?" 먼저 올라가려고 몸을 날리는 바람에 일어난 혼란보다 더 큰 혼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귀 를 틀어막으며 나뒹굴었다. "사, 살인음공(殺人音功)이다!" 두! 두두둥-둥! 그것을 시작으로 마치 북소리와 같은 엄청난 음향이 시신봉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으-악!" "크와-악-!"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칠공이 터져 나가며 죽어 갔다. 그 피해는 시신봉 정상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 극심했고 내공이 약한 자들이 제일 극심한 타 격을 받았다. 광풍노도와 같은 음파경기(音波勁氣)가 시신봉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다. 거대한 망치가 시신봉 전체를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그 위세는 사상초유(史上初有)의 것이 었다. 뚝! 갑자기 숨막힐 듯 퉁소음이 끊겨 혼비백산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할 때, 이번에는 너무도 가냘프게 느껴지는 퉁소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산봉 정상에 있는 백의녀의 모습은 완전히 자광에 휩싸여 있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 그토록 살벌하던 퉁소음이 마치 선녀가 하강하는 듯 꿈결 같은 곡조로 변하자 공력을 일으 켜 저항하던 고수들의 눈에 의혹이 일어났다. "모두 공력을 일으켜 저항하시오! 이것은 죽음의 전주(前奏)요!" 창노한 음성이 일어나며 한 노인이 몸을 솟구쳤다. 때-앵! 맑은 종소리가 노인에게서 울려 퍼졌다. 그의 손에는 황금빛을 발하는 작은 종이 하나 들려 있었다. "신종노인(神鐘老人)이다!" 그를 본 사람들의 놀란 외침이 들리는 순간에 그 노인은 이미 산봉 위로 치닫고 있었다. "퉁소를 멈추어라!" 신종노인은 손에 신종을 흔들며 벼락같이 외쳤다. 그 또한 음공의 대가, 신종노인과 목어승(木魚僧)은 지난 백년 이래 음공의 쌍벽을 이룬 전 대의 고수였다. 그런데 퉁소음이 느닷없이 천군만마가 치닫는 듯 돌변하며,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 에서 백년간 천하를 위진한 신종이 산산조각이 나버리지 않는가? "이럴 수가? 으...!" 신종노인의 칠공(七孔)에서 피가 솟았다. 그가 절망에 찬 노안을 부릅뜨는 순간이었다. "멈추어라!" 벼락 같은 호통과 함께, 일진 태풍이 시신봉 정상을 휩쓸며 일어났다. 뇌성벽력과 같은 굉음 과 함께 회오리치는 경기(勁氣) 속에서 흑영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신종노인의 앞을 막아섰 다. "멈추지 못할까?" 흑영이 창룡후(蒼龍吼)와 같은 외침을 터뜨렸으나, 백의녀는 미동도 없고 퉁소음은 점점 더 살벌하게 변했다. "으-악!" "으아악-!" 봉우리 밑에서 운공하며 저항하고 있던 고수들은 계속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 고, 아름드리 수목이 뚝뚝 꺾어지며 흙먼지가 돌풍을 일으키며 회오리쳤다. 흑영! 나타난 주천운조차 시신봉에 내려서자마자 엄청난 압력을 느껴야 했다. 전신이 분쇄될 것 같은 무서운 압력이었다. 대번에 기혈이 뒤흔들렸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비명, 비명... 세상의 말일(末日)이 다가온 것 같았다. 두두두-두두둥! 두우-웅-! 퉁소음이 천지를 온통 뒤흔들고 있었다. "천... 멸지곡(天滅之曲)!" 퉁소음이 무엇인지 깨달은 주천운이 중얼거렸다. 그와 백의녀와의 거리는 불과 삼 장 정도인지라, 그가 받는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었다. 주천운의 몸에서 연꽃 모양의 장엄한 서기가 서리서리 피어오르며 그의 몸이 암반 (岩盤)을 반 자나 뚫고 들어갔다. "려군, 이 많은 사람들을 몰사시킬 참인가? 멈춰!" 주천운은 전신의 모든 공력을 모아 역근경상의 대사자후(大獅子吼)를 전개했다. 그것은 벼락을 한꺼번에 박살내는 듯한 엄청난 위세였으나, 삼대천음(三大天音)의 하나인 자 미천소에서 발출되는 천음인 천멸지곡을 흐트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파동이 일어나 면서 백의녀의 온몸을 휘감은 백사가 마구 휘날리며 그녀의 얼굴 부분이 조금 드러났다. 그것이 뜻밖인 듯 백의녀는 감았던 눈을 떴다. 마치 얼음과 같이 차갑고 전혀 감정조차 없는 눈이었다. "?" 주천운의 몸에 진동이 일어났다. '려군의 눈빛이 아니다! 려군이 아니란 말인가?' 뿐만 아니라, 백의녀는 주천운을 보고도 전혀 감정의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은 타 인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다. 그녀라면 어찌 그러한 눈빛으로 그를 볼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천멸지곡의 위력이 그때보다 엄청나게 강해졌다! 려군이 갑자기 이토록 강해 질 수는 없다!'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것은 주천운이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주천운처럼 비정상적으로 기하급수적인 무공의 상승을 이룰 수는 없었 다. 그런데 백의녀가 대려군이라면 그녀의 무공은 주천운보다 그새 더 강해진 것이다. 그것 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천운의 무공은 일반인이라면 평생에 한 번 만나기 힘든 기연(奇緣)을 거듭하면서 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파파팍! 무서운 압력에 주천운의 몸이 다시 한 자나 바위를 뚫고 들어갔다. 뚫고 들어갔다기보다는 주변 바위가 부스러졌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뿐만 아니었다. 시신봉 정상의 암반이 금 이 가고 깨지다가 가루가 되어 날기 시작했다. "으-윽!" "우..." 운공하여 저항하던 고수들마저 사방에서 피를 토하며 여기저기에서 나뒹굴기 시작했다. 여인 한 명에 의한 퉁소음에 의해 무림고수 천수백 명이 피바다 속에 쓰러져가고 있는 것이 다. 미증유(未曾有)의 대겁(大劫)이 아닐 수 없었다. "멈추지 못할까?" 상황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느낀 주천운은 크게 다급하여 번개같이 호국지존병을 전 개했다. 여의섬! 그 무적의 삼백육십오세!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절대의 쾌검이 아니었다. 천멸지곡의 연주는 이미 중단부(中段部)에 이르고 있어서 지금 주천운이 받는 압력은 만 근 이상, 검이 한 치 전진하면 그만큼 엄청난 압력이 더 쏟아지는 것이다. 절대쾌검이 절대지검(絶代遲劍)이 되어 반 장을 전진했을 때, 절세신병인 호국지존병이 압력 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라도 부러질 듯 윙윙! 소리를 내면서 휘청거렸다. '으-정녕 려군보다 배나 강하다. 만약 최후의 만상구멸(萬象具滅)을 전개한다면 시신봉에 모 인 고수는 몰사하고 말 것이다!' 빙! 갑자기 빛이 없던 호국지존병에서 눈부신 새파란 빛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주천운의 온 몸에서 천하에 군림하는 제왕(帝王)의 위태가 완전히 드러났다. 쓰쓰-쓰으으-! 호국지존병에서 쏟아지는 새파란 검기는 형체를 이루면서 여지없이 천멸지곡의 압력을 자르 며 뻗어났다. 제왕무적검강(帝王無敵劍 )! 주천운이 강호에 나와 단 한번도 펼친 적이 없는 그 무적신공(無敵神功)이 펼쳐진 것이다. 단숨에 호국지존병에서 제왕무적검강이 일 장이나 뻗어났다. 검강이 뼈를 깎는 기세와 함께 자신과 불과 반 장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 백의녀의 낯빛이 변했다. 여기까지의 진행시간은 긴 것 같으나 기실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채 떨어지기도 전이 었다. 그때였다. 무심했던 백의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며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윽!' 주천운은 그 눈빛에 하마터면 공력이 흩어질 뻔해 내심 크게 놀랐다. 천하제일의 용화대수 미선공을 지닌 그였는데도 그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것은 전설의 만겁수라소녀안(萬劫修羅素女眼)이다!' 주천운은 온몸이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만겁수라소녀안(萬劫修羅素女眼)은 만겁윤회마법(萬劫輪廻魔法)을 거친 여인만이 지닐 수 있는 저주와 마력(魔力)의 눈이다. 그 눈빛을 대하면 그 어떤 고수라도 공력이 흩어지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그 마법을 거친 여인은 인간의 심성(心性)을 상실하는 동시에 상상을 절(絶)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만겁수라소녀안이라도 주천운을 어찌할 수 없었다. 용화대수미선공은 천하의 사 마를 제압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으으! 심성을 상실한 천하무적의 꼭두각시! 설마?' 파파파-. 그 순간, 제왕무적검강이 그녀와 넉 자 거리에 이르자 예리무비한 검기가 천멸지곡의 음경 (音勁)과 충돌해 무섭게 회오리쳤다. 그와 함께 그녀의 온몸을 휘감고 자광 속에서 너울거리 던 백사(白紗)가 갈기갈기 찢겨져 날았다. 절세무비의 완미(完美)한 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려군!' 주천운의 가슴이 터져 나가듯 격탕했다. 동시에, 예리무비한 음향과 함께 제왕무적검강이 단숨에 백의녀의 몸을 양단했다. 잘려 나간 백의가 너울거리며 허공에서 흔적도 없이 부서져 흩어질 때였다. "오호호호호...!" 요기로운 웃음소리가 산봉을 뒤흔들며 반라의 미녀 하나가 허공에서 거미줄을 타듯 내려왔 다. 투명한 그 눈빛은 천하에 다시없이 요기롭고, 그 옥수에는 자미천소가 빛나고 있었다. "려군... 정녕 너로군!" 주천운이 납덩이 같은 안색으로 신음했다. 대려군! 정녕 백의녀의 모습은 틀림없는 대려군이었다. 주천운은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에 제왕무적검강을 전개함에 있어 순간적으로 주춤하게 되 었고, 그 미세한 틈에 대려군은 살아날 수 있었다. 겉옷이 찢겨져 나간 그녀의 상반신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 그 상처는 대단히 깊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고통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흐르는 피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요기로운 눈빛으로 주천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볼 뿐이었다. '아무리 빗겨 맞았다 할지라도, 설사 쇠라도 제왕무적검강의 검기에 스치면 두 동강이 되고 말 것인데! 과연 대려군이 만겁윤회마법을 거쳤단 말인가?' 그것은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제문이 원의 잔당이라면 황족이라는, 더구나 천제문 양단(兩壇)의 하나인 후단(后壇)의 책 임자인 대려군을 이렇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정녕 대려군인 것을. '악독한 놈들! 제주가 이 정도나 되는 자란 말인가?' 주천운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대려군의 천멸지곡으로 군웅들을 몰살시키고 그 중에서 살아난 자들은 이미 대항할 힘이 없을 테니, 힘 하나 들이지 않을 셈이었구나!' 그때였다. 대려군의 요기로운 눈에 갑자기 당황한 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천운이 그녀의 만겁수라소녀안에 미동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서기가 뻗어나는 주천 운의 눈빛에 자신의 머리가 아파 옴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만겁윤회마법이 천하사마의 극성인 용화대수미선공에 극제(剋制)되는 현상이었다. 천하의 주천운이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려군! 나요! 주천운! 나를 알아보겠소?" 주천운은 전음으로 대사자후를 운용해 대려군에게 크게 외쳤다. 그의 전신에서 운용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불문의 항마신공이며 주천운과 대려군의 거리는 이 장여에 불과했다. "주... 천... 운...?" 대려군의 눈빛이 갑자기 흐릿해지는 것 같더니 문득 꿈꾸듯 중얼거렸다. 만겁윤회마법을 거친 꼭두각시가 말을 하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일이었다. '만겁윤회마법을 거친 것이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완전치 못한 것이다!' 주천운의 눈에 희망이 스쳤다. 어찌 그렇기만 하겠는가? 그것은 대려군의 잠재의식 속에 주천운이란 존재가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인가를 말 하는 것이었고, 용화대수미선공이 어떠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소! 주천운! 내가 주천운이오!" 주천운은 더 크게 외치며 대려군에게 한걸음 접근해 갔다. "아... 아... 악!" 미간을 찡그리며 무엇인지 생각에 잠긴 듯이 입을 열던 대려군이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머리가 쪼개져 나가는 듯한 무서운 고통이 그녀를 엄습한 것이다. "려군...!" 주천운이 흠칫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순간이다. "오호호호...!" 머리를 움켜쥐고 몸부림치던 대려군의 입에서 요기로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잘못되었다!' 주천운이 내심 부르짖는 순간에 그녀의 수중에 비스듬히 쥐여져 있던 자미천소가 돌연 가공 할 기세로 주천운을 덮쳐 왔다. 채 일 장이 되지 못하는 거리에서 대려군과 같은 절세고수가 방심한 주천운에게 쏟은 공세 였다. 피할 수조차 없었다. 쨍쨍! 절대위기의 순간에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앞에서 불꽃이 명멸하면서 주천운이 한걸음 물러났다. 과연 여의섬이었다. 그는 그 위기의 순간에 호국지존병을 뻗어 내 대려군의 일격을 막아낸 것이다. "오호호-!" 날카롭게 웃으며 그대로 주천운을 덮쳐 오려던 대려군은 주천운의 눈을 보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좀 전의 고통이 생각난 듯 두 눈 가득 두려운 빛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그 녀의 신형은 한 가닥 바람과 같이 시신봉 정상을 날아올랐다. 그녀가 그대로 계속 덮쳐 왔 다면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주천운은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을 것이었다. "거기 서! 려군!" 창백한 안색의 주천운은 다급히 부르짖으며 몸을 날렸다. 꽈르릉! 그의 신형을 따라 무서운 경풍이 회오리치면서 일어나 천멸지곡과 두 절대초강고수의 대결 에 의해서 이미 박살이 나 있었던 시신봉 정상이 무너져 내렸다. 대려군은 무서운 속도로 날고 있었다. 정녕 귀영과 같았다. 꽈르릉!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주천운의 뇌정군림신법은 더욱 빨랐다. 뇌정군림신법은 신법 이전에 호국신공(護國神功)이었기에 펼쳐지는 것으로 제왕무적검강을 전개하면서 소비한 주천운의 진력을 보충해 주고 있었다. 시신봉 정상 주위 백여 장은 완전 폐허가 되어 거기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만상구멸이 전개되었다면 돌조차 먼지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시신봉 하에 있었던 사람들은 내상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대려군의 신형이 단숨에 백여 장을 내려왔을 때, 겨우 한숨을 돌리고 정신을 차린 군웅들이 그녀를 발견했다. "여, 여귀다!" 혼비백산한 음성과 함께, 몇몇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그들은 대려군의 반신이 피로 물들었고, 그 뒤를 광풍을 몰고 있는 주천운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귀가 부상을 입고 도망친다!" 그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분노가 아니라 탐욕 때문이었다. "죽여랏!" "게 섯거랏!" 서너 명의 고수가 날아오르는 대려군을 무섭게 덮쳐 왔다. "오호호호호-." 그러나 요기로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에 그들의 목숨은 이미 끝이었다. 비명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자미천소가 한번 휩쓸고 지나가자 그들의 모두 피떡이 되어 거꾸러넘어졌다. "오호호호..." 대려군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요기로운 웃음을 터뜨리면서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 륙 장 앞에 몰려 있는 십여 명에게 덮쳐 갔다. 그들은 운기조식 중이었기에 눈을 뜨고도 대 항할 재간이 없었고 대항한다고 해도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대려군을 막아 낼 리 없었다. 그들의 눈에 절망이 떠오를 때였다. "모두 피하시오!" 일진 뇌풍(雷風)이 일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천운이었다. "!" 주천운을 보자 대려군은 두려운 빛을 떠올리며 몸을 날리려 했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주천운이 낭랑히 외쳤다. 호국지존병이 번갯불과 같이 그녀의 퇴로를 봉쇄했다. 그러나 그녀의 신법은 이미 화경에 이르러 공중에서도 그림자같이 움직였다. "도망칠 수 있다면 조화가 마음속에 있다고 할 수 없으리라!" 파파파-쏴아-! 검광이 눈이 달린 듯 대려군의 모든 퇴로를 막아 냈다. 눈 한번 깜박일 시간에 대려군은 열두 번 신법을 바꾸고 스물한 번 허공을 맴돌았다. 그것 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였으나 여의섬보다 빠를 수 없었고, 조화의보다 변화무쌍할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쨍! 귀청이 터져 나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자미천소와 호국지존병은 단숨에 일곱 번을 부딪쳤 다. 그 위세가 얼마나 격렬한지 십 장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비틀거려야 했다. "으음...!" 신음과 함께 대려군은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땅 위에 내려섰다. 그녀의 앞 이 장 거리에 있는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을 가슴 앞에 세운 채 태산같이 서 있었 다. 그를 바라보는 대려군의 눈에 당황과 함께 두려운 빛이 나타났다. 주천운의 기세에 공제되 어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 주천운의 자세는 천하제일의 심도어검세(心道御劍勢)였다. 단심유수화(丹心流水和)로 이름붙은 이 자세는 바로 여의섬 삼백육십오세의 정화인 단심세 (丹心勢)와 조화의 삼십육형의 정화인 류수형(流水形)이 한데 어울린, 다시 말해 변화와 속 도가 모두 그 하나에 어울린 절대신초(絶對神招)인 것이다. 그것은 주천운이 이미 만패검성과 화로의 경지를 벗어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군웅들이 서서히 그들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모두 돌아가시오!" 주천운은 대려군을 바라보며 침중히 외쳤다. 그의 전신은 마치 거대한 검으로 화한 듯하였다. "오늘 일은 천제문에서 무림고수를 몰살하려는 음모였소! 그들이 발동하기 전에 속히 이곳 을 빠져 나가시오!" 그의 목소리는 천리전음을 운용한 것이라 모두의 귀에 종을 울리듯이 똑똑히 들렸다. "그럼 그 여귀가 천제문의 사람이란 말이오?" 누군가 외쳤다. "바로 그렇소. 제일단계가 실패했으니 곧 제이단계가 시작될 것이오!" 술렁이기는 하나 눈치만 볼 뿐, 누구도 쉽게 움직이려는 자들은 없었다. 주천운과 대려군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효는 약 오백 명에서 칠백 명인데, 자미천 소의 천멸지곡에서 살아남은 자들인 만큼 제각기 자부하는 고수들인 것이다. 주천운은 그들이 아직도 자미천소에 미련이 남아 있음을 보고 내심 어이가 없었다. "철방주께선 어디 계시오?" 주천운이 침중히 외쳤다. "노화자 여기 있소이다." 이십여 장 밖에서 고희의 노화자가 두 명의 노화자를 거느리고 달려왔다. 개방의 방주인 복 마신개(伏魔神 ) 철지양(鐵之洋)과 장로들이었다. "무슨 움직임이 있습니까?" "시신봉 주위 삼 개 봉에서 이미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소이다." 개방 방주가 침중한 기색으로 대꾸하자 모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퉁 소 소리 하나에 군웅이 몰사할 뻔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설득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 우선 천도봉쪽으로 가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주천운의 급한 말에 복마신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휘이-이익! 괴이무쌍한 휘파람 소리가 어둠을 찢으며 들려 왔다. 순간, 대려군의 눈에 다급한 기색과 함께 안절부절못하는 빛이 드러났다. 하지만 주천운의 몸에서 서기가 크게 일어나자 대려군은 더욱 다급한 듯했으나 감히 움직 이지는 못했다. 휘이-익! 휘파람 소리가 더욱 급박히 들려 왔다. "제주(帝主)!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다! 그녀는 이미 움직일 수 없다. 용기가 있다면 직접 나 오너라!" 주천운이 느닷없이 벼락같이 외쳤다. 일순간 주위에 갑자기 고요가 찾아드는 듯했다. "으하하하..." 그리고 굉장한 웃음소리가 산봉을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동시에 시신봉 맞은편 연화봉(蓮花峯) 중턱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어둠 속에서 연꽃이 피 어나는 것 같았다. 그 밝음 속에 한 명의 회의인이 떠오르듯 나타났다. 거리가 멀어 확실히 보이지는 않으나 나이는 채 사십이 되지 않은 것 같고 미목은 매우 청 수했다. 그는 십 장 정도 높이 치솟은 바위 위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었다. "그대가 신마금검뢰 상관천인가?" 회의인이 외쳤다. "그대가 제주인가?" 주천운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외쳤다. 그는 대려군에게 정신을 쏟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곳을 쳐다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 는 대려군을 차츰 핍박해가 그녀는 이미 암벽까지 몰려 후퇴할 곳이 없는 상태였다. "으하하..." 주천운의 반응에 회의인은 낭랑히 웃었다. "내가 그대를 얕보았군! 내 안배를 뚫고 거기다 후주까지 막아 낼 수 있을 줄이야! 하나..." 그의 말소리가 힘있게 들려 왔다.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은가? 아무도 본주의 안배를 벗어날 수는 없다! 신마금검뢰 하나가 본주의 안배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지!" "으하하...!" 갑자기 주천운이 크게 웃었다. "정말 장담할 수 있느냐?" 그의 목소리는 종을 때리듯 우렁찼고 그때마다 대려군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제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문주께서는 후단일의 실패의 책임을 물어 군매를 천하회복 때까지 실심인(失心人)으로 만 들어 속죄토록 했다! 만겁윤회마법을 거친 군매의 능력은 이젠 나를 능가하거늘... 도대체 저놈이 누구기에 저러한 능력을 가진 것이란 말인가?' 잠시 생각을 굴리던 제주는 이내 싸늘히 소리쳤다. "믿지 못하겠으면 보여 주겠다!" 그가 손을 쳐들자, 맞은편 양쪽 계곡에서 흑의인영들이 소리도 없이 떠올랐다. 그 수효는 약 팔십 명 가량. "느... 능공허도(凌空虛渡)!" 그런데, 장백파 팔대고수 중 살아남은 세 명 중 하나인 장백신룡(長白神龍)이 그것을 보고는 아연실색하여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능공허도라는 것은 허공을 평지처럼 건너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경공의 최고봉이라 일컬어 지는 만큼, 그러한 경공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히 초강고수라 불릴 만했다. 강호 무림을 통틀어도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제주의 손짓 한번에 능공허도를 전개하는 팔십 명의 절대고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 공포스럽지 않겠는가. 그것을 보고 오금이 저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군웅들의 안색이 내상에다 겹쳐 흙빛이 되었다. 곁눈으로 그것을 본 주천운이 급하게 외쳤다. "실혼마인이다! 철방주, 어서! 그들을 당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마신개 철지양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번개같이 천 도봉쪽으로 몸을 날렸다. 설득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능공허도를 전개하는 팔십 명의 가공할 고수를 본 남은 군웅들이 복마신개보다 더 빠른 속 도로 천도봉쪽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주천운이 발동했다. 그는 검과 함께 떠올라 대려군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검을 싸안은 듯한 기이한 자세 였고, 그 속도 또한 눈에 답답할 만큼 느렸다. 하지만 지면과 다섯 치 정도 떨어진 그의 발 밑에서는 경기가 회오리치며 흙먼지가 마구 일어나고 있었다. 휘이-익! 그것을 본 제주가 대경실색하여 휘파람을 불어내며 몸을 날려왔다. 그는 이 일검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이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검도의 최상승인 어검술(御劒術)이었다. "으으...!" 휘파람 소리를 들은 대려군의 눈빛이 매서워지더니 벼락같이 자미천소를 쳐왔다. 소영(簫影)이 폭발하듯 가공스럽게 일어났다. 자미구류천소 중의 절학인 자미천겁폭(紫薇天 劫爆)이었다. 동시에, 그처럼 느리게 전진하던 주천운의 호국지존병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뻗어나며 검강 (劍 )이 무지개와 같이 피어났다. 비록 제왕무적검강은 아니라 할지라도 호국지존병에서 뻗 어난 검강은 엄청난 것이었다. 때-앵! 자미천소가 미처 호국지존병을 막아 내지 못하고 튕겨지고, 주천운의 검은 대려군의 몸을 엄습했다. 파팟! 예리무비한 검기에 노출된 대려군의 목과 가슴 부위의 옷이 마구 찢겨져나갔다. 산산조각이 난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매끄러운 옥부(玉膚)에는 상처조차 없었 다. 만겁윤회마법의 위력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나는 대려군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주천운의 미간에 갈등이 떠올랐다. 그는 원래 상처를 더 입혀 그녀를 사로잡을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무공이 너무 높아 쉽지 않 은 것이다. 그녀를 제압하고 있는 마법이 용화대수미선공에 극제되는 현상이 없었다면 이것 조차 불가능하였으리라! 쏴아-앙! 주천운이 일순간 망설일 때, 엄청난 기세가 등뒤에서 덮쳐 왔다. '제주가 벌써 왔단 말인가?' 주천운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음을 직감했다. "불광멸겁뢰(佛光滅劫雷)-!" 금방이라도 대려군의 가슴을 꿰뚫을 듯이 무서운 검기를 쏟아 내고 있던 호국지존병이 거두 어지면서, 주천운의 왼손에서 찬란한 서기가 폭발하듯 뻗어났다. 꽈꽝! 대려군의 전신에서 자광이 엄청나게 일어나며 소영이 주천운을 덮쳐 왔다. 그녀는 이미 사 고능력이 없는지라 용화대수미선공에 겁을 먹으면서도 위기를 느끼게 되자 본능적으로 주천 운을 공격한 것이다. 꽈-꽈르릉! 천붕지몰(天崩地沒)의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십 장이 흙먼지로 뒤집어지며 소용돌이쳤다. 카-앙! 뒤이어 대장간의 불똥과 같이 불꽃이 폭발하듯 튀며 매서운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윽!" 주천운이 비틀하며 잇달아 물러났다. '가공할 고수로군!' 돌아온 보도를 잡으며 장내로 내려서는 제주의 안색이 굳어졌다. 단 일순간이었다. 주천운의 불광멸겁뢰가 대려군을 때리는 것과 동시에 자미천소의 경력도 주천운의 가슴을 가격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으로 그의 뒤를 덮치는 제주의 회공어수도 (廻空馭手刀)를 막아 낸 것이다. 불광멸겁뢰(佛光滅劫雷)! 천하의 그 무엇도 견뎌 낼 수 없다는 항마신공이 아니던가. 주천운이 위험을 각오하고 불광멸겁뢰의 위력을 줄였다고는 하나 그것이 가공지세(可恐之 勢)임에는 틀림없었다. "캬아-악!" 한소리 심금을 찢는 비명과 함께 불광멸겁뢰에 격중된 대려군은 그대로 십 장 이상을 훌훌 날아가 떨어지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으음!" 그와 동시에 주천운도 신음을 뱉어 냈다. 그는 거의 같은 순간에 대려군의 일격을 받아 내면서 또한 제주의 가공할 공세를 막아 냈 다. 제아무리 용화대수미선공으로 보호되는 주천운이라 할지라도 어찌 성할 수 있겠는가? 검에 있어서의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과 같은 가공할 절학이 바로 회공어수도라는 절기다. 그럼에도 되돌아온 자신의 보도(寶刀)에 콩알만한 이빨이 빠진 것을 보고 경악하던 제주는 대려군이 십여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군매!" 제주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그와 같은 인물이 감정의 동요를 드러낸다는 것은 간단한 의미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호 칭은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주천운이 흠칫하여 제주를 보았다. 한편, 군웅들이 달려가는 쪽에서 처절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흑의인들이 나타나 도주하 는 군웅들의 퇴로를 막고 그 뒤를 실혼마인이 덮친 것이다. 격렬한 혈투였지만 실혼마인의 위세는 절세(絶世)하여 군웅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방적 일 수밖에 없었다. "으악!" 차-차창! "으아아-." 그런데 어느 순간, 천도봉쪽에서 흑의검수(黑衣劍手)들이 홀연히 나타나더니 군웅들의 퇴로 를 막고 있던 흑의인들을 마구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검세는 가히 일기당천(一騎當千)이었다. "저자들은?" 제주가 불현듯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천제문보다 강한 뇌정검문(雷霆劍門)의 고수들이지! 제주, 실혼마인들을 불러라!" '뇌정검문? 그런 문파도 있었던가?' 암중 생각을 굴린 제주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본주가 왜 그래야 할까?" "그렇지 않다면 실혼마인들로 너를 공격하도록 하겠다!" 주천운은 소매에서 천천히 현천마금을 꺼냈다. "현천마금?" 그것을 본 제주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과연 대단한 안목이로군! 내가 강호에 나온 뒤, 이처럼 대번에 현천마금을 알아보는 사람은 너뿐이었다!" 주천운의 말에 제주는 대려군을 슬쩍 한번 쳐다보더니 수중의 보도를 고쳐 잡았다. 눈빛이 싸늘히 빛나고 있었다. "현천마금에 그런 능력이 있음은 인정하지. 하지만 지금의 너는 그럴 능력이 없을 텐데?" 파팟! 채 그의 말도 끝나기 전에 그의 수중에서 가공할 도세가 주천운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 위 세는 놀라울 정도라 주위 십 장을 뒤덮었다. 꽈르-릉! 그런데 그 순간에 주천운의 신형이 마치 폭발하듯 광풍을 휘몰며 그대로 일직선으로 하늘로 치솟지 않는가? 그것은 가공한 속도와 위세를 지니고 대번에 제주의 도세를 피해 냈다. 흑의 한 조각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도에 남겨졌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정말로 별내상을 입지 않았단 말인가?' 제주는 기가 막힌 듯 굳어졌다. 그러나 그가 어찌 알겠는가? 뇌정군림신법이라는 것이 일단 펼쳐지기만 하면 천지의 기(氣)가 빨려들어 오히려 운기조식 하는 것 같은 효과를 얻는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시전할 때마다 그처럼 씩씩한(?)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제주, 그래도 부르지 않겠는가?" 주천운이 광풍을 휘몰며 공중에서 외쳤다. "네게 능력이 있다면 굳이 본주에게 실혼마인을 부르라는 이유가 무엇이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면 여우가 득을 본다!" "여우?" 제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그 말뜻을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제삼의 인물이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호랑이는 쥐새끼 몇 마리를 잡고도 여우를 잡을 수 있다!" "흥! 외오당 중의 삼 개 당과 내삼당 가운데 일 개 당. 그 사 개 당의 힘으로 호랑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주천운의 코웃음에 제주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본문의 배치를 어떻게 이렇듯 손바닥 보듯...' 그러나 그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얼굴 표정은 여전히 어디 유람이라도 나온 듯했다. "실혼마인을 상대하고도 남을 세력이지!" "끝을 보고 싶단 말이군! 뇌정검문은 어디 있느냐?" 주천운이 크게 외쳤다. 그 목소리는 벼락을 때리듯 엄청난 것이었으나, 그가 내심 이를 악물고 내부 기혈의 진동을 누르고 있음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뇌정검문의 제자가 명을 기다립니다!" 그 순간에 천도봉 전체가 환히 밝아졌다. 그 불빛 사이로 수를 알 수 없는 인영들이 어른거 리는 것이 보였다. '천도봉쪽의 매복이 모조리 분쇄되었단 말인가?' 제주가 내심 신음할 때, 주천운은 땅에 내려서며 말했다. "실혼마인을 없앤 제단의 고수를 본문의 고수와 남은 군웅이 친다면, 그러고도 제단이 이긴 다면... 그때에도 남에게 대항할 힘이 있을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 "우선 실혼마인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나?" 주천운이 침중히 제주를 쏘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두 줄기 전광(電光)이 허공 중에서 작열하는 듯했다. "생각보다 과연이군! 너와 같은 인물이 이제야 세상에 나타났다니 괴이하다! 물러나라!" 제주가 천천히 주천운에게서 눈을 떼더니 외쳤다. "우우-." 그의 명령에 실혼마인들이 괴성과 함께 모두 물러났다. 그러나 한쪽으로 비켜섰을 뿐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군웅들의 피해는 실로 참혹하였다.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것이 실혼마인이었다. 제주는 암중에 대려군을 살펴보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냐?" 주천운은 그가 내심 대려군에게 많은 신경을 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모든 이유를 제쳐 놓고도 그것은 당연했다. 그녀와 같은 절대고수 일 인이라면 만 명의 고수를 얻은 것과 같 기 때문이다. "우선, 쓸데없는 심기는 안 통함을 보여 주겠다!" 주천운의 손이 현천마금에서 움직였다. "으흑!" 쥐어짜는 신음과 함께, 대려군의 곁으로 암중에 다가갔던 천제문의 고수 하나가 심맥이 박 살나 그 자리에서 죽어 갔다. '백년 이상의 내공을 지닌 고수인데...' 표정에 미동조차 떠올리지 않고 있는 제주는 그 광경에 가슴속이 쓰렸다. 인간이 백년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내가의 고수를 어 디서 쉽게 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실혼마인 따위는 전혀 필요없을 것이었다. "현천마금의 사멸령(死滅靈)이면 능히 자미천소의 만상구멸의 위력을 낼 수 있다!" 주천운은 천심전으로 제단의 절강(絶强)한 고수 하나를 죽이고 제주에게 싸늘히 웃어 보였 다. 그 웃음은 너도 죽일 수 있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제주는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꿈에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날 협박할 생각이라면..." 그는 그 느낌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차갑게 주천운을 노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 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주천운은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했다. "모든 매복을 철수해 황산에서 물러나라!" "뭐... 라고?" 주천운의 말에 제주의 눈에 어이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오는 천중절(天中節;단오)이면 십 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사해무림대회(四海武林大會)가 열 리게 된다! 그때 모든 것을 결정짓자!" "사해무림대회..." 제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25 장 백척간두(百尺竿頭) 사해무림대회(四海武林大會)! 십 년 만에 열리는 무림대제전, 지난 십 년 간의 모든 배움을 겨뤄보는 신진고수들의 등용 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사해무림대회였다. 십 년 만에 열리는 일장의 무림성회(武林盛會)인 것이다. '두 달이라...' 제주는 무슨 생각인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좋다! 그렇게 하지! 그런데 네가 무림을 대표할 수 있느냐?" 천하의 주천운도 여기에는 자신있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본방주가 구파일방을 대신해 우선 보증하겠다!" 실혼마인에게 혼이 나 안색이 창백한 복마신개 철지양이 분노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개방의 신용은 역대로 괜찮은 셈이었지... 좋다!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다!" 그는 자르듯 말하고 대려군에게 가려 했다. "잠깐!" 뇌성이 진동하면서 주천운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천둥 치는 소리가 요란하니, 내막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그가 내 상을 입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이냐?" "먼저 매복을 철수하는 것을 봐야겠다!" 제주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소인배로군!" "송인(宋仁:송양지인)의 대인(大人)보다는 소인이 낫지!"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춘추시대 말기의 송양공(宋襄公)이 초(楚)와 전쟁을 하면서 적은 병 력을 가지고서도 적의 대군이 강을 건너 오는 것을 그냥 두고 보았을 뿐 아니라, 적이 진지 를 구축할 때까지 그냥 두었다가 적이 모든 준비를 끝낸 다음에 공격하여 그야말로 박살이 난 것을 이른다. 한마디로 쓸데없는 인정을 의미한다. '무서운 놈... 그러나 네놈은 오늘의 일을 뼈저리게 후회케 될 것이다!' 제주는 내심 코웃음 치면서 소매를 저었다. 신호탄 하나가 높이 올라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시신봉을 중심한 거의 사방에서 신호탄이 솟아올랐다. 제주는 주천운에게서 시선을 돌려 대려군에게 가려 했다. "잠깐!" 주천운이 또 앞을 막아 섰다. "또 뭐냐?" "오늘의 이 참극을 일으키고도 이대로 그냥 간다면 죽은 사람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 가?" 제주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지금 본주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이런 때 장난할 담보가 내게는 없다!" 주천운은 대려군쪽과 한쪽에 서 있는 실혼마인쪽을 바라보았다. "죽은 자의 목숨이 허깨비가 아닌 이상, 그 빚의 일부는 받아야 되겠다." 그 의도는 명백했다. 대려군이나 실혼마인이나 둘 중 하나를 남겨 두라는 것이다. "..." "..." 두 거인(巨人)의 눈이 침묵 속에 무섭게 마주쳤다. "뇌정검문이라 했던가? 좋아..." 제주는 돌연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몸을 돌려 대려군에게 걸어갔다. 주천운은 보이지도 않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자 주천운은 아무 말도 없이 길을 비켜 주었다. 제주가 대려군의 앞에 간 것을 보는 주 천운의 눈에 아픔이 스쳐 갔다. '려군... 미안하오. 군웅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소. 그리고 여기 당신이 있 는다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군웅들이 그냥 있지 않을 것이오!' 그의 심중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 하나하나에는 실로 간단 치 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대려군을 안아 든 제주가 주천운을 돌아보았다. "다시 보게 될 때는... 아하하...!" 제주는 방성대소(放聲大笑)했다. 그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어둠을 뚫고 날아올랐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신형을 따라 웃음소리는 오랫동안 사방으로 메아리 치며 종 소리처럼 들려 왔다. 그것은 그의 깊고 두터운 공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웃음소리의 여운이 잦아들었다. 마치 악마의 손길이 황산을 헤집고 지나간 듯하였다. 사방에는 피와 죽음뿐이었다.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죽지 않은 사람도 피 를 흘리며 창백하게 질린 빛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의혹과 공포, 경악이 모든 사람들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웃음소리의 여운이 사라지면서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일대에 엄습했다.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우뚝 선 주천운을 바라보는 군웅들의 눈에는 의혹의 빛이 충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삼의 세력이 그들을 노리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 가공할 능력을 지닌 제주란 자는 그 제삼세력의 존재를 확인조차 해보지 않고 서 떠나간 것이다. 그것도 저 무서운 위력을 지닌 실혼마인들을 그냥 두고서... 숨막히는 고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직도 더 기다릴 셈인가?" "우하하하..." 주천운이 차갑게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소리 우렁찬 웃음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던 것 이다. '대단한 공력이다!' 군웅들의 가슴이 섬뜩할 때, 이백여 장 가량 떨어진 바위 뒤에서 청의노인 한 명이 나타났 다. 미목이 매우 청수하고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노인의 나이는 채 육십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는 둥근 원이 새겨져 있는데 위는 푸르고 밑은 누런 빛이었다. 이런 곳 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학문 깊은 노유(老儒)로 볼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신마금검뢰의 위명이 갑자기 강호를 진동한다 했더니 과연 까닭이 있었군! 감탄했소!" 청의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은 아주 사람 좋은 호인(好人)으로 보였다. "천지회에는 매우 많은 수의 회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귀하의 신분을 알고 싶소!" 주천운은 차가운 눈길로 청의노인을 주시했다. 노인의 눈에 가볍게 놀라는 빛이 스쳐 갔다. "과연 상관대협이 아는 것은 적지 않구려! 맞소. 본 회에는 모두 십구 명의 회주가 있는데 노부가 외람되게도 제일회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소." 주천운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천지회의 회주인 천지상인(天地上人)이 이렇게 직접 나타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 데?" 청의노인도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본 회에 대해 이토록 정통한 사람이 있음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오..." "..." 잠시 침묵이 흘러갔다.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중인들은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들을 몰살시키려던 제주(帝主)나 그들을 구해 준 신마금검뢰 상관천, 그리고 암중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천지상인까지... 그 누구도 그들이 안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말 한마디 움직임 하나에 자신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지 않는가? 마치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천제문이 이미 갔는데도 귀회(貴會)가 떠나지 않고 있음은... 혹시 천제문이 못다 한 일을 대신하려는 것이오?" 주천운의 말에 군웅들의 안색이 싹 변했다. "허허허... 상관대협의 입은 매우 예리하군! 하나 본 회는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별로 원치 않소!" 천지상인은 주천운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다만 오늘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 여러 사람이 여기 모였던 이유를 생각할 따름이지..." 그제서야 사람들의 머릿속에 보물이 떠올랐다. "천소는 이미 천제문의 것이 되었고 고금(古琴)은 상관대협의 소유이니, 임자 있는 것은 어 쩔 수가 없는데..." 천지상인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천외쌍기의 장보도마저 상관대협이 차지함은 너무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지 않소?" 그의 말은 조용했으나 군웅들의 눈을 일제히 주천운에게 향하게 만들기에 족했다. "회주의 말뜻은 내게 장보도를 요구하는 것이오?" 주천운은 부인치 않고 태연히 웃었다. "굳이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으나..." 천지상인은 환히 밝혀져 있는 천도봉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히 주천운을 쳐다보았 다. "먼 길을 일부러 왔다가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이대로 일이 끝난다면 결과적 으로 오늘의 일은 상관대협을 위한 것이 될 것인데?" 그의 말은 대우 완곡한 듯했으나 그 뜻을 누가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장보도는 네가 가지고 피는 군웅이 흘리고 그리고 내일이면 신마금검뢰의 위명이 천하를 진동할 것이고... 그러고 보면 신마금검뢰의 출현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심기를 쓰다보면 빨리 늙을 텐데도 회주의 얼굴에는 괴이하게도 별로 주름살이 보 이지 않는군." 주천운은 군웅들의 기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도 낭랑히 웃었다.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천지상인의 표정이 그 말에 미미하게 흔들렸다. "굳이 말로써 피곤한 군웅들을 이용하려고 할 필요 없소!" 주천운은 왼손으로 품속에서 옥합 하나를 꺼냈다. 군웅들의 눈이 일제히 거기에 꽂혔다. "철방주." "노화자, 여기 있소이다." 복마신개 철지양이 주천운에게 다가왔다. "여기 장보도가 있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주천운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복마신개에게 옥함을 넘겨주었다. 복마신개 철지양은 의아한 빛을 떠올리다가 아무 소리 없이 옥합을 받아 속을 확인해보았다. "그게 강호에 떠도는 그 천외쌍기의 장보도가 틀림없습니까?" 복마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은 못해도... 그간 본방이 수집한 대로라면 이것은 틀림없는 장보도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노부도 한번 보자!" 느닷없이 군웅들 속에서 번개 같은 인영이 복마신개를 덮쳤다. 복마신개가 노호하며 일 장을 갈겨 냈다. 그러나 실혼마인과의 일전으로 상처 입은 그의 공력은 평소의 칠팔 성에 불과했다. 일진 회 오리가 일어나면서 비틀하는 복마신개에게 인영은 그대로 덮쳐 갔다. "물러나지 못할까!" 호통 소리와 함께 복마신개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복마신개의 앞을 가로막고는 인영의 장세를 그대로 자신의 가슴으로 받아 냈다. 펑! 가죽북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괴로운 신음이 들렸다. 놀랍게도 신음을 흘리며 물러나는 것은 복마신개의 앞을 가로막은 주천운의 가슴을 친 인영 이었다. "이... 이럴 수가? 노부의 구혼독장(句魂毒掌)을 몸으로 막아서 나를 격퇴하다니...?" 믿을 수 없는 듯 두 눈을 부릅뜨는 인영을 보고 군웅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구루마존이다!" 구루마존(句漏魔尊) 형기북(刑驥北)은 강호상에 잘 나다니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독랄하 고 음흉한 성품에 치를 떨지 않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흉명이 높은 자이다. 그가 그처럼 원 한을 쌓고도 오십 년이란 세월 동안 강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무공이 높고, 그가 구루산을 잘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전 그토록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군웅들의 속으로만 숨으며 자신은 조금도 힘을 쓰지 않음을 보았다... 형기북! 너에게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주천운은 침착히 말하면서 구루마존을 쳐다보았다. 이때, 그의 눈빛 깊은 곳에 고통의 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루마존은 주천운의 신위가 생각나자 갑자기 등줄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그에게 반말을 하는 것 따위는 이미 논외였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빠르게 생각을 굴린 그는 다짜고짜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차면서 신형을 날렸다. "익!" 생애 최고의 속도로 허공으로 떠오르던 그는 한소리 쥐어짜는 듯한 신음과 함께 철퇴에 얻 어맞은 참새처럼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운 나쁘게도 그는 머리로 땅을 들이박 으며 그대로 목이 꺾어져 즉사했다. 그가 이처럼 간단히 비명횡사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주천운은 현천마금에서 손을 떼면서 복마신개를 쳐다보았다. "그 장보도를 없애 버리십시오!" "예, 뭐라고 하셨소?" 복마신개는 귀를 의심했다. 주천운은 약 사오백 명 가량 남은 군웅들 보고 쓰게 웃었다. 그들의 눈은 여전히 장보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기를 바랍니까?" "!" 복마신개는 흠칫하더니 이내 껄껄 웃었다. "노화자 평생에 드디어 인물을 만나게 되었군! 누가 반대하는 놈 있느냐?" '놈?' 군웅들이 얼떨떨해서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복마신개는 다시 크게 웃었다. "좋아! 없단 말이지?" 복마신개는 대번에 장보도를 비벼 가루로 만들고 말았다. "자... 장보도가!" "천외쌍기의 무공이..." 군웅들 사이에 탄성이 올라왔다. 주천운은 천지상인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공평한 것 같지 않소." 천지상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아주 공평하군..." 그러나 그의 내심이 일그러지고 있음은 주천운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볼일이 남아 있소?" "..." 천지상인은 아무 말 없이 주천운을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본회는 상관대협의 향배(向背)에 매우 관심이 많소. 그럼." "사해무림대회 때는 뒤에 서 있지말기 바라겠소." 주천운이 마주 웃었다. 천지상인은 껄껄 웃으며 가볍게 공수하더니 그대로 스르르 떠올라 뒤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마치 물결치는 듯한 움직임이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기가 막히게 신속한 철수로군...!" 복마신개는 입을 딱 벌렸다. 군웅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듯했다. 한 사람씩 열거할 수는 없으나 지금 억지로라도 서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내로라 하는 고수였고, 여기에는 선배이인들은 물론이고 전대의 노마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암울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의 일전은 그들의 의기를 꺾어놓기에 족했던 것이다. 무표정한 것은 한쪽에 서 있는 실혼마인들뿐이었다. "김 새게도 생겼지... 이건 듣도 보도 못하던 것들이 나타났다 하면 능공허도라니..." 복마신개도 예외는 아닌지라, 맥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호위장(胡衛將)." 그때 주천운이 나직이 외쳤다. "예." 뇌정검문의 고수라는 흑의검수 하나가 바람같이 주천운의 앞에 부복했다. "휘하를 이끌고 주위를 수색하라.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흠칫 고개를 들던 흑의검수는 이내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호경위라고 불리는 지존위대의 부위장이었고, 뇌정검문이라는 신생문파의 고수이기도 하였다. 패도무적 정문수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호경위가 수하 이십여 명과 함께 사라졌다. "으흐흐흐흑... 이 괴물들이 형님들을..." 그 뒤, 대한 하나가 비통한 음성으로 외치며 실혼마인들에게 다가갔다. 회남오의(准南五義) 의 막내인 신룡검객(神龍劍客)이라는 자인데 그와 생사를 같이하던 네 의형들은 모두 실혼 마인에 의해 죽은 것이다. "멈춰라!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복마신개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두 눈을 부라렸다. "이 괴물들을 두고 볼 필요가 어디 있소이까?" 신룡검객이 이를 갈며 뭐라고 하려는데 비천쌍서(飛天雙鼠) 중의 노대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내달았다. 경공이 높고 교활한 비천쌍서는 강호에서 활동한 지 이미 사십 년인데 오늘 그 노이가 죽고 노대도 중상을 입은 것이다. "실혼마인이 무차별 살수를 펼친 것은 사실이나, 이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가엾은 희생자들이오!" 구화일수(九華逸 )라는 노기인이 고개를 흔들며 참견했다. 견문 넓은 그는 실혼마인의 정체 를 아는 것이다. "크크... 비록 처음에는 괴물들이 우리를 공격한 게 사실이지만 지금의 우리가 누구 때문에 살아 있는 걸 모른다면 돌대가리들이지!" 음침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안색이 창백한 노인 하나가 암벽에 기대고 서 있는데 내상이 중한 듯했다. 올해 백두 살인 음산신마(陰山神魔)인데 그와 같은 고수라도 천멸지곡에 이은 실혼마인들의 공격에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심기는 정평이 나 있는 터라 군웅의 시선이 주천운에게 향했다.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혼마인들이 없었으면, 천지회는 곱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오." 용맹하게 생긴 대한 하나가 나서며 외쳤다. "상관대협의 신공은 이미 천인(天人)과 같은데, 뇌정검문의 고수와 이 실혼마인들을 움직여 그 천제문의 간악한 놈들을 모조리 처치하시지, 왜 그놈들을 그대로 돌려 보내셨습니까?" 그는 철금강(鐵金剛) 조대(趙大)라는 외가고수였다. 대개의 외가고수가 그렇듯 그도 매우 직 선적인 성격이었다. 주천운이 쓰게 웃으며 뭐라고 하려는 순간에 호경위가 날아들며 허리를 굽혔다. "양쪽의 매복과 감시는 이미 완전히 철수되었음이 확실합니다!" "욱!"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주천운의 안색이 백지장과 같이 창백해지더니 잇달아 두 모금의 검은 피를 토해 냈다. "아니?" "사... 상관대협!" 이 돌연한 사태에 군웅들에게서 대소란이 일어났다. "움직이지마라!" 호경위가 주천운의 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벼락같이 검을 세우며 외쳤다. 뇌정검수라 불리 는 지존위대는 이미 번개같이 주천운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신속한 동작에 누가 감탄치 않겠는가? "괜... 찮다... 비켜서라..."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주천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 알겠습니다." 지존이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호경위는 할 수 없이 옆으로 물러났지만 그의 손은 검을 굳게 움켜잡고 있었다. 누구든 곁에 오는 자만 있으면 벨 기세였다. "이제 아셨소? 이게 천제문의 제주... 와 천지회의 천지상인을 돌려보낸 이유요..." 주천운은 철금강 조대를 보고 담담히 웃었다. 이럴 때의 담담함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철금강 조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죄... 죄송하오이다. 상관대협! 나... 나는 대협께서 상처를 입으신 줄 모르고..." "상처가 중하시오?" 복마신개의 물음에 주천운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가볍지는 않습니다... 억눌렀던 것이라." "그 교활한 놈들도 결국 상관대협께 속아넘어가고 말았구려." 복마신개가 그래도 그 중에 통쾌한 듯 미소했다. "그들은 둘 다 소생의 내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천운의 말은 그의 미소를 사정없이 구기고 있었다. "아니? 그 개 시팔놈의 새끼들이 대협의 내상을 알고도 그냥 갔단 말씀이오?" 비천쌍서의 노대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하오문중의 인물에 속하는 자인지라 입이 곱지 않았다. "자미천소의 위력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알기는 했지만 나의 내상이 저들을 움직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몰라 결국 그냥 물러난 것입니다." 주천운은 멍청히 서 있는 실혼마인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거야, 내상을 입고도 움직이는 행동이나 그 구루마존이란 놈을 처리하는 것만 보아 도..." 복마신개의 말에 주천운은 쓰게 웃었다. "그렇게 보았기에 그들이 물러난 것이지요." "그럼, 대협의 내상이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깊었단 말이오?" 바위에 기대 있던 음산신마가 감았던 눈을 뜨며 물었다. 그의 입에서 주천운을 대협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나왔으니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 은 지금 중인들이 어떤 눈으로 주천운을 보고 있느냐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공력을 기울인 단 한 번의 탄주면 저들을 움직일 수 있는데... 지금의 내겐 그런 힘이 없 습니다." 경악한 음성이 곳곳에서 들려 왔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 조금 전에 구루마존을 현천마금으로..." "그것은 천심전인데 그것과 실혼마인의 심혼을 제압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천운이 고개를 흔들자 모두의 가슴속이 서늘해져 왔다. "그럼 만약에 그 제주란 새끼가 속지 않았다면...?" "모두 끝난 거지...!" 모두가 웅성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뇌정검문의 고수들이 천도봉에 매복... 어? 어디 갔지?" 금도삼절(金刀三絶)이라는 고수가 외치다 멍청해졌다. 대낮같이 밝혀져 있던 천도봉쪽이 완전히 암흑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천제문의 음모를 안 것이 너무 촉박해 오늘 이곳에 온 뇌정검문의 고수는 이들이 전부입니 다." 주천운이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앞에 있는 흑의검수들을 가리켰다. 그의 말은 사람들의 입 을 벌리게 만들기에 족했다. "아니, 그럼 천도봉의 것은...?" "허장성세. 거기 있는 사람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공성계(空城計)! 그것은 정녕 칼날 위에서 행해진 위험천만의 목을 건 심기(心機)의 줄타기였다. 주천운은 보통 사람이면 열 번은 죽었을 내상을 입고도 두 개의 거대세력을 교묘히 상호견 제하면서 이용하여 그들을 격퇴한 것이다. 그야말로 소진장의(蘇秦張儀)가 머리를 싸매고 보따리를 쌀 판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그 누 가 있어 제주의 손에서 군웅을 구해 내고 실혼마인 팔십 명을 넘겨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여기에 또 제주의 모략(謀略)이 들어 있었다. 그가 주천운에게 당한 것은 틀림없으나 제삼의 힘이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음을 느끼자 일부 러 쉽게 당하는 척하고는 후일을 기약하고 떠나간 것이다. 주천운에게 장보도가 넘어간 것을 알았기에 천지회와 싸우기를 바라고... 오히려 어부지리를 노린 것이다. 이것이 제주가 제삼의 힘이 있음을 확인치 않고 훌쩍 떠난 이유였다. 만약 싸 우는 기척이 있었다면 그는 다시 돌아왔을 것이었다. 천지상인 또한 거간노활(巨奸老滑)했다. 그는 천도봉쪽의 뇌정검문의 매복이 허장성세임을 알고도 장보도가 없어지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돌아간 것이다. 그도 주천운이 실혼마인을 움직일 수 없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면 결코 그냥 돌아가지는 않 았으리라. 확신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가 그냥 돌아간 것은 만에 하나라도 주천운이 실혼마인을 움직일 수 있다면 싸움은 쉽지 않게 될 것이고, 거기에 제주가 돌아올 것을 꺼려 했기 때문 이다. 그도 제주가 돌아올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어부지리(漁父之利)와 공성계(空城計). 이 두 가지를 교묘히 조종함으로써 주천운은 그 두 초강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은 쉽지만 그 동작 하나 하나, 그 말 한마디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엄청난 심기의 대 결전(大決戰)이 바로 주천운과 제주, 그리고 천지상인과의 일전이었다. 그것은 대격전의 서막(序幕)이기도 했다. 제 26 장 회오리치는 음모(陰謀)의 장(章) 황산(黃山) 대혈겁(大血劫)! 한 달 전에 일어난 황산의 대참사는 이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때 죽은 인원의 수는 모두 구백칠십이 명, 상처 입지 않은 자는 전무(全無)! 전체 사상자 의 숫자는 추정불가였다. 그것은 엄청난 태풍을 몰고 오기에 족한 대사건이었다. 천제문(天帝門)! 암중에 숨어 있던 이 가공할 집단의 힘이 천하 무림인들의 뇌리를 강타하며 드러난 것이다. 천하무림은 그들의 잔인무도한 수단에 전율과 분노를 함께 느껴야 했다. 혈마소후(血魔簫后)와 제주(帝主)란 이름은 저주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시신봉의 절반을 폐허로 만든 공포의 여마(女魔), 그 혈마소후가 그 와중에도 천하가 공인하 는 환우제일미( 宇第一美)로 떠오른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천지회(天地會)! 지난 세월 동안, 존재하는지 마는지 움직임조차 미미하던 천지회는 황산에서의 단 한 차례 출현 이후 또다시 사라져 버렸건만 이 이름은 이미 천하인이 중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천지상인(天地上人). 무림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천지회의 회주,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무엇을 노리고 있 는가? 들끓는 무림의 여론 속에 혈마소후보다, 제주보다, 천제문보다, 천지회보다 더욱 뚜렷이 드 러난 인물 하나가 있었다. 신마금검뢰(神魔琴劍雷) 상관천(上官天)! 황산 대혈겁 이후, 그의 이름은 중천의 태양보다 더욱 뚜렷했다. 홀홀단신, 놀라운 기지(機智)로써 오백여 명의 군웅을 구출해낸 절대영웅(絶對英雄)! 그는 천하최강의 신비문인 뇌정검문(雷霆劍門)의 문주이다! 그의 신검(神劍)에 마후(魔后)가 피를 토하며 거꾸러지고, 그의 마금(魔琴)에 제주(帝主)가 꼬리를 말았다. 교활한 천지상인이 그의 위엄에 뒷걸음 치니... 오오! 천하를 진동하는 그 이름 신마금검뢰... 그의 행적은 무림 중에 이미 한편의 가사(歌詞)로 만들어져 회자되었다. 그것은 상관천이란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사해무림대회(四海武林大會)는 이제 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천제문도, 천지회도... 그리고 주천운의 모습도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태풍직 전의 고요인 양 그들의 종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종적이 강호상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천하무림까지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황산 대혈겁 이후, 무서운 피의 폭풍(暴風)이 숨쉴 사이도 없이 연달아 무림을 후려치고 있 는 것이다. 진주 언가(彦家)의 멸문지화, 뒤를 이어 태극문(太極門)과 용호방(龍虎 ), 광동무관(廣東武 館)... 개방의 금룡분타가 괴멸되더니 드디어는 구대문파의 하나인 점창파가 피로 씻겼다. 그럼에 도 그것이 누가 하는 짓인지 단서조차 남지 않았다. 흉수의 세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천사곡(天邪谷)이 피로 씻기고 봉곡(封谷)한데 이어 구대문파의 종남파(終南派)가 점창파에 이어 막대한 타격을 입고 봉산(封山)을 선포했다. 흉보(兇報)는 연일 꼬리를 물고 있었다. 무림은 공포로 떨고 분노로 떨었다. 구대문파에서 긴급동맹을 소집해 추적대를 만들었으나, 추적대가 동이면 혈겁은 서쪽에서 일어났다. 상황은 명백했다. 사해무림대회 이전에 무림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의 뇌리에는 은연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황산 대혈겁 이후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성한 억측만이 무림을 떠돌 뿐이었다. * * * 죽음의 운무(雲霧)가 피어올라 천험(天險)의 절지로 불리는 곳이 있다. 그 깊숙한 곳에 거대 한 누각이 하나 솟아 있음을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제천각(帝天閣)은 그 절지의 중심이다. 호화의 극을 이룬 대청은 그 제천각의 중앙에 자리한다. "남궁가와 구대문파가 주축이 되어 극비리에 결성한 멸마맹(滅魔盟)의 움직임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본문에 보고되고 있습니다." 기찰당주(機察堂主)로 불리는 냉혹한 성품의 노인은 머리를 조아렸다. "상황의 진전은?" 착 가라앉은 음성, 기찰당주의 앞에 늠연히 앉아 있는 것은 바로 제주였다. "오늘 이후 구대문파는 육대문파가 될 것입니다. 그 외 각지의 분타에서도 예정대로 움직이 고 있습니다." "그자의 종적은 찾았느냐?" "만리추종이 이미 단서를 잡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만리추종이 믿을 수 있는 자냐?"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뒤에는 언제나 감시가 붙어 있습니다." 기찰당주가 고개를 들었다. "신마금검뢰의 신분은 마치 안개 속과 같습니다. 신의 졸견으로는 그는 일반 강호인이 아닙 니다." 제주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후단의 일을 망친 호국지존... 그자와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본인..." "후후후... 과연 기찰당주답군! 본주의 생각도 그렇다. 그의 무공은 호국지존보다 고강하니 본인일 가능성은 희박하나 그 가공할 검술 등의 무공초식이 약간은 비슷하니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기찰당주가 머리를 조아렸다.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곤란?" "예, 멸마맹에서 무림고수들이 각개 격파당한다는 판단 아래 사해무림대회까지 무림정예 고 수들을 멸마맹으로 모으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주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사해무림대회 전까지 무림의 힘을 반감시킨다는 우리의 계획이 어긋나게 된다는 거겠지?" "그, 그렇... 습니다." "후후후... 기찰당주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되었군!" "예? 무슨..." "되었다, 물러가라!" 제주의 음성이 싸늘해졌다. 기찰당주가 예를 갖추며 황망히 물러난 후, 제주는 의자에 깊숙이 파묻혔다. "무림의 힘을 분산시킨다? 사해무림대회? 흐흐... 어리석은 소리, 본주가 정녕 상관천에게 당 해서 물러난 것인 줄 아는가?" 득의한 미소가 제주의 입가에 떠올랐다. "앞으로 열흘 후면 문주와 천제구로가 극비리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때면 백팔 명의 금강마 인(金剛魔人)이 완성된다! 그들의 힘은 실혼마인을 몇 배 능가하는 것이지!" 그의 중얼거림은 실로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금강마인이라는 이름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능력이라는 점에서는 실혼마인과 금강마인은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실혼마인은 전신의 잠력을 한꺼번에 모조리 쏟아내기에, 한 번에 한 시 진 이상을 움직이지 못한다. 만약 한 시진 이상 계속해 움직이면 전신의 잠력이 다해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마인은 그런 제약이 없다. 거기다 실혼마인과는 달리, 금강마인의 신체는 도검불 침의 가공함을 자랑한다. "비록 멸마맹에 고수를 모아도 그들은 강호 여기저기서 터지는 혈겁을 구경할 수는 없다... 동분서주하면서 남은 힘을 모으고 사해무림대회를 기다리면서 이를 갈겠지! 후후후... 그것 이 바로 내가 기다리는 것이다!" 파삭! 태사의의 단목으로 된 손잡이가 제주의 손아귀에서 가루가 되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해무림대회는 열리지 않는다. 열리기 열흘 전에 멸마맹은 본문의 주력 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오오-이 가공할 음모! "쥐새끼 같은 천지상인, 그자는 어부지리를 노리며 눈치를 보다가 멸마맹이 멸망당하는 것 을 보고서야 황급히 뛰어나오겠지! 그때 그자는 수망대어(守網待魚)의 뜻을 알게 되리라! 으 하하하..." 제주의 웃음소리는 제천각을 뒤흔들었다. 수망대어(守網待魚)란 그물을 펴놓고 들어오는 고기를 기다린다는 뜻이 아닌가? 웃음을 멈춘 제주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날로 북경도 끝이다... 그때 국경에선 기다리고 있던 강병(强兵) 삼십만이 침공을 시작하 고 드디어 나는 군매와 더불어 황제가 된다! 천하의 주인인 야율극리(耶律克利)!' * * * 그와 같은 시각, 청수한 모습의 노인 한 명이 늘어진 휘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명대로 알아 낼 수 있는 천제문의 모든 행동을 멸마맹에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공손히 말하는 노인은 놀랍게도 천지회의 회주인 천지상인(天地上人)이었다. "그가 만약 호국지존, 오황야가 틀림없다면 결코 무림고수를 한데 모아 피해를 줄이자는 따 위의 졸략(拙略)은 쓰지 않을 것이다!" 휘장 안에서 아주 위엄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하오면?" 천지상인은 고개를 들었다. "호국지존은 제주 따위가 상대할 인물이 아니다! 천제문주는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 휘장 안의 신비인은 말을 끊었다. 그러자 대번에 주위에 숨막힐 듯 무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기도는 정녕 놀라운 것이었다. 천지상인은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계획을 바꾼다! 천지회의 모든 힘을 발동한다!" "모, 모든 힘이오니까?" "그렇다! 모든 힘이다! 십구 명의 회주에 속한 십구 개 친위대(親衛隊)! 천지인(天地人)의 삼 군(三軍)! 천하의 이백사 개 분타, 그리고 본제(本帝)의 삼 개 친위군(親衛軍)까지도!" "사, 삼 개 직속 친위군까지입니까?" 천지상인은 숨이 막히는 듯 입을 벌렸다.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세력인 것이다. 십구 명의 회주, 그들만 나서도 천하는 요동할 지경이거늘... * * * 남궁세가(南宮世家). 장안(長安)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여산(驪山)에 위치한 유서 깊은 무림세가(武林世 家)가 바로 이곳이다. 당세의 천하제일가로 불리는 이곳은 황산 대혈겁 때 공격해 온 천제문을 격퇴하면서 그 명 성이 더욱 높아져, 지금은 멸마맹의 총단이 되어 있었다. 바로 천하무림의 최중지인 것이다. 남궁가의 그 방대한 건축의 후원, 깊숙한 곳에는 한 채의 고아한 누각이 서 있었다. 목조 이층의 그 누각의 주위에는 송백림이 무성하고 허락을 받기 전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창궁헌(蒼穹軒)이라 이름한 그 누각은 남궁가의 시조인 천애유신(天涯儒神)이 기거하던 곳 으로 당금에 이르러서는 가주만이 출입할 수 있는 금지(禁地)가 된 까닭이었다. 그 창궁헌의 밀실에는 휘황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놀랍게도 그 빛은 한 사람의 몸에서 발산되고 있는 것이었다. 장엄이라는 말 이외에 또 어떠한 형용사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의 전신에는 찬란 한 서기가 연꽃과 같이 피어나고 그의 어깨 위에는 달무리와 같은 후광이 은은히 빛나니, 마치 불타(佛陀)가 환생한 듯한 모습이 아닌가!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서기가 옅어지고 거기 앉아 있는 것이 흑의의 유생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서기는 마치 모래 속으로 물이 스며들 듯 흑의유생의 몸으로 스며들어갔다. 드러 난 그 모습은 주천운이었다. 그는 더없이 맑아진 두 눈을 천천히 떴다. "쓰지 않아도 이르는 경지... 드디어 용화대수미선공이 십성에 이르렀다!" 주천운의 그 말은 용화대수미선공을 운기하지 않아도 그의 전신이 금강과 같아졌음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지난 한 달은 그가 입은 내상을 회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수습한 무공을 연마하는 시 간이기도 하였다. * * * 무림제갈 남궁천! 대외적으로 멸마맹의 임시 맹주인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주천운의 앞에 앉아 있었다. "이것이 본맹 내에 침투해 있는 첩자의 명단입니다." 그는 주천운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다. "멸마맹의 수뇌급은 모두 오십 명 가량, 그 중 첩자가 열이 넘는군!" 두루마리를 훑어본 주천운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실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수뇌급 중에서 첩자가 열이 넘다니... "이젠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로 인해 본맹의 모든 행동이 사전에 누설되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분노한 남궁천의 음성에 주천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는 없소... 멸마맹의 일은 조금씩이라도 밖으로 누설되어야만 하 오!" 두 사람의 어조는 변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궁천은 주천운이 바로 오황야인 호국지존임을 알게 된 데다 그의 끝없는 지혜에 완전히 심복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어느 정도의 피해가 나는지 아시면서도 그러십니까?" "그래도 기다려야만 하오." "사해군웅대회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멸마맹은 정말 망하고 맙니다. 궁여지책으로 고수들을 맹내(盟內)에 모았으나 밖에서 처자가 죽어 가는데 고수들이 어찌..." "사해무림대회는 열리지 않소." 주천운은 잘라 말했다. "...!" 남궁천은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쪽은 양동(陽動)이고 이쪽은 고육(苦肉)입니까?" 주천운은 담담히 미소했다. "맹의 일로 너무 시달려 심기가 흐려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변함이 없소..." 남궁천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지존과 같이 있기 전에는 좀 많은 것을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단순해지는 것 같습니다." 빙그레 웃던 주천운이 정색을 했다. "제주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오. 그는 절대로 공평한 입장에서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고 더 우기 사해무림대회 때까지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오!" "그럼 이대로 적을 기다립니까?" "멸마맹에 고수를 모으긴 했지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혈겁을 막으려고 추격대가 우왕좌왕하 고 아마도 제주는 그것을 매우 바라고 있을 것이오." "바라는 대로 해준다. 허를 만들려고 하십니까?"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득의하게 하려면 우리쪽의 모든 것을 그가 안다고 믿도록 해주어야만 하오!" 잠시 말을 끊었던 주천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최소한 사해무림대회 보름 이전에 발동할 것이고, 우리는 그보다 더 빨라야만 하오! 해서 몽고에 사람을 보냈소." "몽고에?" "그렇소. 천제문 자체와 문주 및 천제구로 등은 몽고에 있음이 틀림없는데 그들이 제단의 힘에 가세하면 그들을 이기고라도 천지회를 상대할 힘이 없게 되오!" "천지회... 천지상인이 그토록 무서운 자라고 보십니까?" 주천운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그는 천지회의 회주가 될 자격이 없소." 남궁천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회주가 따로 또 있단 말씀입니까?" "천지상인의 기도(氣度)도 대단한 것이었으나 지금 그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그것은 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이런 정도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으려면 분명히 무명인일 수가 없 을 테니까." "으음... 앞에는 늑대고 뒤에는 호랑이라니..." 문득 주천운이 물었다. "근래에 들어 천제문에 대한 정보가 각지에서 수집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몇 군데 암암리에 추적해 본 결과, 수집되는 정보는 매우 정확합니다. 괴이한 생각이 들어 저 혼자만 알고 아직은 맹 내에 발설치 않았습니다." "괴이할 것 없소. 천지회에서 우리의 행동을 떠보자는 것이니까, 그 정도 시간을 두었으니 되었소. 하라는 대로 천제문을 공격하시오." "역시 그게 천지회가 흘리는 것이겠지요? 알겠습니다. 덕분에 본맹의 피해도 줄일 수가 있 겠습니다." 천지회에게조차 허를 만들어 둔다... 보이지 않는 심계(心計)의 싸움은 이토록 치열한 것이다. "천지회조차 미처 준비하기 전에 제단을 쳐야 한다면 신속이 생명일 텐데, 아직 제단의 위 치를 모르지 않습니까?" 주천운의 눈에 비로소 고뇌의 빛이 어렸다. "그것이 기다리는 이유요. 공령천수와 무영개신, 만리추종 이 세 사람이 전력을 다해 그 소 재지를 찾고 있소." 주천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천제문주와 천제구로는 머지않아 도착하게 되오. 그들을 저지하는 사람이 그들을 얼마나 지연시켜 줄지... 반드시 그들이 오기 전에 알아 내야만 할 텐데..." 주천운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남궁천은 주천운의 등에서 태산을 보았다. 그도 몸을 일으켰다. "지존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천운은 그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가주도 이젠 아첨을 할 줄 알게 되었군. 그들은 어떻소?" "무서울 정도로 대단합니다. 모두 그들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 인지라..." 남궁세가의 전장(前莊)은 멸마맹의 총단으로 되어 무려 천여 명이 기거하고 있었다. 무림의 정영(精英)이 모인 것인지라, 그 세력은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원에 주천운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남궁천 혼자뿐이었다. 거기다 그 후원 지하 에 무려 사백의 고수가 이를 갈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더 더욱 없었다. 멸마맹의 공봉으로 추대된 중원삼신(中原三神)까지도 그것은 알지 못했다. 그들 사백 명! 그 중 백 명은 연혼전에서 연혼되기 전에 구함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삼백 명은 황산 대혈겁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었다. "정사양도가 섞여 있는데도 전혀 잡음이 없습니다. 지존의 능력이 아니라면 그들이 이토록 맹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궁천의 말에 주천운은 담담히 미소했다. "정사양도 누구라도 이민족(異民族)이 자신의 나라를 침공하려는 데는 반감을 갖기 마련이 지. 하여튼, 그들은 가장 큰 몫을 해내게 될 것이오." 과연 주천운은 지난 한 달 간을 그냥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를 구할 안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그뿐이랴! 그때 주천운이 문쪽을 바라보았다. "지, 지존!" 급박한 외침과 함께 문이 왈칵 열렸다. 나타난 것은 소신풍(小神風) 악비룡(岳飛龍)이었다. 그는 남궁가를 무상 출입하는 특권을 가지고 개방의 연락망과 주천운을 연결하고 있었다. 지난 한 달은 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행운의 한 달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듯 수선하냐?" 주천운의 꾸지람에 악비룡은 냉큼 절을 하더니 다급히 말했다. "혈마소후(血魔簫后)가 나타나 무당파를 멸문시켰습니다!" "뭣이?" 남궁천은 물론 주천운조차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혈마소후라니, 무당의 멸문이라니! "정말 그녀가 나타났단 말이냐?" 주천운이 급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소음에 무당파는 대항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상청관(上淸觀)이 초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으으... 그녀가 불광멸겁뢰에 맞고도 벌써 회복을 했다는 말인가? 큰일이다!' 주천운이 신음할 때, 남궁천이 심각한 어조로 악비룡에게 물었다. "무당파에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잘은 모르나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소음을 거두고 물러갔기에 몰사하지는 않은 듯하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회복 불능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멸절(滅絶)되지는 않았으니..." 남궁천은 신음을 흘려냈다. 주천운의 안색은 매우 심각했다. '그녀가 내 예상보다 일찍 회복되었으니, 엄청난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소신풍의 보고는 계속되고 있었다. "황하맹이 봉문하고 뒤따라 이맹의 하나인 녹림맹도 봉문... 어젯밤에 삼가의 하나인 왕가 (王家)가 봉문하면서 멸마맹에서 탈퇴했고 뒤를 이어 천화곡(天火谷)도..." * * * 주천운은 무심하기조차 한 눈길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정을 하려는 때 의 습관과 같은 행동. '그녀가 휘젓고 다니면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문득, 주천운의 눈빛이 기광을 발했다. 하늘[天象]의 움직임이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자미성이 흐려지고... 붉은 혈기(血氣)가 원(垣)을 뒤덮어 간다. 문창무곡(文昌武曲)이 그 혈 기에 빛이 약해졌다!' 그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변했다. 그것은 황실에 또다시 변고가 생김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과 강호가 겁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으으... 하늘의 뜻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신음하던 주천운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천우성(天祐星)이 빛을 발하고 그 빛이 문창무곡과 서서히 이어지고 있다. 기회가 있다! 아 니, 저것은?" 슈우-. 별빛보다 더욱 빛나는 한 가닥 광채가 야공(夜空)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코 별 빛이 아니었다. "신호탄! 하늘이 천하를 버리지 않았구나!" 주천운의 떨리는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이미 그곳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바람에 그는 그 뒤에 일어난 천기의 변화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 또한 운명이리라. * * * "으윽...!" 만리추종 요불위는 피가 흘러내리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 신음했다. 기형도(奇形刀)를 든 복면인 셋은 만리추종 요불위를 포위한 채로 야수와 같은 눈길로 노려 보고 있었다. '괴이한 일이다! 천제문의 감시는 이미 죽었는데 도대체 이 놈들은 누구기에?' "너희들은 누구기에 노부를 가로막는단 말이냐?" 대답도 없었다. 만리추종이 막 묻는 순간에 소리도 없이 기형의 도가 그를 덮쳐 왔다. 말을 하는 순간을 노 린 그 기세는 악독하고 기쾌할 정도로 빨랐다. "비천무영(飛天無影)!" 나직한 외침 한마디와 함께 만리추종의 신형이 번개같이 기형도를 피해 솟구쳐 날았다. "윽!" 그러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다른 복면인의 기형도가 날아와 만리추종은 벼락같이 방 향을 꺾었다. 날아가던 기세를 죽이기는커녕, 방향을 그대로 틀어 버리는 놀라운 경공! 능히 포위망을 벗어나고도 남을 경공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또 하나의 기형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만리추종과 복면인은 갈라섰다. 허공을 휘돌아 내려서는 복면인의 가슴에는 반 자 가량의 상처가 나 선혈이 치솟고 있었다. "지... 지독한 도법이군! 남을 해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다니..." 만리추종 요불위는 허리춤을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선혈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도... 독이 있었... 군?!" 신음하던 만리추종이 비틀거리는 것과 함께 세 명의 복면인이 무섭게 그를 덮쳤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데!" 만리추종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좌우를 돌보지 않고 앞쪽 복면인을 덮쳐갔다. 그 사나운 기세에 앞쪽 복면인이 흠칫하는 순간에 그 복면인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아났다. 동시에 만리추종은 어깨와 등에서 피를 뿜어 내며 십여 장 밖으로 내닫고 있었다. 좌우의 복면인들의 공세를 돌보지 않고 전신을 내던져 포위를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렇 게 입은 상처는 너무 깊었다. "놓치면 큰일!" 발음이 괴이한 억양과 함께 복면인들이 번개같이 뒤따랐다. 그런데, 만리추종 요불위는 채 삼십 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토록 독이 지독하다니...!' 그가 쓰러지는 순간에 복면인들의 기형도가 사정없이 만리추종에게 덮쳐 갔다. 격식이고 뭐 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도법은 살기(殺氣)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개죽음이라니... 지존!" 눈앞이 흐려짐을 깨달은 만리추종이 비통히 부르짖는 순간에 종을 때리듯한 음성이 귀청을 때렸다. "감히 왜놈들이 발호하다니!" "캑!" 동시에 복면인 한 명이 피떡이 되어 날아가고 다른 한 명은 칼을 움켜쥔 손목이 박살나 나 뒹굴었다. 그리고 그 앞에 흑의서생이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 "지... 지존... 지존을 못 보게 되는 줄... 여기 우리 셋... 드디어 명...을 완... 수..." 만리추종은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더듬거렸다. 주천운은 번개같이 그의 대혈 몇 군데를 누르며 대답했다. "죽을 수 없소! 그까짓 독에 만리추종이 죽는다면 나는 호국지존의 자격이 없게 되오." 그 순간, 대도(大刀)를 쥐던 손이 박살난 복면인이 다른 손으로 번개같이 허리춤에서 소도 (小刀)를 뽑아 주천운을 덮쳐 왔다. 그것을 본 주천운이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들었다. 그는 눈앞으로 덮쳐 온 복면인의 소도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서 그대로 움켜잡았다. 띵! 하는 맑은 음향과 함께 소도는 주천운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흐윽?!" 주천운이 예리무비한 소도를 간단히 잡는 것을 본 복면인은 혼비백산해 눈을 부릅떴다. "지독한 독종들이군... 너는 누가 보냈느냐?" 주천운이 소도를 움켜쥔 채 물었다. 그의 손은 이미 현천백옥수를 완전히 연성해 신병이기 라도 다칠 수가 없는 것이다. "으... 처... 천제!" "감히 왜인 주제에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복면인은 주천운의 기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 천지회 육회주(六會主)..." "육회주?" "옥... 면신마(玉面神魔:중원사마의 하나)... 친위대에 속해 있소..." 복면인은 주천운의 기세에 위압되어 더듬거리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 기세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가 왜 그렇게 쉽게 입을 여는 것인지 상상치도 못하리라! "대답한 대가로 너에게 영광스런 죽음을 내리겠다." 주천운은 소도를 놓아주며 말했다. 복면인은 일순 어리둥절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깨달은 듯 머리를 조아리더니 그 자 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맙소. 조심하시오. 천지회... 무섭소!" 다음 순간, 소도는 망설임없이 그의 배를 긋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깨끗한 할복(割腹)이었다. 동영무사가 가장 바라는 죽음 중의 하나였다. * * * "이 밤 내로 모든 배반자를 처단하라! 내일 멸마맹의 전힘을 소집하겠다!" 태풍의 제일성(第一聲)이었다. 천하는 드디어 멸마맹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이오?" 멸마맹의 십오대 장로 중 하나인 자면신후(慈面神侯)는 급한 호출에 경악한 빛으로 물었다. 그는 멸망한 점창파의 장로로서 자파의 복수를 하겠다고 이를 가는 사람이었다. "우욱!" 하지만 문에 들어서던 자면신후는 쥐어짜는 신음과 함께 눈을 부릅떠야 했다. 그의 양 옆구 리에는 두 자루의 장검이 절반이나 꿰뚫고 들어가 있었다. 그 앞에서 등을 지고 있던 백의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림제갈 남궁천이었다. "이... 이게 무... 슨 짓...?" "제단 천기당의 구호영주와 점창파의 장로... 어느것이 너의 진정한 신분이냐?" 남궁천의 목소리는 얼음을 얼릴 듯 차가웠다. "그... 그걸...?" 부릅뜬 자면신후의 눈에 죽음이 밀려왔다. "누... 누구냐?" 소림 속가장로 철장나한(鐵掌羅漢)은 자신의 침상 앞에 누가 서 있음을 느끼고 대경실색 몸 을 일으켰다. "쉿! 당주님의 긴급지령이오!" 침상 앞에 서 있던 왜소한 인영은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지령? 무슨...!" 의혹 어린 빛이던 철장나한은 문득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벼락같이 소림사의 대력금강장(大 力金剛掌)을 펼쳐 냈다. 펑! "크-윽!" 철장나한은 양손이 박살이 나면서 자신의 장세를 뚫고 들어온 일격에 의해 그대로 가슴이 으스러져 즉사했다. "후후... 지존께 전수받은 영구무적수(永久無敵手)란 말이다."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이며 장난스럽게 웃는 그는 소신풍 악비룡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렇듯 소리도 없이 극비리에 진행되는 이 작업을 발견한 눈이 있었다.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남궁가의 주방장인 남궁휴(南宮休)였다. 그의 이름은 남궁천이 작성한 첩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그는 소리도 없이 창고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비밀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특수 훈련된 비둘 기가 있었다. "천지일회(天地一會)!" 그가 막 비둘기를 꺼내려는 순간에 나지막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 왔다. "누구요?" 혼비백산한 남궁휴가 번개같이 돌아서니 그 뒤에는 음침한 안색의 노인이 서 있었다. "제사회주님의 친위대장인 음산신마(陰山神魔)다. 너의 신분은?" 음산신마가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남궁휴는 상대가 엄청난 마두이자 급히 허리를 굽혔다. "속하는 제구회주 휘하의 정탐향주...?" 대답하던 남궁휴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음산신마가 자신을 찾아왔다면 자신의 신분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순간, 우두둑 소리와 함께 남궁휴의 목은 닭모가지보다 더 간단하게 음산신마의 손에 의 해 꺾여지고 말았다. "노부가 말을 잘못했다. 노부는 상관대협 휘하의 사 개 대(隊) 중 항마대(降魔隊)의 대주로 취직했다..." 음산신마는 자랑스럽게 웃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패도무적 정문수. 그는 근 한 달 만에 주천운의 앞에 있었다. "금릉왕부의 동정은 여전합니다. 자운군주께서는 여전히 불공이시고..." 주천운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알겠소, 호국위는?" "기대 이상입니다. 곧 출관하게 됩니다."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호국이로와 호국위를 호출하도록 하시오!" 정문수의 눈에 격동이 일었다. "드디어 시작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소. 정대장은 이 길로 황궁으로 돌아가시오." "황궁?" 주천운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진행됨에 따라 정문수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어쨌든 밤은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고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 * 태백산(太白山)은 진령(秦嶺)이라 불리는 종남산맥(終南山脈)의 주봉(主峰)이다. 산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험악한데다 숲의 깊음은 곳곳에 전인미답의 원시림을 펼쳐 놓고 있는 곳이다. 그에 따라 명승과 절경도 적지 않은 곳이 바로 이 태백산이었다. 태백산 깊은 곳에 이르면 대낮에도 음침한 운무가 어려 눈앞을 잘 분간할 수 없는 곳이 있 다. 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토박이 사냥꾼들도 알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주위에는 독물이 득실거리고 대낮에도 가까이 간 사람이 급살을 맞아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귀신의 장난이거나 장독( 毒) 때문이거나 상관할 필요 없이 그 곳은 금지(禁地)가 되어 그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수많은 세월 동안 쌓인 낙엽이 썩어, 늪을 이루어 산짐승들조차 피해 가는 그곳을 사람들 은 언제인가부터 귀무곡(鬼霧谷)이라 불렀다. 대낮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이 귀무곡. 한데 야반 삼경, 산새들마저 잠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귀무곡을 주시하는 눈들이 있었다. 가장 앞선 사람의 흑의는 어둠보다 더 검고, 그 눈동자는 별빛보다 더 맑았다. 주천운이었다. 그의 뒤에는 약 이십 명의 인원이 늘어서 있었다. 무림제갈 남궁천의 나이가 가장 어리고 그 외에는 제일 젊은 화산신검(華山神劍)이 칠십오 세였다. 그것은 그가 대동한 사람들이 무림의 전대고수들임을 의미했다. 드디어 주천운이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모두 도착했습니다." 무림제갈 남궁천이 뒤에서 나직이 말했다. 주천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느닷없이 나타난 주천운에 대해 어리둥절한 상태였 다. 여기 있는 이십 명 가량의 초고수급들 외에는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움직이는지도 모르는 정도였는데, 그것은 신속과 비밀의 유지에 중점을 둔 용병(用兵)이었다. 주선(酒仙) 공야월휘(公冶月輝). 남궁천의 반쪽 사부라 할 수 있는 이 노기인은 홀린 듯 주천운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 다. '천하에 천아만한 인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명월과 반딧불 같다니! 저 모습에는 흉내 낼 수 없는 제왕지기(帝王之氣)가 어려 있어 남을 복종케 만든다...' 그는 어제 아침에 느닷없이 나타나 단숨에 군웅을 휘어잡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성질이 괄괄한 무산신모(巫山神 )가 남궁천이 자신을 속인 데 분노하여 주천운에게 대들다 가 완전히 압도당한 일, 그리곤 오늘 주천운의 뒤에 마치 시녀처럼 공손히 서 있는 무산신 모를 보는 주선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스쳐 갔다. 문득 뒤를 돌아보던 무산신모는 주선이 희쭉 웃고 있음을 보고 토끼눈이 되었다. 지난날 중원삼신이 무산신녀를 놓고 다툰 일을 누가 모르겠는가마는, 신녀(神女)가 신모(神 )로 변한 지금까지 그녀의 성미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공야늙은이, 웃는 이유가 뭐지요?" 주선이 무산신모의 전음에 아차 하는 순간에 주천운의 음성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지옥행을 면한 셈이었다. "귀무곡의 형세로 판단컨데 밖으로 통하는 통로는 이곳 하나 뿐이지만 비밀통로를 만들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사에 따르면 제단의 모든 힘은 귀무곡 총단에 집중되어 있 는 것 같습니다." 총단(總壇)! 만리추종과 공령천수 등이 알아 낸 제단의 총단은 바로 이곳 귀무곡인 것이다. "지금 난동을 부리고 있는 제단의 세력은 기실 눈가림이고, 그나마도 혈소마후가 등장함으 로 거의 제단에 모인 상태입니다. 이것을 부수면 천제문은 완전히 궤멸이 되는 셈입니다." 주천운의 어조는 나직했으나 중인들의 가슴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를 놓치게 되면 곤란하게 됩니다." "그자가 비밀통로로 도망쳐 버리면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곤륜파의 장로인 운룡자(雲龍子)가 걱정했다. 멸마맹 십오 장로 중 구대문파의 고수는 모두 열 명이었고, 그 중 장문인이 세 명이나 되었 다. "그는 갈 수 없습니다. 가려고 할 때는 이미 늦기 때문이지요." 남궁천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혹 단신으로 뛰어드시려는 것은 아니십니까?" '설마 그럴 리가...' 모두가 그 말에 내심 고개를 흔들었지만 설마는 사실로 나타났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우리측의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내가 길을 트겠 습니다!" "그... 그런 무모한 일이!" 멸마맹 장로들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하지만 음산신마 등 사 개 대의 대주들의 안색은 태연했다. 지난 한 달 간 그들은 주천운을 겪어 왔기에 그 무엇도 그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 들은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이 눈치라도 채면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저들 을 치고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주천운은 자르듯 말하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항마대와 쇄마대(碎魔隊)는 측면을 막고, 복마대는 외부동정을 감시, 탕마대(蕩魔隊)는 도망 치는 적을 막도록 하시오. 단..." 주천운은 음산신마와 구화일수 등 사 개 대의 대주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손에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되오. 가장 빠르게 적을 해치워야 하오." "염려 마십시오. 말씀하지 않으셔도 피가 떨립니다." 흉악한 눈을 번뜩이는 것은 탕마대주인 패천혈신(覇天血神)이었다. 그는 연혼전에서 구출된 고수 백 명으로 이루어진 탕마대의 대주로 천제문이라면 이를 가는 금년 구십 세나 된 흑도 고수였다. "그리고 멸마맹의 모든 배치는 계획한 대로 남궁가주가 지휘하여 내 뒤를 따라 약 일다경 후에 정면공격을 해주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소신풍, 너는 철방주와 계속 연락하면서 주위 감시를 게을리 하지말도록 해라." 주천운은 백여 장 가량 떨어진 곳에다 진기전음으로 말했다. 어둠에 묻힌 귀무곡에서는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희미하게 안개가 서린 귀무곡 앞은 약 이십여 장 가량의 암석이 널린 평지인지라 몸 숨길 곳이 없었고, 한치 앞도 안 보이도록 짙은 운무가 어린 귀무곡 입구의 넓이는 약 사오 장 정도인 것 같았다. 그러나 원시림이 일대에 발을 옮기기 힘들게 무성하니, 그 속에 어떤 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제아무리 안력이 좋은 사람도 알아볼 수 없었다. 주천운은 그 귀무곡 앞 평지를 쳐다보고 몸을 숨긴 상태였다. 그를 따르는 군웅들은 백여 장 밖에서 기척도 없었고... '귀무곡 주변 십 리에 깔렸던 사십여 개소의 매복은 이미 완전 궤멸, 귀무곡은 고립무원이 다... 혹시라도 남은 초소가 있다면 낭패!' 주천운은 전공력을 기울여 천이통(天耳通)을 전개했다. '양쪽 암벽 속에 두 명씩... 입구쪽에 다섯... 백 장 이내에 있는 자들은 모두 열하나!' 주천운의 손에 현천마금이 들려졌다. 소리도 없었다. 그냥 주천운의 손이 현천마금 위에서 한번 움직이기만 하면, 매복고수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심맥이 으스러져 죽고 마는 것이다. 귀무곡 입구에 하늘이 낮다고 치솟은 암벽의 속에 숨은 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의 주천운이 펼쳐 내는 현천마금의 천심전(穿心箭)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할 바 없이 무서운 살인무기였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으니 방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스-윽! 주천운의 몸이 그대로 이십여 장의 공지를 지나 귀무곡 입구에 들어서도 경보조차 울리지 않았다. 경보를 울릴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귀무... 여기에는 미향(迷香)이 섞여 있군!' 문득 주천운은 앞 부분의 지형이 기이함을 느꼈다. '천살미혼진(天殺迷魂陣)... 구 개 방위와 십팔문 삼십육 개 매복이 혼합되어 사백여의 죽음 이 마련되는 진!' 잠시 살펴보던 주천운은 소리도 없이 천살미혼진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냥 통과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유령과 같이 스쳐가는 곳의 진은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스스슷! 그가 스쳐 가는 곳에는 작은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뱀과 독충 등의 독물(毒物)들이 다투어 주천운을 피해가기 때문이었 다. 그의 몸에는 피독지보인 피독주가 박힌 호국지존병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용화대수미선공이 십 성에 이른 그의 몸에는 독물이 침범할 수 없었 다. 그러나, 그 독물들은 도망조차 갈 수 없었다. 주천운이 뒤에 오는 군웅들을 위해 무형진기(無形眞氣)로써그것들을 으스러뜨려 버리기 때 문이다. 주천운의 신형은 은신과행술로써 소리도 없이 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과 그의 눈, 귀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절벽 위에서 밑에서 숨을 죽인 채 물샐틈없이 사방을 경비하고 있던 제단의 고수들은 무엇 에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는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귀무곡 입구 이십 장 길이에 설치된 매복과 함정은 천라지망이었고, 그 천라지망을 뚫을 수 있는 고수가 오면 경보를 울리도록까지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으나, 그 모두는 주천운에 의 해 단숨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현천마금에는 이토록 무서운 위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삼대천음은 세상을 떨어 울릴 수 있었다. '지독히 천악(天惡)한 곳이다! 이런 곳을 용케도 찾았군!' 입구를 통과한 주천운은 눈앞에 드러난 경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콰르르-쏴악! 입구의 끝은 음습한 데다 칼날 같은 암석이 삐죽삐죽 튀어나왔고 그것을 가로지르며 급류가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그 형세는 심히 험악했고 쇠사슬로 이루어진 다리 하나가 거 기에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 길이는 약 오 장. 소용돌이치는 급류는 대단하여 물보라가 잇달아 일어나는데 아마도 곡의 운무는 이곳 때문 에 생겨나는 것 같았다. '감시는 넷... 아니, 다섯이다. 하나의 공력은 대단하구나! 천심전 일음(一音)에 격살이 될지 모르겠다.' 주천운은 소리도 없이 용솟음치는 물보라에 닿을 듯 날았다. 쇠사슬 다리(鎖橋) 주위에는 두 명의 고수가 지키고 서 있고 그 바로 뒤에는 곡의 내부로 통하는 듯한 관문이 세워져 있는데 매우 견고해 보였다. "저...!" 문득 날아오르는 주천운을 발견한 쇄교 앞을 지키던 고수가 그대로 심맥이 부서지고 뭔가 이상한 기척에 동료를 돌아보던 자는 돌아보다가 그대로 심맥이 끊어졌다. 그들이 쓰러지기도 전에 주천운은 번개같이 관문을 덮쳐 갔다. "!" 관문을 지키고 있는 자들의 무공은 대단했다. 뭔가 이야기하고 있던 두 명의 고수는 대번에 주천운을 발견했다. 그 순간에 그들의 목숨은 이미 끊어지고 있었지만... "윽!" 침중한 신음 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관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가슴 떨리도록 사납게 생긴 대한이 관문 안에서 막 의자에서 일어선 자세로 두 눈을 퉁방울 같이 부릅뜨고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가슴을 움켜쥔 그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에 앞서 두 명의 고수가 쓰러졌다. "역시 대단한 공력이군! 천심전 일음을 견뎌 내다니..." 주천운은 현천마금 위에 다시 손을 얹었다. "마금? 신마금검... 뢰...?" 대한은 경악과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뱉어내면서 손을 쳐들었다. 그 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천장에서 늘어진 줄 하나가 보였다. 디디이-이잉! 현천마금이 심혼(心魂)을 뽑아 낼 듯한 신음(呻吟)을 대한에게 쏟아 냈다. 사람을 죽이는 것 이 아니라, 신지(神志)를 제압하는 탈심혼이 전개된 것이다. "으흐-윽...!" 괴로운 신음과 함께 대한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리며 이내 몽롱해졌다. "대단히 심지가 굳은 자로군... 너의 신분이 무엇이냐?" "귀문관주(鬼門關主) 아합마(阿合馬)..." 주천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몽고인이냐?" "몽고용사... 한(汗:몽고 추장의 칭호)의 후예..." "중요한 곳은 모두 몽고인이라... 지난날 원의 시절과 같이 철저하군! 이곳이 제단 입구의 끝 이냐?" "그... 렇소. 이곳에서 출입하는 모든 기관을 총괄하고 있소..." 과연 아합마라는 자의 뒤에는 매우 복잡한 기관장치가 보이고 있었다. "이곳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봐라!" "여기는..." 제 27 장 몽고대한(蒙古大汗)의 후예(後裔) 귀무곡의 겉은 매우 험악하나 안쪽은 매우 넓어 우물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가운데로 길 하나가 끝없이 쭉 뻗어 있고 그 좌우에는 수많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길 의 끝에는 높은 담장이 완전히 안과 밖을 차단하고 있는데 그 안은 별유천지(別有天地)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릉도원인 양 평화로운 곳인 듯 보이지만 실은 귀무곡 내에서도 가장 중 지였다. 허락이 없이 들어오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당하는 곳이 그 담장 안이었다. 보보함정(步步陷穽)이 바로 그곳이었다. 제주의 거처는 그 담장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제천각(帝天閣)! 그렇게 불리는 누각에 자리한 하나의 대청을 방불케 하는 거대하고 사치스런 침실. 그 가운데에는 지금 한 여인이 석상을 깎은 듯 서 있었다. 그녀의 온몸은 백의로 휘감겨 있고 얼굴마저도 백사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허리에 걸린 자색의 퉁소만이 그 빛을 휘황히 뿌릴 뿐이었다. 그 앞을 제주는 왔다갔다 서성이고 있었다. "군매는 만겁윤회마법에 당해 시키는 대로밖에는 할 줄 모른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당 을 완전히 멸하지 않고 도중에 돌아왔단 말인가?" 그는 대려군을 쳐다보았다. "지독한 상세였으나 만겁윤회마법을 이용하여 그녀는 이미 정상을 회복했다. 그러니 공력이 모자라 천멸지곡을 중단했을 리는 없고..." 제주는 의혹에 빠져 있었다. 그는 대려군이 회복하자마자 무당파를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말 것을 명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임의로 마지막 살음(殺音)은 전개하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만겁윤회마법에 걸린 사람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휘이... 이익!" 그의 입에서 나직한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 죽은 듯 눈을 내리감고 미동도 없던 대려군이 눈을 뜨며 제주를 쳐다보았다.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심한 눈이었다. "면사를 벗어라!" 제주의 명령에 대려군은 기계적으로 면사를 벗어 냈다. 환우제일미( 宇第一美)! 그렇게 불리는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전히 아름답군... 천하를 아무리 뒤져도 너와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은 아무도 없다." 제주는 신음하듯 천천히 말했다. "대원(大元)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가 죽은 후... 그 오대(五代)째인 곤첩목아(坤帖木兒) 가 시해되면서 몽고대한의 혈풍은 끊겼다... 하지만." 제주는 대려군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다가갔다. "순제가 주원장에 쫓겨 응창(應昌)에서 죽을 때 몽고가한(蒙古可汗)의 여인 하나가 아들을 임신하고 있음은 아무도 몰랐지! 군매... 아니, 유라공주(維羅公主)! 너는 바로 단 하나 남은 몽고대한의 후예... 문주의 딸이 아니더냐?"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천제문주(天帝門主)가 후궁의 몸에서 이어진 몽고의 황족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후주인 대려군은 바로 그 직계황족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제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런데... 북경의 일이 실패했다고 해서 자신의 딸을 단번에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 문주의 처사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누구보다 너를 사랑하던 문주였는데..." 그는 천천히 대려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대려군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무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천하를 정복하면 문주는 너와 나를 맺어 천하의 주인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너 는 약혼자인 나에게 너무도 쌀쌀했었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제주(帝主), 후주(后主)... 그 이름은 결국 이러한 매듭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려군의 어깨를 쓰다듬던 제주의 눈빛이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대려군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후후... 려군! 내가 누구냐?" "..." 대려군은 자신의 가슴을 더듬어 내려오는 그의 손길에 무심한 듯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알 수가 없겠지... 지금 너는 명령받는 것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고 말은 잃어버린 상태이니 까!" 갑자기 제주의 손이 딱 멎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는 믿을 수 없는 듯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려군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 은 것이다. "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을 하다니... 려군! 뭐라고 했느냐?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주... 천... 운..." 나직이 흘러나오는 대려군의 말소리에 제주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야... 야율극리가 아니고 뭐라고? 내가 누구라고?" "주... 천운..." 대려군의 눈빛이 가늘게 움직였다. 그러나 제주는 너무 분노하고 놀라 미처 그것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주, 주천운이라고? 주... 그 자식은 호국지존이란 놈! 너를 북경에서 쫓아 낸 놈인데? 윽!" 갑자기 그는 전신을 떨었다. 제주는 평범한 그릇은 아닌 자였다. 평범하다면 그가 제주가 되었을 리가 없었다. "설마 네가 그자와... 문주가 너를 백치로 만든 게... 그... 그렇단 말이냐?" 그는 이성을 잃은 듯 두 눈에서 무서운 광채를 쏟아 냈다. "..." 그러나 대려군은 어느 집 개가 짖는지 알 바 없다는 듯 가만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이... 이럴 수가?" 제주는 이를 악물었다. "좋다! 내 확인해 보겠다! 너를 아껴 두고 있었다만...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지! 설마 그 자식과 그새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겠지! 너는 내 것이어야 한다!" 그는 흉맹한 어조로 외치며 대려군의 양쪽 어깨의 옷을 바짝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는 두 손을 힘껏 아래로 잡아당겼다. 쫘아-악! 최고급 비단으로 싼 백의가 찢겨져 내리는 소리는 가슴 떨리도록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보 다 더 가슴 떨리는 것은 그 속에서 드러난 그녀의 몸이었다. 속옷까지 한꺼번에 찢겨 나간 그녀의 양 어깨에는 소매를 포함한 백의가 아슬아슬하게 너울 거리며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과 배까지는 옷이 찢겨져 나가면서 완전히 드러난 상태였다. 비록 눈이 아프도록 흰 비단이 그녀의 가슴만은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지만... "으-음! 이 정도로 드러난 몸에 이토록 절절한 매력이라니! 과연..." 제주는 신음하듯 마른침을 삼키며 어깨에 매달린 옷을 슬쩍 밀어 냈다. 스르르... 매미가 허물을 벗듯 옷이 그렇게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신비스럽도록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종아리 밑으로 백의가 내려앉는 순간에 가슴 을 가린 가리개와 비소를 감춘 조그마한 흰 헝겊 한 조각뿐, 그녀는 거의 나신이 되어 있었 다. 농염하고도 늘씬하다는 말은 오직 이때 필요한 말일까. 그녀는 속옷조차 모조리 흰색 일색(一色)이었다. "음..." 제주는 절로 가슴이 뛰었다. 그가 여인의 반라를 보고 이토록 욕정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처음이리라! 툭! 그의 손짓에 따라 가슴가리개가 날아갔다. 출렁!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의 가슴은 도저히 살이 엉긴 것 같지가 않았다. 인간의 용모가 아닌 듯 극미(極美)한 그녀의 얼굴, 그 길다란 목을 따라 곡선의 극치인 어깨 선이 부드럽게 흐르 고 그 곡선이 흘러 엉긴 듯 탄력의 극을 이루고 있는 젖가슴은 가슴의 기복에 따라 부드럽 게 출렁이고 있지 않는가? 꺾어질 듯한 허리에서 너무도 폭발적으로 피어난 둔부와 거기에서 뻗어난 두 다리의 곡선은 또 뭐라고 할 것인가. 빛이라도 부딪치면 흘러내릴 듯 투명한 허벅지를 흐르던 제주의 시선이 문득 허벅지를 거슬 러 그 교차점에 머물렀다. 지독히도 앙증스러운 백견(白絹) 한 조각이 그곳을 제주의 시선에 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 흰 비단 안에서 은은히 검은빛이 피어나오는 듯했다. 자신의 육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제주를 대려군은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벗어-라. 마지막!" 한참을 못박힌 듯 그 몸매를 바라보고 있던 제주가 신음하듯 명령했다. 대려군의 눈에 잠시 미혹의 빛이 떠오르는 듯하더니 천천히 양손을 둔부로 가져 갔다. 풍 만한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출렁였다. 그녀의 손이 내려감에 따라 태고(太古)의 어둠이 내린 숲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 지독하구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제주가 대려군을 껴안으면서 침상 위로 나뒹굴었다. 그처럼 침착하던 그답 지 않게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가슴을 짓뭉갰다. "으흐흐... 이, 이 몸을 나 아닌 누, 누가 감히..." 그는 자신에게 온몸을 맡긴 채 석상처럼 누워 있는 대려군의 몸을 미친 듯 더듬어 갔다. 그때였다. "제, 제주께 아룁니다!" 다급한 음성이 문밖에서 들려 왔다. 찬물! 그야말로 불길에다 찬물을 끼얹은 꼴이다. 제주의 눈빛이 살기를 띠면서 차갑게 빛났다. "무슨 일이기에 감히 여기까지 들어온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하오나 너무도 급한 일이라..." "급한 일?" 제주의 몸이 절반쯤 일으켜졌다. "예, 갑자기 외곡에 대혼란과 함께 불길이 치솟고 있는데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사풍오영 (沙風五影)이 나갔으나 돌아오지 않...!" 급박하게 들려 오던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제주의 낯빛이 돌변했다. 지금 그에게 말을 전하던 사풍일영(沙風一影)은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고수였다. 방금 그의 말이 끊기면서 모기 소리보다 더 희미한 신음 소리가 일었었다. 그것과 함께 사 풍일영의 말소리는 끊겼다. 옆에 있어도 쉽사리 들을 수 없는 미약한 소리였지만 제주의 능 력으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이 단말마의 신음인 것도 알 수 있었다. "..." 숨막힐 듯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사풍영(沙風影)! 무슨 일이냐?" 제주가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침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목소리가 떨린 것은 의도적이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믿지 못할 일이다! 사풍십영이 모두 당했단 말인가? 그토록 쉽게? 경보조차 울리지 않은 채 적이 제천각까지 올 수 있다면...' 그는 암중으로 손짓해 현란한 나신을 드러낸 채 가만히 누워 있는 대려군에게 옷을 입도록 명령했다. '드, 들린다!' 그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저 멀리서 싸움 소리와 비명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곡의 전역이 습격을 받고 있단 말인가?' "크, 큰일났습니다! 곡이 적에게 습...!" 그 순간에 누군가가 다급히 부르짖으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중도에서 뚝 끊겼다. 제주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제천각의 수호를 맡고 있는 팔비신풍(八臂神風)이 틀림없었다. '그가 반항도 할 수 없는 고수란 말인가? 천하에 그런 고수는 다섯도 안 된다! 설마 역습을 당했단 말인가?' 찰나, 그는 기척도 없는 암력(暗力)이 자신을 덮쳐 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힘은 너무도 기 이하여 제주는 그 암력이 채 한 치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도달해서야 겨우 느낄 수 있었다. 팍! 그의 가슴이 세차게 진동되었다. '윽! 지, 지독한 음유지기(陰柔之氣)!' 제주는 신음을 입으로 삼키며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부하들이 신음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죽어 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신-마-금-검-뢰?" 부지중에 그의 입에서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으하하하..." 동시에 낭랑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뒤흔들었다. 꽈르르-릉! 그것과 함께 태풍 굉음이 몰아치면서 벽이 산산이 터져 나왔다. 흙먼지가 구름과 같이 피어 오르는 가운데 흑의유생 한 명이 소용돌이를 휘몰며 나타났다. "저, 정녕 네가?" "아직도 나를 기억해 주니 고맙군!" 주천운은 낭랑히 웃으며 그를 향해 손에 든 현천마금을 퉁겼다. '소리도 없는 살음(殺音)!' 이미 한번 쓴맛을 본 적이 있는 제주는 황급히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신법으로 환영과 같이 그곳을 벗어났다. 그 광경에 주천운은 또다시 웃었다. "아직 천심전을 전개치 않았는데 그새 겁이 많이 늘었군?" 제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거, 건방진...!" 그 찰나에 주천운이 번개같이 천심전을 퉁기는 것을 보고 제주는 황급히 또 비켜났다. 그러 나, 아무 이상도 없고 주천운은 가소로운 표정으로 여전히 그를 보며 미소하고 있지 않는 가? 연속으로 놀림을 받은 제주의 가슴은 분노로 터질 듯 뛰었다. 격노한 그가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릴 때였다. "으!" 제주는 한소리 신음과 함께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비틀, 물러났다. "몸이 많이 둔해졌군! 그걸 피하지 못하다니?" 주천운의 담담한 음성이 그의 오장육부를 온통 긁어 놓았다. 그가 두 번이나 속아 심기가 흐트러질 때 주천운이 정말로 천심전을 퉁겨 낸 것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주천운에게 잇달아 당하게 되자 제주는 분노한 가운데,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때보다 더 교활해졌구나! 상관천! 네 입으로 약속을 해놓고 이제와서 배신하다니!" "배신? 과연 너에게 그런 말할 자격이 있느냐?" 주천운은 정색을 하고 제주를 쏘아보았다. '무서운 놈, 선수를 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본 단의 위치를?' 적이 공격을 해왔다면 준비없이 하지는 않는다. 적은 준비를 한 상태이고, 천제문은 그렇지 못했다. 제주는 가슴속이 타는 듯이 다급해졌다. 그는 얼음 같은 안색으로 차갑게 외쳤다. "군매! 저자를 죽여라!" 대려군이 차가운 안색에 살기를 떠올리며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찢겨져 흩어진 옷자락 사이 로 너무도 풍만한 유방이 출렁이는 것이 보였다. 주천운의 안색이 굳어졌다. "네놈이 감히... 제정신이 아닌 여자를 범하려 하다니!" 그의 손이 번개같이 잇달아 현천마금 위에서 움직였다. 팍! 파파파-! 마치 폭죽이 터지듯 제주 주위의 모든 것이 박살이 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천심전이 무서운 속도로 전개되자 제주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피하며 다급히 외쳤다. "군매! 뭣 하고 있느냐?" 그의 외침과 동시에, 찬란한 자광이 온통 방안을 뒤덮으며 대려군이 주천운을 덮쳐 왔다. 꽈르르-릉-! 광풍경기(狂風勁氣)가 주천운의 주위에 일어나는 가운데, 주천운의 몸이 번개처럼 밀려났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대려군을 노려보고 있었으며, 손은 여전히 현천마금에 댄 채였다. 대려군의 자미천소가 무서운 기세를 끌면서 주천운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순간, 괴이무쌍한 소리가 방안을 온통 뒤흔들며 현천마금에서 일어났다. 악마의 속삭임 같은 음향이 뇌리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여태껏 현천마금에서 발출된 탈심혼(奪心魂)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으-!" 제주가 괴로운 표정으로 물러나고, 대려군이 쳐내던 천소를 우뚝 멈추었다. 주천운은 긴장된 표정으로 대려군을 쳐다보았다. "려군! 천소를 거두시오!" 주천운이 천천히 말했다. 대려군의 눈빛이 흔들리며 자미천소가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현천마금의 노예 가 된 것일까? "군매! 죽여라!" 탈심혼에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제주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미친 듯이 휘파람을 불며 외쳤다. "오호호호...!" 그러자, 대려군이 돌연 요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주천운을 덮쳐 왔다. 그녀의 눈빛은 만겁 수라소녀안으로 번뜩이는데 탈심혼을 듣기 전보다 오히려 마성이 더해진 것 같았다. '마음(魔音)으로는 마공(魔功)을 깨뜨릴 수는 없다!' 상황을 직감한 주천운의 온몸에서 서기가 장엄하게 일어났다. 동시에 한 가닥 빛이 그의 품속에서 창공을 달리는 번개와 같이 뿜어져나왔다. 그 쾌속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오히려 먼저 발동한 대려군의 자미천소보다 빨랐다. 대려군은 그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자미천소를 휘둘러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가히 풍운변색(風雲變色)의 기세였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변화라 할지라도 조화의(造化意)의 변화 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어떠한 상승무공이라도 초식을 펼치고 변화를 일으키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는 연결동작이 따라야 한다. 연결을 시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고 거기에는 틈이 필연적으로 생기기 마련이었다. 고수라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언제, 어느 때라도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초식이 있다면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되니, 그러하기에 여의섬이 천하제일쾌이며 조화의가 천하제일변인 것이다. 그 양대검학(兩大劍學)은 주천운과 같은 최고기재의 한 몸에 깃들여 이제는 그 위력이 극도 로 발휘되고 있었다. 대려군이 느닷없이 덮쳐들어 펼쳐 낸 백구십 번의 변초는 실로 단 한 순간이었고 호국지존 병과 자미천소는 그 엄청난 속도 속에서도 단 한번도 부딪치지 않았다. 땅! 느닷없이 귀청이 찢어지는 음향과 함께 그 여파에 방안의 모든 것이 박살이 나 흩어졌다. 그 무서운 변초 속에서 일돌(一突)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려군과 주천운이 그 충격으로 비틀하면서 한걸음을 물러나는 순간에 주천운의 등뒤에서 소리도 없는 도세가 덮쳐들었다. '피할 수 없다!' 팍! 불가사의한 자세에서 검이 뻗어나는 순간에 차앙! 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며 주천운과 제주는 각기 밀려났다. 누구도 득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물러서는 주천운의 등뒤에서는 이미 대려군이 덮쳐들고 있었다. "으하하하... 상관천! 네놈의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 제주가 광소를 터뜨리며 다시 수중의 보도를 쳐왔다. 두 절대고수의 합격은 귀신도 놀라 도망갈 가공할 것이었다. '려군의 만겁윤회마법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마금은 실패했지만 용화대수미선공은 항마신 공! 지난번에도...' 주천운은 번개같이 생각을 스쳐 보내며 전신의 용화대수미선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장엄한 서기가 방안에 가득 찼다. '괴이하다!' 제주는 뭔가 이상함을 대번에 느꼈다. 대려군의 공세가 갑자기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주천운의 몸에서 뻗어나는 서기를 피하듯 대려군은 계속 물러나고 있었다. 그녀가 쳐내는 공세는 주천운을 향한다기보다 서기를 막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안색은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득, 주천운과 그녀의 눈이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부르르 떨렸다. '마, 마안(魔眼)이 또다시 위력을 발하다니! 내 생각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주천운은 그녀의 눈빛에 가슴이 떨림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려군! 정신차리시오! 나를 모르겠소?" 대려군의 눈빛에 고통의 빛이 드러났다. "려... 군? 려...군?"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몽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주는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 마, 말을 하다니?' "네놈이 누군데 군매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이냐?" 그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전신에서 혈광(血光)이 치솟았다. 주천운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소! 당신의 이름이 대려군이오! 나를 보시오! 내가 주천운이오!" 주천운은 대사자후를 운용해 그녀에게 외쳤다. '주천운?' 그 이름을 들은 제주의 가슴은 터질 듯 격탕되었다. "주... 천... 운?" 대려군은 신음하듯 그 이름을 따라 중얼거리면서 주천운을 쳐다보았다. "그렇소! 내가 당신의 주천운이오!" 주천운은 얼굴의 변용신공을 풀어 본모습을 회복하면서 외쳤다. 대사자후의 그 목소리는 마 치 대려군의 뇌리에 벼락을 때리는 듯한 효과가 있었다. "주-천-운?" 대려군은 주천운의 본 모습을 대하게 되자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극심한 고통의 빛 이 그녀의 온몸에서 드러났다. 그녀는 이미 완전히 용화대수미선공의 위력하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소! 주천운이오!" "아-악!" 갑자기 대려군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머리를 움켜잡으며 전신을 격렬히 떨었다. "려군!" 주천운이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는 순간에 갑자기 대려군이 옥장을 휘둘러 주천운의 가슴 을 가격했다. 꽝! "윽!" 피할 사이도 없이 주천운이 일 장을 얻어맞고서 물러나는 순간에 대려군은 번개같이 그를 스쳐지나 문을 뚫고 사라졌다. "려군? 주천...운? 호호호..."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찌르며 울려 퍼졌다. "려군!" 주천운이 소리치면서 자신을 스쳐 지나간 대려군을 따라가려는 순간에 그의 등에서 벼락치 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의 등을 후려치는 소리였다. 주천운이 마치 줄 끊어진 연과 같이 곤두박질 치면서 벽에 처박혔고, 그 벽과 천장이 무너 질 정도로 그 타격은 엄청나고도 대단했다. 쿠쿠쿠... 벽이 부서지고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 뒤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이토록 지독한 반탄지기가 있다니!" 제주가 괴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연신 흔들었다. 그의 공력은 주천운이나 대려군보다 낮은 상태이기에 주천운을 암습한 순간에 용화대수미선공의 반탄지기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음산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으흐흐-네놈이 호국지존 주천운일 줄이야! 하지만 이젠 네놈도 끝이다! 감히 네놈이 대한 (大汗)9)의 후예인 군매를 넘보다니!" 그가 주천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에 흙먼지가 폭발하듯 흩어지며 주천운이 그 속에서 일어 났다. "혈영마신의 혈영수라강(血影修羅 ) 정도로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 주천운의 차가운 눈빛을 대하자 제주는 가슴이 떨려 왔다. "죽어라!" 그의 입에서 사나운 외침이 터지는 것과 함께 그의 보도가 산산조각이 나 주천운에게 폭사 되었다. 상상도 못한 한수는 실로 가공스러웠다. "어림도 없다!" 그러나 그 무서운 공세도 주천운의 호국지존병이 그물과 같이 휘둘러지자, 여지없이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그 순간에 제주가 시뻘건 기류에 휩싸여 주천운을 덮쳐 왔다. 그는 자신의 보도를 폭발시켜 날려보내고는 전신의 공력을 다 모아 다시 주천운을 공격해 온 것이다. 꽝!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이 갈라섰다. 그 결과는 주천운이 조금 밀리는 듯이 보였지만 주천운은 단장이었고 제주는 쌍장이었으니 우열은 명백했다. "그 동안 이토록 강해졌단 말인가? 구백잔혼독공(九魄殘魂毒功)까지 펼쳤는데..." 제주가 암중으로 신음했다. 혈영수라강(血影修羅 )과 구백잔혼공(九魄殘魂功)! 전자는 칠대마공의 하나고 후자는 실전된 사대독공의 하나였다. 이 두 가지는 아주 지독한 것으로 그것을 한 몸에 지니면 무서운 고수로 변모하게 된다. 제주의 능력은 가히 천하를 오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상대는 너무도 특별난 존재인 것 이 그의 불운이었다. "도망칠 셈인가? 어림도 없다! 이미 제단은 끝이다." 제주의 태도를 보고 주천운이 차게 말했다. 밖에서 들리는 격전의 소리는 아주 극렬했다. 과연 누가 이기고 있는지는 소리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주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토록 제천각이 요란한데 아무도 안 오는 것은 대세가 기울고 있다는 것!' 제주의 낯빛이 다시 침착해졌다. "도망? 흥! 너의 이 한수는 확실히 뜻밖이기는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이르다!" 그의 말에 주천운의 입가에 태연한 미소가 어렸다. "천제문주와 천제구로를 믿는다면 포기하는 게 좋을걸? 내가 열흘 후쯤 오도록 조치해 두었 다!" 제주의 얼굴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그것까지? 흐흐흐... 그러나!" 덜컹! 갑자기 바닥이 푹 꺼지며 제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가 꺼져들어간 자리는 흔적도 없이 복원되고 있었다. "어림없다! 제왕무적검강(帝王無敵劍 )!" 꽈르르-릉! 주천운의 몸이 굉음과 함께 제주가 꺼져 간 곳으로 쏘아져 갔다. 제왕무적검강에 겸해 펼쳐 지는 뇌정군림신법의 속도는 천하무쌍하여 그 자리가 채 복원되지도 않아 주천운은 이미 거 기에 이르고 있었다. 꽈꽝! 바닥의 대리석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호국지존병의 끝에서 눈이 멀 듯한 청광(靑光)이 그곳 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으-아-악!" 참담한 비명이 안에서 터져 나왔다. 그 순간에 주천운의 몸은 여지없이 대리석 바닥을 돌파 해 들어가고 있었다. 상상도 못할 위세였다. 제왕무적검강은 가히 제왕의 검과 같아서 무엇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대리석 바닥의 밑은 길게 뻗은 계단이었다. 그 계단의 끝에는 어깻죽지에서부터 잘려나간 팔 하나가 피를 뿌리며 뒹굴고 있었다. 앞쪽으로 길게 뻗은 복도로 핏자국이 보였다. "생각보단 대단하군!" 그 와중에 제주가 팔 하나를 남겨놓고 몸을 뺀 것에 대해 주천운은 놀란 빛을 띠었다. 복도는 약 십여 장 가량인데 그 끝에는 높이 일 장 반이나 되는 석문이 있었다. 핏자국은 석문 안으로 이어져 있는데 얼마나 다급했던지 문도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았다. 꽈앙! 두께 한 자의 석문이 박살이 나듯이 활짝 열어제쳐지는 순간에 주천운의 몸은 이미 석문 안 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이런 방법은 공력을 아끼지 않는 극히 패도적인 것이라 그의 결심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넓이 삼십 장이나 되는 석실! 석문 안은 그토록 엄청난 크기의 지하 석실이었다. 장방형의 석실은 아주 음산했다. 거기다 좌우에는 일 장 이상가는 크기의 석관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등골이 오싹한 광경인데, 그 끝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외팔이가 된 제주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망치 같은 것이 들려 있고, 그 앞에는 거대한 동라(銅羅:징) 같은 것이 대(臺) 에 걸려 있었다. 주천운을 보자 제주는 흠칫하더니 이내 음산히 웃었다. "으흐흐-주천운! 죽음을 보여 주겠다!" 그는 한 맺힌 음성으로 외치면서 벼락같이 손에 든 망치로 동라를 후려쳤다. 대애-애앵! 이루 말할 수 없이 괴기(怪奇)한 음향이 석실을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그것은 현천마금의 탈심혼과 같은 힘을 가진 것이었다. "환혼고심라(還魂錮心羅)?" 주천운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하자 제주는 사악하게 웃었다. "으흐흐... 대혜왕이라더니 모르는 게 없구나! 그렇다면 그것이 어디 쓰이는지도 알겠지?" 끼이이... 끼끼끼... 그 순간에 머리 끝이 곤두설 듯 괴이무쌍한 음향이 사방에서 일어나며 메아리 치기 시작했 다. 맙소사-관뚜껑! 좌우에 수도 없이 늘어선 석관의 뚜껑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방에 귀기(鬼氣) 가 충만해지며 그믐날 밤 귀신이 호곡(號哭)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주천운의 안색이 굳어졌다. '대단한 힘을 가진 강시( 屍) 따위가 깨어나는 현상이 이렇다고 들었다...' 꽝! 꽈다탕! 관뚜껑이 모조리 박살이 나 날아가며 관 속에서 희끄무레한 귀영(鬼影)이 일어났다. 실오라 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신은 윤택이 없는 회색빛이고 온몸에 털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으 며 껌벅이지도 않는 두 눈에서 한 점의 빛도 없는 귀영! 그 수효는 모두 백팔 구나 되었다. 대애-애앵! 환혼고심라가 다시 한번 괴기한 울음을 토하자 귀영들의 눈에서 녹광이 쏟아졌다. "으하하하-주천운! 비록 금강마인의 십 년 대공이 이틀 모자라게 깨어났으나 너를 죽이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죽여라! 금강마인아, 너의 첫 제물이다!" 제주가 미친 듯 웃어대며 환혼고심라를 또 두드렸다. 꽈꽝! 석관이 모조리 박살이 나며 돌덩이가 난비(亂飛)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십여 구의 금강마인이 유령과 같이 덮쳐 왔다. 따따땅! 매서운 금속성과 함께 금강마인 십여 구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들의 천돌혈에는 제각기 한 치 가량의 검흔이 나 있었다. '호국지존병에도 겨우?' 손목이 은은히 저려 옴을 느끼고는 주천운은 크게 놀랐다. 그토록 무서운 호국지존병의 날 카로움으로도 금강마인의 목을 뚫지는 못한 것이다. '저, 저럴 수가! 단 일 검에 상처가 나다니?' 그러나 그것을 보는 제주는 더 놀랐다. "끄-아!" 설명은 길지만 상황은 순식간이다. 상처를 입은 금강마인이 흉포한 외침과 함께 그대로 덮 쳐 오고 그 뒤에 이십여 구의 금강마인이 아우성 치면서 쏘아 왔다. 꽈르-릉! 주천운은 뇌정군림신법으로 벼락같이 회전하며 잇달아 여의섬을 전개했다. 땅! 따다다당! "까-악!" "께에엑!" 괴성과 함께 금강마인 삼십여 구가 모조리 일 검씩을 얻어맞고 뇌정군림신법의 강풍에 휘말 려 비틀거렸다. 뇌정군림신법의 특징은 물론 신법을 전개하면서 운기조식이 된다는 점도 있 지만 이처럼 신법을 전개하면 광풍이 일어나 상대가 이쪽을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도 있었 다. '전력을 다한 검세였는데 겨우 상처라니?' 그 광경에 주천운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우우-!" 그 순간에 다른 금강마인이 오십여 구나 다시 덮쳐 왔다. 이제 금강마인 백팔 구는 모두 움 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우웅! 오십 명의 위세는 그냥 있기만 해도 온몸이 으스러지고도 남을 정도였다. 삼십 장이나 되는 거대한 석실 전체가 강풍에 휘말렸다. '백팔 구가 다 모이면 절대로 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제왕무적검강을 잇달아 전개할 수도 없는 일...' 제왕무적검강의 위력 앞에서 견뎌 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공력의 소모는 엄청난 것이 다. 뿐만 아니라 대려군과 제주의 공격에 격중된 것의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제왕 무적검강을 한 번 쓴 것을 제외하더라도 온갖 매복을 단신으로 처리하면서 들어온 주천운의 공력 소모는 이미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의 고련(苦練)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쓰러져 있어야 옳았다. '제왕무적검강을 잇달아 열 번은 사용해야 금강마인을 모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다면 금강마인이 다 쓰러지기 전에 주천운이 먼저 쓰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꽈꽝! 금강마인들의 공세에 주천운이 있던 곳이 가루가 되는 순간에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제주쪽 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뱀을 잡으려면 꼬리가 아니라, 머리를 잡으라는 격언대로 금강마인을 조종하고 있는 제주를 치려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마인은 일반 강시와는 틀렸다. 그 행동이 민활하기 이를 데 없어 이미 십여 구가 공중에서 그를 덮치고 있는 것이다. 허공에 뜬 주천운의 전신이 갑자기 거대한 검기의 덩어리로 화하면서 무서운 검망이 석실 전체를 푸른빛으로 가득 채웠다. 다급한 상황이 되자 제왕무적검강이 발휘된 것이다. "끄악!" "끼-아-악!" 도검불침의 금강마인 열한 구가 피할 사이도 없이 제왕무적검강에 그대로 두 동강이 나면서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그 한 순간의 지체에 이미 삼십 구의 금강마인들이 그를 덮쳐 오지 있었다. 말이 삼 십 구지, 그것은 숨조차 쉴 여유가 없는 무서운 공격이었다. '공력을 이어 낼 수 없다!' 주천운은 용화대수미선공으로 몸을 보호하며 전력으로 뇌정군림신법을 펼쳤다. 와르르-릉! 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금강마인의 공세를 뚫고 나왔다. '지, 지독하다! 기혈이 뒤틀린다!' 주천운이 그들의 능력에 신음할 사이도 없이 사십여 구의 금강마인이 또다시 그를 덮쳐 왔 다. 마치 해일 속에 위태롭게 떠 있는 일엽편주와 같은 것이 현재의 주천운의 신세였다. 제왕무 적검강을 또다시 전개할 능력은 없었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나머지 금강마인들이 그가 움직일 곳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전후좌우, 모두가 금강마인들의 그림자로 가득 찼다. 디디-디이잉! 탈심혼의 금음(琴音)이 다급하게 메아리 쳤다. 그러자 금강마인들의 공세가 멈칫, 멎었다. '환혼고심라에 의한 마법은 외부의 영향은 받지 않는다! 그런데 현천마금의 금음에는 제압 이 되는가?' 주천운이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볼 때였다. "크아악!" 금강마인들의 입에서 흉포한 괴성이 터지면서 눈에서 녹광이 더 새파랗게 쏟아졌다. '틀렸다!' 펑! 퍼퍼펑! 섬뜩해진 주천운이 번개처럼 뇌정군림신법으로 그곳을 피했건만 단숨에 칠팔 장을 얻어맞고 말았다. 눈에서 불똥이 튀면서 정신이 아득했다. '으윽! 개, 개개인이 모두 백년이 넘는 수위의 공력을... 하마터면 호신진기가 완전히 흩어질 뻔했다...' 주천운은 안색이 창백히 변해 한쪽 구석 벽으로 몰려 등을 기댔다. 누가 봐도 반항할 힘이 없는 상태가 분명했다. "크으...!" 남은 금강마인 구십여 구가 주천운을 노려보며 그곳을 완전히 겹겹으로 둘러쌌다. 피할 곳 이 없었다. "으하하... 주천운! 네놈의 죽음과 함께 명(明)도 끝이다. 그리고..." 득의만면하여 소리치던 제주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졌다. 벽에 기댄 주천운이 현천마금을 아주 무거운 듯 손바닥 위에 받쳐 들고 있는데 그의 온몸에 서 무서운 강기가 일어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자미천소에는 천멸지곡이 있다. 그런데 현천마금은 그런 위력을 발휘한 적이 없다! 같은 삼 대천음인데...' 제주는 번개같이 생각을 굴리다 대경실색해 외쳤다. "빨리 공격해라!" 그가 망치로 환혼고심라를 다시 후려갈기려는 찰나였다. "사-멸-령(死滅靈)!" 띠당땅-땅! 주천운의 손가락이 번개같이 현천마금의 고현(孤絃)을 누볐고, 그 순간에 뼛골을 쑤시는 듯 괴이무쌍한 음향이 벼락을 때리듯 터져 나왔다.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신(死神)이 휩쓸고 지나간 듯 갑자기 침묵만이 거대한 지하석실 안을 감돌고 있었다. 주천운을 쳐다보고 있던 제주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환혼고심라를 치기 위 해 위로 쳐들렸던 망치가 갑자기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땅으로 떨어졌다. 탕! 그것이 신호였다. 털썩! 쿵-. 쿠-당! 구십여 구의 금강마인이 그대로 짚단처럼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 눈에는 이미 녹광이 사라 지고 없었다. 가공할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방금 발휘된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생명(生命)만을 죽이는 현천마금의 제삼음인 사멸령(死 滅靈)이었다. 주천운이 그간 단 한 번도 전개한 적이 없었던 사멸령은 생명체에게는 천하에 다시없는 위 력을 가지나, 무생물에게는 하등의 위력도 없는 저주의 살음(殺音)이었다. 망치를 떨어뜨린 제주의 몸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초점 잃은 두 눈에서는 선혈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입에서도, 코에서도, 귀에서도 선혈이 흘 러나왔다. 주천운은 현천마금을 받쳐들었던 두 손을 맥없이 늘어뜨렸다. 그리고 울컥! 그의 입에서 선혈 한 모금이 토해졌다. 전신이 솜뭉치와 같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미 서 있지도 못할 것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기혈을 가다듬은 주천운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발 아래, 제주가 엎어져 있었다. 그렇듯 야심만만했던 일대의 기재인 야율극리는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 있었다. 그가 주천운을 만난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일단계는 성공인가? 시간...!" 생각을 굴리던 그의 눈에 문득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랐다. "려군!" 어디서 힘이 났는지 주천운은 발을 굴러 번개처럼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뇌정군림신법의 광풍이 석실을 휩쓸었다. 쓰러져 있던 제주의 시신이 그 광풍에 휘말려 뒹굴었다.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제주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형... 님... 당... 신은... 문... 주보다... 더 빨리... 왔... 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를 흘려내면서 희미하게 떨리던 입술이 멎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제주 는 영원히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그 누구도 모르는 천하를 뒤집는 변수가 되는 것이었다. 형님...! 주천운이 제천각을 나설 때, 귀무곡 제단의 총단은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휘-익! 주천운의 앞에 백영이 내려섰다. "아니, 많이 다치셨습니까?" 대경실색해 부축하려는 자는 무림제갈 남궁천이었다. "괜찮소. 조금 피곤할 뿐이오. 어떻게 되었소?" "생각보다는 저들의 힘이 강했으나, 지존께서 모든 매복을 파괴해놓아 완전히 기습을 당한 셈이 되어 적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천화곡(天火谷) 화기의 힘이 뜻밖으로 컸습니 다." 사방에서는 아직 싸움 소리가 간간이 들리나 그것은 그다지 대단치 않은 듯 보였다. "혈마소후가 저지를 뚫고 탈출했습니다. 막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천운의 얼굴에 파동이 일었다. "어디로 갔소?" "서북쪽... 그쪽으로 또 다른 통로가 있었습니다." "음..." 주천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가 그토록 강했습니까?" "뜻밖의 힘이 있었소... 오늘 급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가공할 일이 일어날 뻔했소." 주천운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겠소?" "아직은... 하지만 우리측 고수들의 사상자는 일이백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적은?"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천여 명은 될 겁니다."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대승(大勝)이었다. "이제 되었소! 군웅들을 집합시켜 철수할 준비를 하시오." "아직 정리가..." "정리할 시간이 없소. 가장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오. 우리측 군웅들은 지쳐 있으니까." 말하는 그의 눈빛도 지쳐 있었다. "알겠습니다. 곧 시행하겠습니다!" 무림제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왜소한 인영 하나가 대단한 속도로 주천운쪽으로 날아왔다. 소신풍 악비룡이었다. 그의 안색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무림제갈의 물음에 소신풍 악비룡은 다급히 꾸벅 절을 하더니 말했다. "혹 채설지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채-설지?" 주천운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녀는 병부상서 채광의 외동딸이 아닌가? "모르십니까? 그녀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지존을 찾아..." 소신풍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주천운의 가슴에 폭풍이 일어났다. "그녀가 지금 어디 있느냐?" 제 28 장 죽음의 매복(埋伏) 속으로... 황궁(皇宮). 정전인 봉천전(奉天殿)은 어둠 속에서 조금도 변함없이 그 위용을 발하며 우뚝 서 있었다. 주변을 경비하는 위사들의 모습도 여전했다. 그 서재에는 우여곡절 끝에 황태자가 된 사황야 주성운(朱星雲)이 불을 밝힌 채 있었다. 황 태자가 된 그는 본래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정무(政務)를 척결해나가고 있었다. 지난 세월, 밀린 국사는 만만치 않아 황태자로서 섭정을 하게 된 그는 거의 숨돌릴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이젠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 낸 상태였다. 그럼에도 황태자 주성운은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장주문서(章奏文書)를 보고 있었다. 문득, 주성운의 눈빛이 허공에 머물렀다. '오제, 단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고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평온... 지금의 황궁은 마음 에 걸리도록 평온하다.' 조용히 그의 뒤로 시녀 한 명이 다가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으로 물러났 다. 달깍-. 뚜껑을 열자 심신을 상쾌하게 만드는 상쾌한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형제들은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고 있으나 뭔가 이상한 점이 있어서 금의위장(錦衣衛 長)을 시켜 조사를 보냈다. 돌아올 때가...' 막 차를 한 모금 넘기던 주성운은 눈을 빛냈다. "전하! 신, 채광이옵니다." 밖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들어오도록 하라." "그래 무슨 일이오?" 병부상서 채광의 안색이 굳어져 있었다. "변경의 동정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변경?" "예. 막북(漠北)에 흩어졌던 몽고병들이 집결되고 있다 하고..." "몽고병들이?" "예, 그러하옵고 서역의 라마..." 그의 보고에 주성운의 안색이 굳어져 가는 순간이었다. "서랏!" 갑자기 밖에서 근위(近衛)들의 사나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비... 비켜라! 촌각을 다툰다!" 창! 채-앵! 꾸짖는 외침과 함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를 들어오게 하라!" 주성운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와당탕- 동시에, 문을 사납게 밀어제치며 피투성이가 된 중년대한 하나가 구르듯 뛰어들었다. "금의위 위장!" "저... 전하! 피... 피하소서!" 병부상서 채광이 경악해 소리치는 순간에 금의위장이 선혈을 토해 내며 급박하게 외쳤다. "무슨 일이냐?" "으악!" "으-아-악!" 주성운이 그를 부축하려고 몸을 일으킬 때, 황태자궁 주위에서는 마치 합창하듯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정적(靜寂)! 단 한 순간에 숨막힐 듯한 고요가 주위를 휩쓸었다. "무슨... 설마 백 명의 근위가...?" 그 순간이었다. "아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가 야기(夜氣)를 뒤흔들며 한 인영이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버... 벌써! 전하, 피하소서! 소장이 잠시라도!" 금의위장이 어디서 힘이 났는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번개같이 나타난 인영을 덮쳐 갔다. "흥!" 차가운 냉소와 함께 인영의 손이 번뜩인 순간, 처절한 비명이 일어났다. 참혹했다. 선혈이 난무하면서 금의위장의 몸이 갈가리 찢겨져 날았다. 금의위장의 무공을 생각할 때 그것은 가공할 일이었다. "여-섯째?" 주성운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으하하하... 형님! 그간 안녕하셨소?" 득의한 웃음을 터뜨리는 인영은 다름 아닌 육황야(六皇爺)였다. 가장 평범하고 무공의 '무' 자도 모른다던 진명왕(眞明王) 주소운(朱 雲)이었다. 그때였다. "우욱-!" 갑자기 주성운이 가슴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너... 너는 무슨... 짓을?" "아무것도 아니오. 궁내에 있는 용정수(龍井水)에 실수로 단장홍(斷腸紅)을 조금 흘렸는데 아마 그걸로 차를 끓여 드신 게 아니오?" 주성운의 얼굴이 괴로운 빛으로 일그러질 때, 육황야 주소운은 빙그레 웃으며 여유롭게 다 가왔다. "머... 멈추시오. 전하! 이게 무슨 짓이오? 호국지존께서 그냥 계시..." "다섯째 형이 여기 없는 걸 알고 있다!" 주소운이 픽 웃으며 소매를 저었다. "으악!" 채광이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나는 원로라고 봐주는 것 없지! 덕(德)은 힘[力]을 쓴 후에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육황야 주소운은 주성운을 보며 웃었다. "너야말로 무서운 놈이었구나! 그 동안... 그토록 철저히 자신을 위장하고 있었다니..." 주성운은 진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 숨쉬기조차 힘들게 그를 몰 아세우고 있었다. "고맙소. 넷째 형의 칭찬은 난생 처음이오. 더구나 이 자리에서의 칭찬은 매우 의미가 깊 소." 주소운은 앙천광소했다. "다섯... 째가 돌아올 것이... 다!" "요망사항이지, 그는 돌아올 수 없소!" 주소운은 확신하듯 잘라 말했다. 갑자기 주성운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너는 다섯째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리고 나 주성운도!" "!" 육황야 주소운의 안색이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홍무자염강기(洪武紫焰 氣)!" 꽝! "으-윽!" 일진 폭음과 함께 육황야 주소운이 창백한 빛으로 그대로 쫘아악-벽까지 밀려났다. 놀랍게 도 거의 죽어가는 듯하던 주성운이 일 격을 가했고, 창졸간에 기습을 당한 주소운은 그 와 중에도 그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생각보단 더 강하구나! 내 오늘 너의 배후를 알아 내고야 말겠다!" 주성운이 궁중비전의 홍무자염강기를 쏟아 그대로 육황야 주소운을 덮쳐갔다. "교활... 한... 중독되지 않았으면서... 혈천선풍강(血天旋風 )!" 육황야 주소운이 얼음같이 외치며 소용돌이치는 혈류(血流)를 쏟아냈다. 그것은 바로 금의위 장을 갈가리 찢어 죽였던 그 무공이었다. 꽝! "음!" 주성운이 흠칫 한 걸음 물러날 때, 육황야 주소운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을 물러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이... 이토록 강하다니? 그럼 그때 보인 무공은 진재실학이 아니었단 말인가?" 주성운의 입가에 냉소가 스쳐갔다. "다섯째가 그냥 갔으리라 믿었다면 너는 자격이 없다!" 그는 이미 황궁풍운 때보다 십 배 강한 고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으아-악!" 꽝! 와장창! 그때, 벽이 박살나며 노인 한 명이 번개같이 뛰어들어왔다. "전하!" 다급하게 외치며 뛰쳐 들어오는 것은 개산권신 유동이었다. "오! 사부! 어서 오시..." "미안하오!" 주성운의 얼굴에 십만원군을 얻은 듯한 희색이 스쳐 가는 순간에 개산권신 유동이 갑자기 그에게 날벼락 같은 일 권을 쳐냈다. 그처럼 믿고 있던 사부인 개산권신 유동이 자신을 공격할 것을 그가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으랴. 권신(拳神)이라 불리는 가공할 권력이 사정없이 주성운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으-악!" 주성운은 두 눈을 부릅뜨며 나뒹굴었다. 선혈이 폭포수처럼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무도 상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 * *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주천운의 낯빛은 납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그의 앞에는 지금 전신이 피투성이인 채설지가 누워 있었다. 그녀의 상세는 지독했으나 주 천운의 치료로 간신히 죽음만은 면한 상태였다. "더 이상은 모르습니... 다. 다만 그... 때... 지존위 대장이신 정장군께서 나타나 무슨 기밀부 로 피신했다고..." 주천운은 침음했다. 그는 패도무적 정문수를 보낼 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천하기밀부를 이용토록 했던 것이 다. "상황이 여섯째 하나로 그토록 최악이 되었단 말인가?" 주천운은 미간을 굳혔다. 가슴이 무거웠다. 채설지가 떨리는 눈으로 주천운을 올려다보았다. "지... 존위 위사 십이 명이 북경을 벗어... 나려다 죽... 었고 소녀를 탈출시키느라 전하의... 시비 설란이 소녀 대신 죽었습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설란이?' 주천운의 눈에 은은한 파동이 일어났다. "소녀... 죽을... 수는 없어... 천신만...고 반드시... 이 소식을. 전하께 알리고저..." 그녀의 눈에서 빛이 꺼지며 눈이 감겼다. 긴장이 풀려 실신한 것이다. "상황이 매우 위급해 보입니다.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림제갈이 곁에서 침중한 빛이 되어 입을 열었다. 주천운은 천천히 채설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녀를 무산신모에게 맡겨 주시오. 그녀의 제자이니 아마 잘 돌봐 줄 것이오." "신모의 제자? 그럼 제 사매가...? 알겠습니다." 무림제갈은 다시 한 번 채설지를 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이 소녀의 무공으로 사선(死線)을 넘어 내게 소식을 전한 것을?" 무림제갈이 대견한 듯 말했다. "불가능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렇소. 불가능한 일이지..." 주천운이 고개를 끄덕임을 보고 갑자기 무림제갈 남궁천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 말이 의미 하는 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럼...?" 주천운이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 무림제갈 남궁천은 말을 멈추었다. "아는 것을 다 말할 필요는 없소! 황실의 위험은 곧 나의 위험! 지금 곧 떠나야겠소." "지존! 하지만..." "혈마소후의 종적을 찾아보시오. 매우 중요한 일이오." 주천운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내가 떠난 후, 출발토록 하시오." 주천운의 목소리는 담담하나 그 누구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따라잡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무림제갈은 긴 숨을 내쉬었다. 동녘이 밝아 오고 있었다. * * * 꽈르르-르릉! 때아닌 태풍이 불고 있었다. 그 태풍은 태백산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처음, 그것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그 위세도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태풍 아니, 한 가닥 질풍의 위세는 태백산을 벗어날 때쯤 되어서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 가 되어 있었다. 와르-릉! 그 질풍이 지나가는 곳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날고 바위가 멋대로 굴러나가는데, 그 여파가 미치는 곳은 무려 십 장에 달했다. 게다가 그 속도는 얼마나 빠른가? "아이고, 우강(愚强:風神)께서 노하셨다!" 촌민들이 혼비백산할 때에 굉음은 이미 십 리 밖에서 들리고 있었다. 꽈르-르릉! 미친 듯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울리는 뇌성(雷聲)! 그 위세는 점점 더 강해졌으며 그 광풍이 황하(黃河)에 이르렀을 때, 백년을 두고 생각해도 잊기 어려운 대장관(大莊觀)이 벌어졌다. 꽈르-릉! 쏴쏴쏴아아-. 뇌성이 황하를 가르며 지나가자 물보라가 하늘을 가릴 듯 꿈틀거리고 일어난 것이다. 파도 가 일어나다 못해 마구 휘말려오르는데 그것은 용이 승천하는 듯했다. "아이고! 용신(龍神)이 노하셨다!" 어민들이 배에다 고개를 처박을 때, 휘말려올랐던 물기둥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내려앉고 있었고 뇌성질풍은 이미 황하 저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세상을 놀라게 만든 뇌성질풍(雷聲疾風)! 그 엄청난 회오리는 한 인간이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것이었다. '뇌정군림신법! 과연 대단하다... 계속해서 펼치면 이런 위력이 나타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주천운은 정녕 놀라고 있었다. 귀무곡을 떠날 때 그는 아주 지친 상태여서 길을 떠난다는 것이 무리였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난 지금은 내공이 복원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꾸 공력이 증 가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꽈르릉-꽈릉! 그러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뇌성광풍은 더욱 거세지고 그의 신형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 다. 공력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의 기(氣)를 끌어들이는 천하무비의 신공과 같은 절세 신법이 바로 뇌정군림신법이었다. 눈앞에 협곡이 나타났다. 꽝! 꽈르릉! 그가 무서운 속도로 그 협곡을 지나가는 순간에 거대한 폭음과 함께 화염이 하늘을 가릴 듯 피어올랐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와르릉! 꽈꽈꽝...! 협곡에 균열이 가면서 무너져 내렸다. 가히 개천벽지의 대붕괴.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며 일어났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흙먼지가 조금 가라앉자 서너 줄기의 인영이 거기에 나타났다. "어... 없는데?" "초강고수니까 흔적조차 없을 리는..." "그토록 지독한 폭발에 흔적이 남는다면 사람도 아니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들의 위쪽에서 담담한 어조의 음성이 들려 왔다. "헉!" 그들 복면인의 몸이 굳어졌다. 무너진 협곡 위에 흑의유생 한 사람이 태연히 서 그들을 내 려다보고 있지 않는가? 두말도 하지 않았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주천운을 발견한 순간에 그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사방으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주천운은 어이없는 빛이 되었다. "기가 막히는군..." 그리고 그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꽈르-릉! 그가 떠난 협곡이 뇌성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복면인 넷의 무공은 강호 일류고수급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재주로 주천운의 손을 벗 어날 수 있겠는가? "당금 천하에서 화기를 가장 잘 다루는 곳은 천화곡(天火谷)이지만 그보다 더 전통이 있는 곳은 산서의 벽력당(霹靂堂)이지! 무엇 때문에 나를 습격했느냐?" 주천운은 제압되어 한군데에 쓰러져 있는 복면인들에게 물었다. "..." 잠시 말이 없던 복면인 중 한 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귀하가 진정 신... 마금검뢰요?" 주천운의 눈에 가는 파동이 일어났다. "알고 했단 말인가? 내가 올 것을? 여기서 나를 기다렸다고?" 복면인의 눈에 괴로운 빛이 스쳐 갔다. "으으... 우리의 가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버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다른 복면인 하나가 다급히 외치는 순간, 기괴한 방울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으! 으아-악!" 네 명의 복면인이 동시에 참담한 비명과 함께 펄쩍 뛰었다가 떨어져 죽어갔다. 그것은 결코 잊지 못할 모습이었다. "마령추혼고(魔鈴追魂蠱)..." 주천운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들 네 사람의 죽음에서 그는 칠황야 주서운의 죽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칠황야 주서운의 죽음 또한 바로 마령추혼고에 의한 것이 아니던가? "결국... 그가 나타난 것인가?" 주천운은 방울 소리가 울린 곳을 쳐다보았다. 꽈르-릉! 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여섯째... 그 녀석까지 그의 수중에 있었던가? 그런데... 그런데 그는 무엇을 여직껏 기다린 것인가?' 주천운은 미혹에 잠겨 있었다. 그의 신형은 그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번개처럼 방울 소리가 들린 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곳은 아주 수림이 빽빽히 우거진 숲속이었다. 우지끈! 뚝딱! 그가 나타나자 수십 년 수백 년생 나무들이 뇌정군림신법의 광풍에 휘말려 부러지고 뽑히며 흙먼지를 휘말아올렸다. 암중에 그에게 발사된 독침들이 마구 튕겨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뇌 정군림신법이 있는 한, 그 어떤 암습도 그의 몸까지 접근치 못하는 것이다. "과연 신마금검뢰의 명성은 명불허전이군..."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주 음침한 생김에 얼굴은 괴이하도록 희었고 몸에는 녹의를 걸친 노인 한 명이 소리도 없 이 숲속에 나타났다. "기련노인(祁連老人)..." 주천운의 음성에 녹포노인은 소리없이 웃었다. "노부의 이름까지 기억해 주다니 영광이로군..." 기련노괴(祁連老怪)! 전설로 전하는 대마두, 그가 모습을 감춘 것은 팔십 년 전, 그때 그의 나이가 백하나라고 전 해진다. 그럼 대체 그의 나이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얼마나 된 것이란 말일까. "당신과 같은 노인이 굳이 시비에 다시 뛰어들다니..." 주천운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그 위대한 이름 때문이지! 신마금검뢰란 이름만 지우면 노부는 기련산으로 갈 수도 있다..." 기련노괴는 또 소리없이 웃었다. 순간, 사방에서 무려 백 명에 이르는 녹의인들이 나타났다. "내가 올 길을 아주 잘 알고 있었군..." "뻔하니까!" 말과 함께 백 명의 녹의인이 원형을 이루며 덮쳐 왔다. 꽈르-릉!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태풍이 주천운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새파란 청광이 천룡과 같이 꿈틀거리며 회전했다. "우아... 아...!" "크으으..." 줄을 잇듯 터지는 비명이 끝났을 때, 백 명의 녹의인 중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르-릉! 주천운의 신형이 굉음과 함께 기련노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안색은 약간 창백하나 전과 같이 심한 공력소모는 없었다. 뇌정군림신법과 제왕무적 검강을 어떻게 같이 사용해야 하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뇌정군림신법이 제왕무적검강과 같이 있는 것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미... 믿을 수 없군! 어쩐지 벽력진을 단숨에 파괴하더니..." 기련노괴의 몸에서 아주 차가운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유음풍강(九幽陰風 )? 그러나 기회는 없을 것이다!" 주천운의 눈은 차갑도록 맑았다. 팍! 그의 어깨가 기우뚱하며 그의 몸이 벼락같이 기련노괴에게 덮쳐 갔다. "흥! 천잔(天殘)!" 기련노괴의 냉소와 함께 빙벽을 능가하는 한음지기(寒陰之氣)가 주천운을 맞아 갔다. 파파... 그런데, 마치 얼음을 뚫는 송곳과 같이 주천운의 호국지존병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그의 구 유음풍강을 뚫고 들어오지 않는가? '정면으로 이럴 수가?' 기련노괴는 혼비백산해 몸을 틀며 물러났다. 마치 번개와 같이 엄청난 빠르기의 호국지존병이 그의 목을 한 자 가량 비켜갔다. 그럼에도 그의 목에서는 검기를 이기지 못하고 피가 솟았다. "너는 죽었다!" 검이 자신의 목을 스치는 순간의 허점을 발견한 기련노괴가 전력을 다해 구유음풍강을 때려 냈다. 그것은 너무도 찰나간의 변화라 피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크-악!" 그러나 처참한 비명과 함께 목이 피분수를 뿌리며 날아오는 것은 기련노괴였다. "여의섬과 조화의는 이미 불가능이 없는 검학... 검도에 이르고 있다." 구유음풍강의 힘에 휩쓸려 몇 걸음 물러난 주천운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는 기련노괴의 시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곳을 떠났다. 갈길은 바쁘다. 그러나 과연 그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전력을 기울여 무조건 적을 죽이는 것인가? "멈춰요!" 그런데 문득 다급한 여인의 전음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천운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의 무공이 아무리 높아도 더 이상 가면 죽음뿐이에요! 기련노괴는 그분의 제일친위대 장에 불과해요! 돌아가세요! 어서..." 전음은 절실했다.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천운의 모든 행동을 예측하고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무조건 거기에 뛰어드 는 주천운에다 이번에는 그것을 막으려는 여인까지... 주천운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녀란 말인가?' 그의 눈은 약 십사오 장 떨어진 아름드리 측백(側柏)나무를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분의 삼대친위군(三大親衛軍) 중 기련노괴의 일군이 가장 약해요! 우선 물러나 후일을 도 모하심이..." 끊겼던 전음이 다시 들려 왔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소?" 문득 주천운은 그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번져 갔다. "알고 있겠지, 모르고는 이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라라고 하는 것은 개인과는 다르오. 한번 기운 국세(國勢)는 다시는 회복할 수가 없소." 그의 눈에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나라를 위해 선택된 사람이오. 사직(社稷)이 위험에 빠졌으되 한 가닥 희망이 있는 이상, 나는 그냥 있을 수 없는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나직했으나 그가 원하는 곳에는 아주 잘 들렸다. "그 희망이라는 것이 당신을 유인하기 위한 함정임을 왜 모르시는 건가요?" 안타까운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주천운이 낭랑히 웃었다. "정말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뛰어들었으리라 생각하시오?" "..." 전음이 끊겼다. 그의 말은 그녀에게는 너무도 의외의 것인 것이다. 주천운은 그쪽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처지에 반하는 상황에서 용기를 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오. 고맙소, 지매!" 한소리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의 여운은 다음 순 간에 휘몰아치는 광풍에 의해 묻혔다.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벼락 같은 위세로 까마득히 날아가고 있었다. 흙먼지가 하늘을 가릴 듯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장엄하게조차 보이는 위세였다. 주천운이 떠난 그 자리에 가냘픈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복면 속에 자리한 호수와 같은 그녀의 눈빛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를... 알고 계셨더란 말인가? 그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귓전에 맑은 천리전음성(千里傳音聲)이 그녀의 귓전을 울려 왔다. "사람이란 비겁하게 보이면서도 숨어야 할 때가 있고 때론 무모하게 보이는 일에 목숨을 걸 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오. 천하의 일이 어찌 겉보기와 같으리..." 우-르릉! 저 멀리서 우레가 치고 있었다. 태풍이 오려는 것일까. 흰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넋을 잃은 듯이 주천운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서 있었 다. * * * 나체의 여인! 얼굴은 서시(西施)와 달기(女旦己) 같고 꺾어지는 허리는 조비연(趙飛燕)을 방불케 하며, 출 렁이는 유방의 풍성함은 소군(昭君)이 부끄럽고 풍만한 둔부의 유혹은 양귀비(楊貴妃)를 능 가하며, 옥 같은 두 다리의 늘씬함은 서주의 포사(褒女以)가 도망갈 지경이라... 보일 듯 말 듯한 신비림은 한겹 망사 속에서 은은히 빛나니 그것을 보는 것이 남자의 눈이 라면 기필코 멍이 들고 말리라! 주천운은 어이가 없는 빛을 떠올렸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삼십여 명에 이르는 나녀(裸女),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싱싱한 여인의 육향과 지분 냄새가 정신을 뒤흔들어 놓을 듯이 풍겨 오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여인의 요염(妖艶)함은 군계일학,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뇌쇄시킬 정도였다. "만화곡주(萬花谷主)?"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주천운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자 앞선 여인이 가벼이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 자태 하나에서 요염함이 처절하게 드러났다. 농염한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서 전신으로 번져 갔다. "신마금검뢰의 위명이 천하를 진동하더니, 그 안력 또한 보통이 아니군요." 혼백을 흔드는 매소(魅笑)가 피어났다. 만화곡주(萬花谷主) 우설염(禹雪艶)이 본인임을 그녀는 시인한 것이다. 일회이맹삼가사곡 중 천사(天邪), 천화(天火), 흑령(黑靈)과 함께 사곡 중 하나인 만화곡의 주인 우설염. 천하제일의 탕녀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녀가 만화곡 밖을 출입한다는 소리는 나돈 적이 없었 다. 삼십육염혼(三十六艶魂)은 만화곡의 최정예로 남자의 혼을 녹인다던가? "만화곡주가 제이친위군의 대장이라? 이건 뜻밖이군!" 주천운의 음성에 만화곡주는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요염히 웃었다. "아는 것도 많군요? 하지만 나는 제이친위군 제이대장의 자격밖에는 없죠..." 그녀는 둔부를 흔들며 살랑살랑 걸어왔다. 동시에 삼십여 개의 망사가 기이한 향기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와 함께 미끈하기 이를 데 없는 삼십육 명의 나녀가 전라로 주천운에게 너울거리듯 뛰어 왔다. "어떤가요? 우리 애들의 몸이?" 만화곡주가 깔깔 웃으며 자신의 걸친 망사를 찢어 내렸다. 그 엷은 망사가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며 찢어지고 그 속에서 은은하던 나신이 드러나는 것 은 아주 지독한 유혹이었다. "그래 봤자 거죽 속에 뼈 들고 내장 들었지... 지난날 불타께서는 그 내장 속에 든 오물조차 보셨다고 하던가?" 그런데 주천운은 꽃잎이 떨어지는 듯이 움직이는 나녀들을 눈빛조차 변하지 않고 바라보면 서 오히려 성큼성큼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일이? 만화소혼무(萬花消魂舞)에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을 수가?' 만화곡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대려군의 그 만겁수라소녀안조차 그를 어찌할 수 없었음을! "절(節)을 지키지 못하고 염치(廉恥)를 모르는 여인은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히니,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 꽈-르릉! 주천운의 몸이 무섭게 회전하며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나 그의 몸쪽으로 빨려들었다. "아앗!" "악!" 만화소혼무를 펼치던 삼십육염혼들이 그 경기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주천운 쪽으 로 끌려 들어갔다. "아-아-악!" "아악!" 뒤이어 참담한 비명이 찢어지듯 울려 퍼졌다. "아... 안 돼! 물러서라!" 만화곡주 우설염이 대경실색하여 경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단 한 순간이었다. 삼십육 명의 나녀들이 창공 속으로 그 희멀건 나신을 내던지며 날아오른 것은 정말 한 순간에 불과했다. 그처럼 아름답던 나신이 광풍낙화와 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릴 때, 그녀들에게서 뿌려지는 것은 혈화(血花)! "아윽...! 이... 이 정도라니...?" 만화곡주가 교구를 비틀며 진땀을 흘렸다. 풍만한 가슴이 파동 치며 흔들렸다. 그처럼 아름 답고 풍만한 가슴이 요동 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는 조금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팔을 꺾은 채 주천운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제이친위군의 이대장이라고 했던가? 제일대장은 지금 어디..." 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은 순간이다. "여기 있다!" 파아-! 주천운의 발 밑, 땅속에서 가공할 공세가 솟구쳐오르며 그를 온통 뒤덮었다. 그 빠름과 의외 성, 그리고 그 위세는 상상을 절하는 것이라 가히 출기불의(出其不意)하였다. 차차-창!창! "아-악!" "으-와-악!" 그리고 정적(靜寂)! 왜소하나 아주 뛰어난 기도(氣度)를 가진 녹포를 입은 노인 하나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온몸 을 흔들거리고서 주천운의 앞에 서 있었다. "이... 이건 쾌검도... 아니... 다!" 그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의 천돌혈에서 한 줄기 선혈 이 힘차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땅에 얼굴을 박고서도 그는 믿을 수 없는 듯이 부 릅뜬 눈을 감지 못했다. "녹림마존(綠林魔尊)이 제이친위군의 제일대장이란 말인가?" 어느새 호국지존병을 손에 쥔 주천운은 놀란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심감사혈(心 坎死穴) 부근의 옷이 한 치 가량 찢어져 있었다. 녹림마존(綠林魔尊)! 그의 신분은 기련노인와 비슷하다. 하지만 큰 차이가 나는 것은 그가 무림이맹의 하나인 녹림맹의 맹주라는 사실이다. 그는 녹림의 온갖 술법을 집성(集成)하여 암격(暗擊)의 천재라고 불리며, 실제로 그의 암혼 천심자(暗魂穿心刺)는 누구도 피하지 못했다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녹림을 지난 육십 년 간 독패해 왔다는 그가 누군가의 친위대장에 불과하다니... "다, 당신은... 금강불... 괴?" 온몸이 걸레와 같이 된 만화곡주가 몸을 떨다가 죽어 갔다. 녹림마존의 암습에 그녀도 같이 당한 것이다. 아름답던 그녀의 몸도 이젠 시체에 불과했다. "대단한 자다! 하마터면 호신강기가 흩어질 뻔했다!" 주천운의 가슴팍에서는 가늘게 선혈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현재 주천운의 신체의 호신강기는 일반도검이 부러져 나갈 정도임을 생각할 때 녹림마존이 어느 정도의 고수인가는 알고도 남을 일이었다. "결국 만화곡의 여인은 신경을 돌리기 위한 미끼였었군..." 주천운은 호국지존병을 거두며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다시금 몸을 날렸다. 꽈르-릉! 질풍이 그의 뒤를 따라 일어났다. 하지만 그 위세는 조금 약해져 있었다. * * * 슈슈슈-. 쉬쉬-쉭! 쉭! 빗발치는 화살! 그것은 연환강노(連環强弩)에서 발사되는 것이라 엄청나도록 많았고, 또한 빛살과 같이 빨랐 다. "와아-악!" "크에엑-!" 그러나 쏟아지는 그 엄청난 화살비 속을 간단히 뚫고 들어와서 궁수들을 처리하는 기막힌 고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장난과 같았다. 그가 막 궁수 팔십이 명을 처리했을 때, 나무 위에서 초록의 경장을 한 검수들이 그물과 함 께 떨어져 내려왔다.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있었기에 바로 앞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촤촤촤-! 주천운의 검미가 좁혀졌다. "필요없는 짓! 이런 공격은 이미 스무 번도 더 받았다." 마치 백옥과 같은 그의 손이 번개처럼 난무하며 그곳을 통과했다. 손짓 한번에 그물이 찢겨 지고 검이 손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져 나가니, 그것은 현천백옥수의 신위(神威)였다. 이들의 공력은 일류이나 호국지존병을 꺼낼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꽝! 꽈꽈-꽈르릉! 그런데 그 순간, 상상치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그의 손에 죽어 가던 검수들의 몸이 대폭발 을 일으킨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인간이 폭발을 하는 것이다. 나무가 박살이 나고 화염이 치솟으며 검은 연기가 주위를 뒤덮었다. 그것은 방원 삼십 장을 박살낸 엄청난 대폭발이었다. 스스스... 잠시 시간이 흐르면서 매캐한 화약연기가 조금 가라앉자, 유령과 같이 약 이십 명의 인원이 나타났다. 그들의 신수(身手)는 방금 전까지 주천운을 공격하던 자들과는 아예 차원이 틀린 것이었다. 그 중 앞장선 복면인의 발은 땅에 닿지도 않았다. 답허성실(踏虛成實)의 초강경공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고수 사백 명을 소비하며 만든 함정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찾아라!" 스무 번도 넘는 평범한 공격은 품속에 폭탄을 감추고 있는 검수들을 위한 것이었다. 연달아 계속되는 공격에 방심할 것을 노려 그 허를 공격하기 위해 고수 사백 명을 소비한 것이다. 어찌 잔혹무도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였다. "찾을 필요 없다! 생각대로 죽지 않았으니까." 가슴이 떨리도록 차가운 음성이 허공에서 내려왔다. 주천운이 바닥에 내려섰다. 낭패한 기색이 분명하되, 그 대폭발에서 살아난 사람이랄 수 없도록 말짱한 모습이었다. "으음! 생각보다 더하다! 회주님의 말씀이 틀림없었군...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 라더니." 앞장선 복면인이 천천히 품속에서 자모건곤권(子母乾坤圈)을 꺼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이 이십 명의 복면인들이 미끄러지듯 흩어지면서 주천운을 포위했 다. 주천운의 눈에 약간 흔들림이 일었다. "천지회주의 마지막 친위군의 대장이 무적건곤권 고류수, 당신일 줄은 생각지 못했군." "모르는 게 없다더니..." 자모건곤권을 꺼내던 복면인은 주천운이 단숨에 자신을 알아보자 경악을 금치 못한 듯 신음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의 옷은 무섭게 펄럭이고 있었다. 공력이 최고로 끌어올려지고 있는 것이다. 한번 보아 모든 것을 기억함을 일람첩기(一覽輒記)라 하거니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주 특이한 사람도 있다. 주천운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 다. 그는 천하기밀부에서 천하무림의 모든 인명록을 독파하고는 그것을 모조리 다 외워 버 렸던 것이다. 그러니, 특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무적건곤권(無敵乾坤圈) 고류수(高流水)는 기련노괴나 녹림마존보다 반 배분 아래였으나 그 들보다 강한 고수였고 또한 곤륜파 출신의 당당한 정파 최고기인에 속한다. 그는 곤륜출신이면서도 검이 아닌 자모건곤권을 극한으로 연마하여 중원사마와 동배인 무 림삼요(武林三妖)를 단신으로 처치한 영웅이었다. 그런데... "천지회주는? 여기 있느냐?" 주천운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천지회주(天地會主)! 그는 또다시 그들의 상전을 천지회로 지칭했다. "신룡의 뜻을 추어(魚取魚:미꾸라지)가 알 수 없지. 명부에 가 물어보아라!" 차가운 무적건곤권의 대답, 하지만 그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상황은 명백해지고 있었 다. 위이-잉! 무서운 기세가 회오리치듯 주천운을 압박해 왔다. 그것은 가공할 진세가 일어남을 의미하고 있었다. 주천운을 포위했던 복면인들의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는 주천운의 눈에 의혹과 놀람이 스쳤다. '알 수 없다! 처음 보는 진세다...!' 현재까지 존재했던 어떤 진세라 할지라도 그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펼치고 있는 진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 진세가 새로 만들어졌거나, 주천운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이었다. "으하하... 어떤가? 너를 위해 만든 혈천망혼진(血天亡魂陣)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자모건곤권 고류수의 신형이 묻혀 들어가면서 크게 웃었다. "흥!" 그러나, 주천운은 냉소하며 양손을 내밀었다. 현천마금이 거기 들려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탈심혼이 넋을 뽑을 듯 그의 손짓에 따라 울 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엄청난 압력이 주천운을 눌러 왔다. "으... 윽...!" 가공할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주천운의 발 밑이 대번에 한 자나 꺼져들어갔다. 흙먼지가 피 어올랐다. '탈심혼에 끄덕도 없다니?' "으하하... 천심전! 탈심혼! 얼마든지 펼쳐 봐라! 너의 모든 것은 이미 회주님께서 알고 계신 다! 으핫핫하하하..." 무적건곤권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그것은 혈천망혼진이 주천운의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음을 의미했다. 뒤이어 붉은빛이 온통 하늘을 가리며 귀곡성(鬼哭聲)과 같은 음향이 사방에 진동했다. 이십여 명의 복면인의 손에 들린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붉은 기형검에는 구멍 이 뚫려 거기서 그러한 음향이 발출되는 것이다. '압력이 이토록 세다니!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 손가락조차 움질일 수 없다. 절대로 오래 견 딜 수 없다!' 주천운은 초반에 깨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진이 혈천망혼진임을 깨달았 다. 하늘이 온통 붉은빛으로 가득 찼다. 피로 물든 것 같았다. 혈천망혼이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탈심혼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상, 막대한 공력의 소모가 있는 사멸령을 전개하는 모 험을 할 수가 없다!'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미 저들의 붉은 검은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부릅뜬다 해도 그 들의 검을 볼 수는 없었다. 붉은 선혈과 같은 파도의 무리가 그를 엄습해 오고 있음을 볼 뿐이었다. 가히 전신이 터져 나가는 듯한 엄청난 위세였다. 주천운이 이를 악물며 전공력을 일으켰다. 비-잉! 무서운 압력이 그를 짓누르는 가운데 그의 몸이 미미하게 진동하며 미친 듯한 강력( 力)이 놀라운 위세로 일어났다. '으으...!' 주천운의 얼굴이 압력의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순간에 그의 신형이 서기로 가득 차면서 무서 운 기세로 돌기 시작했다. 꽈르-르릉! 벼락치는 굉음이 그 회오리를 따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압력 속에서 드디어 뇌정군림신 법이 펼쳐진 것이다. "제왕무적검강(帝王無敵劍 )-!" 주천운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의 신형이 그 원 속에서 더 큰 원을 그리며 돌아나갔다. 그 속도는 혈천망혼진이 도는 속 도보다 빨랐고 그에 따라 눈부신 청광이 쭉쭉 뻗어 나가고 있었다. "으-아악!" "우와-아-" 참담한 비명이 터지는 것과 함께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혈천망혼진을 벗어나고 있었다. 단 한 순간이었다. 벗어날 수조차 없어 보이던 엄청난 진이 어이없다 할 정도로 단숨에 깨어진 것이다. "으악!" "으-엑!" 진이 깨어지자마자 대여섯 명의 고수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연달아 거꾸러졌다. "이... 이럴 수가? 무적친위군(無敵親衛軍)이!" "정파의 기인이란 자가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의 주구가 되다니!" 무적건곤권이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할 때, 준엄한 꾸짖음과 함께 번개 같은 광망이 그에게 덮쳐 왔다. "으-야얍!" 나누어졌던 자모건곤권이 차앙! 소리와 함께 벼락같이 합쳐지며 호국지존병을 막아 갔다. 자모건곤권이 합쳐지는 소리는 천둥과 같아, 그가 과연 일대의 고수임을 나타내고도 남았다. 무적건곤권이 자모건곤권으로 주천운의 호국지존병에 부딪쳐 갈 때, 한소리 냉엄한 호통이 큰 종을 울리듯 들려 왔다. "멈춰라!" 그 말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자모건곤권과 호국지존병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창-캉! 고막을 찢는 금속성! "으-아-아-!" 무적건곤권이 두 눈을 부릅떴다. 놀랍게도 만년강모(萬年鋼母)로 된 자모건곤권이 호국지존병과 부딪치는 순간에 반 쪽이 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몸은 두 쪽이 나버렸다. 선혈이 폭포수와 같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막았는데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호국지존병의 위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제 29 장 오오! 혈천마경(血天魔磬) "잘못 생각했었다...!" 냉랭한 음성이 침중하게 흘러나왔다. 무적건곤권이 죽어 넘어진 곳에는 황금가면을 쓴 황의인 한 사람이 태산과 같이 우뚝 서 있 었다. 누구라도 그의 앞에 선다면 식은땀을 흘리며 공포로 질리고 말 것이었다. 그의 전신에 서린 기도는 가히 만인을 위압하는 패왕(覇王)의 그것이기에. 그러나 그를 보는 주천운의 몸에서도 만인을 누르는 제왕(帝王)의 기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제왕(帝王)과 패왕(覇王)... 거대한 기세를 전신에서 흘려 내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요." 그를 보는 주천운의 가슴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결코 두려움은 아닐진대 그의 가슴은 떨리고 있는 것이다. "너를 직접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한 생각이 오백칠십여의 삼대친위군을 죽이고 말았구나!" 황금가면의 황의인이 침중히 말했다. "그 말을 죽은 자들이 명부에서 듣고 과연 믿겠습니까?" 주천운이 나직이 웃었다. 팟! 황금가면의 황의인은 사납게 주천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앙천대소했다. "으하하... 어릴 때부터 너는 상규(常規)로 잴 수 없는 천재였지! 네가 지난 한 달 동안 이토 록 강해질 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구나!" 와르-릉! 사방이 그의 웃음소리에 떨리며 메아리가 전해 왔다. 천지회주(天地會主)! 최고의 신비인인 그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어조는 서로를 아주 잘 아는 듯하지 않은가? "아직도 그 가면이 더 필요하십니까? 삼숙!" 주천운이 정색을 하고 황금가면의 황의인, 천지회주를 쏘아보았다. 흠칫하던 천지회주는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좋다! 네가 이미 짐작하고 있는데 부인할 필요는 없겠지!" 그는 망설이지 않고 가면을 벗었다. 거기에서 나타난 얼굴은 놀랍게도 금릉 대호친왕부의 삼황숙, 병들어 움직이지 못한다던 그 였다. 일은 여기에서 이렇게 풀리고 있었다. 주천운 또한 이미 본모습을 회복하고 있었다. 삼촌과 조카,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찰칵-! 주천운의 말과 함께 빛이 없던 호국지존병에서 갑자기 찬란한 금광이 쏟아져나왔다. 그것은 그가 호국지존의 신분으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신다면 호국지존의 권위로 모든 일은 없던 것으로 돌리겠습니다." 주천운의 눈동자가 힘있게 빛났다. 삼황숙은 나직이 웃었다. "서로의 생각이 다름은 이미 기정사실, 회유될 수 없는 그릇이라면 그것은 깨어져야 한다!" 그의 눈빛에서 은은히 핏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승리를 확신합니까?" "으하하하..." 삼황숙은 또다시 벼락치듯 웃어대었다. "너는 네가 일부러 단신으로 함정에 빠진 듯 뛰어든 것을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하느냐? 그 렇다면 너는 크게 착각했다." 삼황숙의 말에 주천운의 안색이 약간 달라졌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범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기지(機智)가 날카롭게 번뜩이는 것이다. '함정 속에 또 함정이 있었단 말인가?' 굳어지는 주천운의 눈빛을 보며 삼황숙은 득의한 어조로 말했다. "너의 의중을 말해 볼까? 우선 함정에 빠진 듯 나를 상대해 내고, 그 다음에 군웅을 휘동해 천제문주를 상대할 생각이었겠지? 유사시에는 너 혼자의 몸은 내게서 뺄 수 있으리라 생각 하고?" 그의 어조는 아주 무심한 듯했으나 주천운의 가슴을 납덩이로 만들기에 족했다. '내 생각보다 삼숙의 그릇이 크다! 잘못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큰 실수를 했다! 귀무곡 천제문을 멸망시킨 군웅들은 그 때문에 전멸하게 될 것이다!" "삼숙의 천지회가 지친 그들을 공격합니까? 쉽지 않을 텐데?" 말을 받는 주천운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후후... 그런 어리석은 짓을 내가 왜 하겠나? 다만 몽고에 미리 사람을 보냈을 뿐이다." "몽고?" "올 사람을 예정보다 더 빨리 오도록 했는데, 누군가가 그들의 진로를 방해놓으려는 것 같 아서 그들도 함께 치워 주었다!" '천제문주!' 주천운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렇다면 이틀 뒤로 예정되었던 그들의 도착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빨라질 것이 아닌가? 늘 평정함을 잃지 않던 주천운이 안색까지 변하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심중으로 당황해 하는 것인지를 알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안배가 있음은 삼숙도 모를 것이오! 그 안배는 이미 발동했소!' 그의 내심에 흐르는 생각은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멸망한 제단을 본 천제문주는 격노하겠지? 아마 그때 멸마맹은 미처 그곳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삼황숙의 음성은 아주 자신만만했다. "너무 천제문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황실 또한 그렇군요. 마치 모든 것이 누군가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군요." 주천운의 말에 삼황숙은 나직이 웃었다. "이제 생각이 미치는 모양이군... 그렇다! 내가 은근히 천제문을 황궁으로 끌어들였지. 그들 이 황궁을 전복하면 그때 내가 나서려고... 그런데 그때 네가 나타날 줄은 뜻밖이었다!" 엄청난 음모였다. 결국 모든 것은 삼황숙에 의해 조종된 셈이었다. 원의 부흥을 외치는 천제문까지도 그의 수완에 놀아난 셈이 아닌가? "천제문은 끝까지 내 뜻대로 잘 움직여 주고 있다. 물론, 그들은 생각도 못하겠지만... 어쨌 든 이제 모든 것은 끝이다!" 삼황숙은 잘라 말했다. 그의 눈빛은 완전한 혈광을 이글거리면서 쏟아 내고 있어 매우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무서운 마공을 익혔군요. 하지만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겁니다!" "네가 가장 크게 실수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으하하하... 그것은 내가 천 하제일의 고수임을 몰랐다는 것이다!" 삼황숙은 또다시 크게 웃었다. 메아리가 귀청이 터질 듯 웅웅거렸다. "..." 주천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믿지 않겠지! 그러나 네가 내가 익힌 무공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다면 믿지말래도 믿게 될 것이다!" 콰르르-. 삼황숙의 온몸이 완전히 혈광(血光)으로 뒤덮였다. 하늘이라도 가릴 듯 그 위세는 십여 장을 퍼져 나갔다. 일대가 온통 핏물이 번져 가는 듯하 였다. 거기에 대항하듯 주천운의 몸에서 서기가 뻗어났고, 두 사람의 사이에는 강풍이 소용돌이치 면서 일어났다. 그 상태에서 주천운은 긴장된 표정으로 삼황숙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어떤 마공도 저 정도 의 위세를 지니지 못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대려군의 자부육합신공이 용화대수미선공을 제 외하고는 최고의 신공이었다. 하지만 삼황숙이 펼치는 저 무공은 분명히 더 강력해 보였다. "모르겠느냐? 으흐하하하... 당연하지! 혈천제마강(血天帝魔 )을 본 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 했으니까!" 혈광 속에서 삼황숙이 크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과 다르게 아주 음산하고 살기가 어려 있었다. '혈천제마강... 심성까지 변하는 마공이란 말인가?' 갑자기 주천운의 안색이 굳어졌다. 삼황숙이 일으킨 혈광 속에서 괴이한 형태의 혈홍색(血 虹色) 쇳조각이 빛나고 있음을 본 것이다. "너라면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겠지?" "서, 설마...?" 주천운이 소름 끼치는 생각을 떠올릴 때 삼황숙이 굉량하고도 음산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삼대천음 중 가장 강력한 마공지보(魔功至寶)인 혈천마경(血天魔磬)이 다!" 삼황숙의 외침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삼대천음이 드디어 강호에 모두 다 모습을 드러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 다. '혈천마경이 삼숙의 손에 있었다니... 현천마금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마물(魔物)이 혈천마 경인데!' 땡! 바로 그때, 귀청이 찢어지는 괴이무비한 음향이 삼황숙에게서 터져나왔다. 그 순간에 주천운 은 온몸이 으스러져 나가는 듯한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이 덮침을 직감했다. 우지끈! 쩡-. 백 장 일대의 나무들이 박살이 나 흩어지고 바위가 쩍쩍 갈라졌다. 돌멩이가 마치 불속에서 밤알이 터져 나가듯 튀었다. 그 와중에 주천운은 여전히 태산과 같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한 가닥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으흐흐... 과연 대단하구나. 혈천마경의 혈일뢰(血一 ) 파혼(破魂)을 견딜 수 있다니-." 혈광이 더욱 짙어지는 속에서 삼황숙이 소름 끼치게 웃었다. "생각보다는 약하군!" 주천운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꽈르르-릉!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이 무서운 기세를 휘몰고서 삼황숙에게 덮쳐 갔다. 바 로 뇌정군림신법이었다. "우후후후... 혈천마경에는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천주혈천망(天呪血天芒)!" 혈천마경이 은은히 울리는가 싶더니 엄청난 혈광이 마경으로부터 주천운에게 폭사되었다. 파파-팟! 마치 수천 수만의 혈침(血針)이 쏟아지듯 혈광은 처절한 마기와 함께 밀물처럼 주천운을 온 통 뒤덮으며 쏟아졌다. "마음이 움직이니 검이 따르고!" 한소리 낭랑한 외침이 그 혈광 속에서 터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처절한 혈광이 흩어지며 절대무쌍의 쾌검이 삼황숙을 향해 야공을 가르는 번갯불처럼 덮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삼황숙의 상상을 뛰어넘는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이런 일이!" 다급한 외침과 함께 삼황숙은 벼락같이 물러나며 일수(一手)를 쳐왔다. "혈천망혼수(血天亡魂手)!" 콰콰쾅...! 피바다가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검의 움직임에 변화가 일어나니!" 다시금 주천운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뇌정군림신법을 펼치고 있는 주천운의 신형은 그보다 더 빨랐고, 그의 손에 든 호국지존병 에서는 여의섬과 조화의가 잇달아 발휘되고 있었다. 하나 삼황숙은 여태껏 주천운이 만난 최고의 고수였다. 그의 신형은 이미 불가사의하게 그에게서 벗어나고 있었다. "흥! 변화가 마음에 있도다!" 파파-팍! 금광이 전광(電光)과 같이 혈광 속으로 파고들었다. 누가 저런 대결을 상상이라도 해보았는가? 엄청난 혈광에 휩싸인 삼황숙이 무서운 속도로 물러서고, 서기에 휩싸인 주천운이 호국지존 병을 번뜩이며 쫓아가는데 그것은 마치 질풍신뢰(疾風迅雷)가 치는 듯했다. 꽈르릉-꽝! 우지끈-뚝딱! 눈 두어 번 깜박일 시간에 그들의 신형은 이미 수백 장을 벗어나고 있는데, 가공스럽게도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거의 십 장 넓이의 폐허가 길을 만들 듯이 쫘악! 생겨나고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도 그들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산산이 부서지고 그 순간에 그들은 이미 그곳 을 지나고 있으니, 그것은 이미 인간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것이 하나는 공격해 가고 하나는 피해 가는 과정인데 믿을 수 없게도 일 초가 그 대로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수백 장의 거리를 달려가면서 그토록 엄청난 변화와 쾌검을 쏟아 내는 주천운과 그것을 피해 내는 삼황숙! 신기라는 말 외에는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그 어느 순간, 주천운의 전신이 찬란한 금광으로 휩싸이며 거대한 검과 같이 변하면서 삼황 숙을 덮쳤다. 발검에서 시작해서 수백 장의 거리를 달려오면서 끊임없는 변화를 일으키던 주천운의 검이 마침내 상대의 틈을 발각해 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제왕무적검강이었다. 꽈꽈-꽝! 두 사람의 공세가 서로 부딪치자, 개천벽지(開天霹地)의 엄청난 기세가 수십 장을 뒤덮으며 일어났다. "크-으-윽! 혈천제마강을 뚫다니!" 신음과 함께 삼황숙의 눈에서 소름 끼치는 혈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 정도일 줄이야! 제왕무적검강까지 견딜 수 있다니...' 주천운은 득수(得手)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마구 들끓어올랐다. 상대가 상처를 입은 것은 확실한데 그의 전신이 핏빛 덩어리니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땡! 그러나 그들이 떨어졌다고 느낀 순간에 또다시 귀청이 찢어지는 예의 괴이무비한 음향이 일 어났다. "윽!" 주천운의 입에서 선혈이 다시 스며나왔다. "우흐흐흐... 파혼(破魂)을 견딜 수 있다면 어디 육혼(戮魂)도 견뎌 보아라!" 삼황숙의 음성이 미친 듯 울려 왔다. '공력으로 상대할 수 없다! 나는 이미 내상을 입고 있는데다 그의 공력은 상상을 넘는다!' "천주혈천망(天呪血天芒)이다!" 쏴아아-. 하늘을 뒤덮는 혈광이 혈천마경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천지를 완전히 혈광으로 뒤덮어 조금 전과는 그 위세가 틀린 것을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푸스스스... 초목들이 마기가 소용돌이치는 혈광에 스치자 생기를 잃고 바스러져 갔다. 그러나 용화대수 미선공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는 주천운을 침범할 수는 없었다. '파혼의 위력은 자미천소의 만상구멸 초반부 위력인데 이 위세로 보아 육혼의 위력은 만상 구멸보다 더할 것이다!' 주천운은 번개같이 생각을 스쳐 보내고 전공력을 다 일으켰다. "삼대천음의 위세는 모두가 인간의 능력 이상! 현천마금에도 죽음의 제삼음인 사멸령(死滅 靈)이 있다!" "사멸령? 우흐흐흐... 신마양금이 합치지 않는 한 현천마금은 어린아이 장난감에 불과하다!" 사악하기 이를 데 없이 웃는 삼황숙, 그는 삼대천음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제-가거라! 육혼을 보여 주마!" 삼황숙이 다시 음산히 웃어댔다. "장난감? 흥! 사-멸-령(死滅靈)!" 땅! 따땅-땅-땅! 악마의 저주와 같은 금음이 쏟아져 나왔다. 살아 있는 생명을 저주하는 그것은 현천마금에 서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딩... 주천운의 손이 현천마금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사방에 갑자기 숨막히는 고요가 찾아왔다. "..." 주천운은 더할 수 없이 긴장된 눈으로 삼황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멸령의 시전으로 그의 얼굴은 백납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삼황숙의 몸에서 혈광(血光)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천천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린 혈천마경이 내뿜는 천주혈천광은 여전히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괴로운 기색으로 감겼던 삼황숙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거기에는 지독한 혈광이 불타고 있었다. "멋진 소리였다! 우후후후...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혈천마경은 마의 정화가 모인 것! 어떤 마(魔)도 혈천마경의 주인을 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흐흐... 천운! 너는 살려 둘 수 없는 그릇이다!" 삼황숙은 사멸령에서도 살아난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잘못이다! 마음(魔音)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주천운은 깨달았다. 현천마금으로는 혈천마경을 상대할 수 없는 것임을! "우우후후후후... 하늘이 핏빛으로 물드니, 천하가 마경(魔磬)의 저주(咀呪)에 파묻히도다! 혈 이뢰(血二 ), 육혼(戮魂)!" 우우우-웅! 천지가 완전히 혈광으로 가득 차고 그 속에서 악마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혈천마경(血天魔磬)이었다. 엄청난 살파(殺波)가 터져 나오며 천지간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우-욱! 견딜 수 없... 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전신이 아득한 심연(深淵)에 내던져진 듯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됨을 깨 달은 주천운은 절망을 느꼈다. 전신이 터져 나가는 듯했다. "불-광-멸-겁-뢰(佛光滅劫雷)!" 마지막 힘을 다한 일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꽈-꽝! 한 가닥 서기가 폭죽과 같이 혈광 속에서 터져 나왔다. 꽈르릉! 꽈꽈꽈-아앙! 천지에 말일(末日)이 도래한 것인가. 천번지복(天蒜地覆)의 가공지음(可恐之音)이 지축을 뒤 흔들었다. 이윽고 먼지가 자고, 회오리치는 경기가 가라앉으며 주위의 경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는 주변의 지형(地形)이 바뀌어 있었다. 원래 주천운과 삼황숙은 숲속에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쫓고 쫓기는 격투 끝에 수백여 장 떨어진 계곡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 그 계곡의 일각이 꺼져 내려서 깊이를 모르는 절곡(絶谷)으로 화해 있지 않는가? 가공(可恐)... 전율(戰慄)! 이것이 어찌 인간의 힘이라 할 수 있더란 말인가? "우우..." 한소리 신음이 들려 왔다. 아직도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비틀거리는 인영 하나, 옷은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졌 고 입에서는 선혈이 쉬임없이 흐르는 그 인영은 삼황숙이었다. 낭패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이었다. "지, 지독한 놈! 그런... 비장(秘藏)의 한 수가 있었을 줄이야. 한데, 왜 그것을 처음부터 사용 하지 않고...?" 삼황숙은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 아래로 깊이를 모를 절곡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곳에 이런 암곡(暗谷)이 있었다니... 엄청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지반이 가라앉으며 이 절곡이 나타났다... 그 녀석은 이리로... 떨어졌... 다..." 우르릉! 그 순간에 균열로 흔들거리던 절곡 윗부분이 다시 절곡 밑으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산 사태보다 더했다. 삼황숙조차 뒤로 물러나야 할 정도였다. "결국... 확인할 필요도 없더란 말인가? 흐흐... 드디어 천하는 내 손에 들어왔다! 이까짓 내 상... 혈천제마공으로 반 시진이면 충분하다. 으하하하...!" 삼황숙의 웃음이 크게 메아리 치고 있었다. 와르르르-릉! 거대한 돌덩이들이 끊임없이 밑으로 굴러내렸다. 오랜 세월 땅속에서 잠자다 드러난 절곡을 다시 덮어 주려는 듯, 영웅의 무덤을 만들어 주 려는 듯 그렇게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제 30 장 되찾은 세월(歲月) "아-악!" 처절한 고통! 대려군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벌떡 일어났다. 어둠이 눈으로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이곳은...?" "아미타불... 이제 정신이 드시오...?" 그녀가 흠칫하는 순간에 심신을 맑게 가라앉혀 주는 힘이 있는 불호 소리가 그녀의 옆에서 들려 왔다. 희미하게 사방이 밝아 오면서 그녀와 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노승 한 사람이 뒷모습을 보 이고 앉아 있음이 드러났다. 문득 대려군은 자신의 몸이 허전함을 느꼈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넋을 뽑을 듯 풍만한 자신의 앞가슴이 어둠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고 있 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슴을 가리며 사나운 기세로 눈앞에 있는 노승의 등을 향해 일 장을 쳐 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반 점의 공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손짓은 허공을 가른 것 에 불과했다. 그것을 깨달은 대려군의 안색이 돌변했다. "아미타불... 여시주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소? 만겁윤회마법이 깨어진 이상 그 전의 모든 일이 생각날 터인데..." 노승이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겁윤회마법? 아!" 갑자기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탄성을 토했다. 생각났다. 모든 것이... 자신이 머리를 감싸쥐고 귀무곡을 뛰쳐나오던 것까지도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뇌리에 떠올랐 다. "만겁윤회마법은 아주 지독한 마공대법이라 한번 걸리면 해제할 수 없는데 여시주는 천하에 다시없이 강한 항마지기(降魔之氣)로 인해 그 마법이 깨어지고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소." '항마지기... 주천운!' 그녀의 뇌리에 열 번을 다시 죽어도 지울 수 없는 영상이 떠올랐다. 한 순간 만난 사람이었 건만 그렇게 강렬하게 자신의 전신을 휘어잡은 사람. 노승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고불(古佛)을 연상시키리만큼 깡마른 노승이었으나 전신에서는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 이 흐르고 있었다. 그 주름살 어린 얼굴에 서린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편하 게 하는 무엇이 그에게는 있는 듯하였다. "노납은 산속에서 여시주를 발견하고 여시주 체내에 남은 마성을 불광대승신공(佛光大乘神 功)으로 마저 씻어 주었소..." 대려군은 그 노승이 만나기 힘든 기인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보니 려군을 대사께서 구해 주셨군요. 이 은혜...!" 갑자기 그녀는 한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그녀의 가슴을 가리고 있던 옷자락이 떨어질 뻔했다. "불광대승신공이라니? 그럼 무료성승이?" 고불과 같은 노승이 자애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바로 노납이오." 불문제일기! 죽은 것으로 알려지던 무료성승(無了聖僧)이 나타난 것이다. 그때, 무료성승이 자미천소를 쳐들었다. "여시주가 혈마소후요?" 대려군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동안 꼭두각시였던지라 혈마소후가 무엇인지 알 리 만무했다. 그러나 총명절세한 그녀가 아니던가. 황산의 일, 무당의 일 등이 어렴풋이 떠오르자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지칭함을 깨닫게 되 었다. 무료성승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료성승은 나직이 고개를 흔들다 갑자기 정색을 했다. "여시주는 몽고에서 왔소?" "!" 대려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중원 최고의 기인!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천하를 어지럽히는 악녀... 나를 그냥 둘 리가 없다!' 그런데 무료성승은 뜻밖의 질문을 하지 않는가? "여시주를 키운 사람은 혹 여인이 아니오?" "?" "아미타불... 노납의 질문이 조금 이상해졌군! 여시주를 키운 사람, 그리고 만겁윤회마법을 여시주에게 펼친 사람이 몽고대한의 후예라 이름하는 고사란(古沙蘭)이라는 여인이 아닌가 묻는 것이오." 대려군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녀는 정말 너무 놀란 것이다. '야율극리까지도 어머니의 본명은 모르고 있는데!' 대려군의 표정을 본 무료성승은 나직이 불호를 외며 입을 열었다. "이십 년 정도인가, 아니 조금 못되었던가... 노납은 행유(行遊)하다가 몽고의 아이찰박격다 산(阿爾察博格多山)까지 이르게 되었소..." 한데 무료성승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찰박격다산(阿爾察博格多山)에는 몽고인과 한족이 어울린 특이한 부락이 있었다. 원이 망하든 명이 흥하든 상관도 없이 평화로운 곳이 그곳이었다. 그러나 무료성승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강아지 한 마리 살아남아 있지 않았다. 아주 지독한 약탈을 당한 듯한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료성승은 그 잿더미 속에서 죽어 가는 중년의 남자 한 사람을 발견해 내게 되었다. 그는 몽고인 아내를 가진 한족으로 그 부락의 족장이었다. "그는 어느 날 산속의 동부에서 한 권의 비급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마공 비급이라 그는 그것의 처리에 고민하다가 없애기 아까워 우선 보관해 두었소. 그러나..." 그것이 철천지 한이 될 줄이야! 얼마의 시간이 지난 그믐 밤에 자신을 몽고대한의 후예라 자칭하는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 났다. 그녀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에게 그 마공비록을 요구했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는 그것을 없애려 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직감했던 것 이다. 그러나 어찌 상상했으랴! 채 날이 밝기도 전에 그 평화로웠던 마을은 정체 모를 고수들에게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고사란이라던... 바로 그녀였소. 마공비급도 그녀가 가져 ?.. 부탁합니다. 우리 딸... 겨우 백 일 된... 우리 딸을 찾아 주십시오. 제발 부탁... 그 아이의 가슴에는 별 모양의 점이 다섯 개... 그 마녀에게서 제발 우리 딸을... "그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예요?" 대려군이 갑자기 매섭게 외쳤다. 그녀의 안색은 싸늘히 굳어져 있었다. 무료성승은 그녀의 외침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때 빼앗긴 마공비급은 바로 만겁천마(萬劫天魔) 사공후가 남긴 만겁음마록(萬劫陰魔錄)이 었소. 만겁윤회마법 등의 저주받은 마공이 수록된..." "그, 그래서요? 그게 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무료성승은 담담히 웃었다. "노납은 좀 전에 여시주의 상세를 치료하다 본의 아니게 헤쳐진 여시주의 가슴을 보았소. 거기 있는 다섯 개의 점을 어떻게 설명하려오?" 일은, 너무도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상상하지 않았던 사건이 터져 나온 것이다. "아무리 독한 부모라도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식에게 만겁윤회마법과 같은 마공대법을 전 개할 수 있더란 말이오? 그런 부모는 없을 것이오." 무료성승의 말은 너무도 절실히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대려군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천하에 다시없이 총명한 여인인 것이다. 지난날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자신이 처음 대막에서 자미천소를 얻었을 때, 그것을 빼앗아 갔다가 천소상의 무공이 어린 아이가 아니면 대성할 수 없음을 알고 돌려주었던 것에서부터 얼마 전 주천운에게 패하고 돌아갔다가 대한 그 냉정한 모습까지...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만겁윤회마법을 순순히 받은 것은 원의 후예로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 죄라 생각했었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데... "아아!" 대려군은 고개를 숙였다. 천하에서 다시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눈에서 무엇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 가슴이 저며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때의 이러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 아닐는지. 평생을 따라온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을 길러 준 그녀가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원수라니... 제 31 장 나타난 천제문주(天帝門主) 신도무쌍(神刀無雙) 혁련비(赫連飛)는 한 자루의 자전신도(紫電神刀)로서 대강남북을 휩쓸어 신도무쌍이란 외호를 얻었다. 표사출신에서 이인(異人)의 가르침으로 성명한 그는 어느 날 신비인들의 암수에 당해 납치되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는 태산의 연혼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몽사몽간에 그 몸서리쳐지는 고통을 겪으며 인간임을 잃어가던 그를 구출한 것은 주천운과 남궁천. 태산 연혼전에서 구출된 후, 주천운에게 심복한 그는 복마대(伏魔隊)의 대장이 되었다. 그와 복마대원 백 명은 귀무곡 주위를 경계하면서 남궁천 등 멸마맹의 고수들과 나머지 삼 개 대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주천운이 떠난 것과 함께 이미 철수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멸마맹은 이번의 출동에서 무림사에 기록될 정도의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신도무쌍 혁련 비는 마음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는 후미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후퇴를 위한 퇴로는 그의 책임이라 할 수 있었고, 그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남궁천은 그에게 퇴로를 맡겨놓은 것이었다. 귀무곡 내부의 불길과 연기는 아직도 여전했지만 싸움 소리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남궁천 등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귀무곡쪽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신도무쌍 혁련비의 안색 이 조금 굳어졌다. 스산한 달빛 아래, 귀무곡으로 통하는 숲 밖에 한 줄기 인영이 어른거림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가 숲에 매복시킨 복마대원들에게서는 신호가 오지 않았다. 그가 손을 쳐들자, 매복한 복마대원들의 전신에 긴장이 살처럼 달려갔다. 환영처럼 보이던 인영은 어느새 숲으로 들어와 있었다. '무서운 고수들이다!' 그들의 움직임을 본 신도무쌍 혁련비의 전신이 굳어졌다. 인영은 모두 아홉[九人]이었다. 한결같이 백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그들의 생김은 어딘지 묘한 느낌을 주는데, 한인(漢人) 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주름살 사이에 빛나는 눈빛에는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녹광(綠光) 이 선연해 소름이 끼쳤다. 숲에 매복했던 복마대원 십여 명이 소리도 없이 그들을 향해 떨어져내렸다. 그것을 본 신도무쌍은 다급히 외쳤다. "멈춰...!" 그의 일갈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으-악!" "아-아-악!" 아홉 명, 그 중 한 명의 흑의노인(黑衣老人)이 가볍게 일수(一手)를 떨쳐 내자, 복마대원 십 여 명이 일제히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그럼에도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매복을 알고 있는 듯했지만 상관할 필요도 없는 듯, 그렇게 귀무곡을 향해 걸 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스르릉... 신도무쌍은 지난 삼십 년 간 자신을 지켜 준 자전신도를 뽑아 들면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가로막고 섰다기보다는 흑의노인 아홉의 움직임이 너무도 신속하여 이미 그의 앞에 들이닥쳤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었다. 좌우에서 복마대원이 그들을 향해 덮쳐 갔다. "천제문의 성지에 웬 잡놈들이 설치는 것이냐?" 앞선 흑의노인이 싸늘히 외쳤다. 그는 좌우의 복마대원들의 그 공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그의 말과 함께 다른 흑 의노인들이 일제히 흑의자락을 펄럭이면서 복마대원들을 덮쳐 갔다. 복마대원 개개인은 모두 강호의 일류고수로서 결코 가볍게 볼 상대들이 아니었다. "으아악-!" "으-악!" 그러나 그들이 복마대원들에게 덮쳐 간 직후, 터져 나오기 시작한 비명은 그들이 복마대원 들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고수들임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소리였다. 그들의 수법은 실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거수에 머리가 터져나가고 목뼈가 으스러져 꺾어졌다. 한 주먹에 배가 터져 오장육부가 쏟아진다. 잔인(殘忍)이란 이러한 것이다 라고 강의를 하는 듯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그들을 막아 섰던 복마대원들은 거의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져갔다. 마치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이랄까, 아니면 몽둥이에 얻어맞은 짚단이 나뒹구는 것이라고 할 까. 상상치도 못한 광경에 신도무쌍 혁련비는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손을 쓸 여가조차 없었다. 그가 앞선 흑의노인의 천제문 운운하는 말에 그들의 정체에 관한 의문으로 잠시 주춤하는 순간에 일은 그렇게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죽은 복마대원들의 몸에서 스물스물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더니 픽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전신이 한줌 독혈(毒血)로 화하는 것이 아닌가? 살거죽이 녹아 내리고 금세 뼈가 드러나고 뼈조차 흐물거리다가 핏물이 되어 코를 찌르는 악취를 피워 낸다...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 신도무쌍 혁련비는 전율했다. '무서운... 독이다!' 그는 독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저처럼 무서운 독은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정도 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러한 독을 구사하는 독공고수에게는 무공으로 쉽게 상대할 수 없 다는 것도. 이러한 경우에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도주하거나, 가장 빠른 방법으로 상대가 독을 전개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 "잔인한 자들!" 그는 노호를 터뜨리면서 자전신도와 한덩어리가 되어 앞선 흑의노인을 향해 덮쳐 갔다. 신도무쌍이라는 별호답게 그는 이미 도신일체(刀身一體)의 경지에 이르러 일단 움직이기 시 작하자 번갯불과 같았다. 손이 흔들림과 동시에 도광이 첩첩이 일어나 흑의노인을 덮치고 있었다. 그의 자전신도는 그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단숨에 흑의노인의 가슴을 피할 사이도 없이 파 고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신도무쌍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자전신도로서 흑의노인의 가슴을 무찌른 순간에 흑의노인의 신형이 환영처럼 빙글 돌 면서 이미 그의 앞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무서운 고통이 엄습해왔다. 까마귀 발과 같은 흑의노인의 손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모조리 암흑으로 가득 찼다.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귀무곡에 있을 동료들이, 그들이 걱정될 따름이었다... 그의 희미해진 눈에 흑의노인 아홉의 뒤에 나타나는 희끄무레한 그림자 하나가 더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을 볼 수 있는 사치는 그에겐 허용되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이 자신의 눈앞 에서 펄떡거리는 것을 보고도 계속해서 숨을 쉬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 * * "으악!" 고막을 찌르는 처절한 비명! 불타는 귀무곡 천제문의 총단을 뒤로 하던 무림제갈 남궁천등 일행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으아-악!" 또다시 비명이 야공을 흔들며 들려 왔다. 주위의 공기가 금세 터질 듯이 긴장되었다. 비명은 분명히 곡구쪽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복마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는 말인가?' 남궁천이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신호라도 전해 왔을 것이 아닌가. 그 순간에도 비명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비명은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그들쪽으로 다가오 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비명을 질러대면서 그들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속도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다. '심상치 않다!' 남궁천이 황급히 손을 쳐들어 경계의 신호를 보내는 순간에 비명 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려 왔다. "으악!" "아아악-!" 가장 앞서 귀무곡을 빠져 나가던 탕마대(蕩魔隊)의 일각이 무참하게 무너지면서 십여 명의 탕마대원들이 한꺼번에 광풍낙화와 같이 나뒹굴었다. "누... 누구?" 외치던 탕마대원 한 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웬 놈들이냐?" 십여 명의 고수들이 번개같이 그쪽으로 덮쳐 갔다. "크크크...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감히 명월과 밝음을 다투려 하다니!" 고막을 쑤시는 괴이한 음성이 들려 왔다. "돌아오시오!" 그 소리를 들은 남궁천은 불길한 느낌에 다급히 소리쳤다. 찰나였다. 꽈르릉...! "으악!" "으아아..." 광풍에 날아가는 낙화라고 할까. 앞쪽으로 덮쳐간 십여 명의 고수들이 전신에서 피분수를 뿌리며 튕겨졌다. 튕겨져 돌아왔다 고 하는 것이 옳을까. 그들의 죽음은 참혹했다. 피떡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군웅들은 아홉 명의 흑의노인(黑衣老人)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천천 히 손을 거두고 있음도 함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흑의를 펄럭이면서 그들은 여전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히 군웅들을 보고 있음에도 보지 못한 듯 그렇게 계속해서 빠른 신법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멈추시오!" 군웅들의 앞에 선 남궁천이 소리쳤다. 비로소 태풍처럼 진군해오던 흑의노인들이 신형을 멈추었다. 그제서야 군웅들은 그들이 한 결같이 음산한 인상을 풍기는 흑의노인(黑衣老人)임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귀무곡 밖에서 신도무쌍을 비롯한 복마대를 단숨에 처리했음을 군웅들은 아 직은 모르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그들은 무림제갈 남궁천을 쏘아보더니 서서히 좌우로 갈라섰다. "...?" 그리고 그 가운데로 한 명의 궁장미부(宮裝美婦)가 나타났다.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두 다리를 교차해야 한다. 한 다리가 앞으로 나오면 나머지 한 다리는 축이 되면서 다시 앞으로 나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이 없다면 그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흑의노인들의 갈라서면서 방금 모습을 보인 궁장미부는 괴이하게도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같았다. 분명히 천천히 걸어와 모습을 보였음에도. 황색의 궁장을 한 미부의 나이는 불과 삼십 남짓해 보였다. 군웅들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매는 얼음송곳과 같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는 없었 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것은 그녀의 전신에서 뻗어난 기도(氣度)였다. 그녀가 나타남으 로 해서 일대가 마치 겨울을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의 분위기마저 바꿀 수 있는 기도라는 것은 실로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남궁천은 그녀의 눈빛에서 냉엄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숨막히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런 기세는 지존 외에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기세... 이것은 살기다!' 남궁천은 내심 생각하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두 쌍의 눈이 일순간 얽혀들었다. 그리고 궁장미부가 얼음 같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무림제갈이라는 남궁천인 모양인 게로구나?" 남궁천이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바로 남궁모요." 그녀의 눈에서 살기(殺氣)가 싸늘히 피어났다. 불길과 연기로 휩싸인 제단을 일별한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네게 제단을 이렇게 만들 실력이 있더란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일! 제주는 어디 있느냐?" 남궁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 귀하는 천제문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궁장미부가 칼로 자르듯 말했다. "본좌가 천제문주(天帝門主)다." 쿵! 남궁천은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신비에 싸인 천제문의 주인, 황궁과 무림을 한꺼번에 석권하고자 했던 그 막후의 인물이 홀 연히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놀라움 이전에 불길한 느낌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이들은 아직 이곳에 올 때가 아닌데!' 주천운은 그들의 발길을 묶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파견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습격은 천제 문주의 당도 이전으로 맞춰진 것이다. 그런데 주천운이 가고 없는 지금, 그들의 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할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천제문주라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저 아홉 노인이야말로 천제구로일 것이었다. 천제문주는 불길에 휩싸여 때마침 무너져 내리는 제천각을 보고 가슴이 싸늘히 식어 내림을 의식해야 했다.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듣고 예정보다 빨리 대막을 떠났다. 그리고 길을 재촉하기 위해 수행고 수들을 모두 뒤로하고 천제구로와 함께 전력을 다해 이곳으로 달려온 그녀였다. 그렇지 않다면 일개문의 문주이자, 몽고대한의 혈통이라 자처하는 그녀가 어찌 시녀 하나없 이 이곳에 나타났으랴. 천제문주는 얼음송곳이 튀어나오는 듯한 눈빛으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본좌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정녕 이곳을 이렇게 만든 것이 너란 말이냐?" 남궁천이 그녀의 기세에 밀리지 않으려는 듯이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당신이 천제문주라면 당신은 너무 늦게 왔소! 당신이 지난 세월 공들인 모든 것은 보다시피 이미 무너졌소. 이제 남은 것은 당신과 천제구로뿐이오." 차가운 천제문주의 안색이 더욱 차갑게 변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무서운 무형의 살기가 뻗어나왔다. 남궁천은 부지불식간에 한걸음을 물러났다. 천제문주의 전신에서 뿜어진 살기로 인해 전신 의 피부가 갈라지는 것 같아 도저히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천제문주 와 그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끝났다고? 모든 것이...? 아하하하하... 좋아! 너희들을 처리한 다음에 과연 어떤 일이 있었 는지를 알아보겠다! 만에 하나 정말 제주와 후주가 너희들에 의해 변을 당했다면 전무림을 피로 씻어 그 한을 풀겠다!" 돌연 미친 듯이 웃어대던 천제문주는 갑자기 너울거리는 소매를 들어 남궁천을 쳐왔다. 한낱 소매가 움직였음에 굉장한 기세가 일어나면서 남궁천은 눈앞에 황색비단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소맷바람에 일대의 흙먼지가 휘말려 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파천마라수(破天魔羅袖)다!' 그녀 무공의 노수(路數)를 알아본 남궁천은 급격히 한 모금의 진기를 들여마시면서 발검하 여 덮쳐 오는 천제문주의 소맷자락을 찔러 갔다. 주천운의 여의섬 이전에 천하제일쾌검으로 인정받던 옥로자의 태을분광검법이었다. 빠르다는 것은 가장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파천마라수는 그 빠름을 누를 힘이 있었다. "흥!" 한소리, 차가운 코웃음과 함께 천제문주가 손을 흔들자 그녀의 소매는 뱀과 같이 남궁천의 창궁신검을 휘감았다. 가공할 힘이 거기에서 일어나 남궁천을 핍박했다. 단숨에 기혈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남궁천은 의식해야 했다. 길은 둘뿐이었다. 그대로 버티다가 내상을 입고 나가떨어지는 것과 검을 놓고 물러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것 하나도 선택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단 일초에 검을 빼앗기고 물러선다면 치욕일 뿐 아니라, 그 이후에 몰아쳐올 상대의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 일대 위기의 순간에 세 가닥의 거세무비한 암경(暗勁)이 천제문주를 향해 밀려왔다. 제아 무리 천제문주라 할지라도 자신을 돌보지 않을 수 없는 막강한 공세였다. 천제문주는 내심 이를 갈면서 남궁천의 창궁신검을 떨쳐 냈다. 그리고 소맷자락을 전신을 돌리면서 쓸어 냈다. 광풍폭우와 같은 기세가 일어나 그녀를 덮쳐 오는 세 가닥의 암경과 격돌했다. 꽝! 꽈르르-.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맹렬한 선풍이 일대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천제문주는 우리가 맡겠다. 어서 천제구로를 막도록 하게!" 소리치는 것은 주선(酒仙)이었다. 옥로자와 주선, 그리고 무산신모 등 중원삼신이 한꺼번에 나서서 천제문주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남궁천을 구해 낸 것이다. "흥! 누구 마음대로 간단 말이냐?" 천제문주는 날카롭게 웃어대면서 남궁천을 향해 다시 덮쳐 왔고 그녀를 향해 중원삼신이 전 력을 다해 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용호상박의 대결전이지만 놀랍게도 중원삼신이 합세 했음에도 천제문주를 견제하는 데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위태하기는 하지만 단 일 초에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자, 남궁천은 몸을 뒤로 빼면서 천 제구로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은 상태가 심각했다. 천제구로의 주위에는 괴이한 검은 독기(毒氣)가 음산하게 서려 있는데, 이미 수십여 구의 멸 마맹 고수들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검은 독기 속에서 천제구로의 신형이 번쩍일 때마다 멸마맹의 고수들은 거의 대항을 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의 능력이 가공하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쓰러진 고수들의 시신이 한줌의 독혈로 화해 사라지는 것을 본 남궁천은 상황을 단 숨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맙소사! 저건 천잔부시독(天殘腐屍毒)이로구나! 그리고 천제구로는 그냥 움직이고 있는 것 이 아니다!" 그냥 움직이기만 하는데 저렇듯 검은 안개가 서리듯 하면서 사람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만겁구절진(萬劫九絶陣)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만겁음마록(萬劫陰魔錄)을 얻었다는 것인 가?" 천잔부시독은 시체를 썩히는 독기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극독이다. 옷깃에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썩어문드러지는 전설상의 극악무도한 것이 천잔부시독이다. 그 악독함으로 인해 무림 중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이미 까마득한 전설. 그 제조법은 오랜 옛날에 실전되고 오직 오백 년 전의 만겁천마 사공후만이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남궁천이 말한 만겁음마록이란 바로 그 만겁천마 사공후가 남긴 절세의 마공비록이었다. 황량한 대막(大漠)에 한 명의 절세고수가 나타났다. 그때 그의 나이 이십여 세에 불과했다. 그는 누구도 믿지 못할 광오한 말을 지껄여댔다. "나 사공후(司空候)는 무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魔)의 후예이다. 대막과 천축, 북해와 남 해를 종횡하였으되, 그 어디에서도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 하여 이제 나는 중원으로 가나 니... 그곳에서 적수를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염원하노라!" 그는 중원으로 향했다. 누구도 그의 망언(妄言)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중원으로 향한 삼 년이 지난 뒤, 중원무림은 엄청난 혼돈에 빠지고야 말았다.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사공후! 되는 대로 지껄여대는 것 같던 그의 망언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의 적수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였다. 무공으로 맞설 수 없는 것이 그의 마공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보고는 코웃음 쳤다. "나 이제 허깨비들의 중원을 떠나니 명심하라. 사공후가 남긴 만겁음마록(萬劫陰魔錄)을 얻 는 자는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어 명실공히 천하를 휘어잡게 될 것이니... 천하에 군림하고 싶은 자, 만겁음마록을 찾아볼지어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가 나타날 때처럼 광망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 광망하되, 그에게는 그만한 능력과 자격이 있 었기 때문이다. 그의 무공을 노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남겼다는 만겁음마록을 찾아 대막으로 갔고 서역으 로 갔지만 누구도 그것을 얻지는 못했다. 이제 그의 무공은 잊혀진 전설이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세 분 장로(長老)께서는 가서 세 분 공봉을 도와 주시오!" 혼신의 힘을 다해 천제구로의 만겁구절진과 상대하던 곤륜파의 운룡자 등 세 장로는 갑자기 들려 온 음성에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무림제갈 남궁천이 그들의 뒤에 와 있었다. "속히 부탁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이 그의 말대로 천제문주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을 본 남궁천은 신호를 보내 천제구로와 상대하던 고수들을 퇴각시켰다. 중원삼신은 멸마맹의 삼대공봉(三大拱奉)이다. 하지만 그들의 힘으로도 천제문주를 상대하기 는 벅차 보였다. 거기에 세 명의 장로들이 가세한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벌면서 버틸 수 가 있을 것이었다. 그 사이에 남궁천은 군웅들을 움직여 천제구로를 상대할 작정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쾌도난마와 같은 일처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쓰러지는 것은 그들이 될 수도 있었다. 숫자에 있어서는 멸마맹의 군웅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상대는 천제문주까지 합해 서 불과 열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천제구로의 만겁구절진이 문제였다. 더구나 그들에게서 발출되는 만겁부시독은 공력으로 저항하기 힘든 것이라 사람 숫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항마대는 건위천(乾爲天)의 방위(方位)를 지켜 주시오." 남궁천이 물러나는 군웅들을 지휘하면서 소리쳤다. "명을 받들겠소!" 음산신마가 십여 명의 항마대원을 이끌고 건위천의 자리로 날아갔다. "다음은 곤위지(坤爲地)! 소림사의 달마원 주지께서 맡아 주시오!" "아미타불!" 달마원 주지가 승포자락을 펄럭이면서 그곳으로 날아갔다. 그의 뒤를 소림사의 달마원 고수 들이 따랐다. 달마원이란 원래 소림사의 주력이다. 그러기에 남궁천은 만겁구절진에 대항할 진세의 주축에다 그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말은 그렇지만 상황은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천제구로가 마음대로 하도록 버려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상황이라 일방 싸움이 일어나는 가 운데 군웅들이 남궁천의 명령에 따라 몸을 빼어 그 방위로 신형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지수사(地水師) 방위로는 화산파의...!" "다음은 천지부(天地否)!" "풍지관(風地觀)!" "지뢰복(地雷復)!" 군웅들이 옷자락을 펄럭이는 가운데 멸마맹의 고수들은 일제히 교차하면서 순식간에 만겁구 절진에 대항할 진세를 구축해 갔다. 그렇게 되자, 진세의 위력이 일어나면서 만겁구절진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거의 무인지경을 헤치고 가듯 군웅들을 주살하던 천제구로의 행보에는 제동이 걸렸다. 일시 주춤하던 천제구로의 만겁구절진 속에서 그제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는 냉소가 터 져 나왔다. "크흐흐흐... 가소롭구나! 만겁구절진이 어떤 것인지나 알고 장난을 치는 것이냐?" 천제일로가 음산하게 웃는 것과 함께 그들의 신형이 일제히 교차했다. 그러자 만겁구절진에서 검은 회오리가 크게 일어나면서 아홉 이었던 그들의 신형이 열여덟 으로, 열여덟의 신형이 다시 서른여섯..., 일흔둘로 거짓말처럼 분화되는 것이 아닌가. "흐흐... 차륜(車輪)이 맹전(猛轉)하니 천지가 피[血]에 잠기도다아-!" 검은 회오리의 폭풍 속에서 일흔둘이 된 천제구로의 신형이 무섭게 회전하면서 진세의 구결 이 터져 나왔다. 남궁천이 진세를 구축할 겨를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했고 그 순간에 처절한 비명과 함께 또다시 대여섯 명의 고수가 피분수를 뿌리며 튕겨져 나갔다. "건위천, 삼보 후퇴! 곤위지, 이보전진! 이문(離門;남쪽)을 공격하라! 풍지관과 지수사 일제히 전력공격!" 남궁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군웅들이 교차하면서 만겁구절진이 공격하는 곳의 군웅들이 일제히 썰물이 빠져 나가듯이 밀려나가고 좌우에서 만겁구절진의 허리쪽을 잘라낼 듯이 덮쳐갔다. 쾅쾅쾅하는 소리가 연달아 마치 벼락을 때려 내듯이 터져 나왔다. 진세의 격돌에 의해서 일 어나는 소리였다. 권(拳), 장(掌), 지(指)가 우박처럼 쏟아지고 검(劍), 도(刀), 륜(輪), 편(鞭) 등의 각종 병기가 허공을 가르며 위세를 뽐냈다. 이 일전이야말로 천하무학들의 집결과도 같았다. 잇달아 격돌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비명이 일어났다. 일흔둘이나 되던 천제구로의 환영은 상당히 흩어져 이제 오십여 개 정도로 보였지만 그것을 위해 바친 군웅들의 목숨을 실로 적지 않았다. 천제구로의 환영은 사라진 것도 환영이지만 환영을 없애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웅들의 목숨 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귀중한 것이었다. 천제문의 제단이 제아무리 습격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군웅들이 소비 한 힘은 실로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마당에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천제구로와 같은 강적을 만난 것이니 설상가상(雪上加霜)이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수백 명의 군웅이니 그들이 정식으로 싸운다면 또 결과는 달라질 수 있지만 암중에 천제구 로에게서 쏟아지는 천잔부시독의 흉독함은 실로 방비하기 어려워 군웅들의 실력은 거기에서 도 반감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겁구절진의 환영을 없애기에 남궁천이 주력하고 있는 것은 그 환영이 바로 만겁 구절진의 정화로써 환영을 깨뜨리면 만겁구절진이 깨어질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림제갈이란 이름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저들의 상문(傷門)을 깰 수 있는 절세고수 한 사람이 없는 것 이었다. 주천운과 같은 고수가 있었다면 군웅들은 이렇게까지 곤욕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진세를 지휘하던 남궁천은 천지부의 방위쪽으로 몸을 날려 그 방위를 자신이 막아섰다. 금 세 가공할 압력이 그에게 덮쳐 왔다. 강호독보의 태을분광검법이 그의 창궁신검에서 발휘되 었다. 쇄마대의 대장인 구화일수와 그 대원들이 맡고 있던 천지부의 방위는 가장 심하게 압력을 받는 곳이라 이미 거의 붕괴직전이었다. 구화일수의 전신은 피투성이고 그 외의 고수들 역 시 마찬가지였다. 그곳이 깨어지면 진세의 축이 무너지게 된다. 남궁천이 몸소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보고 만겁구절진에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그런다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냐?" 만겁구절진의 환영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남궁천 쪽으로 덮쳐 왔다. 이 진의 가장 무서운 점 은 환영이 실체인지, 실체가 환영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라도 환영이 실체가 되고 실체가 환영이 되기 때문이다. 군웅들의 진세 또한 남궁천이 축인지라, 그쪽으로 전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군웅들이 다시 쓰러져 갔다. 만겁구절진의 환영은 또 십 여 개 이상이 줄어 있었지만 그 위세는 여전히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흐흐흐... 무림제갈 꼬마, 마지막이다!" 진세 속에서 천제일로의 삐쩍 마른 손이 섬광(閃光)같이 날아들었다. 천잔탄마강(天殘彈魔 )이라는 마도의 절기였다.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를 축으로 한 대주천진세(大週天陣勢)는 끝이다. 남궁천은 혼신의 힘을 다해 태을분광검법을 떨쳐 천제일로의 공세에 맞서갔다. 눈부신 검광이 그의 창궁신검에서 일어났다. 진세가 그가 있는 방위를 보호하기 위해 좁혀 오고 있었지만 방금의 일돌(一突)은 진세의 움직임의 민활을 저해했으므로 남궁천은 진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윙윙-! 앞으로 찔러 나가던 검세가 막강한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라도 부러질 듯이 휘청거리면 서 용음을 토해 냈다. 남궁천은 전력을 다해 검을 뿌리쳐 천제일로의 장세를 흐트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의 전신에서 푸른빛이 피어오르고 그 순간에 검빛이 쭉 뻗어나 천제일로의 공세에 격돌했 다. 팡-! 귀청을 찌르는 한소리 굉음! 그것과 함께 남궁천의 호구가 파열되면서 마침내 창궁신검이 그의 손을 벗어나버렸다. "크하하하-낙뢰탄마(落雷彈魔)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진세 속에서 천제일로의 득의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궁천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군웅들이 천잔부시독에 의해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 다. 맹렬한 경기가 남궁천을 향해 밀려들었다. 남궁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금의 격돌에서 내상을 입어 진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아 직 천제문의 제단고수들과의 일전에서 소비한 진력을 회복하지 않은 상태라 원래의 남궁천 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만겁구절진이 무섭다 한들, 그의 무공으로 어찌 이처럼 당할 수가 있 었으랴. 비록 지난날 만겁천마가 천하를 종횡하여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천하는 영웅고수가 속출하여 만겁천마 본인이 직접 와도 과연 지난날과 같은 위세를 시현할 수 있 을지 의문인 상황인 것이기 때문이다. 몸을 뺀다면 적의 공세를 피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진세는 와해될 것이고 모든 것은 끝이 나게 될 것이다. 진세가 와해된다면 결과는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남궁천은 이를 악물면서 전력을 기울여 천제일로의 공세에 맞부딪쳐갔다. 하지만 그것은 이 미 결과가 약속된 무모였다. 절체절명의 위기! 바로 그때였다. "감히 이민족(異民族)이 중원에 발호한단 말인가!" 장중한 일성이 허공에서 메아리 치면서 일섬(一閃) 섬광 한 줄기가 밤하늘을 달리는 뇌전과 같이 남궁천과 천제일로의 사이로 날아들었다. 쓰쓰쓰-. 기묘한 소리와 함께 섬광은 용이 꿈틀거리듯 찬란하게 움직이면서 남궁천을 공격하던 천제 일로의 모든 공세를 잘라 내고는 그것도 모자라 천제일로를 향해 달려갔다. "으허-엇?" 다급한 외침과 함께 천제일로가 급급히 물러나면서 진세 속으로 파묻혀들어갔다. 옷자락이 그의 물러남을 아쉬워하듯이 한 자락 검세에 잘려 펄렁이다 갈기갈기 찢겨져 날아갔다. 물러나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남은 것은 옷자락이 아니라 그의 목이나 팔이었으리라. 보검 한 자루를 빗겨들고서 남궁천의 앞에 우뚝 나타난 것은 백발이 성성하지만 당당한 체 구를 지닌 노인이었다. 일거수에 그처럼 무서운 위력을 보이던 천제일로를 격퇴, 진세 속으 로 몰아넣은 그는 지난날 화원에서 꽃을 돌보던 노인이지만 지금은 다른 신분을 지니고 있 었다. "호국신노(護國神老)!" 그를 본 남궁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화로, 상승검마 하후뢰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호국신위(護國神威)!" 뒤를 이어 웅후한 외침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들려 왔다. 자애한 얼굴의 노승 한 사람이 승포자락을 펄럭이면서 나타나고 그 뒤를 이어 백의무복을 날렵히 차려입은 갓삼십대 정도로 보이는 스물여덟 명의 백의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수중에는 제각기 찬란한 보광(寶光)을 뿌리는 신검(神劍)이 들려 있었다. "호국이로(護國二老)...!" 남궁천은 노승을 보자 부지중에 안도의 외침을 흘려 냈다. 나타난 것은 화로와 함께 호국이로에 봉해진 회오대사였다. 그 뒤를 따르는 백의무사들은 남궁천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신수가 보통이 아닌 것으 로 보아 주천운의 특별훈련을 받은 황궁의 고수들인 것 같았다. "상승검마!" 갑자기 만겁구절진 속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이번에는 화로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가 강호상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이미 까마득한 옛날이고, 지금은 모습조차 변해 있어 그를 알아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크크크...! 하후뢰! 네놈이 살아 있기를 그처럼 빌었더니 하늘이 무심치 않았구나!" 음산한 외침과 함께 천제일로의 신형이 다시 만겁구절진 속에서 드러났다. 그의 얼굴을 본 화로의 눈이 찡그려지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그 낯짝을 보니, 만독삼마(萬毒三魔) 중의 노대인 만독신마 갈후천인 것 같군...!" "크하하하! 네놈이 아직도 본좌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천제일로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우리도 잊지는 않았겠지? 하후뢰!" "네놈의 간을 씹기 위해 지난 세월을 그렇게 기다려왔다!" 만겁구절진 가운데에서 회전하는 외팔이 환영과 외다리 환영이 백발을 펄렁이면서 광소를 터뜨렸다. "만독삼마의 노이와 노삼... 하늘도 무심하군! 네놈들과 같은 해충을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다 니..." 그들을 본 화로가 미간을 찡그렸다. '천제문의 천제구로 중 세 명이 지난날의 만독삼마란 말인가?' 뒤로 한걸음 물러나 있던 남궁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들의 악행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들의 하독(下毒:독을 씀)이 그처럼 대단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강호상에는 그처럼 독으로 천하를 종횡하면서 악행을 일삼던 그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기실 그들은 화로, 상승검마의 검에 패해 구사일생 새외로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해 이를 갈면서 복수를 꿈꾸다 천제문에 포섭되어 금의환향을 꿈꾸고 있었다. "흐흐흐... 하후뢰! 하늘이 무심치 않아 드디어 네놈을 만나게 되었구나! 목을 내놔라!" 오늘날의 천제일로인 만독신마는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 웃어대면서 진세 속으로 파묻혀 들 어갔다. 이미 그의 검신지경(劒神之境)의 일격에 혼이 난지라 진세로 승부를 할 속셈인 것이다. "으아악-!" 그때, 천제문주와 격돌하던 중원삼신 쪽에서 비명이 들려 왔다. 세 명의 장로가 일거에 피를 뿌리고 나뒹굴고 있었다. 중원삼신과 그들이 함께 하는데도 천제문주를 막지 못하는 것이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업보야! 멈추시오!" 주위의 참혹한 상황에 연신 고개를 젓던 회오대사가 승포를 날리며 연대비승(蓮臺飛昇)의 일식으로 천제문주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것을 본 화로는 고개를 저었다. "지존의 생각이 한치도 틀리지 않았구나! 정체 모를 놈들의 방해만 없었다면 좀더 일찍 도 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장내의 상황은 너무 참혹했다. 그처럼 호호탕탕 천제문을 습격해 그들을 멸하고 승리했던 군웅들이 거의 절반이나 쓰러진 상태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고 개중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만겁구절진이 그만큼 무섭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그 무서운 만겁구절진이 소용돌이치면서 화로를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이미 남궁천이 지휘하던 대주천진세는 와해된 상태라 다시 움직여 그들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화로는 그들의 공세를 대수롭지 않은 듯 여기는 것 같음을 보고 남궁천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조심하십시오! 그들의 천잔부시독은 매우 무섭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펼치는 것은 만겁천 마의 만겁구절진입니다!" 그의 외침에 화로는 흠칫하더니 중얼거렸다. "놈들이 어떻게 이처럼 많은 군웅들을 상해할 수 있었는가 했더니 까닭이 있었군..." 그럼에도 그의 기색은 엄중해 보이지 않았다. "미친놈, 뒈질려고 환장을 했구나!" 만겁구절진에서 천제일로 갈후천이 음침하게 소리쳤다. "누가 미쳤는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갈후천, 이번에야말로 그 목을 남겨두지 않겠다." 화로가 싸늘히 말했다. 비록 세월이 흘러 성미가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아 검마라는 이 름을 얻었던 그였다. 이처럼 참혹한 상황을 보고 살기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그것과 함께 그의 좌우에서 흰 비단폭이 펼쳐지는 것 같은 백광이 만겁구절진을 향해서 쏟 아져 나갔다. 화로의 뒤에 서 있던 백의무사들이었다. 남궁천은 그들이 무모하게 만겁구절진을 향해 덮쳐 가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했으나 그들이 이룬 방위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뭔가 다른 점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사실로 나타났다. 그들의 검세가 하나하나 그대로 연결되면서 마치 거대한 가위가 비단폭을 잘라내듯이 만겁 구절진을 뚫고 들어간 것이다. 놀람에 찬 외침이 만겁구절진에서 터져 나왔다. 하늘을 가릴 듯이 피어올라 맹렬히 위세를 뽐내던 천제구로의 환영들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 고 있었다. 만겁구절진의 위세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하핫-! 대천강호국검진(大天 護國劒陣)의 맛이 어떠냐? 만겁구절진이 겨우 그 정도였더 냐?" 그 광경에 화로가 앙천대소했다. 천제구로는 대노했지만 분노를 나타낼 틈이 없었다. 대천강호국검진이라는 이 빌어먹을 괴 물의 위세는 가공하기 이를 데 없어 도무지 불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빠르고 신 속하게 움직여서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으흑!" 그 순간에 천제구로 중 하나의 환영이 깨어지면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환영이 아니라 실체였던 것이다. 그의 가슴에서 어깨로 검기가 긋고 지나가면서 피보라가 일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우리는 이미 웬만한 도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천제구로의 노대인 만독천마는 그 광경에 가슴이 섬뜩해 잇달아 양손을 쳐내면서 소리쳤다. "놈들의 검이 보통 검이 아니다! 부딪치지마라! 혈륜(血輪)! 전도(顚倒)! 천잔(天殘)!" 그의 외침과 더불어 격하게 흔들리던 만겁구절진이 요동하면서 천제구로가 일제히 손을 휘 둘렀고 검은 폭풍과 같은 경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천잔부시독을 전개합니다! 피하도록 하십시오!" 그 광경을 보고 남궁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군웅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저 지독한 독기에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화로는 태연했다. "걱정할 필요 없소. 호국위는 지존위의 정예를 골라 황궁보고의 영약으로 벌근세수(伐筋洗 髓)하여 만독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하사된 절금단옥(切金斷玉)의 신검 스물여덟 자 루로서 검강을 일으켜 대천강호국검진을 이루는 검도고수들이니까." 그 말을 들은 남궁천은 아연실색, 말을 잃어야 했다. 스물여덟 명이 일으키는 검강으로 이루어진 검진에다 제각기 독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수중 에 들린 검은 무쇠를 무조각처럼 베어 낸다니... 이것이야말로 무적이 아니랴! 그러한 그들이 주천운이 가고 없는 이곳에 나타난 것은 주천운이 이미 이러한 상황을 짐작 하고 있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를까. '명월과 반딧불 같군!' 내심 자신의 자부심이 다시 흔들림을 느낀 남궁천은 깊이 탄식했다. 그 탄식은 후일의 폐관 으로 이어져 그의 대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겠지만 그것은 후일의 일이다. "으아악!" 만겁구절진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잔부시독을 전개하면서 단숨에 적을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천제구로는 호국위가 독기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달려들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당황해서 허둥대다가 그 중 한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진 것이다. 그때 고막을 치는 날카로운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물러나랏-!" 쾅! 굉음이 터졌다. 천제문주와 회오대사와 중원삼신이 싸우고 있는 곳에서 일대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 이제 보니 이것은 만겁음마록의 마공!" 회오대사의 무거운 음성이 들려 왔다. "오호홋홋홋... 알았다면 비켜서랏!" 천제문주가 날카롭게 웃어대면서 날아올랐다. 그녀의 황의가 세차게 펄럭이는 가운데 전신 이 서리가 내린 듯 변했고 일대가 졸지에 겨울이 닥쳐온 듯이 한풍(寒風)이 무섭게 일어났 다. 머리카락마저 빳빳이 곤두서 저절로 펄럭이는데 마치 악마의 화신을 보는 듯했다. 섬섬옥수, 아름다웠던 손은 투명하다 못해 얼음으로 화한 듯하였다. 그녀는 천제구로의 위기를 보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일대절학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본 화로의 안색이 돌변했다. "만겁천마의 만겁음명신공(萬劫陰冥神功)이다! 뒤로 물러나시오!" 다급한 외침과 함께 화로의 일신이 검과 하나가 되어 천제문주에게로 날아갔다. 콰콰콰-쩌쩌쩌어-엉! 벼락이 치는 듯 굉량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중원삼신이 일제히 신음을 토하며 튕겨나듯이 뒤로 진퇴되는 가운데 회오대사가 장중한 불 호를 외면서 합장하여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으로 천제문주의 앞을 가로막았고 뒤이어 화 로의 어검술(御劒術)이 번갯불처럼 날아들었다. 다시없는 장관을 군웅들은 볼 수 있었다. 굉음이 잇달아 터지면서 흙먼지가 하늘을 가릴 듯이 피어오르고 광풍이 일어나 그 흙먼지들 을 휘감아 올렸다. "으음...!" 답답한 신음이 그 피아를 분간할 수 없는 광풍 속에서 터져 나오면서 인영 하나가 날아올랐 다. 그 격전의 와중에서 솟아오른 황색 인영은 천마가 날 듯 놀라운 신법으로 단숨에 허공 을 가로질러 천제구로와 호국위가 격돌하고 있는 곳으로 덮쳐 갔다. "크아-악-!" "우아아...!" 그 순간에 만겁구절진의 진세가 산산이 깨어지면서 잇달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잔부시독 을 마구 뿌려대면서 허둥대던 천제구로 중의 두 명이 다시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만겁구절진은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남은 여섯 명의 천제구로 또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가공할 검세를 일으키고 있는 대천강호국검진이 마치 대차륜(大車輪)과 같이 무섭게 회전하 면서 그들을 덮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공포스러운 극독을 뿌려대도, 그처럼 세상을 독보하던 진세도 소용없었다. 달밤에 체조하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검강이 소용돌이치면서 공격해오는데 어떻게 더 이상 당할 수가 있으랴! 천제구로는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마지막 발악을 하듯 전력을 일제히 내쏟았다. 그 러나 그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발악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 그들의 사이에 떨어져 내린 것이 바로 황의인영, 천제문주였다. 지난날 만겁천마 가 천하를 오시하면서 종횡하던 바로 그 만겁음명신공이 서리를 휘몰면서 대천강호국진세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갔다. 건곤일척! 천제문주는 이 상황에서 천제구로를 모두 잃는다면 그녀 혼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임 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될 바에는 승부를 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공할 만겁음명신공이 대천강호국검진을 덮친 순간에 대천강호국검진이 거짓말처럼 갈라지 며 그녀의 공세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치 해일이 바다를 갈라놓는 듯 찰나적인 공동(空洞)! 그리고 다음 순간에 천제문주는 자신이 일으킨 공세와 함께 검진을 덮쳤고 검진이 다시 합 쳐지면서 그녀를 덮쳤다. 그 변화는 실로 순간적이라, 그 변화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군웅들 중에서도 그렇게 많 지 않을 정도였다. 뒤이어 터져나온 일대 격돌음. 처절한 비명이 잇달아 터져 나왔고 굉장한 검기강풍(劍氣 風)이 태풍과 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처음 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우뚝 서 있는 호국위의 위태(威態)였고 그들의 손에 서 빛을 발하고 있는 신검 스물여덟 자루였다. 장내에 세차게 몰아치는 검기광풍에 백의를 펄럭이고 있는 그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하지만 그들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십여 명의 어깨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그 중 몇 은 잇달아 선혈을 토해 내고 있었다. 대천강호국검진은 깨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받은 타격은 실로 간단하지 않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천제구로의 피해는 그들과 비할 수 없었다. 앞서의 세 명을 제외하고 여섯 명이 남았던 그들 중 또다시 네 명이 쓰러졌는데 이미 즉사 를 한 것이 분명했다. 배가 갈라지고 팔다리가 토막이 나고서야 무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로 무사한 것은 천제일로인 만독신마 갈후천이지만 그도 어깨와 가슴팍에서 피를 철 철 흘리는 중이었다. 다른 한 사람 또한 팔이 어깨에서부터 잘려 참혹했다. 결국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천제문주는 믿을 수 없는 듯이 그들을 보고 있다가 자신을 여전히 포위한 채 검을 겨누고 우뚝 서 있는 호국위를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군... 강호상에 언제 이런 고수들이..." 중얼거리던 그녀의 안색이 돌연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면서 신형을 휘청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계속해 흘렀다. 검강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 검술과는 차원이 다른 무공이다. 검에 베이면 살이 갈라진다. 더 깊이 베이면 뼈가 상해를 입게 되고 거기서 더 깊게 베이면 절단이라는 불행을 초래한다. 그렇게 되면 치명적인 결과가 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검에 입게 되는 상처이다. 하지만 검강에 상처를 입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검강은 검의 실체가 아닌 진기가 검을 통해 쏟아져 나가는 검기의 집결체로서 검기성강(劍 氣成 )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즉, 검기가 형체를 이룬다는 뜻이다. 검강에 상처를 입게 되면 단순히 살이 베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철퇴에 얻 어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같이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면 상처를 입은 것만으로 천제문주가 그렇듯 타격을 받았으리가 있겠는가. 그녀의 지고한 무공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검강에 그대로 두토막이 나버렸을 위력을 가진 것 이 바로 대천강호국검진의 위력인 것이다. 그녀는 회오대사와 화로가 자신의 좌우로 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천제문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남궁천은 그것을 보고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무서운 격전은 이제 끝이 난 것이다. 일패도지(一敗塗地)의 위기 끝에 역전에 성공하여 그들은 다시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 군웅들의 기색 또한 그러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 어서 돌아가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남궁천이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도 전에 또 다른 사건이 터질 줄은 아무도 상상 하지 못했다. "매, 맹주님!" 다급히 터진 외침 소리. 그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인영 하나가 바람처럼 날아들다가 땅바닥에 그대로 처박혔 다. 제 32 장 숨막히는 반전(反轉) "너는... 소신풍?" 갑자기 날아든 인영의 얼굴을 알아본 남궁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나타난 것은 정말 소신풍 악비룡이었다. 늘 그렇게 명랑하던 소신풍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전신은 마치 피칠을 해놓은 것 같아 그가 얼마나 위급한 상황을 겪으며 이곳까지 왔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다급히 외쳤다. "어서 여기를 피하십시오! 적이, 적에게 많은 고수가 당했습니다! 어서..." "적이라고?" "정체불명의... 무서운 고수들입니다!" 남궁천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 와중에 만약 또 다른 강적을 만난다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아니겠는가. 군웅들은 극도 로 지친 상태였다. 화로가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우선 이 자리를 뜨고 보는 것이 좋겠소, 맹주." "그렇습니다." 남궁천은 고개를 끄덕이곤 군웅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제 뒤를 따라와주십시오! 움직일 수 없는 분들은 주위 분들이 부축을 해주시고... 숨을 거두신 분들은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냥 가야겠습니다!" "아미타불... 그렇다고 저분들의 시신을 그냥 이대로 두고 간다면..." 그 와중에 군웅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던 소림사의 자성선사(慈性禪師)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이런 제기랄! 그렇다고 이 와중에 시체 돌보자고 우리도 죽어야 한단 말이오?" 흑도의 효웅이었다가 천제문 토벌에 참가한 규면나한(?面羅漢)이 불만에 찬 소리로 말했다. 정사연합인 멸마맹인지라 이렇게 되면 양분될 가능성이 있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순사하신 군웅들을 돌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남 궁천의 이름을 걸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겠습니다!" 상황을 재빨리 간파한 남궁천이 나서서 군웅들의 웅성거림을 막았다. 그의 말에 반대할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한시 바삐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광망한 웃음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으하하하... 곡구가 봉쇄된 지 이미 오래인데, 어디로 갈 작정이란 말이지?" 그 소리와 함께 수많은 인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법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고, 빠르기 이를 데 없음에도 전혀 서두는 것 같아 보이 지를 않았다. 마치 파도가 거대하게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선 것은 열여덟 명의 같은 옷차림을 한 자들. 그들의 옷은 모두 같지만 얼굴은 제각기 달 랐고 일신 기도는 범상치 않아 평범한 자들이 아님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각기 일파의 종사다운 기도가 있다고 할까. 그들 열여덟 명의 뒤로는 한눈에 그 숫자를 알 수 없는 많은 고수들이 따르고 있었다. 아니, 곡구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군웅들은 독 안에 든 쥐와 같았다. "천지상인?" 군웅들 중에서 누군가가 신음처럼 소리쳤다. 정말이었다. 황산 대혈겁 때에 잠시 그 모습을 나타냈다가 사라졌던 그 천지상인이 그 앞장선 열여덟 명 의 가운데에서 당당하게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천지회(天地會)?" "그렇다면 저들이 바로 천지회의 회주들이란 말인가?" 군웅들에게서 술렁임이 일었다. 남궁천은 천지회의 천지상인이 나타났음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들의 가장 무서운 점 은 언제나 전면에 나서지 않는 다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확실한 자신이 있을 때에만 나타났었다. 황산 대혈겁 때에도 그들은 모습을 드러냈다가 확실하지 않자 미련없이 등을 돌리고 사라졌 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이 이 자리에 전처럼 당당히 나타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 넘어 산이요, 강 건너 강이었다. 천지상인과 중원사마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군웅들의 앞에 버티고 섰다. 그들이 천지회의 회주들임은 묻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회주 를 호위하는 친위군이 있었고 그 뒤를 다시 고수들이 에워싸고 있어 곡구는 나는 새라 할지 라도 저들이 비켜 주기 전에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 천지상인은 모습을 드러낸 다음, 태연한 기색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을 뿐, 군웅들과는 아 무런 상관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어린 기색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것 을 확인하고 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었다. "많이 죽었군..." 천지상인이 애석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귀하께서 이곳에 나타나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무슨 뜻이오?" 남궁천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천지상인은 남궁천을 바라보더니 미소했다. "무림제갈 남궁천... 그대의 능력으로 본좌가 나타난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면 이건 뜻밖인 걸?" "남궁모를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남궁모는 천학비재(淺學非才)하여 귀하 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겠소. 하교해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남궁천의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으핫하하하...!" 갑자기 천지상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시간을 끌어서 무엇을 기다려 보겠다는 뜻인가? 누가 와서 도와 줄 것으로 생각 한다면 어리석은 생각이다!" 천지상인의 눈빛이 싸늘히 빛났다. 역시 그는 간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남궁천이 군웅들에게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할 시간을 벌어 주고자 하는 의도를 대번에 눈치 채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남궁천의 안색은 미동도 없었다. "그런가? 하지만 어차피 기다려야 하지 않겠소? 당신은 심부름을 하는 사람일 테니..." "!" 남궁천의 말에 천지상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와아핫핫핫하하하-!" 돌연, 큰 종을 때리는 듯한 굉량한 웃음소리가 귀무곡 전체를 뒤흔들면서 들려 왔다. 그리고 군웅들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황의인(黃衣人)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당당한 체구, 화등잔처럼 강렬한 불을 뿜는 듯한 눈빛! 사자코에 반백의 수염이 위엄있게 바람이 흔들린다. 황색의 용포를 걸친 그의 일신에 어린 것은 위엄(威嚴)! 그의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릴 위엄이었다. "회주님을 배견합니다!" 그가 나타나자 천지상인을 비롯한 천지회의 모든 고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 수많은 고수들이 무릎을 꿇은 가운데 우뚝 선 황포인의 기태는 가히 압도적. 멸마맹쪽의 군웅들은 절로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당금 천하를 암중에서 주지해오던 천 지회주가 이 마당에 저렇게 모습을 드러냈으니 어찌 긴장되지 않겠는가? "다... 당신은... 바로 삼황숙(三皇叔)?" 화로가 황포인을 쳐다보고 있다가 돌연 실성을 토해 냈다. 황포인이 화로를 보고는 담담히 웃음을 띠었다. "하후노사(夏候老師)! 오랜만이구려..." 화로는 부지중에 다시 소리쳤다. "저, 정녕 삼황숙께서 천지회주란 말씀이오니까?" "하하하하... 믿지 못하겠소?" "그럴 수가... 전하께서는 이십 년 동안을... 병마에... 시달렸는데..." "..." 천지회주 삼황숙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이곤 남궁천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대는 영명하니 내가 이 자리에 직접 나타난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 가?" "초민(草民) 남궁모는 기대하신 바와 같이 똑똑한 편이 아니니 하교를 해주셔야 이유를 알 겠습니다." 삼황숙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시간을 끌어 호국지존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작정인가?" 그 말에 남궁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대가 이처럼 정곡을 찔러오는 데에는 미리 준비된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쳤다. "불행히도 그 아이는 이제 돌아올 수 없다!" "무... 무슨 뜻이오?" "아직도 내 말뜻을 모르겠는가? 주천운은 이미 나의 안배에 의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 로 떠나갔다는 뜻이다." 남궁천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영원히...?" "그렇다..." 삼황숙은 주천운의 최후를 남김없이 군웅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꾸민 안배들까지 대부분을 군웅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 심모원려에 군웅들 의 안색이 질린 것은 물론이고 상처을 입고 있는 천제문주까지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하를 노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던지라, 자신의 지금까지의 행적이 모두 삼황숙의 꼭두각시와 같은 역할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자 그 참괴함이야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 었다. 전율이 군웅들의 전신으로 달려갔다. 그 중에서도 화로의 충격이 제일 컸다. 그는 주천운의 성장을 봐온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사부와 같은 사람이었다. 늙은 그에게 있어 피를 부르는 강호행을 마다하지 않게 한 것은 그에 대한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 다. 이미 세상을 달관한 그와 같은 노기인에게 있어 패권이나 황권 따위야 오래 전에 관심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다!" "지존이 그토록 쉽게 당하실 리가 없다!" 그 말에 분노한 군웅들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항마, 쇄마, 탕마대에 속한 몇몇 군웅들과 호국위였다. 그들을 보는 삼황숙의 눈에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항상 관을 봐야만 눈물을 흘리는 바보들이 있기 마련이지!" 때-앵! 그 순간 심금을 치는 괴이한 음향이 터졌다. "으-악!" "아-아-악!" 방금 소리쳤던 군웅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마치 거대한 철퇴에 얻어맞고 패대기쳐지는 물고기와 같다고나 할까. 그들은 펄쩍 뛰어올 랐다 바닥에 처박히면서 머리를 움켜쥐었다. 꿈틀거리는 그들의 칠공에서는 선혈이 터져 나왔다. 공력이 약한 자들은 즉사를 면치 못했고 호국위들조차 가슴을 움켜잡고 신음하면서 그 자리 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들의 입에서 코에서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상대가 손을 쓰지도 않았음에도 회생불능의 막대한 타격을 받고 만 것이다. 남궁천은 삼황숙의 손에 혈광이 이글거리는 괴이한 물체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무리 안력을 집중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실로 괴이했다. 방금의 그 몸서리치는 괴음은 바로 저 물체에서 울린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서, 설마 그것이 혈천마경(血天魔磬)이란 말이오?" 남궁천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하하... 바로 보았다. 이것이 바로 삼대천음 중의 하나인 혈천마경이다!" 삼황숙이 앙천대소했다. 군웅들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들은 삼황숙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토록 가공할 위력을 가진 괴병(怪兵)에 제아무리 천하의 호국지존이라 한들 어찌 대항할 수 있었으랴... 남궁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 우리를 죽이고자 한다면 이처럼 복잡한 절차를 거칠 필요 는 없을 텐데." 삼황숙이 다시 껄껄 웃었다. "역시 쉽게 알아듣는군! 그렇다. 본좌가 바라는 것은 전무림의 완전한 복속이다. 완벽한 항 복이지! 만약 반항하는 자(者)가 있다면 원하는 대로 이 자리에서 전멸시켜 주겠다." "..." "...!" 군중들의 안색에서 핏기가 걷혔다. 삼황숙이 그들을 죽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은 이 미 사실로 드러나 있었다. 그들이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죽기 싫다면. 남궁천은 창백한 안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황실의 종친이며 어른이오. 그런데 무림의 복속을 얻어 무엇을 할 작정이오?" "후후후...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생각인가? 좋아, 좋아... 원한다면 그것도 말해 주지! 본 황 은 이미 황실에도 손을 써두었다. 쉽게 말한다면 등극절차만 남아 있는 셈이지. 본황은 무림 까지 완전히 지배하는 황제가 되기를 원한다!" 두둥!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북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은 황제에 올라, 그 뒤에 혹시 모를 반란을 대비해서 누군가가 무림의 힘을 이용할 것까지 완전히 차단하겠다는 의미에 다름이 아닌 것이었다. 황실과 무림은 늘 일정한 거리를 두었었고, 그것이 관례였지만 또한 중요한 시기에 무림이 늘 거기에 관련되었음이 사실이었다. 삼황숙은 아예 그 근본을 없애 버리려는 것이다. "..." 침묵이 귀무곡 전체를 덮었다. 모두의 얼굴이 잿빛이었다. 죽음이냐, 치욕이냐? 길은 두 가지이지만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이 여기서 죽음을 택한다면 무림의 정영(精英)은 씨가 말라버릴 것이었다. "의논할 시간을 주겠다! 일 각. 그 동안에 대답을 하도록..." 삼황숙이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아무도 상상치 못한 사태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다. 꽈-르릉! 곡구쪽에서 마른 하늘의 날벼락과 같은 굉음이 터져 나오면서 비명이 일어난 것이다. 곡구 쪽을 막고 서 있던 천지회 고수들의 대형에 일대혼란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삼황숙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천지상인이 황급히 외쳤다. "천군장(天軍將)! 무슨 일인지 보고...!" 꽈릉! "으악!" "으아아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벼락치는 음향이 또다시 터지며 군웅을 포위한 천지회 고수들 의 대형 일각이 해일을 만난 방파제인 듯 무너져내렸다. 광풍낙화와 같이 천지회의 고수들 이 날아올랐다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적이다! 막아라!" 지군장(地軍將)과 회주 몇 명이 안색이 변해 그곳으로 덮쳐 갔다. 천지인 삼군(三軍)은 천지 회의 정예다. 그들이 막 거기 도착했을 때,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 왔다. "자-미-천-겁-폭!" 그리고 엄청난 자광이 일어나 그들을 덮쳤다. "물러나라! 자미천소다!" 삼황숙이 그것을 보고 크게 외쳤다. 콰쾅! "크-으-!" "으와아-." 절세고수 네 명이 마치 장난감같이 튕겨져 나갔다. 벌떼처럼 달려들던 천지회의 고수들은 삼황숙의 외침에 썰물처럼 옆으로 물러났다. 단 한 순간에 곡구에서 군웅들이 있는 곳까지 이르는 길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나타난 인영은 겨우 두 사람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인(佳人)과 고불과도 같은 노승. 대려군과 무료성승이었다. "나무아미타불... 이 무슨 업보인가..." 무료성승이 사방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연신 불호를 외웠다. 마치 미끄러지듯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장내로 들어오면서 벌어진 참경에 가볍게 눈살을 찌 푸리던 대려군의 눈빛이 굳어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무너진 담장에 겨우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천제문주를 발견한 것이다. 가 슴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연신 흘러내리고 있는 선혈이 묘한 느낌이었다. 대려군의 신형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유라(維羅)!" 흠칫하던 천제문주는 나타난 인영이 대려군임을 알고 반색하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안색 이 변했다. '만겁윤회마법이... 설마?' "어...머니!"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대려군의 입에서 차가운, 그러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녕 네가 정신을 차렸구나? 어떻게..." "당신이 제 어머니... 맞습니까?" 천제문주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미타불... 고사란(古沙蘭)... 여시주는 아이찰박격다산에서의 일을 잊지는 않으셨으리다." 불문제일기 무료성승의 음성이 들려 왔다. 천제문주의 몸이 갑자기 격렬하게 떨렸다. 무료성승과 대려군을 번갈아 보던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가슴의 상처에서 다시금 선혈이 터져 나왔다. "아, 알... 았느... 냐?" 그녀의 입가에 괴로운 빛이 스쳐 갔다. 몽고! 그 위대했던 대원제국을 회복하려던 엄청난 야심의 여걸답게, 그녀는 이미 드러난 사실을 부인치 않았다. 이 마당에 그것을 부인해서 무엇하랴. "..." 두 사람의 마주친 눈빛이 떨렸다. "아미타불... 업보로군, 업보야! 시주! 개인의 욕심으로 이렇듯 엄청난 혈겁을 일으키다니..." 무료성승이 삼황숙을 바라보며 준엄히 힐책했다. "으하하하... 도도(屠刀)를 버리면 거기가 피안이라, 해묵은 설법을 하려는 것인가?" 삼황숙이 앙천대소했다. "어... 당... 신과의 일은..." 어머니라고 부르려다가 말고 당신이라 그녀를 부른 대려군은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 다. 천제문주의 눈에 가는 떨림이 일어났으나 이내 그녀의 얼굴은 얼음같이 차게 굳어져 눈을 감았다. 고개를 돌린 대려군과 삼황숙의 눈이 마주쳤다. 삼황숙의 눈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후단주가 환우제일미라 그녀의 앞에 서면 천하의 남자들이 무릎을 꿇는다더니 결코 과장이 아니었군!" 대려군의 눈이 얼음과 같이 차게 변했다. "오는 길에 당신의 득의한 목소리를 들었어요. 호국지존, 그가 당신에게 죽었다는 말이 사실 인... 가요?" 얼음 같은 그녀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떨려 나왔다. 삼황숙의 눈에 흠칫하는 빛이 일어나더니 껄껄 웃었다. "과연 그놈의 재주가 대단하구나! 그새 적인 환우제일미까지 휘어잡아놓다니... 그렇다. 주천 운은 내 손에 죽었다!" 대려군의 신형이 휘청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온몸에서 자광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겐 이미 원이고 명이고 무림이고 그런 것은 관심이 없어요! 다만, 당신을... 죽여서 복수 하고 말겠어요!" 그녀는 심금이 찢어질 듯 아주 날카롭게 웃었다. "으하하... 자미천소를 가지고 과연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천하에 나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는데?" 대려군의 입가에 얼음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혈천마경보다 자미천소가 약할지는 모르죠! 호호호... 하나, 자미천소의 천멸지곡이면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몰살시킬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은 삼황숙뿐 아니라 불문제일기와 무림제갈 등 귀무곡 내에 있는 사람 모두를 대 경실색케 하기에 족했다. 이미 혈소마후라는 악명을 얻고 있는 그녀였다. "너는 주천운을 따르던 저자들도 돌보지 않을 셈이란 말이냐?" 삼황숙은 음침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당신이 그들을 살려 줄 것인가요? 흥! 어차피 그들은 죽겠 죠! 그러나 천지회 또한 몰살을 면치 못하겠지요?" 삼황숙의 눈에서 혈기가 드러났다. 그것은 주천운과 싸울 때보다 마성이 더 짙어져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혈광이 이글거리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혈천제마강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독한 계집! 감히..." "오호호호... 당신은 강하니까 살아나겠죠? 어디 혼자 남아 무림이든 황궁이든 마음대로 해 보시지!" 대려군은 얼음이 깨지듯 웃으며 자미천소를 입으로 가져 갔다. 순간, 남궁천의 귀에 대려군의 전음이 들려 왔다. "내가 자미천소를 불기 시작하면 모두를 이끌고 제천각으로 도망쳐요! 거기에는 비밀통로가 있어요! 무료성승께서 안내할 거예요!" 남궁천이 흠칫하는 순간에 대려군의 온몸은 완전히 자광으로 뒤덮였다. 두두두-둥! 동시에, 퉁소에서 엄청난 굉음이 지축을 울리며 터져 나왔다. 천신이 뇌고(雷鼓)를 울리는 것 같았다. "으악!" "케-에에..." 태풍 같은 기류가 일어나며 묘하게도 제천각 쪽을 막고 있던 천지회 고수들이 피를 토하고 나뒹굴었다. "뭘 해요? 나의 공력으로는 천멸지곡의 전반부밖에는 제어(制御)할 수 없어요! 어서 가요!" 대려군의 전음이 급박하게 무림제갈의 귀를 때렸다. 두두두-둥-둥! "으악!" 꽈르르르... 담장과 누각이 장난감처럼 무너지면서 백수십 장 부근의 천지회 고수들이 잇달아 칠공으로 피를 토했다. 한데 그것은 여전히 제천각 쪽이고 묘하게도 그 가운데 있는 군웅들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삼황숙이 누군데 그것을 보고 이유를 모르겠는가. "가증한! 감히 본 황의 앞에서 잔꾀를 쓰려 하다니... 멈춰라!" 꽈르르-쏴! 그의 전신에서 혈천제마강이 엄청나게 타오르며 가공할 혈광이 피분수와 같이 대려군에게 덮쳐 갔다. 절대(絶代)의 혈천망혼수(血天亡魂手)였다. 꽈-꽝! 대려군 주위 십여 장이 박살나면서 대려군의 신형이 나비처럼 날았다. 삐르르-. 퉁소음이 바뀌기 시작할 때, 무림제갈이 갑자기 제천각 쪽으로 몸을 날렸다. 군웅들이 마지 막 힘으로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할 때, 핏빛 덩어리와 같이 변한 삼황숙에게서 악마와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후후후... 가소로운! 혈뢰(血 )의 진정한 무서움을 보여 주마! 파-혼(破魂)!" "!" 천지가 찢어지는 음향이 퉁소음을 깨뜨리며 들렸다. 과과과-. "으악..." "흐으-" 광풍이 회오리처럼 일어나 굴러다니고 수십 장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온몸이 터져나가며 죽어갔다. 만약 군웅들이 죽어라고 몸을 날리고 있던 중이 아니었다면 결과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러나 천지회 고수들도 이미 곡의 끝까지 물러나 있었다. "..." 대려군이 비틀거리면서 내려섰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졌고 전신의 자광이 엷어진 것으로 보아 방금 파혼의 위력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이 차게 빛나는 순간에 퉁소음이 천군만마와 같이 변하며 주위 누각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제... 법이군...!" 삼황숙이 신음하며 비틀 물러났다. 무서운 음파가 그들의 주위를 마구 휘도는데 으스러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천지가 온통 무너지는 것 같았다. 흙먼지가 수십 장 허공까지 치솟아 휘도는데 대려군과 삼황숙은 그 속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기실은 단 한 순간에 불과했다. "크아하하... 만상구멸을 전개할 틈은 없다! 천주혈천망(天呪血天芒)!" 굉량한 웃음소리가 터지며 먼지 속에서 소름 끼치는 혈광(血光)이 치솟았다. "혈천제마강력(血天帝魔 力)이다!" 꽝! 꽈꽈-꽝! "아-악!" 벼락치는 굉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이윽고 먼지가 가라앉으며 벼락이 친 듯 태풍이 쓸고 간 듯한 폐허가 나타났다. 거기에 대려군은 쓰러져 있었다. 간신히 한 쪽 팔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킨 그녀, 일반인 이 보아도 알 수 있도록 그녀는 지독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흐흐... 뜻밖이었다! 네가 이 정도라니... 몇 년 뒤면 능히 혈천마경의 육혼까지 당해 낼 수 있겠구나! 살려 두려던 생각을 바꿔야겠다! 풀은 자라기 전에 뽑는 게 상책-." 과우-. 혈천망혼수가 피바다와 같이 거꾸로 쏟아져 대려군을 덮쳤다. '운랑! 미안해... 요.' 대려군은 피할 수 없음을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피해라! 유라!" 그 위기의 순간에 다급한 외침과 함께 인영 하나가 번개같이 대려군을 밀어 내면서 혈천망 혼수를 맞받았다. 꽝! "아악!" 단말마의 비명! 피떡이 된 육신 하나가 산산이 흩어졌다. "어... 머... 니..." 대려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음과 같은 그녀의 부지중에 흘러나온 음성은 그녀를 구한 것이 누구인가를 말해 주고 있 었다. 천제문주였다. 너무도 뜻밖에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대려군을 구하고 그대로 죽어 간 것이다. 마지막 한마 디조차 남기지 못하고서... "흐흐... 어리석은... 계집이란 어쩔 수 없이 정에 약한 동물이군! 그러나 그렇다고 너를 살려 둘 수는 없다!" 삼황숙의 눈에서는 아주 강렬한 마성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쏴아-. 혈천망혼수가 조금도 망설임없이 다시 대려군에게 쏟아졌다.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는 대려군에게 그것을 막을 힘은 없었다. 삼황숙은 지금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강한 상대인 것이다. "으아아핫핫핫... 환우제일미를 그토록 몰인정하게 죽이려 하다니!" 그런데 그 순간에 천지를 진동하는 홍소(洪笑)가 터져 나오며 한 인영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대려군의 앞을 막아 섰다. 그리고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의 손에서 새파란 전광(電光)이 쏟아져 혈천망혼수를 막아 갔다. 꽈꽈-꽝!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무서운 경력이 터져 나갔다. "으... 이... 이런... 이런 일이?" 그 진동을 이겨 내지 못하고 비틀비틀 두어 걸음 물러난 삼황숙의 얼굴에 경악과 불신이 마 구 뒤엉켰다. '주천운이 죽고 없거늘, 천하에 누가 이런 능력... 그놈도 이런 능력은 없는데?' 삼황숙을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대려군의 앞 일 장 거리에는 홍포를 걸치고 머리에는 금관(金冠)을 쓴 나이가 아직 채 사십 도 되어 보이지 않은 청수한 중년인이 서 있지 않는가? 그의 앞에 발자국 하나가 선명히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한 걸음밖에는 물러나지 않은 듯했다. "으하하하... 과연 대단한데? 나의 대천뢰수라인(大天雷修羅印)을 견디다니!" 홍포의 금관을 쓴 중년인이 크게 웃었다. 그의 태도는 아주 방약무인하였으며 천하에 거리낄 것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 속에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은 그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가를 나타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야... 야율... 사형?" 겨우 몸을 일으키던 대려군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믿을 수 없는 듯이 실성을 토해 냈다. 야율사형이라니? "저... 저건 천제문의 제주(帝主)인데?"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그는 죽었는데..." 경악한 음성이 사방에서 들려 왔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이 홍포의 금관 중년인이 천제문의 제주 야율극리란 말인가? 그것을 증명하듯이 그의 얼굴 은 정말 야율극리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꼭 같았다. "으하하하... 내가 제주라고?" 금관의 중년인은 다시금 크게 웃었다. 그것은 거대한 변수의 등장을 알리는 웃음이었다. 제 33 장 제왕천하(帝王天下) 억겁(億劫)의 세월이 흘렀는가! 사위는 한없이 깊고깊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지저갱(地底坑)!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곳,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묻혀 있다가 겨우 햇빛을 보는가 싶은 순간에 다시 묻혀 버린 곳이다. "으으... 으..." 지옥의 유혼(遊魂)이 신음하는 소리일까. 끊어질 듯한 미약한 소리가 들리다 멎었다. 이 깊은 지하, 이 짙은 어둠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나다니? 그러나 그 후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은은히 서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인가? "으윽...!" 좀 전보다 아주 뚜렷한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틈새가 있었다. 집채만한 바위들이 엇물려 만들어진 높이 이 삼 장에 넓이 삼사 장에 이르 는 그것은 틈새라고 불리기 어려운 그러한 곳이지만 집채만한 바위를 감안한다면 무리도 아 니었다. "으-윽!" 신음 소리와 함께 찬란한 금광이 그곳에서 빛나며 주위가 환해졌다. 참담한 모습의 인영 하 나가 거기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백여 장의 높이에서 맨바닥에 떨어진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정녕 믿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으으... 이... 이곳은?"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기어코 눈을 뜬 것은 주천운이었다. 그는 죽지 않은 것이다. 희미하던 그의 눈에 호국지존병에서 뻗어나는 금광이 보였다. 어둠을 밝히는 금광은 호국지 존병의 광채였다. "살아... 있단 말인가... 우욱!" 흠칫 일어나려던 주천운은 전신이 산산이 부서져나가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 냈다. '지, 지독한 상세로구나...!' 기절할 것 같은 고통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주천운은 암암리에 공력을 일으켜보고 신음했 다. '전신의 공력이 모두 흩어지고 기경팔맥이 모조리 끊어진데다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이탈했 다... 살아 있는 것은 용화대수미선공의 호신진기 덕분이다...' 주천운의 뇌리에 그가 여기 누워 있기 전까지의 상황이 떠올랐다. 득의해 앙천광소를 터뜨 리던 삼황숙의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귀에 들려 오는 것만 같았다. "여기... 있을 수 없다! 그를... 막아야 한다." 안간힘을 쓰면서 몸을 일으키던 주천운의 눈에 으깨어져 뭐가 뭔지도 모를 옥병 하나가 보 였다. "만... 령신단(萬靈神丹)이다." 주천운은 이를 악물고 겨우 움직이는 손을 억지로 뻗어 냈다. 굼벵이처럼 느린 동작이었다. 만령신단이란 것은 그가 장보고 안의 모든 영약을 한데 모아 만든 천하기약이었다. 품속에 지니고 있던 그것이 떨어질 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그의 앞에 떨어져 있는 것이 다. 용화대수미선공(龍華大須彌禪功)은 몸을 보호하는 데 천하의 그 무엇도 따를 수 없는 최고 의 신공이다. 혈천마경의 육혼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패도마공(覇道魔功)이었지만 그가 용화대수미선공을 대성했다면 삼황숙도 그를 이겨내기는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용화대수미선 공만으로도 주천운은 살아 있는 것이다. '으... 윽... 기사회생의 만령신단을 한꺼번에 이십 개나 먹었건만... 이제 겨우 기경팔맥을 이 을 수 있다니...' 한 시진 만에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된 주천운은 전신에 느껴지는 통증에 절로 이를 악 물었다. 그래도 이젠 살아난 것이 아닌가? 쓴웃음을 지으며 사방을 둘러본 주천운은 안색이 굳어지 고 말았다. 붕괴된 암석더미, 그 속에 형성된 조그마한 틈바구니! "처, 천하없는 재주가 있어도 나갈 수가 없다. 위의 암석 하나만 건드리면 저것들이 모조리 떨어져내려..." 주천운은 전신의 맥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기가 막힌 것이다. 겨우 살아났는가 싶은데 이젠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하늘... 그날의 천기(天氣)가 겨우 이런 뜻이었던가." 주천운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야 한다. 혈천마경에는 마기가 있다! 삼숙이 천하를 지배하면 천하가 피에 잠긴다! 그 럴 수는..." 우드드드... 주천운이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순간, 기괴한 음향과 함께 사방이 은은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주천운은 가슴이 식는 것 같았다. 갈수록 태산이라[去去泰山], 겨우 공간을 만들며 엇물려 있던 집채만한 바위 두 개가 위에서 누르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뿌지직! 콰릉! 한쪽이 왕창 무너져 내렸다. 뿌드득! 우드드... 한쪽이 무너져 홀로 압력을 받게 된 머리 위의 거대한 암석의 금이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했 다.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이, 이런 곳에서 겨우!" 어이없는 빛이 되던 주천운은 갑자기 눈을 빛냈다. 방금 무너진 곳, 그곳에 뭔가 시커먼 굴 같은 것이 보이는 게 아닌가? "도, 동굴이란 말인가?" 주천운이 떨리는 손으로 호국지존병을 들어 그곳을 비춰 보려는 순간에 천지를 진동하는 굉 음과 함께 머리 위의 암반이 무너져 내렸다. "우욱! 겨우 피하기는 했으나... 또다시 내상이..." 주천운은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며 신음했다. 그의 입에서는 다시금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위기일발(危機一髮)! 그야말로 단 죽음의 문턱에서 주천운은 살아 나온 것이다. 그가 발견한 곳은 정녕 하나의 동굴이었으며 방금의 진동으로 그 입구까지 무너진 상태였 다. 바로 발 밑까지 동굴이 무너진 것을 보고 머리를 저으며 고개를 쳐들던 주천운은 그만 그곳에 굳어지고 말았다. 오오! 그의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보라! 그가 들어온 곳은 입구에 불과했다.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반월형(半月形)의 동부(洞府)가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높이 십여 장이나 되는 동부의 천장은 호국지존병의 금광(金光)을 받아 종유석들이 한없이 신비롭게 빛나며, 그것은 사방의 종유석들에 부딪쳐 가이없이 상서로운 광채를 뿜어 내고 있었다. <금금별부(禁琴別府)>! 그 광채 속에 떠올라 있는 거대한 글자 네 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금금별부... 금(琴)을 가둔 곳?" 너무도 휘황(輝煌)한 광경에 잠시 멍하니 있던 주천운은 갑자기 가슴이 진탕되었다. 흥분한 그의 눈이 글자의 아래로 격하게 내려갔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서기가 피어오르지만 호국지존병의 금광(金光)은 분명코 아니었다. 신선과 같은 풍도의 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잠든 듯 서기에 감싸인 노인의 모습에 세속(世俗)의 기운은 없었다. 그는 넓이 반 장에 길이 가 오 장 가량 되는 석대의 끝에 앉아 있었다. 그 석대의 끝은 주천운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끝에는 섬세한 계단이 보이는 듯 마는 듯 보이고 있었다. 고금(古琴)! 주천운은 그러한 금을 아직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고금은 노인의 앞에 놓여져 있으며 동굴에 가득 찬 고색창연한 서기는 바로 거기서 피어 나는 것이었다. 그 누가 그 금을 대하고 숙연해지지 않겠는가. 그것은 현천마금과 너무도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일시의 객기를 이기지 못해 천하를 겁난에 빠뜨리게 만든 죄인이 이곳에 금(琴)과 자신을 가두노라! 나 천금상인(天琴上人)은 금을 탄주하여 산봉을 허물어 나와 세상을 단절하고 이곳 금금동 부에서 영면(永眠)에 든다.> "이, 이런 그러면 내가 떨어져내린 곳이 천연적인 곳이 아니라 이분이 산봉을 허물어 위를 막아 놓은 것이란 말인가?" 주천운은 그만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찌 인간이라 하겠는가? 글은 노인, 천금상인이 좌화한 석대에 새겨져 있으며 주천운은 그것을 읽으며 천금상인에게 가까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백 년 전. 천하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천외쌍기(天外雙奇)는 천하무적으로 군림해 적수가 없었다. 천금상인은 평생을 오직 신마양음(神魔兩音)에 받쳐 음율만을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명리 (名利)에는 담백한 편이나 호승심이 아주 강했다. 자신이 음율을 완성했다고 생각한 그는 그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여 천외쌍기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때서야 그는 천외쌍기를 이미 음(音)으로 굴복시킨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 미선자(紫微仙子)와 혈경수사(血磬秀士)의 두 사람이었다. 그 중 혈경수사는 마음(魔音)만을 연구하여 천하군림을 꿈꾸는 효웅이었는데 자미선자를 알 게 된 후, 그녀에게 반해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녀를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결국 삼 인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필연적인 대결! 거기서 천금상인은 두 사람을 모두 격패시켰다. 그런데 한마디 말이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불복한다면 두 사람이 덤벼도 좋소!" <거기서 나는 분노한 두 사람의 합공에 패배했고 ...中略... 결국 나는 그 두 사람을 신마조 화지음(神魔造化之音)으로 드디어 격패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그것이 잘못임을 알게 되었다. 처절한 표정이 되어 나를 원망하며 대막으로 떠나간 자미선자의 웃음이 내 뇌리를 떠돌며, 마음(魔音)을 완성하여 천하를 피로 씻으리라 하며 사라진 혈경수사의 저주... 삼대천음(三大天音)의 전설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 것이다. 後略...> 주천운은 이미 천금상인의 유체 앞에 도달해 있었다. 글이 다 끝난 것이다. "일시의 호승심 때문에 사랑을 잃고 세속을 떠나 이렇게 스스로를 가두시다니..." 주천운은 평온한 듯 미진한 듯한 천금상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금의 앞에 새겨진 마지막 글을 읽었다. <산봉을 허물어 막은 동부가 열릴 때, 한 명의 귀인(貴人)이 이곳에 들어올 것임을 알고 여 기에 현천신금(玄天神琴)을 남겨 두노라. 그대가 정녕 천하를 구할 천명(天命)을 받은 귀인이라면 신마합체(神魔合體)를 이루어 구천 신마조화지곡(九天神魔造化之曲)을 얻을 수 있으리로다. 부탁하노니 어리석은 자의 객기로 일어난 천하의 혈겁을 그대가 막아주기 구천지하에서라도 바라노라. 죄인 천금상인 고두(叩頭).> "이, 이것이 정녕 현천신금이란 말인가?" 주천운은 천금상인에게 삼배하여 예를 갖추고 나서 떨리는 손을 그의 앞에 있는 고금으로 뻗어 갔다. 현천신금(玄天神琴)! 그 천하의 신기(神器)는 보통의 금보다 조금 작았으며, 줄은 모두 여섯이라 매우 기이했다. 그러나 그 끝 부분에 괴이한 홈이 있어 기이한 느낌이었다. 더구나 그 홈은 가로로 되어 있어 여섯 줄 모두와 연관이 되고 있는데... "그 길이가 겨우 일고여덟 치... 신마합체?" 문득 주천운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현천마금! 길이 일곱 치의 소금(小琴)이 그의 손에 들려졌다. 현천신금이 그의 무릎에 놓여 있고 그 짝인 현천마금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정녕 하늘의 안배는 이토록 공교롭단 말인가? 드르-릉-! 두 개의 금이 모습을 드러내자, 신마양금의 현이 저절로 진동하며 기이한 울음을 토해 냈다. 그것은 전설이 이루어지는 소리였다. 현천의 소리 합쳐지매, 비로소 천하에 서광이 비추이도다. 디띵띵-뚱땅! 뚜둥땅-. 주천운의 무릎에서 현천신금이 울고 있었다. 그에 따라 창백하던 주천운의 얼굴은 차츰차츰 정상이 되면서 그의 몸은 장엄한 서기로 빛 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점점 더 장엄해지고 있었다. 천지간에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어 만물(萬物)을 생육(生育)하도다. 이에 그 천지간의 기(氣)를 이끌어 죽어 가는 생명을 되살리니, 이를 신부(神部) 제일조(第 一調) 만생휘(萬生輝)라 하노라! 주천운은 현천신금의 제일조인 만생휘를 이용하여 자신의 상세를 치유하고 나아가 용화대수 미선공까지 완성해 가고 있었다. 천지간의 모든 기를 자신에게 끌어들이니, 그 어떤 영약이 그것을 따를 수 있으리오! 그것은 하늘[天]의 힘이었다. * * * 북경(北京)! 자금성이 패쇄되고 북경에 이르는 모든 길에 철저한 검문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 자금성 의 지하에 위치한 천하기밀부에 숨조이는 기다림으로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천하기밀부는 대명호국의 마지막 힘이 담긴 곳으로 그 단단함은 천하제일이었다. 정문수는 개산권신의 붕옥신권에 갈빗대가 세 대나 부러졌으나 개산권신 유동의 목을 자르 고 여기에 사황야 주성운과 병상의 황제, 그리고 경운공주 등 몇 명의 황족을 처절한 격전 끝에 모시고 피신해 있었다. 뜻밖의 암습에 심한 상세를 당한 주성운은 약간 회복된 듯 정문수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 은 어두웠다. "정대장, 천운이 오지 못하는 게 아니오?"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분을 가로막을 것은 천하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문수의 대답은 확신에 찬 것이었다. 그것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병폐(?) 였다. "아오. 나도 그를 믿소! 하나 그들이 너무 교활하니..." 그때였다. "으악!" "무, 무슨 짓... 으-악!" 처참한 비명이 은은히 사방을 메아리 치며 들려 왔다. "무슨 일이냐?" 정문수가 안색이 싹 변해 그쪽으로 달려갔다. "잘 알 수 없습니다. 전성통(傳聲筒)을 통해 밖에서 비명이 들려 왔습니다." 지존위 위사 하나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이었다. 끼끼-. 느닷없이 비밀문이 열리면서 피투성이가 된 여인 한 명이 굴러들어왔다. "서랏!" 지존위 위사 대여섯이 대경해 번개같이 검을 쏟아 냈다. 차차-창! 여인은 다급히 검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 냈으나 힘이 다한 듯이 그대로 검을 놓치며 쓰러지 고 말았다. "네, 넷째 오라버니!" 그녀는 피를 토하며 부르짖었다. "멈춰라!"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정문수가 지존위 위사들을 저지했다. "네가 지매란 말이냐?" 주성운이 경악한 빛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피투성이의 여인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가 여기를 어떻게?" 그녀의 눈에 다급한 빛이 나타났다. 어디서 기운이 났는지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말 했다. "어, 어서 피해야... 합니다... 바... 밖의 감시들은 모두... 그들이... 눈치채기 전에..." 자운군주 주란지! 천만 뜻밖에도 그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패도무적 정문수는 그녀가 누군지 천하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닌가? "군주께서 이토록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의 어조에는 의심이 어려 있었다. "바, 바보 같은...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탈출할 수가 없어요! 나와 내 비녀 열 명이 목숨 을 바친 일인데... 의심이라니..." 자운군주의 눈빛이 심하게 일렁였다. "다섯째 오라버니... 그분이 돌아가신 지금,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고육지계를 연출할 필요 가 있... 나요?" "뭐, 뭐라고 했소?" "지, 지매! 뭐라고 했느냐?" 혼비백산(魂飛魄散)! 청천벽력(靑天霹靂)! 이보다 더한 충격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갑자기 자운군주의 눈에 눈물이 복받쳐올랐다. 목이 메어 왔다.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부황께서 오시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 후일을 그것만이 그분의 유지(遺志)를 잇는... 길..." 울음이 터졌다. 자운군주는 전신에 난 상처보다 가슴이 이토록 더 쓰린 이유를 모른다. * * * 뚱-! 퉁기둥-둥 따-앙! 그때 어디선가 하늘의 힘을 이은 금음(琴音)이 울려 나오고 있었다. 보라! 꽈르릉-콰콰콰-! 천지개벽이 정녕 일어나고 있었다. 땅이 갈라지고 산봉이 흔들리며, 깊이를 모르는 절곡을 가득 메웠던 거대한 바위들이 날아 오르고 있었다. 아니 그 무엇인가를 위해 비켜난다고 해야 옳으리라. * * * 찬란한 금관(金冠), 그리고 마치 법복인양 기이한 홍포(紅袍)! 신비의 중년인은 여전히 방약 무인한 태도를 보이며 주위를 쓸어보고 있었다. 그 방약무인한 태도에는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오만하고 당당한 기도가 어려 있었다. 그것은 왕족(王族)만이 가질 수 있는 어릴 때부터 길러지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왕기(王 氣)였다. "당신은 야율사형이... 아니군... 야율극리는 당신과 같은 기도가... 없어..." 대려군이 주춤거리며 말했다. 야율극리를 이곳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당연하지! 본 왕은 야율극리가 아니고 륭가종(隆迦宗)이니까!" 홍포금관의 중년인은 대려군을 눈에 집어넣을 듯 바라보며 웃었다. 대려군의 낯빛이 변했다. 그가 자신을 탐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하긴 그 누가 대려군을 보고 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의 대려군은 삼황숙과의 대결에서 겨우 구한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옥 같은 피 부가 마구 드러나는 형편이었고, 그 바람에 거의 둔부까지 드러난 양 다리의 선은 보는 이 의 눈이 튀어나오도록 엄청난 매력의 덩어리가 아니던가! "너는 누구냐?" 그때, 삼황숙이 아주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입을 연 것이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자신을 본체만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있다니! 그런데, 륭가종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는 것이 아닌가? "극리로부터 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네가 이 정도인 것은 말하 지 않았지..." 륭가종은 맑은 소리로 웃으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려군의 안색이 얼음같이 변하며 눈에서 살기가 돌았다. '이자가 감히...!' 그러나, 그녀는 그의 무공이 생각나자 문득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당신은 야율극리를 아는군요?" 대려군은 신음하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태도에서는 처절한 유혹의 힘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이지! 그는 본 왕의 쌍둥이 동생이었는데 모를 리가 있나?" 륭가종은 서슴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대려군의 온몸을 훑고 있는데 주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어리석은 놈, 목숨보다 계집이 더 중한 모양이군..." 삼황숙의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일어나며 그가 막 손을 쓰려고 할 때였다. "이 정도의 여자라면 목숨을 걸 만하다고 생각지 않소?" 륭가종은 문득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태도는 아주 거리낌이 없어 삼황숙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쏴아아-. 바람도 없는데 갑자기 삼황숙의 주위에서 일어나던 무형의 기류가 문득 가라앉았다. '내 심기를 터뜨릴 작정인가... 가소로운...!' 그는 차갑게 웃었다. "환우제일미이니 천하제일의 미녀임에는 틀림이 없지. 하나 그녀가 너를 따르리라 생각한다 면 가소로운 일이다!" 륭가종은 신비하게 웃었다. "본 왕이 만약 말 한마디로 이 여자를 본 왕의 것으로 만든다면 당신은 그 목을 내놓을 수 있소?" 삼황숙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으하하... 당신은 여자를 잘 모르는군!" 륭가종은 대려군을 쳐다보았다. "주천운이란 자를 네가 좋아했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본 왕은 그 원수를 갚아줄 수 있다! 어떠냐? 본 왕을 따르겠느냐?"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삼황숙은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지라 내심 어이가 없었다. 한데, 대려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가? "당신에게 능력이 있다면..." "와하하하... 어떻소?" 륭가종은 박장대소했다. "미친... 저 계집애가 너를 순순히 따르리라 생각한다면... 흐흐... 첫날밤이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삼황숙은 냉랭히 웃었다. "역시 여자를 다룰 줄 모르는군... 그거야 본 왕의 수완이 아니겠소? 나는 지금까지 십이 처 백이십여 첩을 거느렸어도 불평은 들어 본 적이 없소... 후후... 지금 본 왕에 있어 제일 급한 것은 우선 당신의 목이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삼황숙은 이미 얼음이 되어 있었다. "너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륭가종은 씩 웃었다. "중원인들은 꼭 봐야 믿지! 여봐라! 중원마왕(中原魔王)께서 너희들을 보고 싶어하신다!" 그가 크게 외치는 순간에 삼황숙의 가슴이 꿈틀거렸다. '나를 중원마왕이라고? 이놈... 을!' 그 순간이었다. 펑! 일성 포향(砲響)이 사방을 진동하는가 싶더니 이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이... 이건 도... 독(毒)...!" "크에엑!" 펑! "우악!" "이... 이건... 으아-악!" 갑자기 사방에서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연달아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수효의 천지회 고수들의 외곽에 대혼란이 일어나면서 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 져 가고 있었다. 그 기세는 마치 노도와 같이 엄청났고, 그 수효 또한 천지회의 수효보다 조금도 적지 않았 다. 거기에 나타난 인영들은 놀랍게도 서역의 라마승과 밀종(密宗) 고수들이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그 가운데에 중원인 무리가 당당히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봉문을 선포했던 황하맹의 전고수와 황하신룡, 그였다. "동로(東路)! 준비되었느냐?" "포달랍궁(包達拉宮) 파뢰대존자(巴雷大尊子)! 포달랍궁 전고수를 이끌고 명을 기다립니다!" 륭가종의 외침에, 동쪽에서 거대한 체구의 라마승이 나서며 외쳤다. "서로(西路)!" "밀종문(密宗門) 비영시자(秘影侍子)가 밀종문 전고수를 이끌고 명을 기다립니다!" 은발이 허리까지 내려온 노인이 나섰다. "서로(西路)!" "중원총타를 맡은 황하신룡이 황하맹의 전고수와 비문(秘門)의 고수를 이끌고 대기하고 있 습니다!" 황하신룡이 나서며 당당히 외쳤다. "북로(北路)는 어디 있느냐!" "빙궁(氷宮)의 한백신군(寒魄神君)이 명을 대기한 지 오래입니다." 얼음 같은 신색의 노인이 나섰다. 이 돌연하고도 전혀 의외의 출현에 모두의 안색이 급변했다. 천지회 고수에 막혀 한쪽에 모여 있던 정도군웅은 그야말로 기진맥진한 꼴이었다. '끝이다! 늑대에다 호랑이- 지존이 없는 이상 이젠...' 그때 삼황숙은 뚫어질 듯 륭가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서역의 모든 세력을 규합한 것은 역대로 아무도 못했지... 네가 당대의 서역법왕 (西域法王)이냐?" 륭가종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 왕 이외에 누가 있어 그런 능력이 있겠소? 어떻소? 이제 능력이 있어 보이오?" 서역법왕(西域法王)! 그는 모든 것이 신비에 묻힌 자다.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가 서역 지방의 살아 있는 신(神)이며 그가 서역의 모든 문파와 족속을 굴복시킨 위인(偉人)이라는 것뿐이다. 그런 자가 여기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서역을 하찮게 본 것이 실수였군. 진작 신경을... 그러나 감히 서역인 주제에 중원을 넘보다 니!" 삼황숙은 살기 어린 웃음을 떠올렸다. "으하하... 중원이 어찌, 한족만의 땅이라 하겠는가? 여기에 금(金)이 있었고 요(遼)가 있었으 며 원(元)이 있었다! 그보다 오래 전인 은주(殷周) 이전에는 동이(東夷)가 중원천하의 주인 이었었지! 한족은 은주 이래로 중원을 점거했을 뿐이다." 서역법왕 륭가종은 큰 종을 때리듯 우렁차게 웃었다. "으하하... 여기에 서역인(西域人)이라고 중원천하를 지배치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그의 태도는 갑자기 태산과 같았다. '보통 놈이 아니군! 기세를 제 마음대로 바꾸고 있다...' 삼황숙은 냉랭히 웃었다. "이 자리에 이렇게 나타난 것을 보니 그간 많은 준비를 한 모양이군." 서역법왕은 다시 웃었다. "그야 물론... 천하를 얻는 데 어찌 그 정도야! 당신이 천제문을 끌어들여 천하를 도탄에 빠 지게 하고 그 다음에 나타나 나라를 구했다 하고 조카들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임을 처음부 터 알고 있었지! 하하..." 그는 정색을 한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천제문은 결코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거든, 왜냐하면 제단의 제주는 바로 본 왕의 동생이었고 그는 중원정복의 대업을 위해 천제문에 침투했었으니까..." 엄청난 사실들이 서역법왕의 입을 통하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제문은 한낱 껍데기 였었군...' 대려군은 어이가 없었다. 이토록 음모가 뿌리 깊게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그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본 왕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극리가 죽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오히려 잘된 셈이 지!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처리해주었으니 본 왕은 당신만 처리하면 될 것 아니오?" "와핫핫하하하..." 삼황숙은 갑자기 미친 듯 웃어대었다. "좋다 그럴 듯하군... 그런데 과연 너는 네 실력을 저울질 해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냐?" 웃음을 그친 삼황숙의 몸에서 서서히 혈기(血氣)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역법왕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혈천마경이 천하제일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가소로운 일이지! 사백 년 전에도 그 쇳조각은 깨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삼황숙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네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주천운이 현천마금을 가지고 있... 그런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그것을 왜 모르겠는가? 천외쌍기가 바로 내 사부인데!" "!" 그것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럼 장보도 사건은 네가?" "서로 싸우고 골치 좀 아프게 하려고 주었더니 주천운인가 누군가가 찢어버렸더군..." 음모-. 모든 것은 이처럼 처음에서 끝까지 음모에서 음모로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삼황숙의 얼굴에 비웃음이 일어났다. "혈천마경이 완전치 못했어도 천외쌍기는 거기 패했는데 가소롭게..." 과과과-. 그의 전신에서 무서운 혈광이 일어나며 서역법왕을 덮쳐 갔다. "혈천망혼수로 혈천마경의 힘을 보여주겠다!" "으하하... 어제와 오늘이 같다면 무슨 진보가 있겠는가? 오늘을 위해 천외쌍기는 뼈를 깎았 다! 대천뢰수라인(大天雷修羅印)!" 서역법왕은 크게 웃으며 양손을 쳐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의 광망한 태도와 달리 신중했다. 그의 손에서 새파란 전광(電光)이 무섭게 폭사되어 나왔다. 꽈-꽈꽝! 동시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십 장이 뒤집어지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으... 윽! 이, 이럴 수가?' 막대한 충격에 비틀 두 걸음 물러난 삼황숙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말았다. 상대인 서역법왕은 한 걸음밖에는 물러나지 않은 것이다. "이럴 수는... 천외쌍기가 아직 살아 있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흥! 그분들은 삼대천음에 패배한 후, 힘을 합쳐 마침내 정사의 정화를 하나로 만드는 데 성 공하셨다! 이제, 그것을 보여 주마!" 서역법왕은 두 팔을 쫙-벌렸다. "대천뢰수라신공(大天雷修羅神功)!" 콰콰-. 그의 온몸에서 무서운 청광이 솟아오르면서 괴이한 기운이 마구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 위세는 혈천제마강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천지회를 멸하라!" 서역법왕이 외치며 벼락같이 양손을 합했다. 팍! 그의 합쳐진 양손에서 무서운 섬광이 삼황숙을 향해 폭사되었다. "건방진! 파-혼!" 땡-! 과과-꽈르-릉! 꽝! "윽!" "으으..." 대격돌이 벌어지면서 두 사람이 격투를 시작했을 때, 천지회와 서역고수들도 대격투를 벌이 기 시작하고 있었다. "죽어라!" 창! 차-앙! "으-아-악!" 펑! "큭!" "으와아..." 삽시간에 장내는 아비규환의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고 말았다. 멸마맹의 군웅들은 맥 없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미 천하를 쟁패할 힘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화로의 물음에 남궁천은 고소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들 중 한 사람만 나서도 우리는 죽 음을 기다려야 합니다... 굳이 바란다면 이독치해(以毒治毒)이나..." 무림제갈의 말은 참으로 뼈아픈 것이었다. 하나, 어찌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은 혈천마경의 주인이요, 또 한 사람은 천외쌍기의 절학을 한 몸에 지닌 엄청난 고 수가 아닌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꽈꽈꽝-꽈앙! 엄청난 천번지복의 굉음이 천지를 온통 뒤흔들었다. "아-윽..." 대려군조차 견디지 못하고 선혈을 토해 내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녀가 입은 상세는 너무 심해서 두 절대고수가 싸우는 여파마저 견디기가 힘든 것이다. 그때였다. "나무환희불... 우리가 여시주를 보호하리다!" 십여 명의 노라마들이 불호를 외며 대려군을 막아섰다. "흥! 감히 서역 중놈인 주제에 중원에 와서 설치다니!" 천지회 제이회주인 천지상인이 몇 회주와 천군장(天軍將) 등을 이끌고 그들에게 덮쳐 갔다. "나무관세음-법왕좌하의 호가존자를 가벼이 보다니!" 귀무곡은 이미 며칠을 두고 이렇게 주인이 바뀌고 상황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땡! 과과과... 혈천마경에서 펼쳐지는 혈뢰음(血 音) 파혼은 실로 엄청난 위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역법왕 륭가종의 대천뢰수라신공은 바로 음공을 겨냥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끄덕도 없었다. '이, 이런... 육혼까지 전개해야 되겠는데 그러자면 내 수하들까지 다 죽게 된다! 하나 이대 로 있을 수는 없는 일! 수하가 죽더라도 이놈만 없어지면!' 삼황숙은 혈인으로 변한 채 이를 악물었다. "천주혈천-망(天呪血天芒)!" 파파팍! 혈천제마강이 위세를 발하며 혈천마경에서 무서운 빛이 서역법왕에게 폭사되었다. '으! 저... 전신이 바늘에 쏘이는 듯... 이게 도대체 무슨 무공인가?' 혈주혈천망에 접하자 서역법왕은 대갈일성하며 잇달아 가공할 대천뢰수라신공을 쏟아 냈다. 꽈-릉! "우후후... 네놈이 아무리 그래봐도 소용없다! 천지가 핏빛으로 잠기기 시작한다..." 삼황숙의 두 눈이 완전히 시뻘겋게 변하는 것과 동시에, 혈천마경이 괴이하게 울부짖으며 그 광채가 천지를 온통 뒤덮으며 일어났다. "으-악-." "우우우-지... 지독한 마기(魔氣)...!"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던 그래봐야 백여 장 밖이었지만, 대려군을 둘러싸고 싸우던 자들이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고 비틀거렸다. 대려군조차 머릿속이 터져 나갈 듯했다. '엄청난... 자미천소가 완벽해도 이토록 지독한 것을 이길 수는 없다! 혈천마경이 나타나면 천하가 피바다가 될 것이라더니!' 대려군이 억지로 공력을 모으며 신음할 때, 문득 어디선가 맑은 금성(琴聲) 일음(一音)이 들 려 왔다. 그것은 아주 나직했으나 이루 말할 수 없는 포근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혈천마경에서 쏟 아지는 천주혈천망의 힘을 십분 감소케 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고 보니 언제인지도 모르게 장내에 금음이 서서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더없이 신비로운 음률이었다. '고... 공력이 모인다!' 대려군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 금음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산산이 흩어졌던 그녀의 전신 공력이 정말 회복되고 있는 것 이다. 디딩-디당당-뚱! 금음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더없이 평화로워지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싸움이 멎고 있었다. 천지회도, 서역의 고수들도,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싸움을 멈추고 손을 내리고 주위를 두리 번거리고 있었다. 쨍그렁-. 그들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토록 당하고 있던 정파군웅쪽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디다당-둥! 금음은 점점 커지고 군웅들의 몸에서는 힘이 솟았다. 삼황숙과 서역법왕, 그들도 싸움을 멈추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금음에 지배받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 중에 속했다. 서역법왕 륭가종은 자신의 수하들이 싸움을 멈추고 멍청히 있음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 다. 느닷없이 울리기 시작한 금음은 단숨에 장내의 그 대격전을 중지시켜버린 것이 아닌가? 더구나, 정녕 더욱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상처 입은 자들이 모두 치료되고 있음이었다. 피가 멎고 베어진 상처가 아물어가며, 잃었던 내공이 다시 모이고 있는 것이다. 삼황숙의 얼굴이 처절히 굳어졌다. "이... 이것은! 시... 신마조화지곡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그 순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맑고 낭랑한 음성이 금음과 함께 조용히 들려 왔다. "천지간에 가득한 호연지기로 만물을 생육시키니 이를 만생휘(萬生輝)라 하며, 세속의 온갖 욕념(欲念)을 씻어 인간 본연(本然)의 마음을 갖고자 하니, 이를 천상화(天祥和)라 하노라!" 오오, 그 음성의 신비함이여... "어... 어디 있느냐! 어디!" 삼황숙은 흉폭하게 외쳤다. 그의 전신에서 다시금 혈광이 치솟기 시작했다. "나를 찾고자 하시오?" 둥기둥-둥땅! 금음과 어우러지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 이... 이것은?' 대려군이 가슴이 터질 듯 뜀을 의식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하... 하늘이다!" 누군가의 놀란 외침! 그것과 함께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고개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우러러봄이라 해야 되는가! 하늘. 끝없이 푸르른 그 하늘, 이제 막 다시 떠오르는 조양(朝陽)을 받으며 그 하늘에 한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인간이 까마득한 하늘의 상공에 앉아 있는 것이다. 연대부운(蓮臺浮雲)이라 한들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의 무릎에는 찬란히 서기가 어리는 고금(古琴)이 놓여 있으며, 그의 양손은 그 고금 위에 서 춤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그의 모습은 끝없이 신비롭고, 그의 어깨 위로 피어오르는 구 름은 마치 그가 구름을 타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오오... 저... 저럴 수가!" "사... 사람이 아니다!" "운랑!" 탄성이 터지는 것과 함께, 대려군의 목도 울음으로 터져 버리고 말았다. 주천운, 마침내 그가 나타난 것이다. "지... 지존께서!" "오오!" '으으... 이건 말도 안 되는... 저놈은 분명히 육혼에 죽었는데... 더구나 그 위에 엄청난 돌사 태...' 삼황숙이 가슴에서 말할 수 없는 한기를 느낄 때 주천운은 여전히 금을 탄주하면서 천천히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호국위는 어디 있느냐?" 그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새어나왔다. 호국위, 그 다 죽어 가던 호국위들이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튀어나왔다. "호국위가 호국지존을 뵈옵니다!" "호국이로가 지존을 뵈옵니다!" 그들이 땅에 고개를 조아릴 때, 화로와 회오대사가 다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존을 뵈오이다!" 멸마맹의 군웅들 모두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누가 시키기라도 했는가? 시 킨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운...랑...' 대려군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너무도 대단한 광경이었다. 두둥-당! 주천운의 신형은 이미 십여 장 위로 내려와 있었다. "그대들의 몸은 모두 회복되었다! 이제 이곳을 물러나도록 하라." 주천운의 음성에 남궁천이 외쳤다. "이제 힘을 회복했사온데, 어찌 물러나라 하시오니까? 더구나 이 적진 속에 지존 한 분만을 두고..." 주천운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져갔다. "그대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중원무림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이제 그 피는 멈출 때가 되었다. 그리고 서역과 천지회의 고수들의 공력은 모두 이십 년 동안 금제(禁制)하겠다!" 두당땅-둥둥-. 그의 손은 다시금 힘있게 현천고금의 위에서 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크으아하하... 천운, 네가 현천고금을 얻었다고 이 세상이 모두 네 것이 라도 되는 줄 아느냐? 가소로운 놈!" 삼황숙이 미친 듯 외치며 혈천제마강을 일으켜 주천운을 쳐왔다. 주천운의 몸에서 한없이 상서로운 연화 송이가 서리서리 피어나며 그의 몸을 감쌌다. 펑! "우-욱!"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그 엄청난 절대고수인 삼황숙이 주천운을 때리고도 오히려 그 반탄지기에 밀려난 것이 아닌 가? 용화대수미선공, 그 천하기공(天下奇功)이 더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른 것이다. 주천운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삼숙, 당신은 이미 너무 깊이 마경에 빠져 인성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버리시오. 그 마물 을!" 그의 음성은 준엄했다. "크아하하... 건방진 놈! 감히... 저번에는 용하게 살아났으나 이번에는 결코 요행이 없을 것 이다! 모두! 한꺼번에 죽여주마!" 삼황숙은 미친 듯 웃었다. 그의 온몸에 어린 혈광은 이제 보기에도 으스스한 마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핏빛이 하늘을 가리며 일어났다. 주천운이 미간을 찡그리며 바르게 말했다. "호국위는 군웅들과 함께 모두 최대한 멀리 피하도록 하라!" 그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 마당에 그의 말을 거역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파-혼(破魂)!" 피의 저주와 같은 그 엄청난 위력의 파혼은 금음 일성에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갔다. "천주혈천망! 피로 잠기리라! 육... 혼(戮魂)!" 대애앵! 악마의 광란과 같은 무서운 소리가 터져나오는 순간이다. "신마조화지곡(神魔造化之曲)은 구천(九天)의 모든 힘을 이어오니 천하의 그 무엇이라도 뜻 대로 하노라!" 뚜당땅-뚱당! 주천운의 손끝에서 현천고금이 장중하게 울었다. 신마조화지곡! 신마양금이 합쳐져야 된다는 구천신마조화지곡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탄주되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금음 속에 감겨 들고 마경의 소리도 금음에 흩어졌다. 세상을 공포로 떨게 하는 그 무서운 육혼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으아아-악!" 그 엄청난 혈광을 쏟아내면서 그 가운데 떠올랐던 악마의 얼굴, 혈천마경의 혈광이 산산이 흩어지는 순간에 삼황숙은 처절이 울부짖으며 혈천마경을 미친 듯이 움켜잡았다. "우흐흐흐... 모조리 죽이리라! 육... 호온!" 그 순간 주천운이 낭랑히 소리쳤다. "없애리라! 한(恨)과 마(魔)로 뭉친 저 마경을!" 두당땅! 뚱땅! 뚜웅! 현천고금이 크게 우는 순간, 꽝! 하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혈천마경이 산산조각이 났다. "으-아-악!" 한소리 비명뿐, 거기에는 혈광도, 마경도, 삼황숙의 시체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천운의 이마에서 한 방울의 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손이 현천고금에서 떨어졌다. 그 엄청난 위력을 지녔던 혈천마경과 그토록 야심만만했던 대효웅 삼황숙 주진... 단 한 순 간에 그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다. 주천운은 나직이 머리를 저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은 이제 천천히 서역법왕에게 향하고 있었다. "..."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른 후에 주천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합공을 하지 않았소?" "이길 수 있다면 했을 것이오!" 서역법왕은 침중히 대답했다. 주천운의 앞에서는 그 방약무인하던 태도가 보이지 않았다. 주천운의 기도를 대하고는 그런 태도를 보일 수가 없었으리라. 주천운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돌아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중원을 밟지 마시오. 서역인에게는 서역이 있지 않소! 가시오." "..." 문득, 서역법왕은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천운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그대들에 대한 이십 년 징벌은 풀리지 않을 것이오." 서역법왕은 고개를 들었다. "이 절은 군왕지기(君王之氣)를 지닌 자가 제왕지기(帝王之氣)를 지닌 자에게 보내는 경배 (敬拜)이며, 또한 다시는 중원을 침범치 않겠다는 약속의 절이오이다." 그의 말에 어린 의미는 드디어 천하에 겁운(劫運)이 자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었다. 천하의 고수들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주천운과 대려군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보고 있었으며 드디어 그 두 손이 마주잡힘으로써 서로를 확인하고 있 었다. 마주잡은 두 손은 한없이 따뜻했다. 하지만 지난날의 업보를 해결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아직은 그들에게 남아 있었다. 비록 제정신이 아닌 상황하에서 저지른 일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있는 한... 제왕천하(帝王天下)! < 大 尾 >